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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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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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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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쌈마이도 하는데?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경제연구소들의 분석이라고 해봐야 부분적인 통계수치에 기반을 두어서 지상파와 케이블의 경쟁에만 초점을 맞추고 뜬구름 잡는 관계설정에만 주목한다.


“많은 이들이 지상파 방송의 위기를 이야기하지만 지상파 종사자 대부분은 위기감이 없어요. 또 누구는 케이블TV의 약진을 이야기하지만 케이블 종사자 대부분은 스스로 업계가 약진했다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그만큼 업계의 산업적 추이가 종사자들에게 실감되기는 어렵습니다. 가온경제연구소는 업계 종사자들이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구체적인 통계와 사례를 파고들어 제시하기 때문에 꽤 도움이 될 겁니다.”

“꼼꼼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청률 추이의 변화는 곧장 광고주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단순한 숫자놀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연령층, 시청시간대, 평균 시청시간 등 매우 세밀한 조사와 분석이 있어야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편성을 할 수가 있다.

류지호는 감과 경험에 의존하는 기존의 편성 관행을 탈피해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다솜미디어가 운영되길 바랐다.

아직까지는 류지호의 기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다만 디지털방송 전환으로 발생하는 비용 문제, 통신사업자들이 위성DMB·IP-TV 등 신규 플랫폼을 통해 미디어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려는 움직임, 이전 삶처럼 종합편성채널이 등장할 것인가 하는 점 등 지상파를 추격하는 것 못지않게 새로운 경쟁자들에 대응하는 것도 함께 고민해야 했다.

예전처럼 류지호가 일일이 입에 떠 넣어줄 순 없다.

그러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가온그룹 내부적으로 시스템과 협력체제가 갖춰졌으니까.

굳이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미래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일러줄 필요까지는 없다.

류지호는 출국 전까지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부분 사업만 챙겼다.

가장 큰 사업인 건설과 금융 부문은 거들떠도 안 봤다.

본인 영화 챙기기도 시간이 모자랐기에.


❉ ❉ ❉


전하영 부사장이 당부한대로 류지호는 폴란드 유학파 문영진 감독과 미팅했다.

문영진 감독은 데뷔작과 두 번째 작품 모두 평단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런데 흥행에서는 실패했다.

연달아 영화가 잘 안되자 연출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부터 충무로에는 삼세번이라는 암묵적 룰이 생겼다.

신인감독에게 흥행성적과 상관없이 세 번의 기회를 줬던 것.

21세기가 되면서 그 같은 암묵적인 룰이 사라져 가고 있다.

신인감독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데뷔작에서 망한 감독은 두 번째 기회를 잡기가 힘들어졌다.

망한 감독 문영진에게 류지호가 한편의 실화영화를 제안했다.


“이 영화는 전작처럼 생각할 게 많고 관객이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어른들을 위한 전시회가 아닙니다.”


문영진 감독은 유럽 유학파가 으레 겪는 것처럼 작가주의 영화와 대중 영화 사이에서 중심을 못 잡고 표류했다.


“청소년부터 노년까지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드라마가 되어야 합니다.”

“제작자들이 저를 오해하는 것이 그 지점인 것 같아요.”


모든 충무로 감독들이 그런다.

자신의 최대 강점은 드라마라고.


“사실 저는 엔터테이너에 대한 욕망이 무척 커요. 영화가 철학의 매체이며 사람들과의 소통도구이기도 하지만, 본능적으로 ‘나 이거 한다, 좀 봐다오’ 하는 엔터테이너적인 걸 인정하고 있거든요. 데뷔작을 찍을 때는 할 얘기가 너무 넘쳐서 허덕였고, 다음 작품은 이런 얘기를 해보자 하는 식이었어요.”

“왁자지껄하게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영화 한 번 해보세요.”


문영진에게 제안한 영화는 <에린 브로코비치> 스타일의 법정 영화다.

<에린 브로코비치>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변호사 사무실의 말단 사무원이 미국 최대 규모의 환경 소송사건에서 마침내 승리한 이야기다.

화려한 로펌을 동원한 거대기업과의 법적분쟁을 법률사무소 일개 사무원이 600여 명의 고소인을 대리해 열정적으로 싸워 쟁취한 환경 소송 역사에 획을 그은 사건이다.

한국에도 이와 비슷한 소송 사건이 있었다.

미국 다우닝 케미컬사에서 제조한 실리콘 팩의 피해자들이 제기한 집단소송이다.

한국에서도 미국 집단소송에 참여해 승소한 사건인데, 영화는 1994부터 한국인 피해여성을 대리해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실제 변호사의 이야기를 담을 예정이다.


“올 초 미국연방법원이 다우닝 케미컬사가 피해자들에게 보상해 주라고 최종판결을 했죠. 지금쯤 보상절차에 들어갔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알아보니까 피해자가 천 명이 넘는다고 하던데.....”

“한국에만 1,200여 명이 다우닝 케미컬사의 제품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피해 정도를 입증하는 진단서와 진료기록을 제출하면 미연방법원이 지정한 보상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보상금을 지급받게 된다고 하네요.”


한국인 피해자에 대한 보상금 액수는 최대 9만7천여 달러.

가슴 실리콘 팩 시술을 받았으나 다우닝 케미컬 제품임을 증명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600 달러를 받을 수 있다.

얼굴 같은 다른 신체부위에 대한 실리콘 팩 사용으로 인한 피해 보상금도 1인당 350∼1,750달러가 책정됐다.

피해 보상액은 한국인 1인당 GDP를 감안, 미국인 피해자 대비 35∼60% 수준에서 결정되었다.


“다우닝 케미컬사의 실리콘 팩이 80년대 초부터 93년까지 만 개 가까이 수입됐다고 하더군요. 아마 알려지지 않은 국내 피해여성이 꽤 많을 겁니다.”

“실리콘 팩 부작용이 심각한가 봅니다?”

“수술부위가 딱딱해지고 통증 때문에 힘들어 한다고 하네요. 피부괴사나 관절염 같은 부작용을 겪는 피해자도 있다고 하고. 문제는 이 회사가 좀 야비한 게 집단소송이 미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제기되자 1998년에 미국 피해자들에게 보상해주기로 합의를 보고 법원에 파산을 신청했더군요.”

“감독님은 <날라리 변호사>를 <에린 브로코비치>처럼 만들고 싶으신 거죠?”


<날라리 변호사>는 가제다.

코미디 영화는 아니지만 감독이 연출에서 힘을 빼길 바라는 마음에 가벼운 가제를 붙였다.


“꼭 그렇진 않아요. 집단소송을 대리한 변호사가 생각보다 엘리트에요.”


실제 모델인 변호사는 미국 유학파 출신으로 미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국제변호사다.

한국에 들어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는데, 일거리가 쏟아질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파리만 날렸다.

그런 가운데, 법률사무소를 알릴만 한 대형 사건을 수소문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소송이 다우닝 케미컬의 실리콘 팩 부작용 집단소송 건이었다.

실제 변호사는 의료기록과 피해신고가 접수된 여성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소송을 위임 받았고, 마침내 미국의 대형 로펌들 사이 끼어서 소송을 대리했다.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 진행했던 소송은 무려 8년이나 걸렸다.

수임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비를 털어가며 미국을 오갔다.

변호사는 류지호와 만나서 소송에 패소했으면 그간 들어간 경비 때문에 변호사 사무실을 폐업했을지도 모르겠다며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이번 판결이 끝이 아니라며 의지를 다잡았다.

나서지 못하거나 드러내지 않는 피해여성이 상당수라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피해자들에게 보상이 갈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다고 류지호에게 약속했다.

다우닝 케미컬의 피해보상 규모는 24억 달러 규모다.

전 세계적으로 38만 명 정도가 보상을 받게 된다.

피해보상이 내년부터 시작된다.

그에 맞춰 <날리리 변호사>가 개봉되길 기대했다.


“배우는 이훈재씨를 생각하고 있어요.”

“감독님하고 <민중의 적>를 작업했지요?”

“좋은 배우에요.”

“혹시... 이야기가 되신 겁니까?”

“운은 떼놨어요. <민중의 적>의 조규환 캐릭터가 너무 강렬해서 배역 받기 쉽지 않은가 보더라구요. 아마도 <날라리 변호사> 책이 가면 오래 고민 안 할 겁니다.”

“......”

“확정은 아닙니다. 의견을 말해 봤어요.”

“아, 네.....”


세계적인 집단소송은 영화제작자 입장에서 이보다 더 좋은 소재도 없다.

무력해 보이는 한 인물이 거대괴물(조직)을 상대해 이겨낸다는 설정은 대중들의 감정이입을 쉽게 이끌어낼 수 있다.

구약성서의 다윗과 골리앗의 설정이 대표적이다.

미국인들이 열광하는 <스파이더맨>은 평소 나약해 보이기까지 한 평범한 청년이 슈퍼히어로가 돼 악으로부터 도시를 구하고, 나아가 세계를 구원하는 스토리다.

물론 미국이라는 사회를 유지하는 동력인 아메리칸 드림의 연장선 위에 있긴 하지만, 세계 어디서나 먹히는 스토리텔링이다.


‘이런 종류의 영화는 계속되어야 해.’


거대괴물(거악)을 상대로 한 싸움은 한 사람만의 각성에 의해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집단소송이란 것에 개념이 아직 없다.

법률적으로도 허술하다.

이전 삶에서 오성 반도체 사건을 보며 국민들은 남의 일 대하듯 했다.

그러다 가습기 사태를 통해 내 일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이온이 방출된다는 침대에서 라돈 방사능이 검출되었다는 사건도 접하게 된다.

더욱 기가 찬 것은 기업과 정부가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는 공방을 벌인다는 사실이다.

누구도 피해자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영화는 오락거리이지만, 한 시대의 문화적 사건으로서 재현의 수단이자 표현의 수단이기도 하다.

천 만 명 이상 관객을 동원했다는 것은 대한민국 유권자 1/3이 영화를 시청했다고도 볼 수 있다.

영화를 통해 무려 천 만 명이란 국민에게 당대의 중요한 사건이나 문제의식을 상기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할리우드의 영웅주의로 흐르는 것은 경계를 해야 한다.

한 명의 영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미국 사회에도 더 이상 에린 브로코비치 같은 케이스는 없다.

그래서 각성한 시민의 연대(連帶)가 중요하다.


“여성영화 성격이 짙겠군요?”

“여성영화라고 규정짓지 말자고요. 이 세상 수많은 사건 피해자 중 일부에요.”

“좀 더 본질적인 걸 건드려야 하겠지요?”

“다우닝 케미컬사의 실리콘 팩은 성형 보형물로만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의료용으로도 많이 쓰였어요. 실리콘 팩의 피해자라고 해서 가슴 성형을 한 것으로 오해할까봐 피해를 당하고도 나서지 않은 여성이 많다고 하죠.”


다우닝 케미컬사 실리콘 팩 피해자 가운데는 소녀도 있고, 할머니도 있다.

윤락녀도 있고, 연예인도 있으며, 부잣집 사모님도 있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위해 의료용으로 가슴 보형물을 넣기도 하고, 사고나 기타 의료적 조치의 일환으로 얼굴에 실리콘 팩을 넣은 경우도 많았다.


“절대 신파가 들어가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코믹한 분위기도 선을 잘 타야 하고요. 잘못하면 희화화 될 수도 있으니까.”

“진지하되 결코 가볍지 않아야 하겠군요?”

“어렵죠. 그 선이라는 게.”


영화에 있어서 기획이란 단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사람들과 이야기(소통)를 하든지, 사람들에게 쇼를 보여주든지.

류지호가 <날라리 변호사>에서 문영진 감독에게 원하는 것은 후자다.

말을 걸기보다 영화가 던지는 볼거리를 즐기게 하는 것.


“값싸다, 신파다, 뻔하다고 할 수도 있겠죠. 나는 다른 식으로 말하겠습니다. 서사적이었으면 좋겠다고. 각 캐릭터들과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현미경처럼 들이대서 주무르는 게 아니라 큰 이야기 안에 빠졌다가 나오는 정도.”


고전영화는 대체로 내러티브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는 편이다.

때문에 이미지, 컷, 사운드 등이 내러티브를 충실히 전달하는 보조적인 기능을 맡을 뿐.

즉 일관된 심리를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고, 목표지향적인 중심인물이 이야기를 이끌며, 갈등 요소들은 그를 궁지에 몰아넣고,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어렵게 만든다.

또 스토리 안의 사건들은 뚜렷한 인과관계로 묶여서 강박적으로 앞으로 쭉쭉 전진한다.

그러는 동안에 주인공은 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변하거나 혹은 성장한다.

고전영화의 내러티브라 함으로 주로 그 같은 방식을 따른다.

할리우드 영화의 전형적인 이야기 작법이다.

어떤 결점을 가진 인물이 어떤 가치를 지향하게 되는데 영화 마지막에서 그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에 따라 영화가 지향하는 가치가 드러나는 방식이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동안 주인공의 행위와 그 과정을 따라가며 그의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류지호는 파격적인 영화문법의 현대영화보다 내러티브 중심의 고전영화 풍으로 <날라리 변호사>가 제작되길 원했다.


“WaW는 문 감독에게 많이 빡빡하게 굴 겁니다.”


문영진 감독은 폴란드 국립영화학교의 한국인 첫 유학생이었다.

<세 가지 색> 연작의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제자라고 볼 수도 있다.

데뷔작과 두 번째 작품에서 작가로서의 야심이 뚜렷한 작품을 내놓은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흥행에서는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국내외 평단에서는 인정을 받았고.


“할리우드처럼 돌아간다는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시스템 안에 들어와서 영화를 찍어보면 일하는 방식이 한층 성숙해 질 수도 있습니다.”

“감독님은 그린라이트를 켜면 간섭을 잘 안하신다고 들었는데....”

“문 감독이나 나나 욕심도 많고 영화로 풀어내고 싶어 하는 욕망이 강합니다. 우리가 절제했다고 생각한 것들조차 나중에 보면 항상 넘치죠. 시스템 안에서 한 작품 해보면 영화 안에서 절제하는 법을 배우게 될 수도 있어요.”

“감독님은 절제하는 법을 배웠습니까?”

“아니요.”

“......?”

“<복수의 꽃>에서 너무 절제하다가 내러티브가 허술하다는 말을 들었죠.”


농담처럼 말했지만, 힘을 뺀다는 것 혹은 절제의 미학이란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제가 감독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영화를 연출하게 된다면.....”


문영진 감독이 잠시 뜸을 들였다.


“저를 아는 친구들에게 욕 좀 먹을 것 같습니다.”

“상업영화 찍는다고요?”

“평소에 예술가인 척 엄청 해댔는데.... 욕먹을 각오하고 한번 해봐야죠.”

“예술영화와 상업영화를 나누는 것이 현대영화에서 의미가 있을까요? 감독이 철학이 있고, 그 철학을 영화에 잘 녹여내면 그런 것이 평가를 받는 거죠. 상업영화라고 무턱대고 저질의 싸구려라 치부하지 말고, 자기 것을 녹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교과서적인 말이긴 한데.... 그게 쉬운 건 아니잖습니까?”

“나 같은 쌈마이도 하는데요, 뭘.”

“감독임이 쌈마이면 충무로 감독 절반은 쌈마이도 못 됩니다.”

“그럼 이류 정도라고 해두죠.”


할리우드 거장들은 대중적 요구와 작가로서의 입장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한다.

리드 스콧 같은 이들은 할리우드 스타일의 스펙터클 안에 심오한 질문을 잘만 녹여낸다.

심오함에 관객들이 짓눌리지 않도록 화려한 이미지와 서스펜스를 절묘하게 펼쳐 보임으로써 어렵다는 편견을 상쇄시킨다.

영화의 가치는 상업영화나 작가영화로 구분해서 볼 필요가 없다.

영화 속에 반영된 감독의 철학.

그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에 따라서 영화 가치도 달라진다.

반드시 영화에는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철학과 그만의 사고가 들어간다.

영화의 가치는 스토리적인 측면과 함께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도 매우 중요하다.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메시지다.

그런데 답이 아니다.

질문이다.

관객이 그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기도 하고, 타인을 이해하는 법을 일깨우기도 한다.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부조리를 밝히기도 한다.

또한 사회적인 이슈를 재조명하기도 한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영화에는 당시의 그 사회가 담긴다.

그래서 평론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들이 영화를 분석함으로써 그 안에 담긴 감독의 철학이 값어치가 있는가를 선명하게 드러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영화에 담긴 철학이 관객이 생각해볼만한 가치가 있는가 또는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그 질문이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타당한 가치인가.

그런 것들이 영화를 평가하는 잣대가 된다.


“영화의 소재, 장르, 표현방식은 시대가 변하면서 변형되죠. 영화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도 그에 발맞춰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한국의 영화작가들이 푸대접을 받았다.

<데어데블>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이명수 감독이 그랬고, <퇴마기록> 시리즈의 배창훈 감독이 그랬으며, <풍운아>의 박은상 감독이 그랬다.

비주얼리스트라고 해서 깊이가 없다고 하고, 나이가 많은 옛날 감독이라고 저평가 당하고, 무술영화만 찍었던 커리어로 인해 삼류라고 낙인찍고.

세 명의 감독은 WaW가 제작한 상업영화에서 흥행 대성공을 이뤄냈고, 작품적으로도 인정을 받았다.


“관객은 멍청하지도 무지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취향이 갈릴 뿐.”


이명수 감독은 언어 문제를 제외하고 할리우드에서 작업이 꽤나 재미있었다고 했다.


“이명수 감독이 그러더군요. 자신 같이 나이 먹은 감독이 활동할 수 있는 건 할리우드 현장이 경로사상이 희박해서인 것 같다고. 그들은 이명수 감독에 대한 예우가 별로 없거든요. 그냥 동료라고 생각해서 꼰대 취급 받지 않으니까 마음이 편했답니다. 물론 감독이니까 존중을 해줬겠지만.”


반면 충무로에서는 나이가 들면 대우해주려고 하는 성향이 너무 강하다.

그런 것들이 현장에서 작업할 때 불편함을 초래하고 있다.

젊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나이 든 감독과 ‘불편하게’ 일하느니 신인감독과 작업하는 게 '편한' 것이 당연했다.

나이 든 감독들에게서 노련함보다 올드함이 부각되는 것이 현실이다.

류지호는 외국에서 유학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혼란을 겪는 감독들을 보며 안타까움보다는 답답함이 들었다.

영화를 너무 골라서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작가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닌데.


“퐁당퐁당...!”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에요. 아무것도. 구체적인 계약은 WaW의 한 피디와 논의하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영화로 보답하겠습니다.”

“손익분기점 만만하게만 보지 않고 작업하면 됩니다.”


다른 감독보다 상황이 훨씬 좋은 류지호조차 장르 영화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다.

관객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전형적인 상업영화와 자의식을 마음껏 표출하는 영화 사이를 ‘퐁당퐁당’ 오가고 있다.

몇 년 하다가 강력한 인상을 남기고 사라질 것인가.

길고 오래가는 영화감독이 될 것인가.

감독이나 제작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관객이 결정한다.

이전 삶에서 류지호는 그 사실을 외면했었다.


❉ ❉ ❉


“함 사시오! 함 사시오!"


만수주공아파트 단지가 떠나갈 듯 장정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함 사시~오!”


류지호와 친구들이 함재비가 되어 만수주공아파트를 누볐다.

신부 집에 함이 들어가는 시간은 낮과 밤이 조화를 이루는 해 질 녘으로 택한다.

신성한 시간에 귀한 물건을 들인다는 의미다.

함을 지고 가는 사람을 '함진아비'라고 부르는데, 모범적이고 금슬 좋으며 첫 자녀로 아들을 낳은 사람이 된다.

전통적으로는 신랑 집안의 머슴이나 이웃사람이 지고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신랑 친구들이 함을 멘다.


“함 사세요!”


온 동네 꼬마들이 마치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보는 광경을 구경하 듯 함재비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함 사시오’를 따라했다.

서로의 혼인을 타진하고 허락하는 ‘의혼’, 혼약이 이루어져 연길을 청하는 ‘납채’, 결혼식 전날 신부용 혼수와 혼서 및 물목을 넣은 함을 보내는 ‘납폐’, 신부 댁에서 본 혼례식이 치러지는 ‘친영’의 순서에서 납폐에 속하는 함과 혼례때 폐백을 올리는 것만 전통식으로 행하고 나머지는 서양식으로 치러지고 있는 것이 요즘의 혼례문화다.

류지호 일행이 함을 짊어지고 왁자지껄하게 한바탕 쇼를 하는 것은 이 납폐가 현대식으로 변한 것이다.

류지호와 사인방은 고등학교 시절 웨딩비디오 사업을 시작했다.

80년 말부터 다양한 함재비 행사를 경험했다.

요즘만큼 함재비 실랑이가 크게 사건화 되진 않았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기에 돈봉투를 놓는 풍경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후한 대접이라고 해봐야 잘 차린 술상이 고작이었다.

다만 함재비 이벤트를 통해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집의 경사를 알게 되는 등 이후 상부상조를 위한 알림의 기능이 있었다.

김재욱의 목소리가 우렁우렁 온 단지를 뒤흔들었다.


“함 사시오! 함 사!”


류지호와 친구들이 따라했다.


“함 사시오!”


고우찬의 결혼을 앞두고 오랜 만에 사인방이 뭉쳤다.

신포고 동창들도 함께했다.

유부남이자, 떡두꺼비 같은 아들 형제를 두고 있는 이철웅이 함을 짊어졌다.

행렬의 길을 열고, 신부 측과 흥정을 벌이는 건 너스레를 잘 떠는 김재욱이 맡았다.

박상은과 김석민이 청사초롱을 들었다.

류지호와 김준우는 함재비를 촬영하느라 여념이 없다.

사실 아파트 단지에서 이렇듯 요란하게 함재비 행렬이 다니는 것은 실례다.

사회가 각박해져서 자칫 민원이 들어갈 수도 있다.

김재욱이 사전에 만수주공아파트를 방문해 관리사무소와 부녀회에 양해를 구하지 않았다면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야! 적당히 하고 그냥 들어가!”


함진아비를 마중 나온 신부측에서 성질을 부렸다.

어디가나 튀는 캐릭터, 공다연이다.

김재욱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허. 적당이라니! 그쪽이나 제대로 좀 안 하냐!”


신소연이 얼른 공다연을 옆으로 밀어냈다.


“자, 봐봐.”


신소연이 아스팔트 바닥에 흰봉투를 깔기 시작했다.


훗!


김재욱이 봉투에 입김을 불어 안에 내용물을 확인했다.

공다연의 한쪽 미간이 다시 치솟았다.


“니들 다 잘나가잖아! 왜 돈을 확인하고 지랄이야?”

“다연이 너! 자꾸 쫑알거리면 우리 빽도 한다?”

“함진아비는 뒤로 물러나는 거 아니거든!”


김재욱이 능글거리며 대꾸했다.


“옛날 가마나 말은 후진이 안됐지만, 경일자동차는 후진이 된단다.”


함을 지고 있는 이철웅이 실실 거렸다.


“재욱아, 난 무쏘 타.”


신랑·신부의 미래에 빗대어 절대 함을 뒤로 물리지 않았다.

가는 길도 오르막길보다는 내리막길을 주로 택했다.

신랑신부의 삶이 후퇴하지 않고 고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볼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은 류지호와 가온웨딩스튜디오에서 나온 기사들이 디지털 캠코더에 담았다.

구경 나온 아파트 주민이 웨딩비디오 기사에게 물었다.


“드라마 촬영해요?”

“아니요. 결혼식 비디오에요.”

“무슨 결혼식 비디오를 연속극 찍듯이 한대.....”

“평생 한 번 밖에 없는 일이니까요.”

“요즘은 함 들어가는 것도 비디오로 찍나 봐요?”

“찍는 고객도 있고, 안 찍는 고객도 있고 그래요.”


신소연 대신 이번에는 김민아의 소꿉친구가 바닥에 흰봉투를 놓았다.

그러면서 무리에 섞여 있는 류지호를 힐끔거렸다.


“목이 컬컬한데? 술상 없나?”


신소연이 관리실에 맡겨두었던 작은 술상을 가져왔다.


“뭐야? 막걸리야? 양주 없어?”


이철웅의 말에 공다연이 즉각 성질을 부렸다.


“그냥 처먹어! 무슨 양주야!”

“다연이 너는 10년 만에 보는데, 어떻게 하나도 안 변했냐?”


공다연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했다.

눈웃음을 치며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철웅아, 적당히 하자. 응? 민폐야. 민폐... 그치?”

“어디서 되도 않은 태세전환이래. 나 애 아빠야, 인마.”

“이러다 온 아파트 단지 사람들 다 구경나오겠어. 안 쪽팔려?”

“오징어 가면 쓰고 있어서 괜찮아.”

“어휴. 고등학교 다닐 때는 숙맥이던 놈이 형사되었다고 능글맞아져서는....”

“잡소리 말고, 술 한 잔 따라봐라.”

“내가 술집 작부냐?”

“함진아비를 잘 달래야, 밤이 짧은 법이다. 에험!”


쪼르륵.


공다연이 이철웅의 잔에 술을 따라줬다.


“소리 한 자락 해봐라.”

“....?”

“춘향가 좀 한다며?”

“....!”

“사랑가 부르면 현관까지 논스톱으로 가 줄게.”

“진짜?”

“강력반 형사는 구라 안 쳐.”


공다연이 주변을 살폈다.

온 아파트 주민들이 구경 나온 것 같았다.

일부 주민들이 류지호를 알아보고는 사인을 요청하는 모습도 보였다.


“어휴! 징그러운 놈들!”


공다연이 이철웅의 잔을 낚아채 막걸리를 가득 부었다.


꿀꺽꿀꺽.


한 사발 시원하게 들이키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느닷없이 막간 공연이 벌어졌다.


“춘향아~ 우리 업고도 한번 놀아 보자. 도련님도 차암, 건넌방 어머니가 아시면 어쩔려고 그러시요. 얘야 너희 어머니께서는 소싯적에 우리보다 훨씬 더 했다고 허드라. 그러니 잔말 말고 업고 한번 놀아 보자.”


그냥 하이라이트인 중중모리로 넘어가도 되는데, 본격적이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사랑이로구나 내 사랑이야 이히 내사랑이로다.”


김민아의 소꿉친구들이 가세해 공다연 뒤에서 어깨춤을 덩실덩실 췄다.

공다연이야 대학로 연극판에서 굴러먹은 자락이 있으니 그렇다고 쳐도, 새침대기 같은 친구들까지 보조를 맞출 줄이야.

신소연의 어설픈 춤사위를 보던 김준우가 슬쩍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무리 눈에 콩깍지가 끼었다고 해도 그녀의 몸짓을 봐 주기 조금 힘들었다.


키득키득.


류지호와 친구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작가의말

할기찬 하루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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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5 낄 데 안 낄 데 분별을 못하고 있어! +6 23.07.27 2,938 114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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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7 두고두고 가문의 영광이겠지..... +9 23.07.19 2,897 12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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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4 MJJ Music Records. (2) +5 23.07.15 2,934 125 22쪽
553 MJJ Music Records. (1) +5 23.07.14 2,990 103 22쪽
552 내 것이 없으면 언제고 한계가 닥치게 되어 있어. (2) +3 23.07.13 2,989 113 23쪽
551 내 것이 없으면 언제고 한계가 닥치게 되어 있어. (1) +5 23.07.12 2,977 112 23쪽
550 나도 아직 시도하지 않은 건데..... +4 23.07.11 3,009 118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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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 내 이럴 줄 알았다! (1) +4 23.07.08 3,023 112 25쪽
547 앞으로 할 일이 참 많아..... +4 23.07.07 3,029 11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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