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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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작품등록일 :
2023.12.01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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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5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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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9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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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를 팔아먹었다

DUMMY

루비아 에스테리아.

제국 남부의 백작가 출신인 당돌한 아가씨였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과 사파이어처럼 푸른 눈동자.

백옥같은 피부와 또렷한 이목구비는 상투적이지만 그녀를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정확했다.


‘아름답긴 했지. 다른 녀석들이 질투해서 결투 신청을 해올 만큼.’


더욱이 그녀의 집안인 에스테리아 가문은 화염계 원소 마법에 조예가 깊었다.

보통, 원소 마법은 4가지 중 하나만 적성을 타고나는데 그것이 가문의 유전적 특질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혼약을 맺으려는 자들이 끊이지 않았고, 에스테리아 가문 입장에선 선택지가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극한 지대의 북쪽 영지에 처박혀 있던 내게로 보내졌다.

처음엔 이유가 뭘까하고 고민을 했었다.


‘내가 7인의 영웅 중 한 명이라서? 아니면 엘카만 가문의 흑마법을 노리고?’


뒷조사까지 해봤으나 명료한 결론은 내리기 어려웠다.

아무래도 가문의 복잡한 사정이 겹쳐진 듯했다.

애지중지하는 딸을 결코 시집보내고 싶지 않은 집안이 있었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어쨌든, 루비아는 나와 결혼했다.

우연히 엘카만 가문의 고유 결계에 진입해서 나의 비밀스러운 기억을 보았고, 그것을 계기로 흑마법에 깊이 관여했다.

루비아가 연구한 주제는 <영혼의 소생>이었다.

일반적으로 엘카만의 가문은 영혼이 지닌 가능성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것에 관심을 갖지만, 그녀는 달랐다.


‘나를 구원하려는 의도에서였지. 영웅으로 활약하기 위해 생명력을 갉아먹는 흑마법을 계속 써댔으니까.’


내 걱정을 한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환생해오며 인연을 맺었던 여인들은 전부 그러한 주제에 관심을 갖고 일평생을 매달렸다.

그런데도 루비아가 특별했던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오로지 흑마법의 방법론에 입각한 해결법을 찾으려 했지.’


다른 아내들은 흑마법 자체를 문제의 원인으로 삼고 배척하거나 정반대의 방법론을 찾았다.

가령, 신성 마법의 기적 따위와 같은 것들 말이다.

루비아는 그런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재능을 지닌 원소 마법의 가치관도 내려놓았다.

원소 마법은 체계성이 있고 철학적인 가르침이 많아서, 한번 그 길에 들어서면 방향을 틀기 어렵다.

그래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집이 세 보이는 평소 모습과는 달리, 마법사로서의 연구방식은 개방적이지. 조금 스타일이 거칠긴 하지만.”

“칭찬하려면 확실하게 하세요. 그러니까 아내에게 미움을 받는 거라고요.”


루비아가 앞서 걸으며 말했다.

그녀는 나와 함께 공업지구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공업지대를 찾은 주된 목적은 탄광에서 발굴되는 마법석을 싸게 사들이기 위함이었다.

이미 가공된 마법석은 상업지구에서 구할 수 있지만, 그건 가격이 제법 나가고 특상품의 경우는 매물로 자주 나오지도 않는다.

그러니 조금 수고를 하더라도 현지의 채굴장에 발품을 파는 편이 합리적이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마법석은 크게 세 종류야. 술식의 효과를 올려주는 강화석, 악마를 무력화시키는 봉인석, 외부의 침입을 막는 결계석.”

“말 돌리는 실력은 여전하네요. 그런 거야 당신 혼자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텐데요?”


루비아는 알아서 하라며 관심 없단 반응을 보였다.

내가 침묵하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당신들이 휘말려 들었다는 초월 마법이 신경 쓰이는군요. 마왕의 눈을 활용했다고 해도 너무 터무니없는 영향력이에요.”

“그렇긴 하지. 시공간을 왜곡한 것으로 모자라, 인과율까지 뒤바꾼 셈이니까.”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른 놈들이 지금 마물의 배후에서 뭘 또 계획하고 있는 걸까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네요.”


오랜만에 세상에 나온 탓일까.

루비아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바빴다.

그녀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아무튼, 대략적인 건 들려줬으니까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자고. 너도 그런 몸으로는 라크슈 같은 고위 마족을 상대하기 버겁잖아?”

“꽤나 얕보는군요. 하지만 사실이에요. 이 여자애는 자질이 뛰어나긴 하지만 수련이 많이 부족해요. 이대로는 당신의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겠죠.”


어차피 리제는 성벽 너머로 데려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니 루비아도 마찬가지.

물론, 전력 면에서는 카린보다 훨씬 낫겠지만 그녀가 성벽 내부에서 해줘야 할 일이 있었다.


“우선은 리제인 척 행동하면서 에스터리츠 가문 내부의 일들을 알아봐 줘. 그녀는 장녀인데다 성격도 말괄량이니까 의심을 사지 않을 거야.”

“왠지 제 험담을 하는 느낌인데요? 별로 듣기 안 좋군요.”

“마법사 가문이라면 <그것>을 통해서 다른 지역의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받을 가능성이 커. 그런 은밀한 내용을 잘 들어야 해.”

“요즘도 그걸 사용하나요? 하긴, 교역로가 막히고 다들 성벽 안에 들어가 살 테니 유용하긴 하겠군요.”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라고 함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아티팩트, <메신저>를 의미했다.

어떤 거리에서도 사념으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목걸이인데, 진품은 세상에 한 쌍만 존재한다.

나머지는 그것의 마법 회로를 적당히 모방하여 양산해낸 열화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꽤나 먼 거리까지 연락할 수 있지. 그걸로 주요 도시를 따라 연락망을 만들 수 있다.’


분명 신성 교단에서도 그러한 방식으로 정보 공유를 하고 있을 터였다.

널리 보급되면 상당히 편리한 기술이겠으나, 원재료로 사용되는 것이 희귀한 탓에 그러진 못하고 있다.

아무튼, 지금은 탄광의 잿더미에 묻혀 있는 원석을 가려내야 할 때다.


“광물을 매입하러 오셨습니까요? 찾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사내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웃는 낯으로 달려왔다.

레일이 깔린 광산의 초입에 서 있는 걸 보니, 이곳의 담당자인 것 같았다.


“여기에 종류와 수량이 적혀 있다. 그렇게 구하기 어려운 물건은 아닐 거야.”


나는 사내를 향해 간단히 메모된 종이를 건네줬다.

사내는 그 내용을 잠시 훑어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원하시는 것은 전부 있습니다요. 단지, 가격이 조금 오른 상태인데 괜찮으실깝쇼?”

“왜 그런 현상이 발생한 거지?”

“최근에 성직자들이 마물을 토벌하겠다고 대량으로 마력이 깃든 광물을 사 갔지 뭡니까. 그리고 요즘 들어 채굴량이 또 시원찮아서 말이죠.”


사내는 주춤하며 이런저런 이유를 덧붙였다.

보아하니, 바가지를 씌우려고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듯했다.

애초에 이런 걸 찾는 손님은 쉽지 않은 상대가 많다는 걸 알고 있을 터다.


“그래서 얼마지? 전부 다 합해서.”

“잠시만요. 음, 여기 적힌 것들을 전부 매입하신다면 100골드입니다.”

“뭐?”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가격이 폭등했다길래 10~20골드까지는 각오하고 있었는데.

100골드면 내가 기억하기로 그 지역의 초호화 마도 장비를 풀 세트로 맞출 수 있는 수준이다.


“내가 금전 감각이 이상한 건가? 당신, 1골드가 일반 병사 10명을 1개월 동안 부릴 수 있는 가치인 거 맞죠?”


옆에 있던 루비아도 어이가 없는지 확인을 요구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전체적인 물가는 크게 변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수지타산이 전혀 맞지 않네요. 아무리 도시가 고립되고 교역이 주춤해졌다지만, 이 정도 가지고 100골드를 부르다니.”


루비아는 장난치냐는 눈빛으로 사내를 쏘아붙였다.

그러자 사내는 식은땀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린다.


“저희는 수요와 공급에 맞춰서 가격을 책정하는 것일 뿐입니다요. 요새 들어서 마물이 도시를 자주 침공해오고 있는 것도 폭등의 요인이 되었습죠.”

“참나, 그렇다면 이 가격에 마법석을 사가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어디 한번 수요처가 어딘지 말이나 해봐요.”


루비아가 계속해서 사내를 몰아붙였다.

사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리의 눈치를 살폈다.


“후우.”


어쩔 수 없군.

계속 내버려두면 다툼이 오갈 것 같았기에 앞으로 나섰다.

물론, 해결방법은 있었다.


“너, 데커라는 녀석 알지?”


그건 바로 도시의 인맥을 활용하는 것이다.

우연히도, 부하로 데리고 있는 데커가 이곳 공업지구 출신이었다.


“네? 데커? 설마 그 총잡이 말하시는 겁니까요? 몰래 마도 병기를 불법 개조하다가 병사들에게 붙잡혀간 공업사 놈.”

“그래 맞아. 너는 그 녀석의 오랜 친구라고 들었어. 이해관계가 맞아서 사업 파트너이기도 했다지?”

“으윽.”


사내는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토닥거려줬다.


“안심해. 데커는 내 밑에서 잘 활약하고 있다. 녀석이 여기에 오면 너에게 안부를 전해주라더군.”

“데, 데커가 살아있습니까요?”

“그래, 지하 감옥으로 가는 대신 최전방의 성벽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지.”

“···하하. 그렇다면 일단 목숨은 건진 셈이군요. 데커라면 그 지옥같은 전장에서도 어떻게든 잘 버텨낼 겁니다.”


옛 추억이 떠오르는지 사내가 눈시울을 붉혔다.

녀석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금화 5닢에 넘겨드리겠습니다요. 사실 공짜로 드리고는 싶지만 저도 사업을 하는 처지라서요. 최소한의 인건비와 토굴장비 운영비만 고려한 것입죠.”

“괜찮겠어? 그렇게 손해보는 장사를 해도.”

“데커에겐 여러모로 빚을 진 게 많았습죠. 언제 다시 볼지 모르니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겠습니다요.”


데커 녀석.

여자만 밝히는 술주정뱅이인 줄 알았는데, 꽤나 인성은 좋았던 모양이다.

덕분에 마법석 수급 문제는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네 안부도 전해줄게. 그럼 이대로 주문 부탁해.”

“조금만 기다려주십쇼. 금방 다녀오겠습니다요.”


말을 마친 사내가 갱도의 어두운 너머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루비아가 내게 쏘아붙이며 말했다.


“왜 처음부터 그 이야기를 안 했어요?”

“그것이 낭만이니까.”

“무슨 소리예요, 그건 또. 정말이지 이상한 남편이라니까.”


루비아가 옆에서 툴툴거리며 조약돌을 걷어찼다.

나는 그녀를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넌 필요한 거 없어? 95%나 깎아주는데 이참에 좀 사가지 그래.”

“되게 선심 쓰듯이 말하네요? 이거 다 제 돈으로 사는 건데요?”

“엄밀히는 네 돈이 아니고 리제의 돈이겠지.”

“리제가 바로 저잖아요. 계속 이런 식으로 구분할 거예요?”

“아니야, 넌 엄밀히는 리제가 아니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초혼의식으로 불러온 망령···”


말을 채 잇기 전에 루비아에게 정강이를 까였다.

솔직히 별로 아프진 않았다.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세상에 남편을 발길질하는 아내가 다 있네.”

“이번 생에는 혼인 안 했어요. 그러니까 좀 때려도 되겠죠?”

“7인의 영웅 중에 마누라에게 맞고 사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애석하군.”

“제가 싫으면 왜 다시 불러냈어요? 예전부터 좋아하던 그 하프 엘프한테나 가버리지.”


루비아가 화난 표정으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의 질투심은 예나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

하지만 그건 그만큼 나를 사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네가 필요하다고 했잖아, 이 정도면 특별 취급해주는 거라고. 나한테 그동안 너 말고도 아내가 많았는데.”

“아아, 네. 참으로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북쪽 영지의 잘나신 도련님.”

“제대로 아내 대우를 받고 싶으면 이제부터는 나를 상냥하게 대하도록 해.”


별로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웬걸.

루비아의 태도가 이상할정도로 확연하게 바뀌어버린다.


“어머, 그러면 조금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볼까요? 이렇게?”


괜히 옆으로 밀착해서 가슴 쪽으로 팔을 끌어당기고는, 은밀하게 속삭여댄다.

그런데 마지막에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확인해봤는데, 저 처녀더라고요? 그럼 자격은 충분히 되는 거겠죠?”


이번 생에도 나를 독점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이것이 그동안 숨겨왔던 본심이겠지.

나는 적당히 얼버무리며 말했다.


“일단 후보군에는 넣어볼게.”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명치에 주먹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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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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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에리나 브르타니엔 24.01.11 15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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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황무지에서의 전투 24.01.08 16 1 11쪽
30 성벽 밖으로 24.01.05 15 1 11쪽
29 유리우스 제르가딘 24.01.04 20 1 12쪽
28 정예 인원을 뽑았다 24.01.03 19 1 12쪽
27 협상을 해보자 24.01.02 22 1 12쪽
26 알현실에 불려갔다 23.12.30 25 1 12쪽
» 부하를 팔아먹었다 23.12.29 21 1 12쪽
24 재각인 23.12.28 25 2 12쪽
23 할 일은 해야 한다 23.12.27 23 1 12쪽
22 귀찮은 일은 싫다 23.12.26 23 2 13쪽
21 리제 에스터리츠 23.12.25 25 2 12쪽
20 지하 고문실의 독대 23.12.23 28 2 12쪽
19 사라진 왕녀 23.12.22 26 2 12쪽
18 오래된 기억 23.12.21 36 3 12쪽
17 악인은 심판 받는다 23.12.20 34 3 12쪽
16 구원받지 못한 자 23.12.19 29 3 11쪽
15 악마숭배자 23.12.18 30 3 12쪽
14 밤은 깊어간다 23.12.16 30 3 11쪽
13 고대 마물 23.12.15 27 3 12쪽
12 비밀 통로 23.12.14 30 3 12쪽
11 도둑 길드 23.12.13 30 3 11쪽
10 초승달 밤의 도둑고양이 23.12.12 41 3 14쪽
9 진위 조사대 23.12.11 40 3 12쪽
8 유도 질문 23.12.09 43 4 12쪽
7 야간 습격 23.12.08 43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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