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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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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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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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것이 없어도 가치 있게 살아라.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똑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그것처럼 기업을 이끄는 경영자들이나 소유주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즐기며 활발한 대외활동을 하는 경영자나 소유주들이 있는 반면 언론에 거의 노출되지 않는 소극적인 인물도 있기 마련이다. 알려진 부자이지만 대중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거나 그간 언론의 주목을 받을 일이 없어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부호들도 여기 해당한다. 이유야 어찌됐든 ‘은둔의 경영자’란 대중에게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다. 모습을 꼭꼭 숨겨 궁금증을 유발하는 할리우드의 유력자에는 누가 있을까.(중략) 지난 1989년 트라이-스텔라 픽처스를 인수하고, 최근에는 파라맥스까지 인수하며 할리우드에 혜성처럼 등장한 후 일절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인물이 있다. Garam Invest의 지호 류다. 업계에 소문만 무성했던 트라이-스텔라 픽처스의 실질적인 오너가 공식석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피셔킹>의 프리미어가 있던 날이다. 그간 성별과 아시아 출신이라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 베일에 가려져 있던 트라이-스텔라 픽처스의 오너는.....(후략)]


- Daily Variety. 데릭 콜먼 기자.


류지호가 보고 있던 연예전문지 데일리 버라이어티(Daily Variety)를 덮으며 웃음을 흘렸다.


하하.


자신을 두고 ‘은둔자’라고 표현한 것이 재미가 있었다.

버라이어티(Variety)는 영화, 텔레비전, 음악, 양싱기술 및 문화 산업에 대해 폭넓게 다루는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주간지다.

데일리 버라이어티(Daily Variety)는 LA에 기반을 둔 타블로이드 판 일간지다.

할리우드, 브로드웨이 소식 전문지로 뉴욕에서는 LA보다 하루 일찍 발매가 되고 있다.

류지호는 이어 다른 신문과 잡지들을 살펴보았다.


- 페가수스의 진정한 주인.(The Hollywood Reporter)

- 삼각별의 꼭짓점을 차지한 아시아에서 온 청년.(LA TIMES)

- 월가의 초신성.(The Wall Street Journal)

- 일체 경영에 간섭하지 않고, 5편의 영화선택 권리만 행사.(Entertainment Weekly)

- 빅 6의 아성에 도전하는 젊은 영화인.(Los Angeles Daily News)


대부분의 기사 타이틀과 내용은 우호적인 편이다.

트라이-스텔라 픽처스가 선제적으로 언론에 보도자료를 뿌린 덕분이다.

경호책임자 겸 보좌관 도널드 제이콥이 신문과 잡지들을 거둬들이며 물었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낯이 간지럽네요.”

“파파라치는 저희가 통제할 테니 보스는 편하게 대학생활을 즐기십시오.”

“대학생활을 즐기라고요?”

“보스는 다른 청년들처럼 대학 졸업장이 간절하진 않잖습니까?”

“할리우드 파티에 몇 번 참석해 보니까 졸업장을 꼭 받아야겠던데요?”

“그렇긴 합니다. 명문 영화과 출신들끼리는 알게 모르게 끈끈한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으니까요.”

“어디나 파벌은 있게 마련이죠.”

“파벌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미국은 인종, 출신 지역, 학교 동문, 사교 모임 등 이 모든 것들이 사회활동을 하는데 필수요소입니다. 이왕이면 보스가 그런 커뮤니티에서 리더가 되길 기대합니다.”

“노력할게요. Don이 많이 도와줘요.”

“물론입니다.”


류지호가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 안에는 따끈따끈한 카드 한 장이 들어있다.

바로 미국 영주권을 증명하는 그린카드(Green Card)다.

합법적인 미국 이민은 예나 지금이나 '하늘의 별 따기'이다.

작년에 이민법이 개정되어 강화된 뒤로 더욱 그렇다.

이민국이 요구하는 각종 서류 절차와 우선순위 때문이다.

예를 들어 취업 비자의 경우 1·2·3 우선순위를 정해놓은 뒤 그 순위 내에서도 우선 처리 등급을 매겨놓았다.

가족 초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미국에서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획득해 정착한 한인이 자기 가족이나 친지, 또는 배우자를 초청해 놓고도 곧바로 결합하지 못하고 몇 년씩 떨어져 살아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2년짜리인데, 만약 내가 한국의 군대에 가면 어떻게 되는 거죠?”

“원래는 1년 이상 해외에 체류하게 되면 영주권이 취소되거나 추방재판을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괜히 받았네요.”

“......”

“만약 장기간 해외에 체류하고 영주권을 잃게 되면 다시 영주권을 받는데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한국 기업의 미국 주재원들은 1년 혹은 2년마다 잠깐씩 미국에 들어와 여행허가증을 신청하고 영주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류지호의 경우는 군복무 때문에 미국에 올 수가 없다.


“추후 한국에 장기간 체류한 후에 미국 입국 시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를 위해 미국에 영구히 거주한다는 의사와 증거를 마련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테면?”

“미국에 보스 명의로 주택을 소유하는 것과 세금을 내고 있다는 정황증거지요. 또 한국에서 장기체류를 한 목적이 한국의 영주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한 일회성 목적임을 증명해야 하겠죠.”

“포기한 영주권을 재신청할 때 한 번 포기한 이력이 영향을 주진 않겠죠?”

“그 문제는 변호사들이 알아서 가이드를 해줄 겁니다. 보스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주택구입을 통한 미국에서의 재산 유지, 은행계좌와 보험 유지, 미국에서의 성실한 세금 납부 정도입니다.”

“요즘 캘리포니아 분위기가 높은 실업률 때문에 이민자에 대해 적대감이 상당하던데.....”

“보스는 국익에 도움 되는 이민자이기 때문에 관계당국이 트집을 잡아 이민을 막진 않을 겁니다.”


처음으로 미국비자를 받기 위해 주한미국대사관 영사와 인터뷰를 할 때가 떠올랐다.

그레이엄 가문과의 친분을 들먹인 것만으로 대접이 달라졌었다.

아마도 군 제대 후 다시 미국으로 들어올 때도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진 않았다.


“영주권이 나온 것만으로 내 신상에도 많은 것이 바뀌겠네요?”

“가장 먼저 Garam Invest에서 보스의 지위를 바꿀 수가 있고, 트라이-스텔라 픽처스를 비롯해 산하 사업체들의 이사회 의장이 되는 것을 추천합니다.”

“일단 웨스트우드 아파트를 내 소유로 전환하고 GARAM Ventures 대표명의로 바꾸는 것부터 시작하죠.”

“캐서린 & 윌슨에 그 부분부터 처리하라고 전하겠습니다.”


류지호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자, 한인타운으로 움직여 볼까요?”

“가시죠.”


류지호가 움직이자, 티노와 말릭이 재빨리 따라 나섰다.


“......!”


도널드 제이콥은 일본인, 중국인은 물론 여러 아시아인들을 만나본 편이다.

그가 보기에 한국인들은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그들만의 정체성이 있는 것 같았다.

때때로 무뚝뚝한 듯 보여 불친절한 인상을 받곤 했다.

속을 들여다보면 은근히 주변 사람을 챙긴다.

선입견을 빼고 보면 한국인들이 정이 많다.

무엇보다 매우 성실하고 검소하며 근성이 있다.

자신의 보스가 딱 그랬다.

한국인들은 자신들끼리 편을 나눠 싸우다가도 자신의 민족과 관련된 일에는 언제 싸웠냐는 듯 단결력을 보여준다.

밤늦게 술에 취해 다운타운을 아무렇지도 않게 활보하는 인종은 한국인 밖에 없다.

특히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그렇다.

이탈리아와 이스라엘 민족을 합쳐 놓은 것 같은 독특한 민족성이랄까.


‘보스가 천방지축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물론 지나치게 신중해서 답답할 때도 많았지만.

좋게 말해서 신중한 것이다.

나쁘게 보면 소극적인 것이고.

전형적인 미국인 사고방식의 도널드 제이콥이 보기에 그런 면이 없지 않았다.


❉ ❉ ❉


유명인사의 사생활을 몰래 찍은 뒤 이를 언론사에 고액으로 팔아넘기는 ‘파파라치’ 산업은 베일에 싸여있다.

‘paparazzi’라는 말은 원래 벌레를 뜻하는 이탈리아어에서 왔다.

파리처럼 웽웽거리며 집요하게 달라붙는 그들은 스타들에게는 때로 증오의 대상이지만, 연예산업에선 없어서 안 될 존재이고 하다.

파파라치의 수입은 정해진 것이 없다.

‘사진 1컷당 얼마’ 이런 식으로 돈을 받기 때문이다.

보통의 스타 사진은 수백, 수천 달러에 거래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대중에게 인기가 많은 헐리웃 톱스타의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사생활 사진은 건당 수백만 달러를 호가해 ‘로또’ 부럽지 않은 행운을 거머쥘 수도 있다.

그들이 때로 목숨을 걸고 톱스타를 쫓는 이유다.

대중이 보고 싶어 하는 연예인의 사진을 잘만 찍으면 단숨에 큰돈을 거머쥘 수 있는 직업이지만, 위험부담도 크다.

연예인으로부터 물리적 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 목숨을 걸고 차량을 이용한 추격전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그들은 그다지 좋은 시각으로 비추어지지 않는다.

‘돈을 위해 연예인의 피를 빨아 먹는다’는 악평도 쏟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수많은 파파라치들이 생겨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하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에는 약 700여명 정도의 파파라치들이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의 평균 연봉은 60,000~100,000달러.

미국에서 저 정도 연봉은 보통 전문직 중에서도 특별한 사람들이나 받는 금액이다.


“자네는 얼마나 벌어?”


GARAM Ventures 앞에서 일명 뻗치기(doorstepping)를 하고 있는 존 라이트가 근처를 서성이고 있는 신참 파파라치 루크 프레이저(Fraser Fraser)에게 물었다.

루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리 베테랑 파파라치라고 해도 자신의 수입을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한 달 정도 됐어?”

“네.”

“2천~3천 달러 사이 정도 벌었겠군.”


초짜 파파라치의 평균 수입이다.


“내가 작년에 얼마 벌었는지 알아?”

“5만 달러.....?”

“25만 달러.”


루크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존 라이트가 어느 정도 입지를 굳히고 있는 파파라치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수입이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작년에 한방(big score)이 제대로 적중했거든.”

“무엇으로?”

“셰릴린과 리차드 샘버라의 데이트 사진으로.”


셰릴린은 가수이자 배우이고, 리차드 샘버라는 메탈 그룹 본조비의 기타리스트다.


“그 사진이 12만 달러에 팔렸지.”

“몇 장이나....?”

“한 장이지.”


이런 사진을 찍을 만큼 베테랑인 파파라치들은 두 스타의 스타일리스트, 유모, 거리화가, 매니저, 탐정, 심지어 뒷골목 종사자들의 도움까지 받는다.

그들과 수입을 나누는 조건으로.


“잘 들어. 무조건 뻗치기 하다가 운 좋게 사진이 걸리는 것은 초짜 시기에나 있는 거야. 잘 어울리는 스타커플 사진이 가치가 높겠어? 아니면 혼자 있는 사진이 더 높겠어?”

“둘이 다정하게 포옹하거나 오붓한 사진이 더 비싸지 않습니까?”

“아니야.”

“......?”

“부부나 연인이 함께 있는 사진은 겨우 천 달러 될까 말까.... 대신 한 사람이 혼자 있을 때 그것도 무표정하거나 우울해 보이는 사진이라면 스무 배는 넘게 받아낼 수 있지.”


파파라치 사진을 선호하는 매체가 주로 가십지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리 키드먼이 톰 메이포더 없이 혼자 있는 사진을 내가 찍었다고 쳐. 다음 날 기사 타이틀은 ‘what Happened to that couple’ 이런 식으로 붙겠지.”


그저 톰 메이포더의 아내 마리 키드먼은 혼자 볼 일을 본 것뿐이다.

그런데 그 사진을 올리며 기사 제목을 자극적으로 달면 전혀 다른 내용이 된다.

이미 커플의 불화설이 돌고 있다면 그 파급력은 더욱 커진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대중들이 가판에서 신문을 산다.


“에이전시는?”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이 세계에 대해 모릅니다.”


연예계 스타만 에이전시가 있는 게 아니다.

파파라치들도 엄연한 에이전시를 가지고 있다.

에이전시와 계약한 파파라치는 대체로 4:6 수익분배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에이전시가 직접 정보를 주면 5:5로 수익분배가 조정된다.


“남들이 뭐라든지 자부심을 가져.”


루크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남의 사생활이나 캐는 파파라치에게 자부심이라니.


“우리가 찾지 않으면 이 도시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야. 우리는 할리우드가 돌아가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지.”


연예산업이 커질수록 그늘도 짙을 수밖에.


“나왔다!”


수다를 떨고 있는데, GARAM Ventures 건물에서 류지호와 수행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도널드 제이콥이 도로 맞은편의 차량에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파파라치를 발견했다.

류지호가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슬슬 벌레들이 꼬이고 있었다.

진드기들보다 더 지독한 벌레들이.


✻ ✻ ✻


LA 다운타운 남쪽이자 한인타운 남쪽 110번 프리웨이를 중심으로 동서쪽 그리고 105번 프리웨이 북쪽지역에 위치한 지역.

사우스 센트럴 LA다.

본래 특정 지역을 표기하는 것이 아니라 LA 남쪽 지역 도시들을 통합해서 부르는 명칭이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흑인들이 주로 모여 살던 이 지역은 몇 년 전부터 히스패닉이 유입되기 시작해 지금은 흑인과 히스패닉이 한데 어울려 사는 동네가 됐다.

히스패닉의 유입으로 인종 구성에 변화는 있었지만, 흔히 사우스 센트럴 지역이라고 불리는 플로렌스 일대는 예나 지금이나 낙후된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서부의 대표적인 흑인지역으로 악명 높은 갱단 Crips와 Bloods의 활동지역이다.

그 같은 위험천만한 지역에서 많은 한인들이 들어가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다운타운과 인접한 지역적 특성과 교통의 편리성, 결정적으로 새로 이민 온 한국계가 기존의 한인타운 내에서 경쟁을 할 수가 없어서 사우스 센트럴 지역이 위험한 줄 알면서도 많이들 진출하는 상황이다.

때문에 한인들 사이에서 ‘4.29’라고 불리는 LA 흑인폭동 당시 사우스 센트럴 LA 특히 플로렌스 지역에서 상점을 운영하던 한인들이 약탈과 방화 등의 피해를 집중적으로 받았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은 물론 백인들도 이 동네를 걸어서 다니는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철조망이 둘러쳐진 공터가 곳곳에 눈에 띄었고, 마켓이나 주류 판매점 외벽은 대부분 쇠창살로 둘러싸여 있다.

상점 외벽에 낙서도 가득했다.

수십 년간 기차가 다니지 않은 철길은 동네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빈민가를 보여줄 때 보게 되는 바로 그런 풍경이다.


“지금까지 지나쳐 온 거리를 생각해보십시오. 경찰을 봤습니까? 이 지역은 사실상 시정부가 방치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말릭의 어조에는 상당히 감정이 실려 있었다.

그도 어린 시절에는 이 같은 빈민가에서 자랐으니까.


끼이익.


사우스 센트럴에서도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플로렌스의 한 건물 앞에 류지호를 태운 차량이 멈췄다.

얼마 전까지 한국인 고순희 가족이 운영하던 상점자리다.

현재 이곳에서 플로렌스 지역의 미취학 아동을 위한 놀이방 겸 교육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이곳을 출입하는 인종은 흑인, 히스패닉, 한국계 극소뿐이다.

봉사활동을 오는 이들 역시 백인은 없다.

류지호가 이 동네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유일한 한국인에게 인사했다.


“진형이형!”

“헤이. Jay! 요새 좀 뜸했다?”


류지호를 반갑게 맞이하는 한국인 청년 김진형.

흑인 빈민가 특유의 슬랭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거의 유일한 한국인이다.

흑인 갱단 은어까지 완벽하게 구사하는 주제에 현재 하버드 대학에 재학 중인 수재다.

또한 류지호가 이곳에 만든 청소년 센터의 공동 책임자다.

김진형은 하버드에 다니면서도 흑인 인권단체와 함께 빈민가에서 청소년 서비스, 교도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방학 때마다 한인타운으로 돌아와 한흑연맹과 함께 두 인종 간의 중재자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코리안아메리칸 학생컨퍼런스(KASCON) 조직을 돕고 있기도 했다.

김진형이 류지호의 품 안에 소닉 핸디캠을 안겨주며 명령하듯 말했다.


“잘 왔다. 비디오캠 가지고 날 따라와.”


김진형이 류지호를 데리고 간 방에는 흑인 소년이 불량한 태도로 앉아있다.


“Jay. 카메라로 저 녀석이 진술하는 걸 찍어줘.”

“진술? 형은 변호사가 아니잖아. 이런 걸 함부로 해도 돼?”

“녀석을 도우려면 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어야 하니까.”

“범죄에 연루 됐어?”

“그런 건 아냐.”


소년이 건들거리며 시비조로 말했다.


“자기 나라 말로 얘기 하지 마. 날 욕하는 것 같잖아.”


김진형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인마, 이 형도 한국말을 잊어먹지 않으려면 가끔 써봐야 할 거 아냐.”

“쳇!”


두 사람은 흑인빈민가 특유의 말투로 대화를 나눴다.

김진형은 소년과 인종만 다를 뿐 말투에서 전혀 이질감이 없었다.


“스탠바이.”

“좋았어.”


김진형은 소년과 2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했다.

류지호가 보기에 김진형은 심리상담가나 변호사로는 낙제다.

그들 직업은 냉정을 유지해야 한다.

헌데 소년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앉아있다.

인터뷰하는 소년은 황당해하며 비웃기까지 했다.

그런데 1시간 내내 김진형이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고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때로는 분노를 터트리기도 하면서 맞장구를 쳐주니, 말하는 재미가 있었다.

김진형이 보이는 반응은 연기를 하거나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그 역시 인터뷰하는 소년처럼 어린 시절에 똑같은 환경에서 같은 일을 겪으며 자랐으니까.


“내가 어디서 살았는지 이야기해 줄까?”

“.....?”

“난 코리아에서 세 살 때 부모님과 미국으로 이민 왔어. 그리고 킹슬리길 아파트에서 살았지. 알지? 거기 한 달 렌트비가 100달러인 거. 나와 동생은 2년 동안 집 밖에 나가지도 못했어. 왜? 무서워서. 동네에선 갱들 간에 총격전이 수시로 벌어지고, 마약에 취한 좀비 같은 형들이 거리를 서성거리고, 빈곤과 실의로 자살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졌으니까.”

“겁쟁이! 흥. 우린 너 같은 놈들을 경멸해.”


김진형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 아빠는 하루에 16시간 이상 자동차를 고치는 일을 했어. 우리 가족이 유일하게 함께 지내는 시간은 주말에 스왑밋이나 플리마켓에서 도자기를 파는 부모님을 따라갈 때뿐이었지. 아버지가 일자리를 잃고 집에 먹을 것이 없을 때는 토요일에 동생을 데리고 아드모어 공원으로 걸어가 무료급식 받는 대열에 끼어들기도 했어.”

“그걸 자랑이라고 떠벌리는 거야? 지금?”

“그 동네에서 어른아이는 빨리 자라.”

“어른아이?”

“어른이 아니지만 빨리 세상을 알아버린 아이.”

“쳇! 뭐야 그 따위 단어는....”

“내 친구들이 어땠는지 알아? 너처럼 형들 따라다니며 갱의 일원이 되거나 이 구역 밖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되고 싶어서 공부를 열심히 했어. 난 갱이 되는 것보다 공부를 선택했지.”

“농구를 잘하거나 힙합을 할 수도 있어. 공부한다고 성공하지 못해.”


빈민가에서 양질을 교육을 기대할 수 없다.

알파벳을 읽고 쓸 줄 알고 산수를 조금 할 수 있는 정도만 되어도 다행이다.


“난 교도소에 들어간 친구들을 위해 변호사가 되고 싶었어. 내 흑인친구들이 피부색이 백인과 다르다고 해서 불공정한 재판을 받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 내 조국에서 온 고향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위해주는 척 하지 마.”

“난 위해주지 않는데? 난 내 친구를 위해 법정에서 변호할 권리가 있어. 아직 공부중이라 자격증을 취득하진 못했지만. 언젠가 그렇게 할 거야.”

“그럼 나중에 내가 부탁하면 나도 변호해 줄 거야?”

“비록 살인자라고 해도.”

“사람을 죽였는데, 변호를 해준다고?‘

“모든 사람은 변호를 받을 권리가 있으니까.”

“살인자를 변호해 주는 쓰레기가 되고 싶다고?”


어린 소년은 시민의 기본적인 권리도 알지 못했고, 알았다고 해도 도저히 이해를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변호사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억울한 사람, 가난한 사람, 부자인 사람, 물건을 훔친 사람, 사람을 때린 사람, 맞은 사람, 살인한 사람까지도 그들의 편에 서서 변호를 해야 하지.”

“난 살인자를 변호하는 일은 못하겠어. 아니, 안 해.”

“그럼 뭐가 되고 싶은데?”


소년 제이 T 테일러(Jay T. Taylor)가 김진형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올해 12살의 제이 테일러는 콤프턴(Compton) 출신이다.

갱 밀집지로 악명 높은 콤프턴은 블러즈(Bloods), 크립스(Crips), 슈레요스(Sureños)와 같은 LA에서 시작된 갱들의 주요 활동지이다.

제이 테일러의 어머니는 매춘부였고 아버지는 악명 높은 크립스 갱단원이었다.

둘 모두 마약 중독자로 집안에는 총과 탄알이 나뒹굴었다.

제이 테일러는 누나를 강간하려는 아버지를 총으로 쏴 죽이려다가 도리어 아버지한테 죽기 직전까지 구타를 당한 일도 있고, 7살 때 가장 친한 친구가 십대들에게 옷과 신발로 시비가 붙었다가 죽게 되면서 충격을 받기도 했다.

8살에 마약 중독자이자 갱단원이었던 부모들이 구속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어린이 양육시설에 들어가 살게 됐다.

현재는 양육시절에서 도망쳐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이곳 센터에서 음식을 무료로 제공한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왔던 것.

김진형은 한동안 소년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줬다.

류지호는 카메라로 그런 둘의 모습을 담담히 담았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 없다.

특히 사우스 센트럴 LA 지역에 불쌍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인터뷰가 끝나고, 김진형은 제이 테일러에게 음식을 내줬다.


“이 동네 거주하는 두 인종끼리도 교류가 전혀 없지?”

“흑인 애들하고 멕시칸 애들하고 총질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게. 그 나마 어린애들은 분노나 증오가 덜 한 편이라서 이렇게 센터에서 어울리기라도 하지.”

“한국인 상점 주인들과 주민들 사이는 어때?”

“신망을 얻은 이들도 있고, 사이가 좋지 못한 이들도 있고.”

“사람 사는 데는 다 그런 걸지도.”


한인과 흑인은 서로의 필요가 있을 때만 접촉이 있을 뿐.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곳 사우스 센트럴 지역에 들어와 장사를 하고 있는 일부 한인을 제외하고는 한인과 흑인이 서로의 지역을 넘어서는 경우는 거의 없다.

류지호가 관심을 가지고 LA 지역의 현안들을 살펴보니 LA 흑인폭동이 괜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캘리포니아에 불경기가 찾아오자 흑인 거주지 빈민가 경제가 처참하게 무너졌다.

무료급식이 있지만, 꽤 많은 빈민들이 하루 한 끼를 못 먹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교육률도 좋지 않았을 뿐더러, 저소득층 주택문제 등 문제가 심각했다.

현재 LA는 한해 1,100명의 사망자와 마약전쟁 등으로 인해 높은 범죄율을 기록하고 있다.

거기에 일자리도 잃고, 지역의 공장들은 하나둘 떠나고, 한인뿐 아니라 히스패닉까지 지역에 들어와 언어문제까지 심각해졌다

언제고 분노가 폭발할 것처럼 부글부글 대는 상황이다.

때마침 터진 로드니킹 사건이 도화선이 되었던 뿐이다.

그리고 흑인들(히스패닉까지)의 폭동을 백인, 캘리포니아 정관계, 언론, 심지어 주류에 편입된 일부 흑인들까지 암묵적으로 이용했다.

참고로 폭동 당시 체포된 이들 중에서 흑인 숫자보다 히스패닉 숫자가 훨씬 많았다.

그런 면에서 LA폭동을 흑인들의 폭동이 아니라 사우스센트럴LA 폭동 혹은 LA빈민가 폭동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암튼 류지호가 수십 억 달러의 재산을 가진 메가 리치인데다가 부동산개발업을 하고 있다면 플로렌스 지역만이라도 개발사업을 벌여 빈민들의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주 정부 혹은 시가 해야 할 일을 왜 내가....‘


류지호는 작은 선행은 얼마든지 할 생각이다.

수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개인의 능력 밖이다.

제아무리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가 21세기 슈퍼 리치의 필수덕목이라 할지라도.


“형, 이거 내가 다시 돌려봐도 돼?”

“왜?”

“영화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집으로 가져가는 건 안 돼.”

“센터에서 보고,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 게.”

“그렇다면 상관없어.”

“어디가?”

“이 녀석 재워 줄 집에 데려다 주고 올게.”


류지호는 센터를 떠나는 김진형과 제이 테일러의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았다.


- 가진 것이 없어도 가치 있게 살아라.


김진형의 부모가 어릴 때부터 주입시킨 가치관이란다.

그 가르침에 따라 김진형은 빈민가에서 흑인, 히스패닉 말썽꾸러기들과 어울리면서도 열심히 공부했다.

어린 시절부터 사우스센트럴의 한인과 흑인 어른들의 상호 무지와 증오를 목격했다.

김진형은 그 모습들이 너무 답답했다.

자신이라도 두 인종 간에 화합과 공존을 위해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두 인종 사이에서 중재를 하려면 먼저 흑인들을 알아야 했다.

때문에 김진형은 하버드대학에서 흑인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똑똑한 형이야... 좋은 사람이기도 하고.”


류지호가 만든 센터에 상주하는 주민 대여섯 명과 자원봉사자, 흑인단체, 히스패닉단체, 한인단체에서 온 사람들이 어울려 지역의 어린이를 돌보고 청소년을 교육하고 있다.

사명감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멋있다.

비록 김진형이 하는 일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는 그 자체로 빛나는 사람이다.

누가 한인과 흑인 사이에서 둘이 서로 존중하고 함께 살아가게 하려고 모든 열정과 청춘을 바칠 수 있겠는가.

류지호는 그를 후원하는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아니, 앞으로 좀 더 그와 그가 하는 일에 지원규모를 늘리리라 결심했다.


찰칵찰칵!


파파라치들은 종군기자처럼 목숨을 걸어야 하는 모양이다.

흑인 갱들의 활동지역에서 버젓이 고가의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고 있었으니까.


찰칵찰칵!


초짜 파파라치 루크 프레이저가 플로렌스 어린이 센터에서 각기 다른 인종의 아이들과 놀아주는 류지호를 사진에 담았다.

그는 셔터를 누르며 자신이 점찍은 저 아시아에서 온 꼬맹이가 부디 거물이 되기를 빌었다.

그래야 자신의 사진이 고가에 팔려나갈 테니까.

그렇게 미국 언론에서 '은둔의 경영자'라고 명명한 류지호에게 파파라치가 붙기 시작했다.

루크 프레이저는 꿈에도 몰랐다.

자신의 사진이 10여 년 후에 얼마에 팔리게 되는지.

류지호의 전담 파파라치 생활을 하면서 본인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찰칵찰칵.


류지호와 소년 제이 테일러의 재회는 4년 이상 걸리게 된다.

두 사람의 인연은 꽤 오래 이어진다.

여담으로 소년 제이 테일러는 훗날 갱스터 힙합 래퍼로 유명해진다.

제이 테일러의 스테이지 네임은 ‘The Game'이다.


작가의말

습작에서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파파라치 루크 프레이저가 이름도 생기고 단역급으로 격상이 되었습니다. 사소하다면 사소합니다만 미국 연예계에서 파파라치가 차지하는 비중도 상당한 것 같습니다. 습작에서 뭉뚱그려서 묘사했던 몇 가지 사건이 아주 조금 풍부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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