57화_사랑일 리가 없잖아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57화>
사랑일 리가 없잖아
* * * * *
벼리는 아침에 되어 연이가 깨워서 일어났다.
온몸이 땀에 젖었다.
연이는 벼리를 걱정했다.
“밤에 다시 올게.”
“재인 씨가 의심할 거야. 오지 마. 괜찮아. 잘 지내볼게.”
“어떻게 해. 혼자 두고 가서 걱정된다. 나는 일단 집으로 가서 민수 오빠 만나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볼게. 그리고 연락할게. 조심히 잘 지내고 있어. 잠을 좀 더 자든지. 얼굴이 안 좋아.”
벼리는 점점 환상을 보게 되었다.
밤새 꽃들이 벼리에게 무슨 말인가 했었다.
벼리는 꽃의 향기를 들을 수 없었다.
힘든 일이 많아지자 꽃들의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러자 환상이 보이는 것 같았다.
환상은 꽃들의 괴로운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꽃들은 어딘가에 갇혀서 향기와 습기를 모두 빼앗기고 하얗게 말라서 박제가 되어있었다.
드라이플라워는 꽃을 건조시키는 것이다.
일조시간이 짧은 북유럽에서 꽃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고안했다.
드라이플라워는 꽃의 색상과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다.
빛과 광택이 변하지 않아 반영구적인 보관이 가능하다.
빅토리아시대에는 생활패턴의 한 양식이 되기도 했다.
이를 윈터부케(winter bouquet)라 하였다.
드라이플라워 만드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자연건조식이다.
자연히 말라 건조된 것과 채취하여 건조시킨 것이 이에 포함된다.
꽃을 채취하여 말릴 경우에는 꽃이 한창 싱싱할 때, 좋은 날씨가 계속될 때, 이슬이 말랐을 때를 택하여 자른다.
손질하여 4~5개씩 작은 다발로 묶어 직사광선을 피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거꾸로 매달아 말린다.
마르기 시작하면 줄기가 가늘어져 빠지기 쉬우므로 다시 매어주면서 2~3주일 말리면 완성된다.
두 번재는, 건조제를 이용하는 것이다.
건조제 속에 꽃을 파묻고 밀봉하여 수분을 급속히 말리는 방법이다.
건조제로는 모래, 붕사, 옥수수가루, 펄라이트(perlite), 실리카겔(sillcagel) 등이 쓰인다.
이 방법은 꽃의 모양을 흩트리지 않고 빛깔도 자연건조보다 더 자연에 가깝게 만든다.
세 번째는 용액제를 이용하는 것이다.
용액제를 흡수시켜 잎의 수분을 용액제와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방법이다.
잎, 줄기, 가지를 처리할 때 쓰인다.
용액제로는 글리세린, 알코올, 포르말린 등이 쓰인다.
빨아올리게 하는 방법과 용액제 속에 담그는 방법이 있다.
꽃을 드라이플라워로 만드는 것은 꽃을 다루는 예술의 하나로 꼽힌다.
드라이플라워는 나름 꽃을 오래 볼 수 있도록 만든 사람들의 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벼리는 드라이플리워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꽃에 대한 사람들의 사랑의 방식을 이해하긴 했다.
그런데 환상 속에서 만난 꽃들은 드라이플라워와는 완전히 달랐다.
사람들이 만드는 드라이플라워는 꽃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꽃의 아름다움을 남기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담았다.
그러나 벼리를 괴롭게 하던 환상은 누군가 꽃을 완벽하게 파괴하고 있었다.
꽃의 생명과 영혼,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고 파괴하고 소멸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 꽃들은 아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도 너무 힘든 상황을 만나면 소리를 지르지 못한다.
커다란 공포가 닥쳐올 때 사람들은 제일 먼저 목소리를 잃는다.
성대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도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벼리가 환상 속에서 보았던 꽃들은 모두 비명도 지르지 못한 상황에 처한 것이었다.
벼리는 꽃이 어딘가에 박제되어 있다면 그 꽃을 구해줘야 했다.
민수와 명훈이 그린섬 지하의 꽃들이 유리상자에 가득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꽃들을 박제한 것 같다는 표현을 썼었다.
그들이 박제란 표현을 썼다면 그런 느낌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박제란 살아있는 동물표본의 일종으로 동물의 가죽을 건조 상태에서 보존하는 기술이다.
식물에 쓰는 것이 아니다.
동물에게 쓰는 것이다.
그런데도 꽃들이 있는 유리상자를 보면서 박제되어 있는 것 같다는 표현을 썼다.
벼리는 지하에 내려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린섬 지하로 내려가기 위해선 엘리베이터를 작동시킬 카드가 필요했다.
재인의 책상을 몇 번이나 봤지만 그런 카드는 발견하지 못했다.
카드처럼 작은 것을 찾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벼리는 그린섬을 나와 그린섬 정원을 빙 돌아서 건너편 건물에 가보기로 했다.
공사 중인 건물의 지하로 차들이 들어갔었다.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있을 수도 있었다.
벼리는 그린섬 정원을 빙 돌아 맞은 편 건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를 찾아 건너고 있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렸다.
벼리는 비명소리에 놀라 몸을 피했다.
그 순간 오토바이가 굉음소리를 울리며 지나갔다.
비명소리가 없었으면 벼리는 오토바이와 부딪쳤을 것이다.
오토바이가 굉음소리를 울리며 지날 만한 도로가 아니었다.
수상스런 의도를 가지고 벼리에게 달려든 오토바이였다.
벼리는 놀라서 주저앉았다.
도로를 지나던 사람이 놀라서 벼리를 부축했다.
벼리는 인도로 몸을 피했다.
비명을 지른 것은 그린섬 정원 쪽으로 피어 있던 넝쿨장미였다.
넝쿨장미의 외마디 비명이 없었으면 벼리는 틀림없이 사고를 당했을 것이었다.
겨우 피하고 보니 오토바이는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옆에 있던 넝쿨장미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벼리, 괜찮아?”
벼리를 인도까지 부축했던 사람은 가던 길을 갔다.
벼리는 넋을 놓고 한참 있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이 두려웠다.
꽃들이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쳤을지 모를 일이었다.
벼리는 무서운 상황이 되자 오히려 재인이 생각났다.
어쩌면 자신을 위험하게 하는 사람이 재인일지 모를 일이었지만 순간 재인이 보고 싶었다.
벼리는 재인에게 전화했다.
재인이 전화를 받자마자 벼리는 엉엉 울고 말았다.
재인은 정신없이 달려왔고 벼리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재인은 따뜻한 차를 벼리에게 주었다.
무슨 일인지 굳이 묻지 않았다.
벼리는 재인이 토닥거리자 그 품에 안겨 다시 엉엉 울었다.
어떤 불안이 재인을 잡아갈 것 같았다.
사고는 자신에게 있었는데 벼리는 재인을 걱정하고 있었다.
벼리는 그런 재인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벼리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재인은 성 부장을 부르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벼리, 쉬고 있어. 성 부장이랑 이야기가 좀 있어. 바로 올라올게.”
벼리는 재인이 왜 성 부장을 부른 것인지 궁금했다.
몰래 내려가 봤다.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성 부장님, 벼리는 어떻게 된 거죠?”
“이미 너무 위험합니다. 벼리 사모님이 여러 가지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일에 차질이 있을 것 같으니 제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방금도 지하 비밀통로를 가려던 것이었습니다.”
“나에게 아내입니다.”
“진짜 아내가 아니지 않습니까? 계약결혼인 걸 제가 가장 잘 알고 있고. 사실 벼리 씨도 도련님의 일에 방해가 되어 가까이 두고 있는 것 아닌가요? 제이를 파리에서 데리고 있던 것과 같은 것인데 왜 예민하게 그러십니까? 벼리 사모님도 제이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뭔가 다른 게 있는 것입니까?”
“별 다른 게 있는 것이 아냐. 다만, 다만 내 아내로 있는데 사고가 난다면 의심 받을 수도 있잖아.”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오늘도 단순한 오토바이 사고였지 도련님이 의심받을 일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특히 이번에 벼리 사모님에게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서둘러 달려간 일이 있었으니 다음에 어떤 사고가 나더라도 도련님을 의심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도 벼리는 안 돼. 벼리는 내 아내로 있는 거라고.”
“벼리 사모님이 안 된다는 것은 뭐죠? 사랑에 빠지기라도 하셨습니까?”
“사랑일 리가 없잖아?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해? 그냥 필요에 의해 곁에 두는 것뿐이야. 제이와 다르지 않아. 그리고 우리의 중요한 일에 꼭 필요한 걸 몰라?”
재인의 이야기를 듣고 벼리는 숨을 죽이고 방으로 돌아왔다.
재인의 소리가 계속 귀에 맴돌았다.
사랑일 리가 없다는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아팠다.
자신은 재인에게 필요에 의해 곁에 두는 사람이었다.
필요에 의한 계약결혼이었다.
그런데 성 부장이 벼리를 해치려고 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었다.
벼리를 필요에 의해 곁에 두었다는 재인의 말도 놀랄 일이었다.
자신이 어떤 비밀을 알고 있다고 했다.
벼리는 자신이 어떤 비밀을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여러 가지가 혼재되어 벼리는 복잡했다.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할 상황이었다.
벼리는 연이와 민수를 만나야 했다.
그린섬 지하에 가려던 것은 입구에 가기도 전에 저지당하고 말았다.
성 부장은 벼리가 지하 비밀통로에 가려던 것을 알고 있었다.
벼리의 상황은 성 부장에게 노출되었다.
벼리는 성 부장에게 위험인물이 되었다.
위급한 상황이었다.
“사랑일 리가 없잖아.”
하지만 재인의 말은 성 부장이 만들어낸 위급함보다도 더 먼저 벼리를 위급하게 하고 있었다.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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