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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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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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3.05.10 10:16
최근연재일 :
2023.09.14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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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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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8화 탤런트 진혜리

DUMMY

처음부터 환자가 바글바글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천천히 가지, 뭐. 바쁠 거 있나?’


천천히 가는 자가 멀리 간다는 속담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겨우 서른이 조금 넘었고, 평생 할 한의사가 아닌가?


그런데 천천히 가는 것도 어느 정도이지, 이건 너무 느리다.


개업빨!


딱 사흘 갔다.


개업 빨이 끝난 나흘 째 되는 날부터 열흘 동안 딱 한명 왔다.


불안감이 슬슬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6개월을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도 잘한 게 있다면 직원을 많이 뽑지 않고 딱 한 명만 뽑았다는 것이다.


간호조무사 차 선생.


허준영 한의원의 유일한 직원인 차 선생은 원장인 그보다 바빴다.


‘이 한의원 얼마 못가겠는데! 아, 하필 이런 한의원에 올 게 뭐람!’


차 선생은 새 직장을 알아보느라,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제법 바쁜 하루를 보냈다.


#


오늘도 하루 종일 공쳤다.


공치는 날이 간혹 있는 것도 아니고 일주일이 넘게 계속되었다.


이쯤이면 공치는 것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렇지 못했다.


아픔은 제법 컸다.


차 선생 보기가 민망하다.


민망하기는 차 선생도 마찬가지여서 서로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지냈다.


개업 한 지 한 달이 되지 않은 어느 날 퇴근시간 무렵이었다.


중년의 여성이 젊은 여성과 함께 한의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진료 끝났어요. 아니, 뭐하다가 퇴근 시간 넘어서 오셨어요?’


한 마디 톡, 쏘아붙일 만도 하다.


그러나 그는 눈물부터 왈칵 쏟아졌다.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차 선생도 퇴근 준비하느라 탈의실로 사라져서 혼자 환자를 맞이했다.


그러고 보니 중년의 여성은 낮이 익었다.


같은 건물 일층 백반 집 여사장이다.


죽은 거나 다름없는 이 상가에서 그럭저럭 장사가 되는 유일한 점포.


“안녕하세요? 저 일층 백반집 아시죠?”

“아 예. 그럼요.”


그도 두어 번 간 적이 있었다.


그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스크에 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있었지만 젊은 여성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퇴근하시는 것 같은데, 우리가 너무 늦게 왔죠?”

“아, 아뇨. 괜찮습니다.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어느 분이?”


진료실로 들어온 젊은 여성은 한참을 망설인 후에 모자와 마스크를 벗었다.


“얘가 우리 딸인데요.”


그러고 보니 젊은 여성도 낯이 익었다.


백반 집에서 서빙을 하던 여종업원.


“종업원이 아니라 따님이시군요?”

“예. 엄마 돕는다고 그냥 알바 하는 거예요. 그런데 얘가 몇 시간 전에 얼굴에 마비가 왔어요.”

“그래요! 어디 한 번 볼까요?”


그는 젊은 여성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딸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얘. 얼굴을 돌리면 선생님이 어떻게 봐? 창피하더라도 얼굴 들어야지.”


엄마가 다그치자 딸은 마지못해 얼굴을 들었다.


백반 집에서는 얼핏 봐서 몰랐는데 제법 미인이었다.


진혜리, 31살, 여


구안와사(口眼喎斜)!


안면신경마비이다.


“눈을 한 번 감아보시겠어요?”


눈이 반쯤만 감긴다.


“힘드시겠지만 웃어 보세요.”


억지로 웃는데 입술주위가 일그러졌다.


“오른쪽 안면신경에 마비가 왔군요. 이런 일이 처음이신가요?”

“예. 처음이에요.”


그녀가 처음으로 말을 하는데,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구안와사는 입주위의 근육 일부가 말을 듣지 않는다.


웃거나 말을 하려고하면 입 주위가 일그러진다.


마비가 온 쪽의 눈까풀이 덜 감긴다.


혀에 마비가 와 말이 조금 어둔해지기도 한다.


물을 마시면 마비가 온 입술사이로 물이 흐르기도 한다.


뇌의 기질적 이상으로 오는 중추성과 말단부위의 이상으로 오는 말초성이 있는데, 중추성은 치료가 까다롭고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예후도 좋지 않다.


진단 결과 딸은 중추성은 아니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가령 찬바람을 쐬었다든가, 찬 곳에 얼굴을 대고 주무셨다든가, 과로나 스트레스 등등이요?”

“사실은 얘가 연기자예요. 자주는 아니지만 간혹 드라마에 출연했거든요.”

“아, 탈렌트 진혜리 씨요? 그렇군요.”


드라마에서 자주 봤어요, 라고 립서비스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백반 집에서 본 것 외엔.


“안 그래도 하도 미인이셔도 연기자이신가 생각했었거든요.”


립서비스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백반집 여사장이 계속 말을 했다.


“실은 오랜만에 새 드라마에 출연하게 되었어요. 주연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맡았던 역할 중엔 비중이 큰 역할이라서 얘가 신경을 많이 썼는데, 그래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요.”

“이 병이 원래 스트레스 때문에 많이 옵니다.”

“큰 병원에 가서 검사도 하고 치료도 받을까 생각도 했지만 그러다보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서요. 우선 바로 위에 한의원이 새로 생겨 이리 와 봤어요.”


그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일부터 촬영이 시작되는데 하필 오늘 이런 병이 와서 속상해 죽겠어요. 연기자로서 인생 최대의 기회라며 정말 잘 하고 싶다며 좋아했는데······.”


여사장님 말의 요점은!


그의 실력을 믿고 온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병원이 끝난 시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온 것이다.


그는 불쾌하지 않았다.


‘며칠 만에 온 환자인가?’


이런 환자는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구안와사는 한약 치료와 침 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우선 침 치료만 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구안와사는 일주일 정도면 많이 호전 될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일주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녀는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말끔한 얼굴을 확인해야한다.


그래야 가벼운 마음으로 드라마 촬영장으로 갈 수 있다.


그녀의 상황은 그만큼 다급했다.


더 다급한 사람은 준영 자신이었다.


한 방에 고치지 못하면 그녀의 병이 완치되는 때보다 한의원 폐업이 더 빨리 올지도 모른다.


‘진혜리의 치료에 승부를 걸어야한다.’


그는 마음을 다 잡았다.


“자, 그럼 자침하겠습니다.”


같은 질환에도 많은 침법이 있다.


구안와사의 경우, 환측에 자침하는 침법도 있지만 반대편에 자침하는 방법도 있다.


양측 다 자침하는 방법도 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정신을 모았다.


양측 다 자침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그는 제일 먼저 좌측 손목근처에 있는 신문혈에 자침했다.


정신적 안정을 위해서였다.


백반집 사장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병은 오른쪽인데 왜 왼쪽에? 침을 잘못 놓은 거 아니냐? 그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거죠?”


그가 미소 지으면서 그렇게 묻자, 여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왼쪽 팔꿈치 주변의 소해 혈에 하나 더 자침한 후 말했다.


“이제부턴 마비가 온 오른 쪽으로 침을 놓을 겁니다.”


그는 승읍, 청궁, 예풍, 사죽공, 협거, 지창, 인중, 백회혈에 침을 놓았다.


환측에 침이 꽂혀 있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백반집 사장은 그제야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의 치료는 한의사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정도에서 자침을 마무리하고, 다른 한의사들보다 더 뛰어난 치료효과를 기대하는 건 욕심이다.


그는 진혜리의 오른쪽 발바닥에 조금 전보다 더 굵은 침을 놓았다.


용천혈.


발바닥에 위치한 혈자리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혈자리가 용천혈이다.


용천혈에 침을 놓으면 통증이 아주 심하다.


죽은 사람도 이 자리에 침을 놓으면 너무 아파 벌떡 일어나 침을 뽑고 다시 드러눕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더구나 다른 혈자리보다 더 굵은 침으로 자침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무모한 일이었다.


자칫 병을 고쳐주고도 사람 잡을 일 있냐며, 멱살 잡히기 딱 좋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표정에 특별한 변화도 없었다.


비명은커녕 신음도 내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용천혈에 침을 맞고도 비명조차 지르지 않다니!


다리의 신경이 다 죽어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나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가 자침한 혈자리는 용천혈이 아니었다.


용천혈에서 발뒤꿈치 쪽으로 한참을 간 자리였다.


혈자리 이름은?


없다.


그 어떤 의서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혈자리.


그가 발견한 창의적인 혈자리였다.


그러나 이 혈자리도 자침하면 용천혈만큼 통증이 있다.


그녀가 통증을 전혀 느끼지 않은 것은 그의 자침 실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침이 그녀의 발바닥을 뚫고 들어갈 때, 그의 손끝에서 아무 저항감 없이 침이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침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발바닥이 빨아 당긴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제대로 들어간 것이다.


그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고슴도치 얼굴이 된 진혜리는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


다음날 아침 상가 앞.


출근하는 그의 앞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백반집 여사장.


“아유, 원장님. 왜 이렇게 출근이 늦으셨어요? 저,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사장님?”

“우리 혜리 말이에요. 원장님께 침 맞고 너무 좋아졌어요. 제가 봐도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어요.”

“그래요! 정말 다행이네요.”


그는 좋아서 입이 찢어지게 웃었다.


“세상에! 어떻게 딱 한 번 맞았는데 그렇게 좋아질 수가 있대요? 저도 침을 자주 맞았는데, 한 번도 그런 경험은 못했거든.”

“과찬이십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명의가 계신 줄 몰랐네요.”

“아이구! 그 정도는 아닙니다.”

“우리 애 말로는 오른쪽 얼굴의 감각이 약간 둔한 느낌은 있지만, 겉으로 봐서는 왼쪽 얼굴하고 차이를 모르겠대요.”


‘발바닥에 놓은 마지막 침이 탁효를 발휘한 거다.’


그는 그렇게 확신했다.


“아침 일찍 드라마 촬영하러 가면서 나보고 고맙다는 인사를 대신 드리래요.”

“그러셨군요.”

“그래서 여기서 원장님을 기다린 겁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원장님.”


여사장이 상가 앞에서 그를 기다린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침을 한 번 더 맞고 싶은데 드라마 촬영이 늦게 끝나니 어쩌면 좋을까요?”

“그러면 내일 오시면 되죠.”

“내일이요? 다시 심해지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하루 종일 드라마 촬영하고 와서 침 맞으시는 것 보다는 차라리 푹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맞으시는 게 더 낫습니다.”

“내일도 촬영이라서 아침 일찍 나가야 되거든요. 치료를 제 때 못 받아 다시 재발하는 건 아닐까요?”

“그, 그럴 수 있기는 합니다.”

“어쩌나! 그렇다고 하루 종일 환자 치료 하시느라 힘드실 텐데 우리 애 하나 때문에 늦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여사장은 그 말끝에 그의 표정을 슬쩍 훔쳐보았다.


‘하루 종일 몇 명 진료했는지 실토하면 비웃을까? 아, 아프다!’


하긴 환자라고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 한의원에서 하루 종일 자다 깨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것도 힘들기는 하다.


차라리 환자에 시달리는 게 낫다.


그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일단 제가 따님을 기다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하죠.”

“어머!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원장님?”

“예. 별 수 없죠, 뭐.”

“세상에! 잘 생긴 남자치고 마음까지 따뜻한 사람은 드문데. 어쩜 원장님은! 고맙습니다, 원장님. 저녁은 우리 식당에 와서 드세요.”


그 날 개업 이후 처음으로 세 명의 신환(新患)이 왔다.


세 명 모두 백반집 여사장이 소개해서 온 환자였다.


말 많은 사람이 꼭 피곤한 것은 아니다.


이럴 때는 말 많은 사람이 큰 도움이 된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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