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에 백병전
바그너 상병이 말했다.
“그러게 군대에서는 실력이 있어도 숨기는 것이 좋네. 대충 묻어가는 게 상책이지.”
바그너 상병이 술을 한 모금 들이키고는 말을 이었다.
“한스는 이제 책임져야 할 자식이 있지 않은가. 얼굴도 못 본 자식을 두고 전쟁터에서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거겠지. 자네들도 자식이 생기면 이해할거야.”
요나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저는···한스가 부모님 이야기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헤이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말했다.
“어차피 그 전차 밑에 낑긴 놈은 우리 동포도 아닙니다! 왜 우리가 그런 새끼들에게 동정을 느껴야 합니까?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진정한 군인에게는! 동정심 따위는..필요 없습니다..!”
바그너 상병이 말했다.
“진정한 군인이고 나발이고 난 살아 돌아가기만 하면 그만이야. 훈장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에밋이 말했다.
“파이퍼 중사님이 제정신을 유지해야 우리가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 때, 마르코가 와서 말했다.
“바그너 상병님께 2급 철십자 훈장이 수여된다고 합니다!”
마르코의 말에 바그너 상병의 눈이 커다래졌다.
“뭐라고? 철십자 훈장? 내가?”
이 때, 베르너 대위는 한스를 불러놓고 칭찬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해! 자네 덕분에 중요한 요충지를 점령하게 되었어! 바그너 상병에게도 축하 인사 전해주게나!”
“감사합니다!”
“많은 비열한 장교들은 하사관의 공을 가로채고 있지. 하지만 난 절대 그러지 않네. 자네에 대해서는 전부 제대로 보고서를 작성했네! 자네 팔은 괜찮은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한스는 병원에 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고 쉬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체념한 상태였다. 한스의 말에, 베르너 대위가 미소를 지으며 지도를 가리켰다.
“지금 우리가 점령한 지역은 이렇게 돌출부를 형성하고 있다네. 이 곳을 조금 더 확장할 수 있다면 좋을걸세.”
“놈들이 다시 공격해올 가능성은 없습니까?”
“물론 있지. 지금 병사들이 철조망을 설치해두고, 기관총을 곳곳에 설치해두고 있네.”
한스는 지도를 관찰했다. 현재 형성된 돌출부는 넓게 퍼져 있었기 때문에 방어해야 할 곳이 많았다.”
‘한 곳만 뚫려도 순식간에 밀려올 것 같은데..놈들이 야간에 기습하면..아군과 피아 식별이 힘들다..’
한스는 이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베르너 대위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야간에 적 보병과 백병전을 펼치게 되면,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좋은 질문일세! 철모를 만져보면 구분할 수 있지! 영국놈들은 쟁반 모양 철모를 쓰지 않나!”
한스는 베르너 대위와의 대화 이후에, 현재 점령한 지역의 지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돌아가기 전에, 직접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지형을 살펴 보았다. 혹시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전차가 쉽게 이동할 수 있는 경로를 미리 확인해둘 필요가 있었던 것 이다.
‘야간에는 전차가 쓸모가 없겠군..’
새로 점령한 땅에서, 독일 보병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나뭇가지로 위장한 기관총을 거치해두고, 철조망을 설치하고 있었다.
‘다들 열심인데 나 혼자 병원에서 노닥거릴 순 없지..’
한스는 잠시 멈추어 서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 때, 옆에서 2소대 보병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는 상병인데 이번 전투가 처음이라고?”
“내가 운이 좋은건지, 꼭 후방으로 빠졌을 때만 전투가 벌어지더라고.”
“이번에도 우리는 1소대랑 3소대가 간 다음에 전투 다 끝날 즈음에 갔잖아.”
“우리 소대부터 먼저 끌려 갈까 조마조마했다니까!”
“가능하면 안 싸우는 것이 좋지. 괜히 설치다가 총알이나 맞는 걸. 그렇다고 보상 받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전투도 해봐야 훈장도 받고 진급도 빠르지. 아, 나도 철십자 훈장 한 번 받아보고 싶다!”
“그딴 철 쪼가리 때문에 목숨을 건다고? 난 싫어.”
옆에서 듣고 있던 한스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난 이등병 때부터 맨날 끌려 다녔는데 저 새끼들은 뭐? 한 번도 안 싸워?’
한스는 기관단총을 가져와서 그 2소대 보병 새끼들한테 총알을 박아 넣는 상상을 했다. 분명 여기서 총을 갈겨대면 베르너 대위가 달려 올 것 이다. 한스는 베르너 대위한테 수류탄을 까 던지는 상상을 했다.
‘망할 새끼들..’
한스는 티거를 이용해서 탄약고에 포탄을 날리고, 중대 지휘소를 깔아뭉개는 상상을 했다. 짜릿한 상상을 하니 좀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아서 한스는 입에서 슬며시 미소가 나왔다. 그 때, 니클라스가 한스의 등을 치며 말을 걸었다.
“이보게 한스! 바그너 상병도 훈장을 받는 것이 정말인가?”
“아, 그렇네!”
“그 양반, 훈장에는 관심이 없다더니 엄청 좋아하고 있어!”
“그..그런가..”
“한스 자네 부모님은 잘 계시지?”
한스는 한 번도 전쟁에 온 이후로 부모와 편지를 주고 받은 적 조차 없지만, 니클라스에게 대충 둘러댔다.
“두..두 분 다 잘 계시네.”
그 날 밤, 보병 하인리히는 동료 요하임과 함께 야간 보초를 서고 있었다. 야간 보초를 서는 것은 언제나 지루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절대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명령까지 내려왔기에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인리히가 요하임을 쿡쿡 쑤시고는 속삭였다.
“저 쪽에 나무들 말이야. 유령 같지 않나?”
하인리히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에는 시커먼 나무들이 마치 유령의 팔다리가 비틀린 것처럼 앙상한 가지를 뻗어가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제는 병사들이 철조망까지 3중으로 꼼꼼하게 설치해놓았기에, 흉물스럽기 그지없었다. 요하임이 말했다.
“저 나무 중에 하나가 조금씩 움직이면서 이 쪽으로 다가온다고 생각해봐.”
그 때, 하인리히는 얼핏 나무 밑동이 움직인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이봐, 저 쪽 아래쪽에서 조금 뭔가 움직인 것 같지 않나?”
“난 잘 모르겠는데?”
하인리히와 요하임은 2시 방향에 있는 시커먼 나무를 한참 동안이나 숨 죽이고 관찰했다. 하지만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요하임이 말했다.
“원래 저런 형태 아니었나?”
하인리히가 말했다.
“미안. 내가 착각했나 봐.”
하인리히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요란하게 방구를 끼었다. 요하임이 얼굴을 찌푸리고 속삭였다.
“지독한 새끼..”
“잠깐. 뭔 소리 들렸는데?”
“니 방구 소리?”
“아가리 닥쳐.”
하인리히와 요하임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소리에 집중했다. 그 때, 10시 방향에서 작은 금속 소리가 났다.
탕!
철조망을 자르는 소리였다. 하인리히가 외쳤다.
“아아악!! 기습이야!!”
요하임은 소리가 들렸던 쪽을 향해 기관총을 긁어댔다.
드득 드드드득
기관총에서 순간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요하임은 기관총을 쏘아서 적군에게 위치가 탄로 났을 거라는 생각에 공포감에 휩싸였다.
‘계..계속 긁어?’
그 때, 무언가가 포물선을 그리며 휙 날라왔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밀즈 수류탄이었다. 하인리히는 반사적으로 그걸 집어서 다시 적이 있는 쪽으로 던졌다.
쉬익
쿠과광!!콰광!!
그 때, 누군가가 하늘을 향해 조명탄을 쏘았다. 그리고 하인리히와 요하임은, 저 쪽에서 수 많은 영국 병사들이 철조망을 건너뛰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아악!!”
드드득 드드드득
그 때, 다시 수류탄이 하나 날라왔다.
데구르르
“피해!”
쿠과광!!콰광!!
이 때, 캠머리히 상병은 프레드리히, 파울과 함께 다른 쪽에서 방어하고 있었다. 다른 쪽에서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드드득 드드드득
“으아악!!”
“폴이 맞았어!”
“위생병!! 위생병!!”
“이러다 뚫리겠어!!”
프레드리히는 바지에 오줌을 지린 채로 캠머리히 상병에게 물었다.
“우..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캠머리히 상병이 말했다.
“우리는 명령대로 이 곳을 지켜야 하네!”
파울은 소총을 들고 적진이 뚫고 들어올지 모르는 철조망 지대를 겨냥한 채로 식은 땀을 흘렸다.
‘이..이 쪽으로는 안 오겠지? 놈들도 저기서만 좀 싸우다가 다시 후퇴할 거야! 제발!’
파울은 실수로 방아쇠를 달려서 어두컴컴한 곳으로 총을 쏘았다.
타앙!
총알은 바위에 맞아서 불이 번쩍거렸다.
‘바위에 쏘면 저렇게 번쩍거리는구나..’
프레드리히가 벌벌 떨며 말했다.
“이 쪽으론 안 오겠지?”
“몰라 시발···”
그 때, 어둠 속에서 한 형체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시발!!”
타앙! 탕! 타앙!
“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검은 형체가 사라진 것 같았다.
“이 쪽으로도 온다!!”
현재 적군은 2소대가 지키고 있는 쪽을 주공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적군은 다리가 긁히는 것을 감수하고, 철조망을 빠른 속도로 뛰어 넘어 오고 있었다.
드드득 드드드득
쿠과광!
기관총 소리와 수류탄 소리 때문에 병사들은 귀가 먹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영국군은 착검된 소총을 들고 달려들고 있었다.
“공격!”
어두운 숲 속에서 피아를 식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독일 병사들은 베르너 대위에 가르침에 따라 철모를 만져보고 영국군 특유의 접시 모양 철모면 소총을 휘둘렀다. 여기 저기서 총소리와 함께 불꽃이 번쩍거렸다.
타앙! 탕!
“으아악!!”
“아악!!”
야간에 백병전은 그야말로 단 한번도 병사들이 경험해보지 못 했던 지옥도나 다름없었다. 한 병사는 소총을 놓치자, 통조림을 딸 때 쓰는 칼을 가지고 적군에게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적군을 겨우 쓰러뜨려도 또 다른 적군이 뒤에서 달려들었다. 심지어 아군끼리도 엉겨 붙어서 싸우기도 했다. 영국 병사들은 못을 여러 개 박아 놓은 곤봉을 휘둘러댔다.
이 때, 한스는 비교적 후방 쪽에서 전차 해치 위로 몸을 내밀고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밤이라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분이 안되잖아! 전차로 어떻게 싸워야 하는 거야!”
이미 2소대 쪽에서는 아군과 적군이 뒤엉켜서 근접전을 펼치고 있었다. 전차가 가서 기관총으로라도 지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스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적이 후퇴할 수 없도록 퇴로를 차단한다!”
한스와 동료들은 영국군이 진입했던 경로를 틀어막기 위해 느릿느릿 전차를 운전했다. 티거, 판터, 푸마는 적군이 2소대 쪽으로 밀고 들어온 퇴로를 막기 위해서 나아갔다. 적군은 3소대가 있는 쪽으로도 진입하고 있었기에, 슈테켄 중사의 A7V 브륀힐트는 레오파드, 나스호른과 함께 영국군이 3소대 쪽으로 들어온 길로 전진했다. 하늘에서 조명탄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지만, 야간에 전차를 운전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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