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_랑데부 셰프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32화>
랑데부 셰프
* * * * *
연이가 보내준 인스타 계정의 사진은 전혀 뜻밖의 얼굴이었다.
랑데부에서 몇 번 봤던 영진의 여자 친구였다.
뭔가 차림이 남다르다고 생각했는데 패션계에서는 알아주는 인싸라고 했다.
라일라의 인스타 계정에는 라일락꽃 가지를 하나 꺾어들고 찍은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라일라는 라일락꽃처럼 순수하지 못해요. 순수를 찾아볼게요. 잠시 활동을 접고 라일락꽃 첫사랑의 라일라가 될까 해요. 난 다시 순수로 태어날게요>
인스타의 라일라는 더없이 밝은 얼굴이었다.
사진은 지난 번 랑데부에서 입었던 옷을 입고 있었다.
라일락 빛깔의 옷이었다.
“라일라는 부모가 모두 파리에 계셔. 라일라는 파리에서 오랫동안 살았대.”
“아, 그래서 감각이 조금 더 좋았나 봐.”
"감각이 좀 남다르지?"
“나, 라일라 본 적 있어.”
“어디에서? 어떻게?”
“응, 여기 랑데부에서 몇 번 봤어. 그리고 그린섬 회합에서도 본 적이 있어.”
"그린섬?"
“영진 씨 있지?”
“재인 씨 친구? 의사라는?”
"응, 라일라는 미화 씨리고, 영진 씨 여자친구야."
“영진 씨 여자친구였어? 그런데 라일라 인스타에 영진 씨 사진은 없던데?”
“영진 씨 인스타에도 라일라 사진은 없어. 난 영진 씨랑 인스타 친구거든. 못 봤어.”
“대개 여친, 남친 사이면 인스타에 올리지 않아? 왜 안 올린 거지?”
“글세, 취향인가?”
“중요한 것은 지금 라일라가 갑자기 잠적해서 소식이 없다는 거잖아.”
“나 지금 매우 곤란해. 이번 주 취재를 라일라 하겠다고 부장한테 이야기 다 했단 말야. 만약 라일라 취재 못하면 부장한테 엄청 까일 거야.”
“라일라는 대체 어디 간 거지?”
“박 부장이 날 잡아 먹을 거야. 내가 지난 번에도 펑크냈거든. 그때는 펑크 대신 여기 랑데부 정우를 취재해서 모면했어. 다행이었지.”
“언니, 오늘 저녁에 그린섬 모임이 있는 날이야. 영진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언니는 오늘밤 우리집에서 자면 어때?”
“아가씨 집에서 자도 돼? 나 펜트하우스, 이런 데서 한 번 자보고 싶다. 너네 욕실도 정말 근사하잖아.”
“뭐야, 내가 좋은 거야, 아니면 펜트하우스야?”
“물론 벼리 때문에 가는 거지.”
“근데 암만 봐도 연이 언니는 물욕이 숨겨지지 않아.”
“하하, 내가 솔직해서 매력이잖아.”
“내가 오빠한테 전화할게.”
“오빠도 오늘 야근이거든. 집에 안 오니까 잘 됐다. 그리고 살짝....”
"살짝?"
"그린섬 지하도 가보고...”
벼리는 연이가 그린섬 지하 이야기를 꺼내자 가슴이 철렁했다.
벼리가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재인과 관련된 어떤 비밀을 밝히면 재인이 나쁜 사람이 될 거 같아 오히려 걱정됐다.
납치범과 오랜 시간을 지내면 그 납치범을 걱정한다는데 벼리는 나쁜 재인을 걱정하는 것은 아닐까 연이가 말하곤 했다.
벼리는 연이가 좋다가도 재인을 나쁜 쪽에 몰아넣고 말할 때는 화가 났다.
연이의 말이 맞을지 모른다.
벼리는 재인에게 어떤 일이 생길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둘은 점심을 랑데부에서 먹기로 했다.
정우에게 전화해서 두 사람 분 식사를 예약했다.
랑데부로 올라가자 정우가 좋은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재인과 함께 하는 넓은 룸이었다.
정우는 점심시간이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우에게 라일라를 물어보기는 어려웠다.
둘이 자리를 잡을 때 도현이 동생 주영과 함께 들어왔다.
도현은 요즘 잠시 뜸했었다.
도현은 벼리 일행을 발견하고 반가워했다.
“벼리 씨, 내가 사랑하는 벼리 씨.”
“오빠는 늘 벼리 씨를 사랑한대. 그런 말은 조심해.”
“그래도 사랑하는 걸?”
연이가 도현을 반가워 했다.
연이는 도현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남자가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했었다.
“안녕하세요, 도현 씨. 요즘 뜸하셨던 거죠?”
“네, 주영이가 불러서 파리에 다녀왔어요.”
“우리 오빠가 주영 바보잖아요. 내가 부르면 언제나 달려오는 주영 바보.”
영진은 주영의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아휴, 예쁜 우리 주영이, 그래 또 뭐가 필요한데?”
“내가 뭐 필요한 게 있겠어? 난 재인이 필요한데.”
모두들 순간 당황했다.
“아, 농담이야. 놀라긴. 재인 씨 품절남인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난 내가 가질 수 있는 것만 욕심내. 걱정하지 마.”
“벼리 씨, 미안해요. 우리 주영이가 워낙 농담을 막 던지는 스타일이라서.”
“막 던지다 다치는 수가 있어요. 조심하세요.”
연이가 나서서 한 마디 했다.
“언니, 미안해요. 재미있으라고 한 소리였어요. 점심 드시러 오셨죠? 미안한 의미로 제가 대접할게요.”
“주영아, 이 오빠가 살게. 사랑하는 벼리 씨가 있는데.”
도현이 오자 정우가 나와서 자리를 안내했다.
“자리에 앉으시죠. 같이 밥 먹기는 껄끄러운 사이인 거 맞지? 하지만 우리 주영이가 그런 거 신경 쓸 스타일은 아니니까.”
“정우야, 네가 우리 주영이를 좋아한다고 해도 주영이는 안 된다. 아까워.”
“도현이 무서워서 뭘 어떻게 하겠니?”
“오빠, 걱정하지 마. 내가 오빠를 좋아해 줄게.”
"하하하"
모두 마음이 편한 사이였다.
벼리는 약간 불편하게 자리에 앉았다.
벼리는 도현의 동생 주영이가 재인과 결혼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런 자리는 매우 불편한 자리였다.
하지만 도현이나 주영이, 정우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신경을 쓰지 않으니 벼리도 신경이 별로 안 쓰이는 상황이 되었다.,
여럿이 주도하는 상황이란 것은 어느 한 사람의 의견 쯤은 조용히 묻어주는 능력이 있었다.
식사를 하는데 정우가 연주를 끝내고 식사 테이블로 왔다.
“오빠도 식사해야지.”
“응, 난 미리 좀 먹었어. 맛 괜찮아? 뭘 좀 더 챙겨줄까?”
“아니야, 오빠만 있으면 돼.”
“주영아!”
도현이 뭐라고 했다.
주영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웃었다.
“오빠는 내가 아직도 어린 줄 알아.”
“하하, 도현의 주영이 사랑은 정말 못 말린다. 시집은 어떻게 보내냐? 혹시 재인과의 결혼도 보내기 싫어서 도현이가 몰래 작업한 거 아냐?”
“정말?”
주영이 놀라며 되물었다.
“이 바보야, 도현이 주영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럴리 있어? 웃기려고 하는 소리잖아.”
정우가 수습했다.
“근데, 오빠, 라일라 여기 다녀갔어?”
벼리와 연이는 주영이 라일라 이야기를 꺼내자 귀가 솔깃해졌다.
정우에게 물어보려는 걸 주영이 대신 물었기 때문이다.
“지난 주 영진이랑 다녀갔는데 그 뒤로 못 봤어. 왜?”
“지난 주 나랑 통화했어. 파리에 오고 싶다고 했었어. 그래서 내가 한국에 갈 거라고 했더니 오면 연락하라 그랬어. 함께 만나기로 했거든.”
“영진에게 물어봐. 영진이 알지 않을까?”
“영진 오빠도 모른대. 라일라가 지난 주 파리에 간다고 했대. 잠시 찾지 말라고. 그래서 모른다는데?”
벼리는 라일라를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연이가 하지 말라는 눈치를 했다.
도현이 벼리를 챙겼다.
“사랑하는 벼리 씨, 이것이 좀 더 맛있는데 드셔보시죠?”
“연이 씨는 이것을 좀 더 드세요. 제가 먹어본 바로는 이게 맛있습니다.”
유난스럽게 벼리와 연이를 챙기자 정우가 한 마디 했다.
“솔직히 말해서 도현이 너는 여기 랑데부 음식 다 좋아하잖아.
"하하하, 그래. 이 눈치없는 녀석."
연이는 상황을 봐서 라일라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식사시간에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주영 씨, 저, 라일라 팬이에요. 주영 씨랑 친한가 봐요.”
연이가 주영에게 말을 걸었다.
“라일라 예쁘죠? 저랑 어렸을 때부터 친구예요.”
“나중에 저 좀 소개시켜 줘요.”
연이는 주영에게 명함을 줬다.
“신문사 문화부 기자예요. 라일라 취재 한 번 해보고 싶어요.”
“내가 부탁하면 뭐든 들어줄 거예요.”
“아, 고마워요. 역시. 친한 거 맞네요.”
둘의 이야기가 길어지자 도현이 벼리를 불렀다.
“벼리 씨, 둘은 이야기하라고 하고 우리 둘은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별일 없었어요. 재인 씨랑 잘 지내고 있어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재인이 말 안 들으면 제게 즉각 말씀하세요. 제가 단단히 혼내겠습니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벼리 씨를 사랑하는 제가 당연히 그 정돈 챙겨야죠.”
도현의 말이 지나친 감이 없잖아 있자 정우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다른 사람들도 그냥 크게 웃었다.
“하하하”
“정우 오빠, 준희 언니 있어? 준희 언니가 라일라랑 같은 오피스텔 살 텐데?”
“그래? 불러서 물어볼까?”
도현은 벼리와의 이야기를 막는 모든 주제가 싫은 것 같았다.
“뭐하러 물어봐, 라일라가 잠시 생각할 게 있나 보지 뭐.”
이때 준희라는 랑데부 셰프가 나왔다.
“주영아, 왔어? 오랜만이다. 파리는 잘 다녀왔어?”
“그렇잖아도 언니 부르려고 했어.”
“나도 주영이가 궁금했어.”
“하하, 주영이는 궁금하고 난 궁금하지 않아?”
“도현 씨는 관심 갖는 사람이 많잖아요. 전 남자라고는 정우 씨 말고는 관심 없어요.”
“하하, 역시 내겐 일편단심 준희가 있었지?”
“준희 언니가 아깝다. 뭐가 아쉬워서 정우 오빠를 만나? 정우 오빠는 아냐.”
준희는 하얀 피부에 여리여리한 몸을 하고 있었다.
잠깐 사이 주영이 준희에 대해 이야기를 해줬다.
준희는 파리에서 셰프 공부를 하였다.
순수하게 셰프 공부를 위해 파리에 갔다.
그러는 중에 S4 멤버들을 만났고 특히 정우에게 좋은 친구가 되었다.
정우는 아주 많은 여자들을 만났는데 무슨 이유인지 3개월 이상 만나는 여자들이 없었다.
유일하게 오래 만나는 여차 친구가 준희였다.
정우는 준희를 소울메이트라고 불렀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자신보다 준희가 더 잘 알 거라고 했다.
실제 준희는 정우에 대한 일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의사 집안인 정우가 의사 되는 걸 싫어하며 방황할 때 항상 든든한 상담자 겸 친구가 되어 주었다.
결국 정우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셰프인 준희를 위해 랑데부를 연 것이었다.
정우는 자신의 오랜 벗인 준희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준희는 평범한 집안의 딸로 재벌가들의 놀이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준희의 음식은 매력이 있었다.
모두 집을 떠나 지내는 친구들이었다.
준희는 친구들을 위해 매번 좋은 음식을 준비했다.
자연스럽게 정우는 준희를 위헤 레스토랑 랑데부를 열었다.
다행인 것은 정우가 하고 싶었던 음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레스토랑 역시 성공을 거두었다.
준희는 정우가 마음의 평온을 얻긴 바랐다.
정우는 언제나 뭔가 결핍된 사람처럼 안정된 사랑에게서 도망쳤다.
안정된 사랑이란 준희였다.
정우는 준희가 사랑하는 남자였다.
벼리와 연이는 정우와 준희의 관계에 대해 처음 들었다.
랑데부에 갈 때마다 유난히 잘 챙기는 수석셰프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정우의 사랑이라고 했다.
정우는 아니고 준희가 사랑이라고 했다.
“정우는 준희가 사랑이 아니라고 했을지 몰라도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을 것 같아. 준희처럼 순수하게 오로지 한 사람을 바라보는 사랑을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
“그럼?”
“그냥 모르는 척 하는 거지. 부담일 테니까.”
벼리와 연이는 라일라에 대해 뭔가 물어봐야 했다.
라일라가 영진의 여자친구라는 연결은 뜻밖이었다.
갑자기 정우를 사랑한다는 준희의 등장은 더 뜻밖이었다.
더군다나 주영과 라일라, 준희는 서로 친밀한 사이였다.
벼리나 연이의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던 준희였다.
셰프 준희는 다른 누구의 이야기에도 잘 끼어들지 않았었다.
그러나 준희는 벼리와 연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다.
다음 날 저녁 준희와 벼리 일행은 약속을 했다.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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