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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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작품등록일 :
2023.12.01 17:08
최근연재일 :
2024.01.15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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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9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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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구원받지 못한 자

DUMMY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빛이 눈부시게 세상을 비출수록 그 이면에 드리우는 그림자는 더욱 극명해진다고.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을수록 내면의 절망감은 커져만 갈 뿐이라고.


‘모두가 구원받는 세계 따윈 없다. 그걸 인정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


생기 없는 표정의 수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둠 속에서 마수를 날려 보내고 있다는 건, 이미 영혼이 잠식된 상태란 의미다.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엔 너무 늦어버린 타이밍이었다.


“물러나십시오, 아델레 수녀님.”


말을 마친 후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이후 이글거리는 푸른 불꽃이 허공에 떠오른다.


“도망···쳐···”


리에리아 수녀가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아마도 그녀가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마지막 행동이었을 것이다.

검은 그림자에서 뻗어 나오는 마수들은 일말의 주저함 없이 우리를 노리려 든다.

위협이 가까워져 오자, 나는 푸른 불꽃의 출력을 최대한으로 높였다.


화르륵!


오늘따라 실력행사를 많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가시긴 하지만, 이런 상황을 내버려 두면 더 골치 아파지니 하는 수 없었다.


‘딱히 7인의 영웅이라서 활약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 역할은 검성 카이젤이나 성녀 알리사에게 맡겨둔지 오래다.

오히려 나는 동료의 배후에서 철저히 존재감을 지워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누군가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위한 영웅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지 못한 자에게 필요한 건 안식뿐이다.’


리에리아 수녀도 그것을 바라고 있을 터였다.

나는 두 번 다시는 예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로 했다.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다가, 도리어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던 과거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아앗, 불꽃이!”


조마조마하며 지켜보던 라일라가 탄성을 내질렀다.

만개한 푸른 불꽃이 날아들던 마수를 전부 불태운 것으로 모자라, 꼭두각시가 된 리에리아 수녀를 덮친다.

그 모습을 본 아델레 수녀의 눈썹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기도하는 일뿐입니다.”


나는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리에리아 수녀는 푸른 불길에 휩싸인 채 주저앉은 상태였다.


“당신의 차례입니다, 수녀님.”


마무리를 짓기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급박한 상황에서 시간 낭비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아니었다.

앞으로의 도움을 받으려면, 아델레 수녀가 마음의 각오를 할 기회를 줘야 했다.


“시스터 리에리아, 부디 아르테시아 님의 가호가 함께 하길.”


침묵을 깨고, 아델레 수녀가 조용히 기도문을 읊조렸다.

그러자 리에리아를 휩싸고 돌던 음침한 그림자는 통로 너머의 어둠 속으로 도망쳐버린다.


“저건 대체 뭔가요? 소름 끼칠 정도로 너무 무서운데.”


카린이 창백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다른 일행도 얼어붙은 채 공포에 질린 모습이다.


“타락한 자들의 원념으로 이루어진 어둠입니다. 여기에 있는 누군가가 금지된 술식을 발동시킨 것 같아요.”


아델레가 설명을 해주었다.

고위 성직자인 그녀는 이곳에 도사리고 있는 노골적인 악의가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어서 가시죠, 시로네. 무고한 희생자를 최대한 줄이고 싶습니다.”


내게 다시 앞장설 것을 권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리에리아 수녀는 안식을 얻은 표정으로 벽에 기댄 채 숨이 멎어있다.


“네, 서두르는 편이 좋겠군요.”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악마를 소환하는 술식이 상당 부분 진행되었는지, 공간 자체가 기괴하게 변이되어가고 있었다.


“이곳은 점점 알 수 없게 변해갈 거예요.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말을 마친 아델레가 스태프를 휘둘렀다.

그러자 눈 부신 빛의 문양이 아로새겨지며 천장에서 도사리던 촉수를 잘라냈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촉수가 떨어지자 라일라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가 있는 공간 자체가 마물처럼 변해버리는 느낌이에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소환에 성공하고 나면 이곳은 악마종의 둥지가 된다.

통로는 미궁처럼 변해버리고, 평범한 사람은 버티지도 못할 마기가 가득 차겠지.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소환 술식이 끝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최대한 발목을 붙잡으려고 하겠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악마 숭배자들은 간단히 말해서 인간이길 포기한 족속이었다.

사로잡은 수녀를 앞세워 우리를 공격한 것만 봐도 이미 선을 넘어섰다.

그런데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사, 살려줘!”


저 너머로부터 어두운 형체가 기어왔다.

그 정체를 파악한 일행이 달리던 걸 멈췄다.


“아아.”


타르샤가 신음을 내뱉었다.

그것은 분노라기보다는 탄식에 가까웠다.


“어떻게 이런 짓을.”

“차마 못 봐주겠군요.”


데커와 이실롯도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이쪽으로 기어오는 형체를 바라봤다.

손발이 잘린 채, 숨을 헐떡이는 사내.

그나마 멀쩡한 몸에는 온갖 고문을 당한 흔적이 역력하다.


키릿!


뒤이어 나타난 마물이 사내를 급습했다.

인정사정없이 내리친 앞발에 사내는 절명했고, 카린과 라일라는 눈을 가렸다.


“···!”

“···!”


멈춰선 마물이 득의양양하게 사내의 내장을 빼먹었다.

나는 아델레에게 눈짓을 보냈다.


“전능하신 아르테시아님. 부디 이 자에게 안식을 내리소서.”


아델레가 기도문을 외우자, 눈 부신 빛의 기둥이 마물을 집어삼켰다.

짧은 영창만으로 사멸시킬 수 있을 만큼 약한 개체.

하지만 일행에게 정신적인 데미지만큼은 충분히 입히고 있었다.

놈들의 의도에 맞게 말이다.


‘이런 식의 패턴이 계속 반복되겠군.’


그렇다면 방법이 있었다.

나는 아델레 수녀에게 한 가지를 제안했다.


“차라리 길을 열어버리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수녀님. 당신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정화가 가능할 것입니다.”

“그 말은, 여기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을 신경 쓰지 말자는 건가요? 악마적인 술식에 걸려 있는 상태라면 신성 마법이 독처럼 작용할 수도 있어요.”

“시간이 지체되면 어차피 다 죽게 됩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살아남을 가능성 따윈 없습니다.”


희생양이 되었던 사내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거기엔 진홍색의 악마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다.

산제물로 바쳐지는 자에게 거는 극단적인 술식.

저들은 살아 있어도 이제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니었다.


“과연, 그렇군요. 당신의 말을 따르겠습니다.”


의외로 아델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하면 안 된다느니 하는 말을 늘어놓을 줄 알았는데.

아무튼, 그녀가 동의해준다면 이제 이곳을 공략하는 건 쉬웠다.


“전능하신 아르테시아 님, 당신이 제게 맡기신 권능으로 눈앞에 창궐하는 악을 멸하소서.”


나지막한 기도문이 통로에 울려퍼졌다.

얼마 후, 사방의 벽면에 빛나는 문양이 아로새겨지며 전방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에 닿는 모든 불온한 존재가 불타며 한 줌의 재로 사그라든다.


‘처음부터 이러면 빨랐을 텐데.’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고리타분한 정의관을 지닌 아델레가 순순히 나서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신성 주문으로 정화된 통로를 따라 나는 걸음을 옮겼다.


“저 너머에 놈들이 있습니다. 어서 처단하러 갑시다.”


**


지하 감옥은 악마 소환을 위한 산제물로 가득했다.

애초에 여기 갇혀 있었던 흉악범부터 시작해서,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철창 안에서 도와달라며 손을 내밀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최단루트를 따라서 모든 비극의 원흉인 최심부로 향하는 것 말고는.

아델레가 신성 마법으로 지속적인 도움을 준 덕분에 시간을 제법 단축할 수 있었다.


“기어코 여기까지 찾아왔구나, 마법사. 게다가 난폭한 성녀까지 데리고 말이야.”


제단 위에서 수상한 의식을 벌이던 흑마법사가 말했다.

이곳은 지하 감옥에서도 가장 깊숙한 공간.

본래 무엇을 위한 것인진 모르겠지만, 제법 넓고 장애물 없이 탁 트여 있었다.


“우리의 자매를 건드린 죄는 톡톡히 치르게 될 것입니다, 불경한 자여.”


아델레가 앞으로 나서며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자 흑마법사는 기이하게 웃으며 그녀를 손가락질했다.


“너희들의 신은 끝내 자신의 어린 양을 구원하지 못했나 보군. 아니면 단순히 신앙심이 부족했던 탓인가? 어느 쪽이든 이로써 증명되었다. 너희들의 신을 믿을 이유 따윈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더는 지껄이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

아델레는 현재 기분이 매우 안 좋은 상태다.

그리고 그녀가 괜히 성녀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우러러볼 정도로 타고난 신성력과 가호.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종교재판의 극형을 내리듯 녀석을 찢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목숨은 살려두는 편이 좋겠지. 나머지 녀석들이 보이지 않는다.’


얼마 전에 도망쳤던 치안 수비대장, 아들러도 이곳에 없었다.

분명히 녀석을 따라서 지하 감옥으로 들어왔는데 이상한 일이다.


‘설마, 숨겨진 다른 통로가 있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이쯤에서 인원을 다시 나누는 편이 좋았다.

나는 타르샤에게 조용히 귓속말을 했다.


“여긴 수녀님과 라일라만 있으면 돼. 나머지 일행과 함께 숨겨진 통로를 찾아내줘.”

“네? 그 다음엔요?”

“그건 너의 판단에 맡길게.”


타르샤는 여도적 출신인만큼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었다.

자잘한건 그녀가 알아서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지금 신경써야 할 것은 바로 눈앞의 흑마법사.

그리고 노골적으로 악의를 풍겨오는 마법진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시로네. 당신이 말리더라도 저는 싸우겠지만, 의향 정도는 참고하겠어요.”


일행이 둘로 갈라지는 것을 보며 아델레가 말했다.

나는 그녀를 잠시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글쎄요, 의향이라. 저도 그렇게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죽이기 전에 녀석이 아는 정보는 전부 털어놓게 만들고는 싶군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교단은 이교도를 매우 효과적으로 실토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전용 고문실까지 마련되어 있고요.”


개인적인 감정이 있더라도 당장 죽이지는 않겠다는 의미다.

그거면 충분했다.


“산채로 붙잡으려면 제 도움이 필요하실 겁니다. 저 녀석, 산제물을 꽤나 바친 모양이니까요.”


마법진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기운의 농도가 제법 짙었다.

못해도 백여 명.

사라졌다는 왕녀의 행방은 알 수 없지만, 보아하니 아직 희생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조금 성가신 일을 벌일 수 있겠지.’


라일라를 남겨둔 건 바로 그 이유에서였다.

어쩌면, 그녀의 도움을 빌려서 소울 웨폰을 소환해야 할지 모른다.


“이야기는 끝났나, 마법사? 고민이 조금 많아진 것 같은데 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지.”


흑마법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그게 뭔데?”

“지금부터라도 우리와 함께하지 않겠나? 어린 나이지만, 너도 흑마법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충분히 소질도 있어 보여서 말이야.”


어디서 되지도 않는 회유를.

간단히 거절하려 했는데, 아델레가 먼저 나서며 입을 열었다.


“그럴 일 따윈 없습니다. 이제 천벌을 받으시지요.”


아델레가 스태프를 지면에 내리쳤다.

그러자 여태껏 봐오지 못한 수준의 위력을 지닌 빛 기둥이 순식간에 흑마법사를 덮쳤다.


콰지지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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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6 숲속에서의 대화 24.01.15 13 2 12쪽
35 숲속의 악마 24.01.12 12 1 12쪽
34 에리나 브르타니엔 24.01.11 15 1 12쪽
33 환영의 숲 24.01.10 14 2 12쪽
32 추방된 자들 24.01.09 15 1 12쪽
31 황무지에서의 전투 24.01.08 17 1 11쪽
30 성벽 밖으로 24.01.05 15 1 11쪽
29 유리우스 제르가딘 24.01.04 20 1 12쪽
28 정예 인원을 뽑았다 24.01.03 19 1 12쪽
27 협상을 해보자 24.01.02 22 1 12쪽
26 알현실에 불려갔다 23.12.30 25 1 12쪽
25 부하를 팔아먹었다 23.12.29 21 1 12쪽
24 재각인 23.12.28 25 2 12쪽
23 할 일은 해야 한다 23.12.27 23 1 12쪽
22 귀찮은 일은 싫다 23.12.26 23 2 13쪽
21 리제 에스터리츠 23.12.25 25 2 12쪽
20 지하 고문실의 독대 23.12.23 28 2 12쪽
19 사라진 왕녀 23.12.22 26 2 12쪽
18 오래된 기억 23.12.21 36 3 12쪽
17 악인은 심판 받는다 23.12.20 34 3 12쪽
» 구원받지 못한 자 23.12.19 30 3 11쪽
15 악마숭배자 23.12.18 31 3 12쪽
14 밤은 깊어간다 23.12.16 30 3 11쪽
13 고대 마물 23.12.15 27 3 12쪽
12 비밀 통로 23.12.14 31 3 12쪽
11 도둑 길드 23.12.13 30 3 11쪽
10 초승달 밤의 도둑고양이 23.12.12 42 3 14쪽
9 진위 조사대 23.12.11 41 3 12쪽
8 유도 질문 23.12.09 43 4 12쪽
7 야간 습격 23.12.08 44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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