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사천당문
“내가 널 위해 숱한 말로 황사방과 손을 떼라고 사정했건만 그 말을 통째로 씹어 먹은 놈이 할 소린 아니지.
넌 잘못되면 항상 남의 탓으로 돌리고 원망만 했지···.”
“듣기 싫다! 내가 와신상담하며 십 년 동안 칼을 갈아왔는데 오늘 너와 끝장을 보겠다.”
하무거가 검을 중단으로 들고 한 발 앞으로 내딛는 기세는 엄청나서 몸 전체가 검이 된 듯 예리한 검기가 퍼져 나왔다.
주위에 있던 나뭇잎들이 그 기세에 파르르 떨렸다.
멀리 숨어서 보고 있던 두성이의 눈에도 극도의 원한과 분노에 찬 하무거의 모습은 흡사 야차가 현신한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반면에 고목처럼 굳건하게 대지를 밟고 태산처럼 우뚝 서있는 마동탁의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장군처럼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끊어지는 기합과 함께 땅을 박찬 하무거의 신형은 잘 벼려진 검처럼 번쩍이는 검기를 날리며 상대의 가슴을 향해 쇄도했다.
“차앙!”
검과 쇠방망이가 불똥을 튀기며 세차게 부딪치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예리한 검과 방망이를 맞대고 혼신의 힘을 쏟아 붓는 두 사람.
결국 마동탁의 힘에 밀려 뒷다리로 버티던 하무거가 오른쪽으로 몸을 비틀며 검을 홱 뒤집어 마동탁의 옆구리를 노리고 휘둘렀다.
순간적으로 몸의 중심이 앞으로 쏠린 마동탁은 왼쪽으로 몸을 틀며 방망이를 올려쳐 베어오는 검을 간신히 막아냈으나, 하무거의 왼발에 걸려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절호의 기회를 잡은 하무거가 땅에 엎어진 마동탁의 등을 향해 검을 내려쳤다.
손과 발에 힘을 주며 앞으로 굴러서 하무거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마동탁은 하무거를 향해 육중한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밀고 들어왔다.
뒤로 밀리던 하무거가 훌쩍 옆으로 피하자 마동탁도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주로 방어만 하였다.
하무거가 분수를 알고 스스로 물러나길 바라고 있었으나 하무거는 눈에 불을 켜고 집요하게 덤벼들었다.
그러자 한 번 혼이 난 마동탁은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었다.
두성이가 보기엔 하무거의 실력도 뛰어났지만 마동탁보단 한 수 밑이었다.
마동탁이 쇠방망이를 좌우로 휘두르며 하무거의 공격을 흘려내고 하무거의 앞에까지 다가갔다.
찔러오는 검을 옆으로 쳐내더니 가슴팍으로 달려들어 두 팔로 하무거의 허리를 안고 힘을 주었다.
하무거는 두 손을 옴짝달싹하지 못하자 머리를 뒤로 잦혔다가 이마로 마동탁의 코를 들이박았다.
“빡!”
“읍!”
느닷없이 눈앞에 별이 반짝이고 코뼈가 부러지며 코피가 터져 나오자 마동탁은 정신이 아득하여 조였던 팔을 풀고 뒤로 뒤뚱거렸다.
아귀처럼 눈을 부릅뜬 하무거가 절호의 찬스를 놓치지 않고 검 빛을 흘리며 횡으로 공간을 베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위험을 느낀 마동탁이 반사적으로 몽둥이를 들어 막았지만, 예리한 칼날이 가슴을 베고 지나간 후였다. 오른쪽 가슴에서부터 시작한 상처가 왼쪽 옆구리까지 이어지며 피를 뿜었다.
한발 뒤로 물러난 마동탁이 재빠르게 혈도를 짚어 지혈을 한 후 이를 악물고 하무거를 노려보았다.
마동탁의 앞섶은 길게 찍어져 가슴이 드러났고 흘러내리는 피로 얼룩져 있었다.
선기를 잡은 하무거가 발을 꽝꽝 구르더니 마동석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칼을 두 손으로 높이 들고 뒤로 꺾은 후, 종으로 베려고 마동탁 앞으로 다가오며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기다리고 있던 마동탁이 하무거를 향해 육중한 쇠방망이를 힘껏 던졌다.
세찬 바람소리를 내며 방망이가 하무거의 배를 향해 다가오자 하무거는 그대로 공중제비를 돌며 방망이를 밑으로 흘려버렸다.
이어 떨어져 내리며 마동탁의 머리를 쪼개려고 혼신의 힘으로 검을 내려쳤다. 그러나 마동탁은 오히려 하무거의 가슴으로 달려들며 또 한 번 하무거의 허리를 껴안았다.
“흐읍!”
마동탁의 억센 힘에 허리가 조이며 뒤로 꺾이자 하무거는 숨도 쉴 수 없어 사색이 되었다.
하무거가 숨이 막혀 정신줄이 오락가락할 때, 마동탁이 한숨을 내쉬며 손을 풀고 놓아주었다.
하무거는 그대로 풀썩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며 망연자실하여 넋 나간 꼴로 움직이자 않았다.
자신은 오직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절치부심하며 십 년 동안 칼을 갈면서 기다렸지만 상대는 자신을 훨씬 뛰어넘었다.
절망감에 앞으로 무슨 면목으로 살아야할지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아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구차하게 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눈을 질끈 감은 하무거는 옆에 떨어진 장검을 집어 들고 목을 그으려고 하였다.
순간, 파공성을 일으키며 날아온 작은 돌멩이에 손등을 맞고 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두성이가 순식간에 다가와 하무거의 혈도를 짚었다.
마동탁은 하무거의 순간적인 행동에 깜짝 놀라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두성이가 하무거가 떨어뜨린 검을 집으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지난 십 년 동안 힘들게 참았으면서 한순간을 못 참는단 말입니까?
진정한 무인이라면 잊어야 할 것은 깨끗하게 잊는 것이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시작이 아닐까요?”
젊은 공자가 난데없이 뛰어들어 오지랖도 넓게 참견했지만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었다.
하무거는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다.
마동탁은 타고난 신력으로 어릴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남보다 배 이상을 분투노력하였지만 마동탁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저놈만 아니었으면 내가 온 마을에서 부러워하는 사람이 됐을 텐데....)
같이 자란 친구였지만 오히려 꼴도 보기 싫은 놈이었다. 하무거는 항상 마동탁을 시기하고 원망하였다.
게다가 십여 년 전 마동탁과의 싸움에서 얼굴에 자상을 입은 후론 복수의 날만 기다려왔다.
그렇지만 오늘 또 한 번 좌절을 당했다.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쉽게 버릴 수도 없었다.
두성이가 혈도를 풀어주고 검을 건네주자 슬며시 받아든 하무거는 등을 돌린 채 말없이 걸어가다가 돌아서며 말했다.
“마동탁! 너한테 목숨을 빚져서 알려 주마, 빨리 이곳을 뜨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알아듣게 말해주라.”
“사천당가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외부에서 온 무림인들을 무작정 공격해서 벌써 여러 명이 비명횡사했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군소 방파들과 일부러 시비를 거는 걸 보면 뭔가를 꾸미고 있음이 분명하다.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니 네 목숨을 잘 보전해라!”
말을 마친 하무거는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갔다. 그 뒷모습이 무척이나 안쓰럽게 보였다. 하무거의 말을 듣고 두성이는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왔다.
“주공, 이곳에서 소청천과 조의원의 행적을 찾는 일은 일단 추명성에게 맡기고 우린 서둘러 사천당가가 무슨 짓을 하는지 살펴봅시다.”
“그래야할 것 같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고 있는 하무거 앞에 검은 경장차림의 괴한이 앞을 막았다.
하무거는 얼른 검의 손잡이를 잡으며 물었다.
“누군데 앞길을 막는 것이냐?”
“진정하시오, 난 당신을 해칠 사람이 아니오. 오히려 도움을 줄 사람.”
“뜬금없이 무슨 말이오?”
“당신이 결투한 것을 보았소, 당신은 실력이 모자라 진 게 아니오.
다만 힘이 좀 모자란 것이지.“
“힘이라..., 맞는 말이오. 그래서 어쩌란 것이요?”
“난 힘을 키울 방법을 아는 사람이요. 당신은 여기서 포기할 사람도 아니고, 일단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보지 않겠소?
절망 속에도 한줄기 길은 있는 법이오.”
“음...!”
절망 속에서 꺼져가던 한줄기 복수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무거는 자신도 모르게 앞서가는 괴한의 뒤를 쫓아가고 있었다.
* * *
아미파, 청성파와 함께 이곳의 터줏대감인 사천당가.
사천 성도의 남쪽, 운남과의 경계에 흐르는 금사강 인근에 도사린 사천당가는 강호에서 가장 껄끄러운 집단으로 취급받는다.
한번 원한을 맺으면 이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몇 대를 거치더라도 반드시 복수를 하는 지독한 가문이었다.
이들은 가문의 비전절기인 독공을 가족이 아니면 절대로 전수하지 않았다.
비록 귀여운 딸이라도 시집가면 남이 되기에 전수하지 않았으나, 한식구가 된 며느리에겐 비전을 전수했다.
다섯 걸음을 걷기 전에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주는 오보단장산, 일곱 걸음을 채 걷기도 전에 혼백이 달아난다는 칠보추혼산, 냄새도 없고 어떠한 맛도 느낄 수 없다는 무형지독이 당가의 대표적인 독이다.
사천당문과는 절대로 적이 되지 마라!
그들과 적이 되는 순간, 감미로운 음식을 포기해야 하고, 편안한 잠자리는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흔히 보이는 주위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네 피를 말리고, 한 줄기 이는 바람결에도 혼은 구천을 떠돌게 된다.
이처럼 독 암기와 독의 달인인 사천당문의 사람들은 강호에서 제일 꺼리는 골치 아픈 존재였다.
* * *
염룡채(冉龍寨), 사천 사대 강의 하나인 민강에서 활동하는 강족들이 결성한 단체다.
‘염룡’이란 거북이 몸에 뱀의 머리를 한 전설상의 동물, 거북용이라고 하는 현무를 말하는 것이다.
민강은 깎아지른 협곡을 휘감아 돌며 성도로 흐른다. 그 민강의 주변에는 강족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염룡을 수호신으로 받들고 있었다.
염룡채가 있는 선착장 주변에 모여 있는 상가의 한 주점에서 두성이와 일행들은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느긋하게 이 지방 요리를 맛보고 있었다.
소동파가 즐겨먹었다는 동파묵어(東坡墨魚)는 먹처럼 검은 빛깔의 묵어로 만든 생선 요리로 껍질이 바삭바삭하고 맛은 고소하면서도 매운 맛이 났다.
대식가인 마동탁은 두성이가 한두 점 먹었을 뿐인데 어느 틈에 가시만 남기고 먹어치우고, 소 도가니 요리와 오리 생강요리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좀처럼 말이 없는 초대봉과 탁일문도 음식 맛에 흠뻑 빠져 주위의 시끄러운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고양이가 생선을 좋아한다고 했지만, 깔끔이는 쳐다보지도 않고 의자에 엎드려 졸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사방팔방을 날카롭게 쏘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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