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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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작품등록일 :
2023.12.01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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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5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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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5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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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서의 대화

DUMMY

숲속의 안개가 걷혀나갔다.

문제의 원인이었던 악마가 죽자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다행인 일이었다.

악마의 둥지는 오래되면 고착화되어서 주인이 사라져도 변하지 않는다.

원상복귀가 안 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곳의 악마가 군림한 시기는 짧은 편이었다.

그래서 영물이었던 고목도 침식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실, 이 나무는 예전에 제가 심었던 종자예요. 대략 500년 전이었을 거예요.”


푸른 기운을 내뿜는 고목을 올려다보며 에리나가 말했다.

500년 전이라면 전생에 있었던 일이었다.


“이런 변방에 무슨 일로 방문했었지? 생태계 연구라도 하고 있었던 거야?”

“그건 아니에요. 어쩌다가 우연히 들렸을 뿐이에요. 당신이 여기에서 저와 만난 것처럼요.”


에리나는 손을 내밀어서 고목과 교감했다.

고목은 비록 말은 하지 못하지만, 에리나를 반기고 있었다.

거대한 기둥으로부터 온화한 마력이 느껴진다.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시기는 초월 마법에 휩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지?”

“맞아요. 시공간의 왜곡이 발생하면서 아마도 제약 같은 게 풀린 모양이에요?”

“제약이라고?”

“네, 첫 번째 모험에서 우리가 창세신과 서약을 맺었을 때의 내용이요. 대부분은 기억나지만 모호한 것도 있어요. 영웅으로서의 책무를 다해야 하는데 서약의 일부가 기억나지 않는 건 분명 이상하죠.”


에리나의 말이 맞았다.

실은 다른 영웅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 전생의 기억이 다들 돌아온다면 본격적으로 의심하기 시작할 테지.

나도 그와 관련해선 궁금한 점이 있었다.


“환생 이후의 기억이 유지되어온 건 나뿐이었어. 이유는 몰랐지만, 비밀로 했지. 그걸 말해서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몰랐으니까.”

“당신은 너무 혼자서만 고민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이제부터는 그런 모습을 버릴 필요성이 있어요.”


에리나는 내 태도를 문제 삼았다.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이기에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조언은 이전과 다르게 공감이 되기 시작한다.

반복적으로 마왕을 봉인해오던 국면과는 달라졌단 걸 나도 인정하고 있었다.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지 협력할게. 하지만 지금은 서북쪽 산맥의 동태에 집중해야 해.”

“마왕군 서열 3위인 녀석 말인가요? 망자의 군주, 라틴젤이라고 했었죠? 아아, 기억나요. 항상 언데드 군단으로 시간만 끌다가 도망쳐버리던 졸장부.”


에리나의 평가는 상당히 박했다.

그녀만 그런 게 아니다.

마왕군 내부에서도 라틴젤은 졸렬한 행보로 말이 많았다.

항상 논란을 달고 살았는데, 군단장으로서 계급장에 별 4개를 유지했다는 게 신기하다.


“뭐, 라틴젤의 능력 자체가 너무 범용성이 좋긴 했지. 마왕군에게는 필요한 전력이었어.”

“그렇긴 하죠. 전장에서 망자를 일으켜 세우고 자신의 수족처럼 다룬다는 게 사기적인 능력이니까요.”


에리나도 네크로맨서가 골치 아픈 흑마법사란 건 동의했다.

영웅의 반열에 든 자라면 모를까, 평범한 이들은 그 압도적인 군세 앞에 좌절할 것이었다.

하지만 네크로맨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그건 바로 직접 전장 지휘를 해야 해서 기습에 취약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라틴젤은 자신의 수급을 노리는 기습을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조금만 불리해져도 꽁무니를 뺐다.


“그러던 녀석이 갑자기 대담한 일을 저지르니까 적응이 안 되는걸? 마왕의 눈을 가지고 대륙을 지배할 야욕을 부리는 것 말이야.”

“진정한 목적은 아직 뭔지 몰라요. 그러니 너무 확신하지는 마세요. 평소답지 않은 모습이란 건 저도 이상하지만요.”


에리나가 졸장부라고 품평할 만큼, 권력적인 야욕이라곤 없던 마족이었다.

고위 악마는 자부심이 대단해서 서열 싸움에 맹목적인 성향이 있는데, 라틴젤은 껄끄러운 상대다 싶으면 공개적으로 서열전을 포기한다.


‘그런데도 3위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대단하지만 말이지.’


지금까지 무시해왔긴 하지만, 그래도 마왕군에서 3번째로 직급이 높은 녀석이었다.

서열 1위는 당연히 마왕이고 2위는 오른팔인 발자크였다.

그러니 마왕의 왼팔이라고 불러도 좋을 법한 위치인 건 확실했다.

영예로운 자리라서 아래쪽의 악마들로부터 도전을 받을 법도 한데, 꽤나 조용했다.

능력 상성이 유리하기 어려운 탓인지, 라틴젤은 서열전 자체를 치른 경험이 별로 없었다.


‘서열 2위였던 발자크와의 서열전에서는 기권표를 던졌지.’


발자크는 그만큼 대단한 고위 악마였다.

엘카만 가문처럼 심상 마법을 특기로 사용하는데, 현실과 교묘하게 뒤섞어서 혼란을 유도한다.

그런 농간질에 지독하게 당하고 나면 아군은 서로 싸우다 죽어있고 살아있어도 혼이 나가 있다.


‘그런 녀석과 일대일로 이긴 것이 바로 에리나였지.’


완전히 성장했을 때의 에리나는 정말 대단했다.

문제는 그녀가 시공간의 왜곡으로 어려졌다는 것이다.

빠른 속도로 다시 힘을 되찾고는 있을 테지만, 상황이 급박했다.


“확실한 건, 마왕의 눈을 파괴해야 한다는 사실이야. 그런데 마왕의 눈은 전설적인 유물이라 평범한 방법으로는 흠집 내는 것도 어려울 테지.”

“듣고 보니 그렇군요. 하긴, 마왕도 사멸시키는 게 불가능해서 봉인하는 것에 그쳤었죠.”

“일반인은 손대는 것만으로 정신이 미쳐버릴 거야. 우리도 함부로 접촉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곤란하군요. 최선은 성녀인 알리사에게 맡기는 건데 그건 어렵겠죠. 행방도 모르는 상태이니. 아마 멀리 떨어져 있을 것 같고요.”

“성녀라면 있어. 알리사를 대체할 수준인진 모르겠지만.”

“설마 당신이 이끄는 병사들과 함께 있던 수녀를 말하나요? 조금 분위기가 남다르긴 했어요.”


아델레가 성녀라는 이야기를 하자 에리나가 놀랐다.

자고로 성녀의 칭호를 받아온 건 동시대에 오직 1명뿐.

그런데 알리사가 10년간 부재한 세태에서 새로운 성녀가 탄생한 것이었다.


“그녀에겐 과거를 들춰볼 수 있는 가호가 있어.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가호는 아니지만, 덕분에 다른 동료의 위치는 대략 알 수 있었지.”

“그런데도 제가 첫 번째 재회 대상이었다는 건, 역시 서로 떨어진 거리가 먼가 보군요.”

“에뮤리아 대륙 전역에 골고루 흩어져 있는 상태야. 신성 교단에서 노력하고는 있다지만, 마물의 방해로 시간이 지연되고 있지.”

“그들에게 하다못해 원거리 연락이라도 된다면, 집결지를 정할 수 있을 텐데요. 예전처럼 교통이 좋지 못해서 아쉽네요.”


에리나는 입맛을 다셨다.

사실, 전혀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주요 도시에 설치된 마도 장치를 이용해서 연락을 주고 받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기능을 유지하려면 마력이 많이 소요되므로, 이런 혼란 상황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뭐, 그건 신성 교단에서 알아서 할 거야. 다른 동료들도 현지에서 무언가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겠지.”

“우리는 일단 진군하는 게 최선이란 건가요? 확실히, 다른 방법은 없긴 하네요.”

“서북쪽의 산맥을 운 좋게 공략하면, 생각보다 쉽게 혼란이 끝날지도 몰라. 지금까지 파악한 바에 의하면, 라틴젤과 마왕의 눈이 핵심 문제니까.”


라틴젤은 죽이고 마왕의 눈은 어디엔가 숨겨서 봉인해두면 된다.

이미 지나간 10년의 세월을 되돌리긴 어렵겠지만, 마왕의 군세만 사라지면 인류는 재건의 역사를 써내려갈 수 있었다.


“승산이 얼마나 될까요? 제가 합류한다면 라틴젤은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녀석의 협력자가 얼마나 있고, 전력은 어느 정도인진 파악하지 못했어. 하지만 충분히 싸움을 걸어볼 만하다고 생각해.”

“새로운 성녀도 동행하니 그렇겠군요. 최전방을 맡는 성기사도 쓸 만해 보였고요.”


에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뒤돌아서 나를 바라봤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더 묻겠어요. 당신의 목적은 무엇이죠? 이번에도 동료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전략을 세우는 건가요?”


목적이라.

그런 걸 고민할 여유는 아직까지 없었다.

확실한 건, 마왕을 봉인할 때와는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다만, 그게 뭔지는 아직 잘 모르겠는 느낌이었다.


“글쎄. 희생을 최소화한다기보단 희생할 필요 자체를 없애버리고 싶어.”

“그 말은, 마왕군을 이번 기회에 완전히 절멸시키겠단 건가요?”

“아니, 여신을 깨울 생각이야.”

“뭐라고요?”


에리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쉰다.


“창세신 아르테시아는 상위차원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 아니었나요? 잠들어 있다는 말은 대체 뭔가요?”


아무래도 에리나는 기억이 없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여신이 잠꾸러기란 사실은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나보다.


“우리에게 권능을 나누어준 후 여신은 잠들었어.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잠들었다는 건, 힘이 다해서 생명 활동을 멈췄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나요?”

“장례식의 느낌은 아니었어. 딱딱한 가시나무 관에 누웠긴 하지만, 유언을 남긴 건 없었지.”

“그래도 지금까지 깨어나지 않았다는 건 문제이지 않나요? 우리에게 모든 걸 맡겨놨다고 하더라도요.”


에리나도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신성 교단에서 이런 사실을 알면 상당히 난감해하겠지.

성전에 의하면, 창세신 아르테시아는 항상 만물을 관조하는 위치에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의 잠꾸러기 여신님은 사실 직무 태만을 저지르고 있었다.


“애초에 여신이 어디에 잠들었는지 알 수 없어. 아니면 누군가는 깨우기로 되어 있었을지 모르고.”

“그게 설마 당신이란 건가요?”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녀를 찾아야겠단 생각은 최근에 강하게 들어.”

“후우, 알겠어요. 하지만 그건 서북쪽의 산맥을 완전히 정벌하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아요.”


지금으로선 여신의 행방을 찾는 건 너무 요원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곧 저물 테니 오늘은 숲속에서 야영할 거야. 영물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니 장소 선정은 좋은 편이지.”

“고목의 영력으로 하급 마물의 침입 정도는 막아내겠군요. 밤에 발 뻗고 잘 수 있겠어요.”

“빈말인 거 알아. 너는 방심하지 않는 편이잖아.”

“말이 그렇다는 거죠. 아무튼, 돌아가면서 마저 이야기하죠. 비밀스러운 내용은 어느 정도 주고받았으니까요.”


에리나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


숲속의 공터에 우리는 야영지를 마련했다.

어두워진 밤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에리나였다.

그녀는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질문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에리나 님, 마왕의 오른팔을 물리친 이야기 좀 해주세요!”

“마법의 위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한번 보여주세요!”

“시로네 님하고는 무슨 관계인가요? 정말로 수제자인 건가요?”


덕분에 에리나는 피곤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모처럼 쉬려고 돌아온 건데, 영웅의 일과는 너무도 바빴다.


“시로네, 당신만 혼자 빠져 있는 건 치사하지 않나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나는 본명을 쓰는 데 아무도 못 알아보는 중이야.”


불경한 흑마법사라는 이유로 신성 교단이 나에 대한 기록을 누락시킨 결과였다.

덕분에 이렇게 편안한 여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야전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고기 스튜를 먹으면서 말이다.

그 모습이 못마땅한지 에리나가 한 마디 했다.


“기억해두겠어요. 복수할 거예요.”


이미 여러번 들었던 말이다.

나는 씨익 웃으며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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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 숲속에서의 대화 24.01.15 13 2 12쪽
35 숲속의 악마 24.01.12 12 1 12쪽
34 에리나 브르타니엔 24.01.11 15 1 12쪽
33 환영의 숲 24.01.10 14 2 12쪽
32 추방된 자들 24.01.09 15 1 12쪽
31 황무지에서의 전투 24.01.08 16 1 11쪽
30 성벽 밖으로 24.01.05 15 1 11쪽
29 유리우스 제르가딘 24.01.04 20 1 12쪽
28 정예 인원을 뽑았다 24.01.03 19 1 12쪽
27 협상을 해보자 24.01.02 22 1 12쪽
26 알현실에 불려갔다 23.12.30 25 1 12쪽
25 부하를 팔아먹었다 23.12.29 21 1 12쪽
24 재각인 23.12.28 25 2 12쪽
23 할 일은 해야 한다 23.12.27 23 1 12쪽
22 귀찮은 일은 싫다 23.12.26 23 2 13쪽
21 리제 에스터리츠 23.12.25 25 2 12쪽
20 지하 고문실의 독대 23.12.23 28 2 12쪽
19 사라진 왕녀 23.12.22 26 2 12쪽
18 오래된 기억 23.12.21 36 3 12쪽
17 악인은 심판 받는다 23.12.20 34 3 12쪽
16 구원받지 못한 자 23.12.19 29 3 11쪽
15 악마숭배자 23.12.18 30 3 12쪽
14 밤은 깊어간다 23.12.16 30 3 11쪽
13 고대 마물 23.12.15 27 3 12쪽
12 비밀 통로 23.12.14 30 3 12쪽
11 도둑 길드 23.12.13 30 3 11쪽
10 초승달 밤의 도둑고양이 23.12.12 41 3 14쪽
9 진위 조사대 23.12.11 40 3 12쪽
8 유도 질문 23.12.09 43 4 12쪽
7 야간 습격 23.12.08 44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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