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표 박사의 100배 가치! 허준영
[저도 환자의 병을 못 고칠 때가 있습니다. 아, 물론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요. 하하하]
객석에서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신의 농담이 먹혀들었다는 사실에 고무된 표 박사는 더욱 신이 났다.
[저라고 어떻게 모든 병을 다 고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저는 제가 고쳐준 환자를 자랑하기보다는 못 고친 환자의 아픔을 제 아픔보다 더 크게 생각합니다. 퇴근해서 집에 가면 하루 30분은 꼭 반성의 시간을 가집니다.]
조금 전보다 더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환자의 병을 못 고친 저 자신을 나무라며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되짚어 봅니다. 저는 병 잘 고치는 한의사보다 환자를 제 몸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그런 한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객석의 관중들은 일어나 일제히 기립 박수를 보냈다.
‘도대체 어느 대목이 감동적이라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오는 걸까?’
준영은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가만있기는 멋쩍었다.
그도 어쩔 수없이 박수쳤다.
표 박사는 다시 강연을 이어갔다.
그 때 누군가가 그의 옆에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선배.”
쳐다보니 한 여자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어! 이게 누구야? 정윤이잖아!”
대학 2년 후배 이정윤.
대학 때 같은 동아리 회원이라서 잘 아는 편이었다.
“호호호. 먼발치에서 보면서 설마설마했는데 준영 선배 맞구나.”
“야아, 이거 얼마만이냐?”
“저, 졸업하고 처음 보는 거 같은데요?”
“그래. 그런 거 같네. 그나저나 네가 여긴 웬일이야?”
“저 표 한의원에서 부원장으로 근무해요. 표 박사님 모시고 왔어요.”
“그래! 몰랐네.”
“선배님은 여기 웬일이세요? 진료할 시간이잖아요.”
표 박사의 강좌는 오후 2시부터였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없이 오전 진료만하고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표 박사님. 워낙 유명하신 분이잖아. 하나라도 배울 게 있을 거 같아 와 본거야.”
“그래요? 그렇구나!”
그녀는 쓴 웃음을 지었다.
#
그들은 강연장을 나와 대기실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는 자판기 커피를 뽑아 정윤에게 내밀었다.
“고마워요, 선배.”
그는 그녀 옆에 나란히 앉았다.
“몰랐네. 표 박사님하고 같이 일하는 줄?”
“선배가 얼마나 저한테 관심이 없었으면. 치이.”
그녀는 눈을 흘겼다.
“왜 그래. 사람 싱숭생숭하게.”
그는 농담 반 진담 반처럼 말했다.
“저 표 박사님 모시고 일한 지 2년이 다 되었어요.”
“한의원 규모가 큰 가 보네.”
“그럼요. 저를 포함해서 부원장만 다섯이에요.”
“그 정도야?”
“방송을 통해서 워낙 유명하시니까요.”
“그런 훌륭한 분 모시고 2년이나 근무했으면 많이 배웠겠구나?”
“뭐어, 그럭저럭.”
그녀의 대답이 어째 시큰둥하다.
“사실은 2년 꽉 채우면 그만 두려고요.”
“왜? 계속 근무하면 많이 배울 텐데?”
“상술이야 빤한데 더 배울 게 뭐가 있어요?”
“뭐? 상술?”
“아, 아니에요. 농담이에요.”
그녀는 몹시 당황하더니 주변을 살폈다.
이번에는 그가 주변을 살피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윤아. 너 혹시 최인혁 씨라고 아니?”
“그럼요. 그 분 삼현 신소재 전무님이시잖아요. 삼현그룹 회장님 셋째 아들이고요.”
“나보다 더 잘 아네?”
“우리 원장님이 삼현 신소재의 위촉한의사에요. 그 회사 직원들이 우리 한의원에 자주와요. 본사 직원만 해도 얼만데요? 그 가족들까지 합치면 어마어마하죠.”
“그렇군. 최근에 최인혁이 표 한의원에 온 적 있어?”
“두 달 전쯤인가? 우리 한의원에 한 번 오셨어요.”
두 달 전이면?
그가 최인혁을 만나기 전이었다.
“그 후론? 한 번도 안 왔어?”
“그 후론? 글쎄요. 저는 못 봤어요. 혹 모르죠. 오셨는데 제가 못 봤을 수도 있고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의원 규모도 크고 직원들도 많으니 그럴 수 있겠네.”
“그런데 그런 건 왜 물어보세요? 선배, 최인혁 전무하고 잘 아는 사이에요?”
“뭐어, 그냥 좀 안다면 알고 모른다면 모르고.”
“호호. 무슨 말이 그래요?”
“그건 그렇고. 저기, 표 한의원에서 천오 많이 쓰니?”
“아뇨. 약장에 천오도 있고, 초오도 있지만 많이 쓰지는 않아요. 두 어 달에 한근 정도?”
그 큰 한의원에서 두어 달에 한 근이면 거의 안 쓰는 것이다.
“왜 안 써?”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싸이는 강남 스타일, 표 박사님은 보약 스타일.”
“크큭!”
“보약에 천오 쓸 일이 뭐 있겠어요?”
“그렇구나!”
“아, 얼마 전 개원하셨다는 말은 들었는데, 선배는 많이 쓰세요?”
“나는 환자가 없어서 쓰고 싶어도 못 쓴다.”
“크큭. 처음엔 다 그렇죠, 뭐.”“대극이나 완화는?”
“대극! 완화요? 선배는 그런 약도 쓰세요?”
“아니. 난 한 번도 써 본적 없어.”
“저도요. 박사님 처방에도 대극, 완화가 들어간 건 한 번도 본적이 없어요.”
“그런 약은 표 박사님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렇죠, 뭐. 흐흐.”
“대극, 완화는 그 한의원에는 아예 없다는 말이네.”
“한약장에 대극, 완화 통만 있지 약은 없어요. 대신 다른 게 들어 있죠.”
“다른 거 뭐?”
“우리 한의원 여직원들 간식거리요. 쿠키나 스낵, 뭐, 그런 거요.”
“엥!”
“대극, 완화 약장에 넣어두고 들락날락하면서 간식 꺼내 먹더라고요.”
“네 말은 천오는 있지만 대극이나 완화는 그 한의원에 들어온 적이 없다는 말이구나?”
“제가 알기로는요.”
“너도 모르게는?”
“제가 모르게 들어왔을 수는 있죠. 약재 관리하는 직원이 따로 있으니까요.”
“약재 관리하는 직원에게 알아봐 줄 수는 있겠지?”
“그건 어렵지 않지만, 그런 걸 왜 궁금해 하세요?”
그녀가 그의 얼굴을 빤히 보는데 몹시 당황스러웠다.
“아! 사실은 내가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데, 표 박사님이 워낙 명의시니까 뭐라도 배울 수 있을 거 같아서 말이야.”
겨우 찾아낸 변명거린데,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진부하다.
정윤은 잠깐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긴 했지만 더 이상 다그쳐 묻지는 않았다.
“뭐어, 알았어요. 나중에 알아보고 연락드릴게요.”
“고맙다, 정윤아.”
“제가 표 박사님 소개 시켜드릴까요? 강의 끝나면 저녁 먹을 건데, 선배도 같이 가요.”
“나도? 나는 한 번도 직접 뵌 적이 없는데, 식사 자리에 불쑥 가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제가 잘 말씀 드리면 괜찮아요. 또 박사님이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걸 워낙 좋아하셔서 괜찮아요.”
#
셋이 아닌 둘 만의 이른 저녁 식사는 고급 횟집 방에서 있었다.
정윤은 자신이 전담하던 환자가 사전 연락도 없이 내원했으니 빨리 복귀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처음 보는 두 사람이 마주 앉는 식사 자리는 어색할 줄 알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표 박사의 친화력은 매우 뛰어났다.
표 박사는 처음 보는 그를 마치 아끼는 친동생처럼 대했다.
“허 원장.”
“예. 박사님.”
“안 그래도 최 전무가 아! 삼현 신소재 최인혁 전무 알지?”“안다고 말씀 드리기는 좀 뭣하지만, 한 번 만난 적은 있습니다.”
“최 전무가 허 원장 얘기를 하더라고. 천만 원을 거절했다며?”
그는 조금 놀랐다.
‘그런 말까지 표 박사에게 다 했단 말이야?’
두 사람이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가?
윤지현의 말로는 가깝기는 하지만 믿지는 않는다고 했는데 말이다.
‘최인혁이 원래 조심성이 없나?’
아무리 아버지 백으로 전무까지 됐다고 하더라고 그런 큰 기업의 경영인이 되려면 말을 가려할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면 자신감의 표현인가?
‘그래서 알면 어쩔 건데. 삼현 그룹 오너 2세인 나를 네 주제에 감히 어쩔 거야?’
뭐 이런 자신감인가?
아니면 만취 상태에서 술주정하듯 뱉은 말일지도?
그는 대답은 안 하고 표 박사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맞나? 천만 원 거절했다는 말?”
“글쎄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네요.”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아, 아닙니다. 그냥 흘려들으셔도 됩니다.”
표 박사는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잘 했어. 아암. 젊은 사람이 그 정도 정의감은 있어야지. 하하하. 나도 우리 허 원장 나이 때는 불의에 당당히 맞서고 그랬는데, 이젠 나이가 들어서 예전 같지가 않아.”
“아직도 정정하신데요, 뭐.”
“그런가! 고맙구먼. 자, 오늘 내가 한 턱 쏠 테니 마음껏 들어. 여기서 1차하고 2차는 좋은데 가자고.”
2차 까지?
그는 살짝 당황했다.
“그나저나 우리 허 원장은 결혼 했나?”
“아뇨. 아직 안 했습니다.”
“그래. 우리 이정윤 부원장 어때? 가만 보아하니 이 부원장도 아직 교제중인 남자가 없는 것 같던데?”
“글쎄요.”
“하하. 내가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했구먼. 자, 한 잔 받게.”
그는 표 박사가 권하는 술을 받아 마셨다.
정윤이 보낸 문자가 도착했다
-선배! 약제사 님께 물어봤더니 얼마 전에 대극, 완화가 각 1근씩 들어왔다는군요. 하지만 표 박사님의 지시로 세금 계산서에 기록하지 않고 몰래 들어왔대요.-
-그래. 고마워, 정윤아. 나중에 밥 한 번 같이 먹자.-
이 정도에서 식사를 마치고 헤어졌더라면 좋았을까?
아니!
표 박사가 만취 상태가 되기 전, 그만 마시라고 말렸더라면 좋았을까?
‘아니면 차라리 내가 표 박사보다 더 만취 상태가 되어 그가 어떤 말을 하든지 못 알아들었으면 좋았을까?’
그러나 들었다.
듣고 말았다.
2차 가자던 표 박사가 횟집에서 만취 상태가 되어 지껄였던 말을 듣고 말았다.
“이보게 허 원장. 자네한테 가야 할 돈 천 만원이 나한테 왔어. 하하하. 선배 체면에 입 싸악 닦고 모른 척 할 수는 없지. 안 그런가, 허 원장?”
“······.”
“마셔. 마셔. 오늘은 내가 쏠 테니 마음껏 마셔.”
잠시 후 표 박사는 푹 고꾸라졌다.
그는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표 박사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갑자기 최인혁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로라하는 명의 표 박사보다 100배나 더 높이 평가해준 최인혁에게 난 무슨 짓을 했나?’
옛 말에 남자는 자신을 인정해준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릴 줄도 알아야한다고, 했다.
‘그런데 난? 나를 이렇게 높이 평가해준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는커녕 주먹을 날리다니!’
그는 술잔에 술을 채운 다음 단숨에 마셨다.
‘흐흐흐. 난 은혜도 모르는 놈이구나. 인간도 아니다. 알고 보니 나라는 놈은 그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구나.’
그는 쓰러져있는 표 박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다짐했다.
‘표 박사에게 주먹을 날리고 또 며칠 동안 후회하는 짓은 하지 말자.’
대선배님 아니신가!
이번에는 참자.
그는 자신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마셨다.
한 잔 더 마셨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방을 나왔다.
그는 카운터 앞에 서서 카드를 내밀었다.
여종업원은 단말기에 카트를 긁었다.
그런 다음 단말기의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요.”
그는 주위를 휘 둘러보더니 여종업원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놀란 여종업원이 흠칫했다.
“왜? 왜 그러세요?”
그는 여종업원에게 속삭였다.
“할부로 해주세요. 6개월 할부로요.”
그는 민망한 웃음을 짓지 않으려고 무진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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