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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3.05.10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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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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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세상은 요지경!

DUMMY

“그러니 어떻게 안 믿겠어요? 10억을 단칼에 거절하시는 분을요.”


진혜리는 그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거야 뭐어······.”

“지현이는 연예계 은퇴하고 외국으로 갈 생각도 있나 봐요. 저한테 지나가는 말처럼 그랬어요.”

“외국은 왜요?”

“글쎄요. 아무리 천하의 윤지현이라도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겠죠.”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원장님. 지현이 한 번만 만나주실 수 없으세요? 그것만으로도 지현이 한 테는 큰 힘이 될 거에요.”


그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예기치 않은 일에 휘말려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이틀 뒤.


그는 윤지현과 만났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웬일이에요? 밥 사달라고 그렇게 매달려도 싫다고 하시더니. 치이.”


그녀는 전보다 조금 수척해보였다.


색조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에는 윤기가 부족해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아름다웠다.


“양심의 가책이 되던데요? 그래서 밥 사려고요.”

“아유. 한 십년 쯤 뒤에 연락하시지 그러셨어요.”

“흐으. 그동안 잘 지냈어요?”

“그럭저럭요. 아! 원장님. 지난 번 카타르 월드컵 맹활약 하신 거, 저도 알아요. 정말 큰 일 하셨네요.”

“큰 일만 한 게 아니라 큰 봉변도 당했네요.”

“아! 한의원 다 부서진 거요? 마 대표님께 들었어요.”


그는 마동수와 진혜리를 만나서 나눴던 얘기를 윤지현에게 간략하게 전했다.


“그러면 그렇지 난 또 웬일로 원장님이 전화를 다 하셨나 했네요. 마 대표님과 아는 사이인줄은 몰랐네요.”

“아는 사이라고 하기엔 좀 그래요. 제가 그 분 치료해준 게 전부예요. 그것도 딱 두 번. 그러니 아는 사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해요.”


윤지현은 자신 앞에 놓인 물을 마셨다.


“원장님은 이런 일엔 관심이 없으실라나?”

“어떤 일요?”

“최인혁이 나온 거 아시죠? 불구속으로요.”

“뭐라고요? 삼현 신소재의 최인혁 전무가 풀려났다고요?”

“예. 벌써 오래전일인데요! 정말 나한테 관심이 너무 없는 거 아니에요?”


카타르 월드컵에다가 파손된 한의원 복구하느라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일에 더 이상 관심을 둘 이유도 없어서 최인혁이 풀려났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


“풀려나다니요? 그게 말이 돼요?”

“불구속 수사 한대요?”

“말도 안 돼.”


그는 법조인은 아니지만 불구속 수사의 요건에 대해서는 안다.


도주의 우려가 없거나,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다면 불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한다는 정도는.


최인혁이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것은 이해가 된다.


삼현 그룹 최 회장의 셋째 아들이면서 삼현 신소재의 전무.


이 많은 걸 포기하고 그가 도주할 리는 없다.


그러나 증거 인멸의 우려도 없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삼현 그룹의 막강한 영향력이 작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법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말은 법전에만 존재한다지만 이건 정말 아니다.


표진탁 원장을 사주해서 윤지현의 뱃속 아기를 죽게 한 것은 피해자가 한정되어 있는 일이니 또 어떻게 덮는다고 치자.


그러나 상장회사인 삼현신소재의 공금 3000 억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삼현신소재의 주주가 도대체 몇 명인가?


수천? 아니, 어쩌면 수만 명?


사람들은 겉으로는 정의, 윤리를 외치지만 돈에 훨씬 민감하다.


여자 연예인 뱃속의 아기가 죽었다는 것보다 내 돈이 도둑맞았다는 사실에 훨씬 더 분노한다.


그게 10만원이든 20만원이든.


‘그 많은 주주들이 피해를 입었는데 불구속 수사라니!’


이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해외로 빼돌린 3000억을 재빨리 채워 넣은 다음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할 참인가?


3000억 빼돌린 사실이 없다고 발뺌할 것인가?


이는 최인혁을 파멸로 몰아가려는 불순한 자들이 퍼트린 가짜 뉴스라고 할 참인가.


계좌에서 빠져나갔다 다시 들어온 돈은 흔적도 안 남는단 말인가?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감쪽같이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삼현그룹의 영향력이 막강하단 말인가.


‘흐흐. 하긴 이보다 더한 일도 일어나는 세상이니까.’


그는 갑자기 윤지현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최인혁이 풀려난 걸 보고 얼마나 두려웠으면!


최인혁이 마음만 먹으면 뱃속의 아기가 아니라 이번에는 자신을 죽일 수도 있을 거라는 두려움이 얼마나 컸으면!


그렇구나!


‘그래서 연예계를 은퇴한 후에 해외로 도피할 생각이었구나.’


그는 윤지현을 연민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면 최인혁에 대한 수사도 종결이 된 건가요?”

“그건 아닐 거예요. 여론의 눈치를 살피면서 수사할 거고, 재판도 질질 끌 거고, 그러다 상황 봐서 증거 불충분, 뭐 이런 식으로 처리해서 무죄 판결 날 거고요.”

“무죄는 말도 안돼요. 피해자가 몇 명인데, 그 사람들이 가만있겠어요?”


윤지현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게 어려우면 약간의 징역형에 집행유예! 아니면 징역 좀 살다가 적당한 때 되면 경제회복을 위해 사면(赦免). 뭐, 그런 식이겠지요.”

“법조인 같네요.”

“제 생각이 아니라 제 변호사 생각이에요.”


이번에는 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두 사람이 더 이상의 법률적 추론을 진행시키기는 어려웠다.


“그나저나 윤지현 씨. 기어이 연예계를 은퇴하실 생각이신가요?”

“고민 중이에요. 해외로 나가 사는 것도 고민 중이고요.”

“근본적인 해결 방법은 아닌 것 같군요. 해외로 도피한다고 최인혁이 못 찾을 리 없잖아요?”

“그래서 고민 중이에요. 아니면 최인혁과 죽기 살기로 한 판 붙을까요?”


윤지현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죽겠죠? 흐으. 최인혁이 죽을 리는 없잖아요?”

“마음 같아서는 윤지현 씨를 돕고 싶어요. 하지만 한계가 있어요.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최인혁과 맞설 수 있겠어요? 또 그럴 입장도 아니고요. 저는 그저 평범한 한의사에 불과해요.”

“알아요.”

“지현 씨. 우리 그냥 친구처럼 지내는 건 어때요? 가끔 만나서 지금처럼 이렇게 밥 같이 먹고, 대화 나누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거기까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예요.”

“이해해요. 원장님까지 제 일에 끌어들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그는 웃으면서 말하는 윤지현의 표정에서 진심을 느꼈다.


“고마워요, 준영씨. 호호. 저 준영 씨라고 불러도 되죠? 우리 나이도 비슷한 것 같은데.”

“그럼요. 얼마든지요.”

“준영씨가 제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돼요. 더 이상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게요.”


그 역시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다음날.


그는 후배 정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달 전까지 표 한의원에서 부원장으로 있다가 사표를 낸 후 다른 한의원의 부원장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은 들었다.


하지만 전화 통화는 몇 달만이었다.


-표진탁 원장님 다시 진료하세요, 선배.-

-뭐? 아니 그럼 전에 경찰 조사 받던 거는? 나, 전에 그 장면 뉴스로 봤는데!-

-증거 불충분? 아무튼 그런 식으로 대충 마무리 된 거 아닌가요?-

-나한테 그걸 물으면 어떡해? 몰라서 너한테 묻는 건데.-

-저도 법은 잘 몰라요. 한의사가 의료법만 알면 되지 그런 거까지 알아야하나요? 골치 아픈 법 알고 싶지 않아서, 저는 경찰에 조사 받으러 가야할 일은 아예 안 저지르거든요.-

-아니 그럼 무혐의로 나왔단 말이야?-

-그렇겠죠. 그러니까 한의원에 나와 다시 진료하는 거 아니겠어요?-


사실 이 사건은 증거를 확보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임신부 금기 약을 한의원에 들여올 때도 세금 계산서를 발행하지 않고 들여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면 처방전도 남기지 않았을 거고, 쓰다가 남은 한약을 몰래 버리면 그만이다.


그렇기 때문에 표진탁 원장이 증거불충분으로 나왔다는 건 납득이 되는 일이다.


최인혁의 불구속 수사에 비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는 했다.


-표 한의원에서 같이 근무하던 부원장이 그러던데요. 진료하신다고요.-


정윤이 말했다.


-그런 불미스런 일이 뉴스에도 나가고 그랬는데 누가 진료 받으러 오나?-

-그게 웃기죠. 처음에는 환자가 뚝 떨어졌대요. 그런데 얼마 안 가 회복되더니 이젠 사건 터지기 전 상태로 완전히 회복 됐다던데요.-

-그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방송의 위력 아니겠어요?-

-방송의 위력?-


그는 정윤에게 되물었다.


-표 원장님. 얼마 전부터 다시 방송에도 나오잖아요.-

-뭐! 말도 안 돼. 아니, 그런 짓을 저지른 사람이 방송에 다시 나온다고?-

-선배는 도대체 아는 게 뭐에요? 그런 것도 모르고.-

-그러게 말이다. 나 지금 완전히 바보 된 기분이다.-

-못 믿겠으면 찾아보세요. 인터넷이나 O튜브에서요.-

-굳이 그런걸 뭐 하러 찾아 봐? 네가 그렇다면 맞겠지.-

-아! 그리고 선배. 언제 밥 살 거예요? 정말 밥 한 번 안 살 거냐고요?-

-알았어. 며칠 내로 밥 한 번 같이 먹자. 수고 해.-


그는 통화를 마쳤다.


“허어! 참!”


그냥 웃음이 나왔다.


#


그는 O튜브에 접속했다.


찾았다.


그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음악이 흘렀다.


신신애의 노래 <세상은 요지경>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산다

야아야아야들아 내 말 좀 들어라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을 친다


그는 신신애의 춤을 따라 췄다.


미친 듯이 신나게.


노래도 따라 불렀다.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을 친다


그 때 원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는 문 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진료실로 들어오는 그녀를 보지도 못했다.


“어맛! 이, 이게 뭐야?”


차 선생이 기겁했다.


우후!


그는 노래에 취해 추임새까지 넣었다.


인생 살면 칠팔십 살 화살같이 속히 간다 정신 차려라 요지경에 빠진다

싱글벙글 싱글벙글 도련님 세상 방실방실방실방실 아가씨 세상

영감하고도 삐틀어지고 할멈씨도 도망갔네


“워, 원장님. 왜 이러세요?”


차 선생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후!


세상은 요지경


“아악! 아아아악! 왜 이러세요, 원장님?”


우당탕탕!


차 선생은 뒷걸음치며 원장님을 나갔다.


아아아악! 아아아악!


차 선생의 비명이 한의원을 뒤흔들었다.


그는 그녀의 비명을 듣고 춤을 멈췄다.


달아나는 차 선생을 그제야 발견했다.


“차 선생. 아니에요.”


그는 대기실로 나갔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차 선생.”

“가까이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말라니깐”


차 선생은 급기야 한 쪽 벽에 세워둔 플라스틱 빗자루를 들더니 그에게 휘둘렀다.


“오지 말라고. 가까이 오지 말라고오오오.”

“아니라니까. 그런 게 아니라고. 나 멀쩡해요.”


차 선생은 빗자루를 아무렇게나 내던지더니 한의원을 뛰쳐나가버렸다.


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그는 이번에는 조 선생을 쳐다보았다.


조 선생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조 선생! 아, 아니에요.”


그러나 퇴로를 차단당한 조 선생은 미처 한의원을 빠져 나가지 못했다.


조 선생은 그의 눈치를 슬슬 보더니 차 선생이 버리고 간 플라스틱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가까이 오지 마!”


그녀는 빗자루를 들고 출입문 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기 시작했다.


“아니에요. 나, 멀쩡해요. 멀쩡하다니까요.”


그는 조 선생에게 두 어 걸음 다가갔다.


“가까이 오지말라고오오오. 제발!”


조 선생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한 걸음 씩 뒷걸음쳤다.


출입문 가까이로.


그녀는 그의 동태를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눈빛을 발사했다.


조명을 다 꺼도 될 만큼 강렬한 눈빛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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