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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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작품등록일 :
2023.12.01 17:08
최근연재일 :
2024.01.15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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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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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오래된 기억

DUMMY

검은 성녀, 아델레.

그녀는 신성 교단의 권위를 내세워 이번 사건을 철저히 조사해나갔다.

뒷수습도 나쁘지 않게 한 덕분에 이쪽으로 피해가 오는 일은 없었다.

다만, 왕녀가 실종된 건 심각한 문제였기에 병사들의 경계가 풀릴 때까지 조용히 지내야 했다.

따분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내게는 잠시 휴식을 취할 기회였다.


“···으음.”


긴장감이 풀려서인지 간밤에 꿈을 꾸었다.

7인의 영웅.

그들과 함께 모험을 떠나는 장면이었다.


“함께 세상을 구원합시다, 시로네. 마왕을 무찌르려면 당신이 필요합니다.”


검성 카이젤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손을 내민다.

혼자서 마룡 카르나크를 때려잡았다는 괴물 녀석.

그 옆에 있는 성녀 알리사도 만만치 않은 여자다.


“저희는 <맹세의 언약>에 의해 다시 태어난 몸입니다. 당신도 여신님에게 서약했던 기억은 남아 있으시지요?”


수백 년 전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알리사의 말대로 분명 그 당시의 상황은 머릿속에 떠올랐다.

7인의 영웅이 창조신 아르테시아의 권능을 부여받았던 날.

나는 모두와 같이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등에 키스했다.


“그래, 나는 분명히 언약을 맺었다. 에뮤리아 대륙이 혼란에 빠지면 환생해서 인류를 구원하기로 했었지.”

“당신이 선택받은 것엔 분명한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여기서 흑마법이나 연구하고 싶다는 이야기는 그만두세요.”


성녀 알리사는 내가 좀 더 책임감을 느끼길 원했다.

동료 중에서는 가장 늦게 합류하는 터라, 동기부여가 덜 되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대대로 흑마법을 연구해온 엘카만 가문의 천재 후계자라니, 정말 기대되네요! 당신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었다던 마안, 구경 좀 해도 될까요?”


원소술사 에리나가 가까이 다가와 내 얼굴을 훑어봤다.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다는 천재적 재능의 하프 엘프.

그녀에 대한 첫인상은 <생각보다 말이 많다>였다.


“실례잖아, 에리나. 인간은 엘프와 달리 초면엔 낯을 좀 가린다고.”


마궁수 프리실라가 에리나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인간의 피가 섞인 에리나와 달리 프리실라는 뼈대 있는 가문의 순혈 엘프였다.


“그건 편견이야. 나 같은 수인종도 처음 보는 사람은 다가가기 어렵다고.”


디펜더 슐리츠가 자신의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사자인지 늑대인지 구분이 잘 안되는 외모의 반인반수.

출신으로 보아 녀석은 남쪽의 초원지대에서 온 것 같다.


“저 녀석, 뭔가 음침해. 나랑 비슷한 구석이 있어.”


벽면에 기댄 채 이쪽을 바라보는 건 암살자 루시우스였다.

서남부의 자유도시에서 채무처리인으로 이름을 떨쳤다던 사내.

기척을 숨긴 채 예상치 못한 일격을 날리는 것이 특기다.

기습에 약한 마법사에겐 천적 같은 존재였다.


“다들 자기소개는 끝났습니까? 그럼 슬슬 출발할까요?”


혼자서 팔짱을 껸 채 서 있던 카이젤이 씨익 웃었다.

그러자 다들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떠날 채비를 한다.


“그렇지 않아도 북부 영지는 추워서 빨리 떠나려던 참이었어요.”

“이곳의 생태계가 궁금하긴 한데, 갈 길이 바쁘니까 어쩔 수 없겠네요.”

“동감. 풍요로운 숲속에서 살던 엘프에겐 설원지대는 가혹해.”

“수인종도 마찬가지야. 자꾸 엘프만 특별하다는 듯 말하지 말라고.”

“엄살 부리지 마라. 너는 그나마 털이라도 달려 있지 않은가? 사자머리.”


너무 제멋대로인 녀석들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던 나는 모두를 멈춰 세우려 했다.


“자, 잠깐.”

“운명이라고 생각했다면, 서두르는 게 좋아요.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잖아요?”


성녀 알리사가 뒤돌아보며 윙크했다.

처음엔 미인계인가 했는데,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다.


“후우···.”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 이들의 뒤를 따라나서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젠가 후회하고 말 거란 사실을.


“잘못되면 전부 당신들이 책임져야 할 겁니다.”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하려다가, 엉뚱한 소리를 하고 말았다.

그러자 저 너머에서 재미있다는 듯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로네 엘카만. 여기 있는 누구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최후에 어떤 결과를 맞이하더라도.”


검성 카이젤이 환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악의라고는 한점도 찾아볼 수 없는, 선의 그 자체였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앞으로 나아간다면, 실패하는 일 따윈 없어요. 마왕은 반드시 우리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겁니다.”


성녀 알리사가 여신의 이름으로 보증수표를 내밀었다.

나머지 일행도 걱정 따윈 집어치우고 모험을 즐기자는 쪽에 가깝다.


“전생에도 이렇게 모여서 함께 다녔던데,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고요.”

“솔직히 나는 일부분만 기억나지만, 나쁘진 않았던 것 같아.”

“나중에 그 기억을 서로 맞춰보면 재밌겠군. 영웅들이 떠났던 최초의 모험이니까 의미는 있을 거야.”

“솔직히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나는 몇백 년 전의 전생 따위에 집착하지 않고 현생을 즐길 거야.”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되었던 첫 모험은 나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뭐 상관없다.

이들을 따라나서면 무엇이든 답을 얻게 되리라.

어째서 내가 공허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는지.

인간의 영혼을 연구하는 흑마법으로 진정 하고 싶었던 게 무엇이었는지.

그래서 성큼성큼 걸어가 문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한번 지켜보겠습니다. 당신들의 모험이란 것을.”


그것이 환생한 나의 첫 번째 모험이었다.

이후의 이야기는 한순간의 희로애락처럼 빠른 장면으로 지나가고, 어느덧 마왕과의 결전마저 끝나간다.


“시로네 엘카만!”


이제는 오래된 일이지만, 여전히 잊을 수 없다.

분노에 차서 내 이름을 부르는 검성 카이젤의 모습을.


“그러니까, 책임져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일이 잘못되면요.”


나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카이젤을 바라봤다.

내 손엔 성녀 알리사의 영혼으로 소환한 소울웨폰이 쥐어져있다.

거룩한 계율이 새겨진, 순백의 거대한 십자가.

지면엔 이미 부러져버린 다른 동료들의 소울웨폰이 나뒹굴고 있다.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소울웨폰이 파괴되면 그것을 이끌어낸 상대도 목숨을 잃는단 사실을!”


카이젤이 다시 한번 험악한 표정으로 따졌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부러진 소울웨폰의 수만큼, 동료들이 차가운 시체가 되어 누워있었다.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건, 카이젤과 나 그리고 에리나 뿐이다.


“전부 사전동의 하에 사용한 것입니다. 당사자의 허락이 없으면 소울웨폰을 쓸 수 없단 건 잘 알 텐데요.”

“···그래도!”

“전부 당신들이 부족했던 탓입니다. 저로서도 이건 최후의 수단이었습니다.”


나는 말을 마친 후 흘끔 에리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런 말없이 이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언제부터 동료를 수단으로 보기 시작한 겁니까, 시로네 엘카만.”


카이젤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겠단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나는 한숨을 내쉰 후 정면을 가리켰다.


“마왕과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눈팔 때가 아닐 텐데요.”


허공에서 수많은 암흑낙뢰가 내리치며 대지를 난도질했다.

카이젤이 허겁지겁 성검을 휘두르려 할 때, 수호 결계가 펼쳐지며 그를 보호했다.

성녀 알리사의 소울웨폰으로 시전한 최상급의 신성 마법이었다.

그녀조차 생전에 도달하지 못했던 경지의 수호 결계를 보며 카이젤이 기를 찼다.


“당신은 결국 이런 것밖에 할 줄 모르는군요. 인간의 영혼을 멋대로 이용하고, 파괴되면 쓰다 버리고.”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당신이 악마와 다를 바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질책하는 눈초리가 내 마음속에 내리꽂혔다.

나는 태연한 척하며 받아쳤다.


“빛과 어둠은 결국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해석하기 나름인 거죠.”

“어째서 나와 에리나의 영혼은 마지막까지 남겨둔 겁니까? 지금은 그 대답이 가장 듣고 싶군요.”


카이젤은 멈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금 암흑 마법을 시전하는 마왕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궁금했습니까? 당신들의 소울웨폰은 잘 다룰 자신이 없었거든요. 다른 이유는 아닙니다.”

“아무래도 제 말은 당신의 마음에 닿지 않는 것 같군요. 에리나, 부탁드립니다. 저 자에게 뭘 잘못한 건지 설명해주세요.”

“···.”


에리나는 슬픈 표정으로 우리의 시선을 받아냈다.

잠시 후,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냥 괴롭다고 하셔도 돼요, 시로네. 타인을 위해 감정을 숨기는 건 그만두세요. 이제 거의 끝났잖아요?”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에리나! 저자는 지금···!”

“악인을 자처하지 않고, 똑같이 힘들어하면 카이젤 씨가 자책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카이젤 씨는 책임감이 강한 타입이니까요.”


나는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내 머릿속을 완전히 꿰뚫어 보는 듯한 에리나의 눈빛을.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건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으아아아아!”


미친 듯이 십자가를 휘두르며, 마왕에게 치명타를 연달아 먹였다.

마지막 순간, 십자가도 부러져버렸고 성녀 알리사는 그대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시로네 엘카만!”


카이젤이 달려와 내 멱살을 부여잡았다.

그는 다짜고짜 내 안면에 주먹을 날리고는 꼴사납게 쓰러뜨렸다.


“그만 해요, 전부 끝났어요.”


에리나가 눈물을 흘리며 카이젤을 말렸다.

나는 먼지를 털며 일어선 후 다시 전방을 바라봤다.

힘이 다한 마왕은 잿더미로 화해 사라져가고 있다.


“정말로 끝났군.”


이제는 죽어도 된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카이젤은 나를 죽이지 않았다.

아니, 죽이지 못했다.

비록 심정적으로는 거부했지만, 내가 선택한 방법이 최선이었단 걸 알았으니까.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비밀에 부치겠습니다. 적당히 이야기를 만들어 퍼트릴 테니, 제 뜻을 존중하여 주십시오.”


뒤돌아선 카이젤이 말했다.

그는 혼자서 동료들의 무덤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후 다시 이야기를 건넸다.


“<맹세의 언약>에 따라, 우리는 언젠가 비슷한 시기에 다시 환생한다. 그렇지, 시로네?”

“···.”

“약속해라. 네가 이 일을 기억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동료들의 희생을 최소화해라.”


그때의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무슨 말이든 대답할 기분이 아니었다.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자, 카이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의 나는 너를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언젠가, 네가 모두를 구원해낸다면···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때 가서는 널 용서하마.”

“···알겠습니다.”


어떠한 기록에도 실려있지 않았을 대화.

수많은 희생을 뒤로 한 채 끝난 모험이었다.

이제 와서야 왜 이런 꿈을 꾸는 걸까.

그런 것따위, 더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텐데.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나는 스르르 눈을 떴다.


“피곤하셨나보네요, 의자에 앉아서 주무신 걸 보니.”


라일라가 빼꼼하며 내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녀는 내가 잠든 동안 동화책을 읽고 있었던 것 같다.


“어지간히도 좋아하는구나. 영웅들의 모험 이야기를.”

“네, 세상이 절망에 빠진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 필요하니까요.”


진정한 영웅이라.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영웅이 탄생한다면 좋겠구나.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그저 오래된 기억일 뿐이었다.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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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6 숲속에서의 대화 24.01.15 12 2 12쪽
35 숲속의 악마 24.01.12 12 1 12쪽
34 에리나 브르타니엔 24.01.11 15 1 12쪽
33 환영의 숲 24.01.10 14 2 12쪽
32 추방된 자들 24.01.09 15 1 12쪽
31 황무지에서의 전투 24.01.08 16 1 11쪽
30 성벽 밖으로 24.01.05 15 1 11쪽
29 유리우스 제르가딘 24.01.04 20 1 12쪽
28 정예 인원을 뽑았다 24.01.03 19 1 12쪽
27 협상을 해보자 24.01.02 22 1 12쪽
26 알현실에 불려갔다 23.12.30 25 1 12쪽
25 부하를 팔아먹었다 23.12.29 20 1 12쪽
24 재각인 23.12.28 25 2 12쪽
23 할 일은 해야 한다 23.12.27 23 1 12쪽
22 귀찮은 일은 싫다 23.12.26 23 2 13쪽
21 리제 에스터리츠 23.12.25 25 2 12쪽
20 지하 고문실의 독대 23.12.23 28 2 12쪽
19 사라진 왕녀 23.12.22 26 2 12쪽
» 오래된 기억 23.12.21 36 3 12쪽
17 악인은 심판 받는다 23.12.20 34 3 12쪽
16 구원받지 못한 자 23.12.19 29 3 11쪽
15 악마숭배자 23.12.18 30 3 12쪽
14 밤은 깊어간다 23.12.16 30 3 11쪽
13 고대 마물 23.12.15 27 3 12쪽
12 비밀 통로 23.12.14 30 3 12쪽
11 도둑 길드 23.12.13 30 3 11쪽
10 초승달 밤의 도둑고양이 23.12.12 41 3 14쪽
9 진위 조사대 23.12.11 40 3 12쪽
8 유도 질문 23.12.09 43 4 12쪽
7 야간 습격 23.12.08 43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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