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
꿀잠을 자던 영국 이등병 조지가 잠시 뒤 대가리를 맞았다.
퍽!
“아악!!”
윌리엄 상병이 소리쳤다.
“졸지 마!”
조지가 억울해서 항변했다.
“어차피 좀 있으면 우리도 후퇴하지 않습니까?”
윌리엄 상병이 말했다.
“후퇴할 때가 제일 위험한 법이다! 졸지 말고 제대로 서 있게!”
조지가 속으로 툴툴거렸다.
‘다른 부대는 다 후퇴 중인데..’
그 때, 하늘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어?”
쿠과광!!콰광!!
독일군의 첫 포탄은 조지가 있던 곳 근처에 떨어졌고, 조지는 균형을 잃고 털썩 넘어졌다. 개머리판으로 정통으로 대가리를 맞은 것 같았다. 조지는 발목까지 질퍽거리는 진흙탕 위에 얼굴과 양 손을 쳐박고 쓰러졌다.
‘어..어..’
귀가 들리지 않았지만 조지는 빨리 대피호로 달려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조지는 진흙투성이 땅을 거세게 밀어내서 겨우 일어났지만 다리가 휘청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축축해서 보니 바지에 오줌을 지린 상태였다.
“시..시발..”
그런데 조지의 눈 앞에 윌리엄 상병이 쓰러져 있었다. 조지는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진흙 속에 얼굴을 쳐 박고 있는 윌리엄 상병을 일으켰다.
“상병님!”
조지는 자신의 오른손으로 받치고 있는 윌리엄 상병의 머리 쪽에서 뭔가 뜨끈한 것이 흘러나오는 것을 눈치챘다.
‘마..말도 안돼!’
윌리엄 상병은 얼굴에 진흙 범벅이 된 것 외에는 전혀 다친 곳도 없어 보였고 체온도 아직 뜨끈했다. 하지만 윌리엄 상병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땅은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조지 자신도 머리에 파편을 맞고 죽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조지는 참호 바닥에 엎드린 채로 대피호를 향해 기어갔다. 포탄이 터질 때마다 땅에 갖다 대고 있는 손과 무릎, 발에 진동이 느껴졌다.
‘빨리..빨리..’
그런데 몇 고참 병사들이 대피호에서 밖으로 나와서 달려가고 있었다
‘저 쪽은 교통호인데? 왜 저쪽으로 가지?’
그 고참 병사들은 지원 참호 쪽으로 후퇴할 수 있는 교통호로 미친듯이 달려갔다.
‘다른 부대 다 후퇴하는데 우리만 남아서 싸우라고?’
‘그 새끼들 후퇴하는 동안 나만 총 맞고 뒈질 순 없어!’
‘왜 하필 내가 교전 참호 있을 때 후퇴야!!’
조지가 그들이 도망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못 채고 외쳤다.
“그 쪽은 교통호 입니다! 대피호에 있어야 합니다!”
쿠과광!!콰광!!
몇몇 영국 병사들이 도망가기 시작하자 교전 참호에 있던 다른 병사들도 우르르 교통호로 향했다. 평소에 겁이 많던 병사들만 도망가는 것이 아니었다. 나름 산전수전을 다 겪고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치고 동료를 구하던 고참병들까지 도망가기 시작했다.
‘다 같이 죽는 건 참아도 나만 죽는 건 못 참아!’
마틴 소위가 하늘을 향해 권총을 쏘았다.
타앙! 탕!
“도망가지마! 명령이다!”
하지만 마틴 소위가 그렇게 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우르르 교통호로 달려가고 있었다. 마틴 소위는 몰려가던 병사들 사이에서 자신과 친하던 스코트 상병을 발견하고는 멱살을 붙잡았다. 스코트 상병이 울부짖었다.
“나머지 새끼들은 다 후퇴 중인데 왜 저만 잡습니까?”
마틴 소위가 외쳤다.
“명령이다!!”
스코트 상병이 핏발 선 눈으로 소리쳤다.
“왜 우리 대대만 죽어야 합니까? 다른 대대는 후퇴해서 오늘 저녁 고기 스프를 먹을 겁니다!”
마틴 소위는 권총으로 스코트 상병의 머리를 겨누고 노려 보았다.
“도망가면 지금 나한테 죽는다..”
그럼에도 스코트 상병은 계속해서 절규했다.
“저는 여태까지 한 번도 도망친 적 없습니다! 근데 왜 하필 저만! 오늘 죽어야 합니까!!제가 죽어야 한다면 소위님이 직접 쏘십시오!!“
마틴 소위는 스코트 상병의 절규에 멱살을 놓았다. 스코트 상병은 잽싸게 교통호로 도망갔다. 병사들로부터 헛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퇴각하라는 명령이다!”
“퇴각 명령이 내려왔대!!”
마틴 소위가 속으로 생각했다.
‘거짓말이다..그런 명령이 내려올 리 없어..’
그런데 마틴 소위는 중대장 캐럿 대위조차 도망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중대장님!!”
이 때 한스가 있는 독일 부대의 포병들은 르노 전차를 개조해서 만든 자주포와 마크1 전차를 개조한 견인포를 준비해두고 있었다. 며칠 동안 빌이 포병들에게 기본적인 운전법과 정비법을 가르쳐 주었었다. 호르스트는 조만간 자신이 직접 운전해서 타고 나가야 할 개조된 르노 전차를 바라보았다.
‘이건 너무 작다..난 저 견인포가 더 마음에 드는데..’
호르스트는 지난 번에 르노 전차가 통째로 땅 속에 파묻힌 이후로는 비좁은 르노 전차 안에 다시 들어가는 것이 무서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편 한스와 전차병들은 이 엄청난 규모의 포격을 숨죽이고 보고 있었다. 요나스가 말했다.
“대단해! 우리가 이렇게 포탄이 많이 있었나?”
한스가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이렇게 대규모로 공격할 수 있는 기간은 아주 짧다..앞으로도 몇 번의 공세가 있을 테지만 갈수록 자원이 부족할 거다..’
에밋이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포탄으로 확실히 박살내고 간다면 우리는 꽤 안전하게 갈 수 있을 겁니다!”
거너도 희망찬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명령대로 첫 번째 전선까지만 가서 버티고 있고, 보병과 기병들이 참호를 확보해주기를 기다리면 되는 거 맞습니까?”
니클라스가 말했다.
“그렇네! 한스는 언제나 우리 소대의 안전을 중요시하지!”
하지만 한스의 생각은 달랐다.
‘갈 수 있을 때 가능하면 최대한 가야 한다..영국 놈들이 후퇴를 하고 있다면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이 때 하늘 위에 미하엘의 정찰기가 나타났다. 전차병들은 모두 정찰기를 쳐다보며 환호했다.
“저 녀석이 어떤 소식 갖다 주려나!”
한스가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내 생각대로 영국군이 후퇴하는 것이 맞다면..녀석들에겐 미안하지만 오늘 내 작전은..’
하지만 한스는 고개를 돌려 다른 전차병들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영국군이 후퇴한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군..’
오늘 포격은 한 시간 후에 끝나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그 때가 되면 바로 공격을 해야 했다. 한스는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한스는 비단 자신과 동료들의 목숨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역사를 바꿀 실의 끝이 눈 앞에 보였고, 그것을 당기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이었다.
한편 미하엘은 높은 고도로 하늘을 비행하고 있었다.
‘빨리 정찰만 하고 튀자..’
오늘은 정찰만 하고 오는 임무라 멍청한 녀석들과 같이 비행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하늘과 마치 다른 세계처럼 느껴지는 땅에서는 계속해서 포탄으로 구덩이가 파이고 있었다. 이제는 비행 때 얼굴을 때리는 거센 바람도 제법 익숙해졌다. 미하엘은 카메라를 떨어트리지 않도록 손에 꽉 쥐고 사진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사진을 촬영한 미하엘은 안심하고 미소를 지었다.
‘녀석들 오늘은 왜 대공포도 안 쏘지? 어차피 못 맞추니까 안 쏘는 건가?’
미하엘은 다시 돌아가기 위해 방향을 선회하며 슬쩍 아래 쪽을 내려다 보았다.
‘저..저 새끼들 후퇴하잖아! 빨리 알려야 해!
그 때 하늘 저 편에서는 영국군의 전투기 편대가 이 쪽으로 날라오고 있었다. 미하엘이 비명을 질렀다.
“아악!!!으아악!!!”
미하엘은 꽁지 빠지게 도망갔다. 그리고 영국군이 퇴각하고 있다는 이 소식은 한스에게도 들어왔다.
‘역시..내 생각이 옳았어..’
반면 다른 전차병들은 영국군이 퇴각한다는 소식에 기뻐했다. 에밋이 소리쳤다.
“영국 놈들이 통조림 많이 남겨두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거너도 말했다.
“맨날 고생해서 조금씩 전진했는데 오늘은 운이 좋습니다!”
니클라스가 말했다.
“놈들이 후퇴하고 있다고 해도 방심은 금물이네!”
한스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제 포격은 20분 뒤면 끝날 것이었다. 동료들은 다른 때에 비해서 안심하고 있었지만 한스는 미친듯이 심장이 쿵쾅거렸다. 요나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저녁에 고기 스프 나왔으면 좋겠다.”
한스가 속으로 생각했다.
‘앞으로 내릴 결정은..내 잘못이 아니다..애초에 나를 소대장에 앉혀 놓은 것이 잘못이지..난 소대장으로서 책무를 다할 뿐이다···’
한편 영국 교전 참호에는 라마누잔이라는 인도 병사가 퇴각하지 않고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라마누잔을 비롯한 몇 인도 병사들은 전투에서 공을 세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변소에서 똥을 치우거나 참호를 파는 자질구레한 일만이 인도 병사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영국 병사들은 라마누잔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고 늘 깜둥이라고 불렀다. 그 때 동료 인도 병사 아미르가 라마누잔을 불렀다.
“라마누잔! 도망가야 해! 영국놈들도 도망가는데 왜 버텨야 하나?”
라마누잔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도망가게! 나는 여길 지키고 있겠네!”
아미르는 라마누잔이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이내 살기 위해 영국 병사들 사이로 도망갔다. 늘 인도 병사들을 깜둥이라고 멸시하던 한 소위가 병사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이보게! 잠시만 버티다가 우리도 퇴각하면 되네! 퇴각하지 말게! 영국은 자네들을 필요로 하네!”
하지만 그 소위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우르르 도망가고 있었다.
“후퇴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소위가 시뻘개진 얼굴로 펄펄 뛰며 외쳤다.
“누구한테 명령 받았나?”
라마누잔이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버티는 것은 영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조국을 위해서다..인도인의 용맹함을 보여주겠다..’
그 때 도망가던 한 영국 통신병이 비명을 질렀다.
“암호 해독기! 젠장! 그걸 부셔야 하는데!”
그 영국 통신병은 라마누잔을 보고 말했다.
“이봐! 가서 암호 해독기 가지고 지원 참호로 오게나!”
“암호 해독기?”
“못 가지고 오면 부수고라도 오게! 아주 중요한 임무일세! 독일놈들한테 그게 들어가면 끝이야!”
그렇게 말한 영국 통신병은 도망가기 시작했다. 영국 참호 어딘가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전차다!! 보슈놈들 전차야!!”
타앙! 탕!
영국군의 소총 사격솜씨는 꽤나 유명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지금 영국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지금 제일 앞서서 달려오는 독일군들은 포탄 구덩이를 이용해서 3명씩 혹은 개개인 단위로 앞질러 오고 있었다. 평범한 보병이 아니었다. 연막탄을 뚫고 여기저기서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그들은 스톰트루퍼였다.
- 작가의말
후원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모든 분들께 쪽지로 답장 드리고 싶은데 발송이 되지 않아서 여기서나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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