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고기
헨리의 동공이 커지고 이마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독일군이 들을 수 없도록 조심스럽게 헨리는 허리춤에 있는 수류탄을 하나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려서 핀을 뽑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때, 그린 소위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으으..아아..”
‘젠장!’
그린 소위가 살아있다면 독일군을 향해 수류탄을 던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헨리는 천천히 뒤로 한 발짝씩 발걸음을 옮겼다.
‘그냥 도망가자..’
앞에서는 독일군이 그린 소위에게 영어로 뭔가 묻는 소리가 들렸지만 헨리는 개의치 않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 순간, 헨리는 뒤에 있던 돌맹이에 걸려 뒤로 자빠졌다.
퍽!
헨리는 오른손에 수류탄을 꼭 쥐고 있었다. 그 때 그린 소위를 심문하고 있던 한스가 손에 단검이 앞에 장착된 권총을 들고 위협 사격을 하며 달려갔다.
탕!
그 때, 한스는 눈 앞에 쓰러져 있는 헨리를 발견했다. 헨리가 오른손에 수류탄을 들고 외쳤다.
“오지마! 오지마!”
한스는 권총으로 헨리를 겨냥한 상태에서 멈추었다. 눈이 뒤집힌 헨리는 당장에라도 수류탄 핀을 뽑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에밋이 MP18을 들고 달려왔다가, 이 광경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으악!!으아아악!!”
헨리는 한스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한스는 완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한스는 엄청나게 공포스러웠지만 막상 죽음이 뒷덜미까지 다가오자, 온 몸이 굳고 얼굴 근육까지 경직되었다. 한스가 영어로 천천히 말했다.
“수류탄 내려 놔.”
헨리가 증오심을 내뿜으며 외쳤다.
“물러나! 그렇지 않으면 핀을 뽑겠다!”
한스가 말했다.
“알았다.”
한스는 권총으로 헨리를 겨냥한 상태로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이런 상황에서 양쪽 합의 하에 교전을 하지 않고 무사히 살아 돌아간 사례가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한스는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통통한 영국 병사가 아주 어리고 경험이 적다는 것을 눈치챘다. 헨리는 수류탄을 손에 쥔 채로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바지에 똥오줌을 지리고 눈이 충혈되어 있는 상태였다. 헨리가 외쳤다.
“내 동료들은? 니 놈이 다 죽였냐?”
앞에 그린 소위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한스가 말했다.
“살아있다. 데리고 가서 치료해 줄 것 이다.”
헨리가 울분을 터트리며 외쳤다.
“웃기지 마!! 네 놈들이 죽이고 물고문했잖아!!”
헨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소위님과 동료들은 내가 데리고 가겠어!! 네 놈 부하들을 모두 돌려보내!!”
헨리는 당장에라도 수류탄 핀을 뽑겠다는 듯이 한스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젠장!’
그렇게 한스는 뒷걸음치고 헨리는 서서히 앞으로 걸어갔다. 헨리가 속으로 생각했다.
‘프레디는 어디 있지? 네빈슨은? 설마 살아있을 거야!’
그 때, 헨리는 자신의 발치에 무언가가 걸린 것을 발견했다. 네빈슨의 시체였다.
“으아악!!”
헨리가 정신을 판 순간, 한스는 헨리에게 달려들어 권총으로 헨리의 오른손을 쳐냈다.
타악!!
헨리의 오른손에서 핀이 뽑히지 않은 밀즈 수류탄이 데구르르 굴러갔다. 헨리가 재빨리 수류탄을 주우려고 하는 순간, 한스는 헨리의 가슴을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 위에 올라타서 권총을 겨누었다.
“에밋!!거너!!헤이든!!”
한스는 검이 달린 권총으로 헨리의 목을 겨냥한 상태에서 짓눌렀다. 헨리는 손 끝으로 수류탄을 다시 잡으려고 발버둥쳤다. 한스가 외쳤다.
“젠장!!항복해!! 항복해!!”
한스의 손은 두뇌의 판단과는 달리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마치 짐승이 도축 당하기 직전에 절규하는 듯한 한스의 비명소리가 숲 속에 울려 퍼졌다.
“으아아악!!!!!!!”
한스는 제발 이 순간을 멈추고 싶었다. 한스의 밑에서 헨리는 눈을 까뒤집고 수류탄을 끝까지 집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간질 환자가 발작하는 것 같았고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한스는 계속해서 헨리를 누르고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어릴 때부터 배웠던 모든 도덕 관념들을 한스는 서서히 총 앞에 달린 단도로 찢어내기 시작했고 인정하기 싫은 묘한 쾌감이 가슴 속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며 손에 힘을 주게 만들었다.
“끄아아아악!!!”
잠시 뒤, 에밋, 헤이든, 거너가 조심스럽게 한스의 비명소리가 들린 곳으로 걸어갔다. 거너는 바지에 똥오줌을 지린 상태였다.
‘젠장! 그 영국놈이 소위님을 죽였을 거야!’
에밋, 헤이든, 거너 셋 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막상 서로의 눈치가 보여서 도망도 못 가고 천천히 걸어갔다. 그 때, 맨 앞에 있던 헤이든의 눈에는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는 한스의 모습이 보였다.
‘소위님?’
에밋, 헤이든, 거너는 나무 뒤에 숨어서 머리만 내밀고 상황을 살펴보았다. 한스는 얼굴에도 피가 묻어 있었지만 살아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고 다른 영국 군은 없어 보였다. 헤이든이 먼저 뛰쳐 나갔다.
“소위님! 괜찮으십니..허억!”
전차병들은 입을 벌리고 죽어 있는 헨리의 시체를 발견했다. 한스의 군복 소매는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 받은 새 장교용 군복이었다. 한스는 멍하니 나무에 기대어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헤이든과 거너는 차마 한스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있는데 에밋이 주절거렸다.
“소위님! 치료해드리겠습니다!”
한스가 중얼거렸다.
“난 다치지 않았어.”
에밋이 떠들었다.
“그럼.. 돌아갈까요?”
에밋은 저녁 시간에 늦을까봐 조금 초조해졌다. 헤이든과 거너는 에밋에게 눈치를 주었다. 한스가 말했다.
“물 좀 주게.”
헤이든이 재빨리 자신의 물통을 한스에게 내밀었다. 한스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한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전차병들의 모습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밋, 헤이든, 거너는 헨리의 시체 쪽으로 눈길도 돌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빙 멀리 둘러서 한스를 따라갔다. 예전에 시체 치우는 작업에 동원된 적은 있지만 죽은지 얼마 안 된 시체는 쳐다보는 것 조차 끔찍했다. 한스는 네빈슨의 시체를 무심코 발로 넘어서 걸어갔다.
부상당한 그린 소위가 한스를 보고 겁에 질려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으윽..”
한스가 전차병들에게 말했다.
“이 자는 생포해서 전차에 태우게. 시체들은 전차 위에 올려놓고.”
한스는 온 몸에 진이 빠져서 팔에 힘을 쓸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한스는 자신이 죽인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어..’
에밋, 거너, 헤이든은 시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서로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한스는 몸을 일으켜 네빈슨의 시체를 뒤져 보았다. 가방 속에는 비스킷과 통조림이 있었다. 한스는 이걸 전차병들에게 던져주었다. 그러자 에밋, 거너, 헤이든은 주저앉아서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대충 허기를 때우자 한스가 셋에게 다시 말했다.
“시체 만지는 것도 하다 보면 익숙해지네! 맨날 궤도에 묻은 시체도 내가 치우지 않았나!”
그럼에도 에밋, 거너, 헤이든은 병신같이 서로의 눈치만 보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한스는 이를 갈면서 셋에게 말했다.
“저 장교라도 데려가게!”
에밋, 거너, 헤이든은 한스의 명령에 잽싸게 그린 소위를 전차로 데리고 갔다. 한스는 벤을 데려와서 겨우 영국 병사의 시체들을 전차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린 소위는 부하들의 참혹한 시체를 보고 겁에 질렸다.
‘미친 자식들!!’
그린 소위는 한스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겁에 질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한스는 그린 소위에게 물병을 내밀었다. 그린 소위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살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린 소위는 여태까지 수 많은 병사들을 전투에서 잃어왔었다. 오후에 죽은 부하들은 저녁이 되면 잊게 마련이었다. 위에 세 구의 시체를 태운 티거가 덜덜거리며 앞으로 전진했다.
끼기긱 끼기기긱
한스는 해치 위로 머리를 내밀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전장의 지배자다 지상전의 왕자다 티랄랄라~ 티랄랄라~ 티랄랄라~ 호이~ 호잇! 진흙투성이 궤도! 불타오르는 적 전차!”
잠시 뒤 독일 병사들은 세 구의 시체와 함께 돌아온 티거를 보고 환호했다.
“와오!!”
티거 안에서 전차병들이 그린 소위를 끌어냈을 때 보병들은 더욱 더 환호했다.
“대단해!! 역시 영웅이야!”
한스는 티거 위에 올려져 있는 시체 세 구를 끌어내렸다. 몇 병사들은 한스의 피투성이 군복과 상당히 어려보이는 시체를 보고는 말이 없어졌다. 하지만 병사들은 여전히 환호하며, 통통한 헨리의 시체를 비웃기까지 했다.
“영국 놈들은 배급이 많은 가봐! 이렇게 살이 찌다니!”
호프만과 베르너가 뒤늦게 찾아와서 이 광경을 보았다. 베르너가 뻔뻔스럽게 한스에게 말했다.
“이보게 한스! 굳이 죽일 필요는 없지 않았는가?”
호프만이 한스를 쳐다보며 낄낄거렸다.
“자네가 훈장을 받은 이유를 알겠어! 악독한 자식..”
호프만은 그린 소위가 차고 있는 시계를 탐이 난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헨리의 시체를 툭툭 발로 건드려보고는 한스에게 가서 말했다.
“이따 식사 시간에는 손은 씻고 오게!”
한스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호프만은 통통한 헨리의 시체와 한스를 번갈아 보며 비웃었다.
“혹시 자네 어디서 몰래 돼지 고기라도 뜯어먹고 온 것은 아니지? 새로 받은 군복이 이게 뭔가?”
호프만의 말에 그린 소위가 소리쳤다.
“망할 크라우트 새끼!!네 놈의 창자를 뜯어 주겠어!”
호프만은 그린 소위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퍼억!
“으윽!!”
그린 소위의 입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 그린 소위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놀랍게도 부하들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심문을 하게 되면 어떻게 말해야 아군에 피해가 가지 않을지만 생각하고 있었고, 몇 년의 전쟁 동안 부하들의 죽음은 늘상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서야 그린 소위는 자신의 실책으로 부하들을 모두 잃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한스는 아무 말 없이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머리 속이 웅웅거렸고 권총으로 호프만과 베르너의 대가리에 총알을 한 발씩 박아 넣고 싶다는 충동이 간절하게 들었다. 아까 전에 프레디를 죽였을 때부터 느껴지던 쾌감의 뒷맛과 쿵쿵 뛰던 심장의 흥분은 아직도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한스는 그랬다가는 자신이 겨우 얻어 낸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고 다시는 기계공학 책을 읽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한스는 시끄러운 상황을 뒤로 하고 천천히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일단 좀 쉬자.’
한스가 지나가는데 다른 병사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주부터 공세라며.”
“무슨 요일이야?”
“그건 모르지.”
“좆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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