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허준영 한의원
“내가 왜 허 의원을 살리려고 하는지 그게 궁금하단 말이지?”
“예. 이 일이 발각이라도 되면 나으리나 저는 온전하기 어려울 텐데 말입니다.”
“나는 몰라도 자네는 죽음을 면키 어려울 걸세.”
“예? 나으리.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무섭습니다.”
장희재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중전마마가 뒤에서 떡하니 버티고 있는 장희재와 믿을 사람 하나 없는 임치두는 분명 입장이 다르다.
장희재는 널브러진 준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죽이기에는 너무 아깝단 말이야. 나중에 쓸모가 있을 거 같거든. 자네 생각은 어떤가?”
“옳은 말씀입니다. 스승님은 백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의원입니다. 아니, 백 년이 훨씬 지나도 쉽게 안 나올 겁니다.”
임치두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자네는 어째 말이 오락가락 하는가? 지금의 말과 전하 앞에서 하는 말이 어찌 이리 다른가? 전하 계신데 서는 미친 자라 하지 않았던가!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장희재는 경멸이 가득한 눈빛으로 임치두를 보았다.
“저도 죽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소인이 전하 앞에서 어떻게 스승님의 편을 들 수 있습니까. 전하의 노여움이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상황에서요.”
“하긴. 자네도 살 궁리는 해야지.”
“고맙습니다, 나으리.”
“잠시 후면 날이 밝을 것이다. 그러면 전하께서 허 의원이 없어진 것을 알 것이다.”
“전하께서 아시면 한양 땅을 다 뒤져서라도 스승님을 찾아낼 게 틀림없지 않습니까?”
장희재와 임치두의 시선이 널브러져있는 준영에게 동시에 쏠렸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지. 그렇게 되면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나으리 계획은 무엇입니까?”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허 의원을 보내 버려야한다. 그래야 이 자가 죽지 않는다.”
“그 곳이 어딥니까? 조선 천지에 안전한 곳이 어딥니까?”
“서울! 허 의원이 원래 있었던 곳일세.”
“서울이요? 그 곳이 어딥니까? 소인은 처음 들어보는 곳입니다.”
“너는 알 것 없다. 사실은 나도 아는 게 별로 없다.”
임치두는 장희재의 표정을 살폈다.
비록 희미한 달빛 아래이기는 했지만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침으로 네 스승의 의식이 되돌아오게만 해보게. 지금 이런 상태에서는 서울로 보내기 어렵네.”
“자신은 없습니다만, 한 번 해보겠습니다.”
임치두는 품에서 침통을 꺼낸 다음 열었다.
그런 다음 그는 스승을 반드시 눕혔다.
그는 제일 먼저 태충(太衝:)에 자침했다.
그런 다음 합곡(合谷)에 자침했다.
이어 인중(人中)에 침을 놓았다.
백회(百會)혈에 자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 놓았느냐?”
“일단은요. 안 되면 두 어군데 더 놓을 수도 있습니다만, 스승님의 몸이 너무 쇠약해진 상태라 일단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 발로 설 수만 있으면 좋을 텐데, 아니면 부축을 해서라도 서 있을 수만 있다면 그 다음엔 내가 어떻게 해볼 텐데 말이야.”
장희재와 임치두는 주위를 한 번 살핀 다음 준영만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각(30분)이 지났다.
준영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아주 미미한 움직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장희재의 눈이 커졌다.
임치두가 스승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스승님. 스승님. 정신이 드십니까?”
그는 임치두를 올려다 볼 뿐 말이 없었다.
임치두는 눈물을 왈칵 쏟더니 무릎을 꿇었다.
“스승님. 이놈을 용서하지 마십시오. 구차하게 살아남으려 스승님을 배신했습니다.”
그의 얼굴에 임치두에 대한 분노 따위는 드러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체념한 것 같았다.
눈의 초점이 흐려 임치두를 보고 있는지 아닌지도 애매했다.
“시간이 없다. 어서 발침하게.”
임치두는 손으로 눈물을 훔치더니 재빨리 발침했다.
그런 다음 임치두는 자신의 얼굴을 스승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닿을락말락할 정도로 가까이.
“스승님. 소인에게 일러주십시오. 마취침의 혈자리를 일러 주십시오.”
그는 임치두를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보게, 임치두. 자네 지금 무얼 하는가?”
장희재가 으르렁거렸다.
“언제 숨이 끊어질지 모르는 분입니다. 만일 이대로 돌아가시면 그 비법은 대가 끊기고 맙니다.”
“자네 심정은 이해하네만 지금 그럴 시간이 없네. 허 의원을 빨리 서울로 보내야한단 말이네.”
“잠깐이면 됩니다.”
장희재의 으름장도 지금의 임치두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스승님.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마취침의 혈자리와 마취제의 구성 약물을 이놈에게 일러 주십시오.”
임치두는 간절한 눈으로 스승에게 말했다.
그의 말은 애원처럼 들리기도 했고, 협박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 자가 정말!”
장희재는 칼을 뽑아 임치두의 목에 들이밀었다.
“나으리.”
“죽고 싶은가?”
“잠깐이면 됩니다요.”
“큰일을 그르칠 셈인가? 주둥아리를 닥치고 어서 허 의원을 일으켜 세워라.”
장희재는 주위를 살핀 다음 임치두를 노려보았다.
“시간이 없다. 말을 안 들으면 이 자리에서 자네의 목을 벨 걸세.”
“나으리. 스승님을 그냥 보내면 안 됩니다. 마취제의 약재를 알아내야합니다.”
장희재는 칼로 임치두의 목을 살짝 그었다.
임치두의 목에 피선이 드러났다.
“마지막 경고다. 어서 허 의원을 일으켜 세워라.”
임치두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스승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려고 애썼다.
장희재가 옆에서 도왔다.
“일어날 수 있겠나, 허 의원?”
장희재의 물음에도 그의 눈은 공허했다.
“좀 더 힘을 써보게.”
두 사람은 힘겹게 그를 일으켜 세웠다.
“허 의원. 자네는 시대를 잘못 타고 난 것 같으이. 먼 미래로 자네를 보내주겠네. 자네가 이곳으로 오기 전 살았던 그 곳으로 보내주는 걸세.”
그러나 그는 장희재의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들을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축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환생해서 한의사 허준영으로 살던 그 곳으로, 그 때로 돌아가게.”
장희재는 그에게서 떨어졌다.
이젠 임치두 만이 스승이 쓰러지지 않게 안간힘을 다해 부축했다.
장희재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더니 주문을 외웠다.
잠시 후, 검은 하늘에 둥그런 빛이 생겼다.
이어. 그 빛이 땅으로 쏟아졌다.
바람이 일었다.
그 바람은 천천히 그에게로 옮겨가고 있었다.
“뒤로 물러서게, 임의관. 어서.”
임치두는 재빨리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는 맥없이 푹 고꾸라졌다.
그러나 바람이 빨랐다.
회오리바람은 그를 재빨리 빨아 올렸다.
장희재와 임치두는 회오리바람의 중심으로 빨려 올라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임치두는 보이지 않는 스승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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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반포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의 인도에 괴물체가 떨어졌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행인들이 인도에 떨어진 괴물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행인들은 기절할 뻔했다.
“어머! 이게 뭐야? 사람이잖아.”
놀란 행인들이 뒷걸음질 쳤다.
잠시 후, 그들은 다시 모여들었다.
원을 그리며.
“죽은 거 아냐?”
“당연히 죽었겠지.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어떻게 살아.”
행인들은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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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영은 자기 방 침대에 누워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돌이켜 보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를 걷다가 갑자기 조선으로 끌려갔던 일.
그 곳에서 세자의 장옹을 수술했던 일.
그리고 임금 앞으로 끌려갔던 일.
고문당했던 일.
가히 충격적이었다.
‘뭐였지? 꿈이었나?’
그는 혼란스러웠다.
장옹수술!
지금의 의술로는 충수염수술이야 가장 간단한 수술이지만 수백 년 전에 수술이라니!
그는 자신이 세자의 장옹을 수술하던 과정을 되새겨 보았다.
마취침, 한방 마취약, 그리고 개복과정.
그 모든 과정들이 다 기억나는 건 아니었다.
‘지금 당장 내 앞에 급성 충수염으로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가 있다면, 수술로 치료할 수 있을까?’
양방적인 수술이 아니라 한방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자신 할 수 없다.
그는 심한 혼란을 느꼈다.
그렇게 심한 고문을 당했는데도 후유증은 심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견딜만한 근육통이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지금은 다 사라졌다.
그는 자신의 발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인두로 지진 상흔만 남아 있을 뿐 걷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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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는 하루였는데, 서울에서는 열흘이 지났다.
아무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자, 부모님은 그를 찾기 시작했다.
휴대폰은 계속 불통.
사흘 째 되던 날, 부모님은 실종 신고를 했다.
경찰은 그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작은 단서 하나 찾지 못했다.
“야, 이놈아. 어디 갔었어? 어디 가면 간다고 말 한마디만 했어도 이렇게 피가 마르지는 않았을 거 아냐? 내가 못 가게 했을까봐?”
부모님은 처음엔 화도 내고 심하게 나무라셨다.
그러나 이내 누그러지셨다.
“어쨌든 살아 돌아왔으니 됐다. 그럼 된 거야.”
어머니는 눈에 띄게 수척해진 그를 몸보신시킨다며 찜통에 사골을 끓이셨다.
여자 친구 은교는 조금 달랐다.
“바른대로 말해. 오빠, 여자 생겼지? 어떤 년하고 해외로 밀월여행을 다녀온 거야.”
은교는 눈에 불을 켜고 그를 몰아붙였다.
“국내여행이었다는 거짓말은 하지 마. 국내라면 휴대폰 통화가 그렇게 안 된다는 건 말이 안 돼. 어떤 년이야? 끝까지 말 안 할 거야?”
은교도 답답하겠지만, 그의 답답함에 비할 수는 없었다.
‘해외 밀월여행? 너 장희빈이라고 알지? 그 장희빈한테 장희재라는 돌 무식한 오빠가 하나 있는데, 나 그 자식한테 납치당해서 조선으로 끌려가서 고생이라는 고생은 다하고 심지어 발바닥에 인두로 지지는 고문까지 당했어. 겨우 살아 돌아왔는데, 뭐? 해외밀월여행.’
이 말은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다.
발바닥의 고문 상흔을 보여주면 믿을까?
은교는 믿어주기는커녕 어디론가 전화부터 걸 게 틀림없다.
“여보세요. 거기 정신 병원이죠? 입원실 예약 좀 하려고요.”
은교는 단호했다.
“내가 납득할만한 이유를 대기 전까지는 나한테 전화하지 마. 아, 아냐. 우리 여기서 끝내자. 난 오빠가 그 년하고 호텔 침대에서 뒹굴었을 거라는 상상만하면? 아악! 난 미쳐버릴 것 같거든. 잘 먹고 잘 살지 말고 빌어먹어라. 이 나쁜 놈아.”
그녀의 통보는 단순한 엄포가 아니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집 앞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도 만날 수가 없었다.
으으으. 장희재, 이 자식.
단 한순간에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린 이 나쁜 놈.
다시 조선으로 가서 실컷 두들겨 패주면 속이라도 좀 풀리려나?
#
<허준영 한의원!>
서울로 돌아온 지 석 달 만에 한의원을 개원했다.
누구나 황금상권이라 인정하는 곳에서 50미터 정도 골목 안으로 들어간 자리.
상가는 주거지와 다르다.
황금상권에서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죽은 상권이 있기도 하다.
준영은 죽은 상권은 아니지만, 누구도 탐내지 않는 5층 상가 건물 2층에 개원한 것이다.
돈.
이유는 단 한 가지,
황금 상권의 상가에 비해 월세가 반도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명필이 붓을 안 가리듯 명의는 상권을 따지지 않는다.
명의가 아닌 그는 당연히 상권을 따져서 개원해야하는데 따지지 못했다.
돈.
그 놈의 개업자금이 부족해서 황금상권에 위치한 상가는 구경만 하고 뒤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건물 2층에.
살아있지만 죽은 거나 다름없는 상가에 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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