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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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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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0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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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Life Goes On.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딸랑!


술주정뱅이 노인 아마드가 한여사의 잡화점으로 들어간다.

잡화점에 들어서기 직전에 지나가는 후레쉬(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소년)에게 한 바탕 설교를 늘어놓고 난 이후다.

아마드라는 이름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흑인 배우가 능글맞게 아침 인사를 해 온다.


[다들 안녕하신가?]


흑인 배우의 실제 나이는 50대 후반이지만, 70대처럼 보이는 외모의 배우다.

따로 노인 분장을 하지 않았다.

절대 노안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본판 얼굴이 늙어 보인다.

아마드가 잡화점 할머니 한여사에게 능청스럽게 묻는다.


[혹시 일손이 필요하진 않수?]


잡화점에서 빈둥거리고 있는 흑인 청년 새미가 이죽거린다.


[눈앞에서 알짱거리지 말고 꺼져 술주정뱅이!]


한여사가 조근조근 타이른다.


[새미, 저 분은 그만 내버려 둬.]

[할멈, 우리에게도 조금 친절해 보라고. 우리에겐 매번 화만 내잖아.]


한여사는 새미의 말을 무시하고 아마드에게 말한다.


[아마드, 빗자루 챙겨요.]


아마드는 냉큼 빗자루를 챙기며 입을 연다.


[한여사, 당신 가게 앞을 이 동네에서 제일 깨끗하게 만들어 줄게. 나만 믿어요.]


아마드가 빗자루를 들고, 잡화점을 나서려고 한다.

그의 발걸음을 한여사의 목소리가 멈춰 세운다.


[아마드, 이걸 놓고 갔어요.]


카운터에 1달러 지폐 한 장이 놓여있다.

아마드가 얼른 지폐를 챙기며 능청을 떨었다.


[잡화점 앞은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책임지고 깨끗하게 만들어 놓을 테니까. 보건위생국처럼 말이야. 하하하.]


한여사는 웃지 않는다.

그저 무표정할 뿐.


[할멈, 돈이 썩어나? 그렇다면 내게 줘. 매일 이 술주정뱅이 영감탱이한테 1달러씩 주지 말고.]

[너희들은 신경 쓰지 마. 아마드는 좋은 분이셔.]


스테디캠은 한여사에게서 노인 아마드로 또 다시 시점이 바뀐다.

그는 잡화점 앞을 깨끗이 쓸고, 다시 잡화점 안으로 들어간다.

맥주캔 하나를 1달러를 내고 구입해, 잡화점을 나선다.

스테디캠은 계속해서 아마드를 따른다.


“컷! 여기서 한 번 끊었다 갈게.”


스테디캠 촬영은 정말 힘들다.

그것만으로도 힘들어 죽겠는데, 심지어 롱테이크로 찍는다.

육체에 부담을 많이 준다.

엄청난 체력을 요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부주의나 집중력이 떨어져 넘어지기라도 하며 크게 다칠 수가 있다.

35mm 카메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볍고 작은 16mm 카메라 역시 마찬가지다.

때문에 류지호는 사전에 매우 섬세하게 끊어갈 부분을 계산해서 계획을 세워두었다.

아마드가 거리를 걸어가며 누군가 부딪칠 때 한 번 끊어갔다.

아마드와 부딪친 사람이 겹쳐지는 부분에서 카메라를 끊고, 다음 촬영 때 그 부분을 더블액션으로 촬영해 편집에서 붙이면 관객들은 여전히 영상이 끊긴 걸 눈치 채지 못한다.

더블 액션(Double Action)은 영화편집에서 비가시편집의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기법이다.

비가시편집(invisible editing)이란 서로 다른 장면을 마치 하나의 화면인 것처럼 인식시키는 편집 방법이다.

쇼트와 쇼트를 연결하는 것보다 오직 동작의 연속성을 유지하는데 의미가 있는데, 하나의 완결된 행위가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어준다.

그 중에서 더블 액션은 인물이 움직이는 동안에 컷을 바꾸는 것으로 관객의 눈이 움직임에 집중되어 있는 동안 편집을 해서 이어 붙이게 되면 관객들은 컷이 바뀐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해준다.

류지호의 경우는 아마드와 행인이 부딪치는 순간에 스테디캠도 함께 움직이는 것처럼 관객을 속이는 방식으로 응용했다.

더블 액션은 비가시편집의 기본 중에 기본이기 때문에 연출이나 편집자는 모를 수가 없다.


꿀꺽.


아마드는 자신의 집 앞에서 맥주캔을 따서 한 모금 마신다.

미국은 길거리에서 음주를 해서는 안 된다.

때문에 아마드는 맥주캔을 쓰레기통에서 찾아낸 종이봉투로 감쌌다.

버려진 소파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던 흑인 노인들이 성질을 부린다.


[이 냄새나는 술주정뱅이야! 저리 가서 술 먹지 못해!]


아마드가 지지 않고 맞받아친다.


[시끄러워! 검둥이 노인네들아!]

[이 빌어먹을 주정뱅이가! 어디서 욕을 해. 나와 한 판 붙자는 거야?]

[너희들은 10년 넘게 뒤에서 내 욕을 했잖아!]

[썩 꺼져! 쓸모없는 주정뱅이!]

[너희 영감탱이들도 언젠가 나한테 잘하게 될 거야. 우리가 다 죽어서 흙속에 묻힌 후에 잘 대해주겠지.]


아마드가 맥주를 목뒤로 넘기며 떠나간다.

스테디캠은 소파에 앉아있는 하릴없는 노인들에게 머물러있다.


[너희들 그거 알아? 할렘에서 태어난 흑인 남자아이 평균 생존연령이 36세래. 전 세계에서 가장 극빈국인 에티오피아의 39세보다도 낮아.]

[웃긴 일이지.]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인 미국에 살고 있는데 말이야.]

[그러니 분노한 검둥이들이 때만 되면 들고 일어날 수밖에.]

[우리 잘못이 아니잖아. 다 정치하는 개자식들의 무관심 때문이지.]


어떤 학자는 흑인폭동과 관련해서 10년 주기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흑인들이 10년간 쌓인 분노를 고름을 한 번씩 터뜨리듯 분출하고, 자신들의 생업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주장이다.

이런 사실을 주지하고 있는 미국 정부는 폭동이 발생하면 관여하지 않고 스스로 수그러들 때까지 수수방관을 한다는 주장이다.

류지호는 지난 60년대부터 가장 최근까지 벌어졌던 흑인 폭동을 조사했다.

1968년 뉴저지 뉴워크에서 벌어졌던 흑인 폭동은 이탈리아인과 포르투갈 사람들을 겨냥했던 사건이다.

1978년 로이사이다라 불리는 남부 맨해튼 지역의 폭동은 가해자가 히스패닉이었는데 피해 상인들도 히스패닉이었다.

올해 발생한 브루클린 크라운 하이츠 지역의 폭동 피해자는 근본주의 유태인이다.


‘도대체 이 나라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경찰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류지호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두는 미국이란 나라의 공권력에 심각한 회의감이 들었다.

실제로 미국 경찰의 권한이 상당히 막강한 편이고.

1990년 한인타운 주민수는 대략 14만 6천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추산인 이유는 불법 체류자들 때문이다.

이 가운데 한인 주민은 30% 정도를 차지한다.

한인타운이라고 불리지만 실제 히스패닉계 주민이 더 많이 살고 있다.

LA폭동의 진원지 사우스 센트럴 LA는 이 당시 흑인들이 전 주민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경찰병력이 친 저지선에 막혀 백인 주거지역으로 진입하지 못한 흑인 폭도들이 난리를 칠 곳은 한 군데 밖에 없다.

백인에게 화를 풀지 못하게 되면 흑인의 공격이 향하게 되는 곳.

흑인보다 주민수가 적고, 백인만큼 미운 소수인종이 모여 있는 곳.

게다가 털어갈 물건들이 산처럼 쌓여 있는 곳.

바로 한인타운이다.


[망할 놈, 어디서 주워들은 걸 갖고 잘난 척 하는 거야?]

[저 한국인 돈벌레 놈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불쌍한 놈이라는 거야.]

[저 동양에서 온 원숭이 자식들 편을 드는 거야?]

[말이 그렇다는 거야.]

[닥쳐. 우리의 돈을 저 놈들이 다 가져가. 우리는 굶고 있는데.]

[우리끼리 싸우지 마. 검둥이 노인네들아! 젊은 애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것도 지겨워죽겠는데, 늙은이들까지 싸워야 돼?]


노인들이 일제히 ‘*uck!’ 따위에 욕설을 내뱉었다.


[지난주 1가에 있었던 강간 사건 알아?]

[정말 더러운 일이었지.]

[망할 놈의 새끼! 내 눈에 띠어봐, 내가 그 놈 한 방에 박살낼 테니.]

[그래 너 참 잘났다. 네 꼴 좀 봐라. 도넛 찌꺼기까지 핥아먹는 걸레 같은 경찰놈 같다.]


삐요!


경찰 순찰차가 세 명의 노인들의 앞을 천천히 지나쳐 간다.

백인 경찰들과 노인들의 눈이 마주친다.

잠시 백인 경찰들과 흑인 노인들의 눈싸움이 벌어진다.

씹는담배를 질겅거리던 백인 경찰이 차문 밖으로 걸쭉한 침을 뱉는다.

운전을 하는 경찰이 빈정거린다.


[쓰레기들.... 쓰레기.]


스테디캠이 서행하는 순찰차에 올라탄다.

이런 장면 촬영 역시 고난이도 작업이다.

육중한 스테디캠을 몸에 부착하고 순찰차 뒷좌석에 오를 수 없다.

때문에 카메라만 따로 차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메라맨에게 건네줘야 했다.

그렇게 되면 카메라가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영상 톤이 깨지고 만다.

그래서 류지호는 아이디어를 냈다.


끼이익!


순찰차가 급정거를 하며 차 내부가 전체적으로 흔들린다.

백인 경찰관들의 욕설이 난무하며, 조수석에 앉아있던 경찰이 뒷좌석 쪽으로 넘어올 듯 팔을 뻗는다.

마치 카메라를 덮치듯이.

그러면 잠시 카메라가 경찰관의 몸에 의해 어두워진다.

그때 촬영이 끊긴다.

잠시 경찰차 안에서 핸드헬드로 촬영되다가 카메라가 다시 스테디캠 위에 올려진다.

경찰관들이 차 밖으로 튀어 나온다.

스테디캠은 한 번도 끊어서 촬영한 적이 없다는 듯 능청스럽게 백인 경찰들을 쫒는다.


[&%&$%.....!]


순찰차로 뛰어들었던 사람은 흑인 마약중독자다.

백인 경찰들은 그를 사정없이 구타한다.

지나치던 행인들이 그 모습을 발견한다.

길거리에서 대 놓고 흑인을 폭행하는 것이 조금은 꺼려지는 경찰관들이다.

경찰들은 마약중독자를 순찰차에 강제로 태운다.

구타는 차안에서도 계속된다.

순찰차가 급하게 거리를 떠난다.

스테디캠은 계속해서 순찰차를 따라간다.


“뭐 하나 간단한 촬영이 없네.”

“이 영화 장르가 도대체 뭐야?”

“액션스릴러 아니었어?”

“휴먼드라마라던데?”

“누가?”

“누구긴 누구야, Jay지.”


계속해서 난이도 높은 촬영이 이어졌다.

스테디캠 오퍼레이터가 대기하고 있던 사륜구동 오토바이 앞부분에 올라탔다.

이 사륜구동 오토바이는 카체이싱을 촬영할 때 주로 사용하는 Camera Bike(충무로에서는 슈팅 바이크)다.

순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사륜구동 오토바이가 그 뒤를 따랐다.

때로 사륜구동 오토바이는 순찰차의 옆으로 붙기도 했다.

달리는 순찰차 안에서 경찰이 진압봉으로 뒷좌석의 마약중독자를 구타하는 장면이 스테디캠에 고스란히 담겼다.

스테디캠 오퍼레이터의 안전을 고려해 서행해서 찍었다.

그럼에도 느려보지 않도록, 류지호는 카체이싱을 연상케 하는 스테디캠 무빙을 주문했다.


끼이익.


순찰차가 히스패닉 밀집 거주구역에 멈춘다.

경찰은 흑인 마약중독자를 히스패닉 지역에 던져놓는 만행을 저지르고 떠나간다.


[쫄지 마. 갱단 아닌 것 같아....]


히스패닉 청년들이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마약중독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흑인을 팰 것 같았던 히스패닉 청년들.

그들의 행동은 예상 밖으로 흘러간다.


[죽었어?]

[아니. 약에 절어있는데?]


마약중독자를 거칠게 다룰 줄 알았던 히스패닉 청년들이다.

헌데 청년들이 마약중독자를 부축해 일으켜 세운다.

옷에 묻은 먼지까지 털어준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흑인 구역 쪽으로 안전하게 데리고 간다.

경찰은 흑인 마약중독자가 히스패닉에게 몹쓸 짓을 당하길 바랐겠지만,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이 동네 평범한 청년들은 사납지 않다.

류지호는 일부러 사건을 만들지 않았다.

이 지역에서 살고 있는 다양한 인종 안에는 미친놈도 있고, 착한 놈도 있고, 아무 생각 없는 놈도 있고, 무신경한 놈도 있다.

모두가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류지호가 이방인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실제 이 지역에 살고 있다면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순 없다.


찌릿!


한여사의 잡화점으로 들어온 히스패닉 청년들에게 흑인 청년들이 매서운 시선을 던진다.

두 패거리 사이에서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진다,

물건 값을 계산하는 히스패닉 청년이 한여사에게 화를 낸다.


[사람 차별해? 왜 우리한테 2센트 더 받는데?]

[그 가격이 원래 가격이야.]

[저 놈들에게는 싸게 팔잖아!]

[그런 적 없어. 모두가 똑같은 돈을 내고 사가.]


히스패닉 청년들이 계속해서 한여사를 압박한다.

그러자 슬금슬금 가게 안에 흩어져 있던 흑인 청년들이 카운터로 모여든다.


[X발! 흑인 동네서 장사한다고 우릴 무시해? 할망구 정말 혼 좀...]


히스패닉 청년은 말을 이을 수 없다.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흑인청년들이 일제히 권총을 뽑아들고, 겨눴기 때문이다.

여섯 명의 청년이 겨눈 여섯 개의 총구.


[워워. 진정해 친구들! 난 아직 아무 짓도 벌이지 않았다고!]

[꺼져, 새끼들아! 대가리에 총알구멍을 내주기 전에.]


한여사는 권총을 뽑아들고 기세등등한 흑인 청년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렇다고 겁먹은 표정은 아니다.


[2센트 깎아줄게. 돈 내고 어서 이곳을 나가는 게 좋겠다.]


히스패닉 청년들이 얼른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꺼내 카운터에 쏟아놓았다.

음료수를 챙겨 서둘러 잡화점을 빠져나간다.

잡화점에서 나댔던 히스패닉 청년이 성질을 부린다.


[빌어먹을 자식들! 사촌형들에게 말해 저 놈들 혼 내줄까?]

[진정해. 잘못하면 두 동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어.]

[한국인 할망구가 감히 우릴 푸대접 한단 말이야? 오늘 밤에 다시 와서 가게를 털어갈까?]

[할멈이 잘못한 건 없어.]

[맞아. 돈이 모자라면 장부에 이름을 적어 놓으면 되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 장부는 지옥행 명부라고. 살아 있는 놈 이름보다 죽은 놈 이름이 더 많아.]

[근데 할멈은 왜 이 동네를 떠나지 않지?]

[떠나다니? 여긴 할멈이 10년 동안 살고 있는 동네라고.]

[이 동네의 돈을 다 쓸어갔던 한국놈들을 생각해 봐.]

[그 놈들은 동네에 온지 5년이 되면 모두 떠났어.]

[할멈도 그들처럼 돈을 많이 벌었겠지?]

[우리 동네에서 제일 잘나가는 가게일걸? 마약중독자들이 득실거리던 버려진 집에 가게를 차려서는.... 돈을 정말 많이 벌고 있지.]

[난 이 동네에서만 10년을 살았어. 재수 없는 한국 놈들이 천재인지 아니면 우리가 바보 멍청이 인지 모르겠다.]

[우린 그래도 저 검둥이들보단 나아.]

[그렇지. 다른 말이 필요 없지.]


큭큭큭.


히스패닉 청년 세 명이 마약중독자 흑인을 지나치며 비웃음을 흘렸다.

이 거리 밖 사람들이 보기에 이들의 말은 누워서 침 뱉기다.

그들 동네 역시 흑인 동네와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컷! 좋았어요!”


류지호의 힘찬 외침에 또 한 회차 촬영이 마무리되었다.

학생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촬영은 자신들의 힘으로.

난이도가 있는 촬영은 할리우드 스태프를 고용했다.

프로들이 참가했다고 해서 학생영화이자 독립영화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지진 않는다.

로이가 걱정스레 류지호에게 말했다.


“네 경호원을 늘리는 게 좋겠어. 아니면 학교 밖으로 한발자국도 나오지 말던가.”

“무슨 소리야?”

“모두를 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아.”

“적?”

“네 동포부터 시작해서 흑인, 히스패닉, 백인까지 비판하고 있잖아.”

“난 비판 한 적 없는데?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뿐이야. 어쩌면 내가 보여주는 것들이 현실의 일부분도 다 표현 못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고.”

“난 이 영화가 공개되었을 때를 예상할 수 있어.”


류지호가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 욕을 엄청나게 먹겠지?”

“다른 인종이 흑인사회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건 미친 짓이야.”

“흑인사회를 다루지 않아. 우리 이웃의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라고.”


아시아인이 흑인사회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만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흑인 소년이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지만, 흑인 삶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양한 인종들을 고르게 담아야 했다.

류지호가 묘사하는 동네는 선의와 악의가 마구 혼재되어 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감독인 류지호가 할 일이 아니다.


“Jay, 기죽지마.”


배우로 출연하고 있는 타이론 터너(Tyrone Turner)가 다가와 류지호를 격려했다.

류지호와 동갑인 이 흑인 배우는 재닛 잭슨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바가 있다.

TV·영화로 자신의 커리어를 확장하고 싶어 했다.

현재 <딥 커버>라는 래리 J 피쉬번 주연 영화에 단역으로 캐스팅된 상태다.

참고로 래리 J 피쉬번은 몇 년 후 <매트릭스> 시리즈의 모피어스 역할을 맡게 될 배우다.

타이론 터너 외에 영화 속에서 잡화점에 머물고 있는 흑인 청년 역할의 배우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류지호에게 ‘쫄지마’ 라며 격려했다.

실상은 격려가 아니라 아부에 가까웠다.

류지호는 학생임에도 파라맥스에서 제작비를 받아 영화를 찍는 감독이다.

전도유망한 감독에게 눈도장을 찍는 것은 배우들에게 당연했다.


“모두 고마워. 마지막 촬영 날 보자.”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어.”


흑인배우 한명이 한국말로 류지호를 흉내 냈다.


“빨리, 빨리!”


류지호는 이 촬영현장에서 한국말을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심지어 한국계 배우들에게조차.

따라서 단역배우는 TV에서 한국인을 묘사하는 것을 보고 유머랍시고 따라하는 것이다.


“......”


모두가 촬영현장을 떠났다.

류지호와 낸시 둘만 남았다.

자연스럽게 경호원들이 두 사람을 둘러쌓았다.

시에서 나온 공무원과 경찰은 진즉 떠나갔다.

그러자 촬영 때는 보이지 않던 노숙자 몇 명이 거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노숙자들이 촬영팀이 머물렀던 곳을 서성거렸다.

혹시 먹을 것이라도 떨어져 있지 않을까 찾아보는 것 같았다.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류지호와 낸시가 탑승했다.


“저 사람들은 진짜 집이 없어서 길거리에서 사는 걸까? 돌아갈 가정조차 없을까?”


낸시가 불쑥 류지호에게 물었다.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노숙자들을 보며 류지호가 대답했다.


“모르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저들을 칭하지만, 아프리카가 진짜 저들의 고향은 아니잖아.”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미국인이지.”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은 슬픈 것 같아.”


저 옛날 아프리카에서 북미대륙으로 강제로 팔려왔거나 이주한 흑인노예.

그들의 고향이었던 왕조거나 국가는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그들에게 아프리카가 영혼의 고향일 수는 있겠지만, 실제적인 고향은 아닌 것이다.

한국인, 멕시코인, 이탈리아인 등은 고향이 존재했다.

반면에 고향이 없는 흑인들.

마음의 고향이라고 자위해 봐도 현재의 아프리카와 그들의 정체성은 전혀 달랐다.

고향이 없는 사람들은 한(恨)이 많다.

한국인들 역시 한(恨)의 민족이라고 한다.

모두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한(恨)이 민족구성원들의 전체적인 정서를 지배하고 있다는 뜻이다.

흑인들은 한(恨)이 맺힌 사람들이다.

그런 궁지에 몰린 사람들을 더 밑바닥까지 추락시키고, 그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 미국사회가 잔인하단 생각마저 드는 낸시다.


‘이해하는 게 다가 아니라, 관계를 맺는다는 게 어려운 걸지도....‘


이전 삶에서 LA폭동 이후 한인과 흑인의 사이가 좋아졌는지 더 나빠졌는지 류지호는 몰랐다.

부디 이번 삶에서는 두 인종이 갈등 대신 화합하기를.....

소수인종들끼리 다투는 건 누군가가 바라는 상황이다.

백인계층일 수도 있고, 소수의 기득권층일 수도 있다.

약자끼리 싸우게 만들어서 이득 보는 것은 약자 본인들이 아닌 전혀 엉뚱한 이들이다.

두 인종이 갈등하든 말든.

그럼에도 각자의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 영화의 워킹타이틀은 우리 사회의 그늘을 암시하는 <그림자>다.

막바지 촬영을 앞두고 류지호는 정식 제목으로 바꿨다.

바로 <Life Goes On>이다.

류지호는 한인사회의 힘이 커지길 바랐다.

이기적인 마음이다.

그래야 자신이 한인사회의 지원과 협조를 얻어낼 수가 있을 테니까.


❉ ❉ ❉


<Life Goes On> 마지막 촬영 날이다.

오늘은 촬영팀에게 긴 밤이 될 것이다.

류지호는 자신만의 LA폭동을 영화에 담을 생각이다.

아직은 벌어지지 않은 사건이지만.

폭동 장면에 50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했다.

UCLA에 재학중인 유색인종 친구들도 모두 끌어 모았다.

거기에 더해 이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배우가 다 출연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스테디캠으로 각각 시점을 옮겨 다니며 에피소드를 구성했던 인물들이 백인경찰의 흑인 살해라는 사건을 계기로 폭동을 일으키는 장면이다.

류지호는 이 시퀀스의 하이라이트에서 ‘스텝프린팅’ 기법을 사용할 생각이다.

훗날 웡자웨이 감독을 규정하는 스타일의 그 ‘스텝프린팅’이다.

‘스텝프린팅’(Step Printing)은 촬영한 필름 중간 중간 프레임을 들어낸 후 그 자리에 똑같은 프레임을 복사해 채워 넣는 기법이다.

쉽게 말해 1초에 24프레임이 돌아가는 영화 필름의 A1-B2-C3-D4-E5-F6... 순서에서 B2, D4, E6의 프레임을 들어낸다.

그 빈자리에 A1, C3, E5 프레임을 복사해 이어 붙인다.

그러면 A1-A1-C3-C3-E5-E5... 이런 식으로 프레임이 연결된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필름을 재생시키면 인물의 동작은 마치 흐르는 것처럼 보이고, 불빛은 빛살무늬의 광선을 만들어낸다.

즉, 동작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툭툭 끊기는 느낌을 준다.

동시에 프레임수가 늘어가기 때문에 일종의 슬로 모션(Slow Motion) 효과를 주면서 인물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웡자웨이 감독은 1초에 24프레임으로 촬영하거나 또는 1초에 프레임 수가 24프레임보다 많은 고속 촬영을 한 뒤에 프레임 수를 거기서 뺀 다음, 다시 늘리는 식으로 ‘스텝프린팅‘을 사용한다.

<중경삼림>, <타락천사> 등에서 인물들이 어딘지 모르게 부유하면서 거친 느낌을 주는 것은 바로 이런 움직임 때문이다.

늘어난 시간 속에서 인물들의 불안감도 확대되는 효과를 준다.

반대로 액션 씬에서 역동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 ‘스텝프린팅‘을 사용하기도 한다.

웡자웨이 감독과 정반대로 1초에 24프레임보다 적은 수, 즉 16프레임 심지어 6프레임으로 장면을 저속촬영한 다음, 이것을 24프레임, 28프레임, 심지어 72프레임으로 복사해서 늘리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 인물이 느릿느릿 움직이면서 움직임이 툭툭 끊기는 효과가 더욱 극대화된다.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비트>의 액션 장면이 이런 식으로 촬영되어 거칠고 툭툭 끊기는 액션을 보여주게 된다.


- 모두 주목! 빌어먹을 놈들아 주목하라고!


류지호가 메가폰에 입을 대고 배우와 엑스트라들을 향해 소리쳤다.

촬영현장은 돛대기 시장이 따로 없었다.

UCLA 영화과 학생들은 이런 규모의 인원을 동원해 촬영한 경험이 없었다.

당연히 우왕좌왕 헤맬 수밖에.


- 스테디캠의 동선에 있는 사람들 한 명 씩 빼서 뒤쪽으로 이동시켜! 사람들을 뭉쳐 놓으니까 규모가 작아 보이잖아! 각자 팔 길이만큼 떨어지라고 해. 낸시! 그 쪽에 서있는 사람들 줄 서있는 것 같아. 불규칙적으로 흩어지게 해. 좋아. 바로 그거야! 지금 그 곳에서 두 발자국 이상 움직이지 말라고 해.


류지호는 쉴 새 없이 메가폰에 대고 소리를 지르며, 촬영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물 만난 물고기가 따로 없다.

배우와 엑스트라들의 위치를 잡아주고, 앵글파인더를 꺼내들어 스테디캠 동선을 확인했다.

류지호는 첫 리허설 전까지 난잡하게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출연자들에게 정확한 지점을 지정하고 카메라 동선을 디렉션했다.

제법 조감독으로 유능했던 류지호다.

마치 블록버스터 현장을 날아다녔던 똘똘했던 조감독 시절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Form is Temporary, Class is Permanent.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란 말이다.

잉글랜드 리버풀 FC의 전설적인 감독 빌 샹클리가 한 말이다.

류지호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영화 천재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전 삶에서 수십 년 영화밥을 먹으며 쌓아 온 일정 ‘수준’을 갖추고 있다.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즉 류지호에게서 베테랑이 주는 포스가 마구 뿜어져 나왔다.

'폼'으로 잠시 영광을 맛볼 수는 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역사를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하하. 재밌네....!’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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