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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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작품등록일 :
2023.12.01 17:08
최근연재일 :
2024.01.15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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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9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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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된 자들

DUMMY

예로부터 이런 말이 있다.

등잔밑이 어둡다.

하지만 처음부터 방심하지 않는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허점을 파고들려 하는 전략은 한 수 위의 상대에겐 통하지 않는다.


“명중.”


내가 날려 보낸 푸른 불꽃이 놈에게 적중했다.

별로 강한 상대는 아닌지 일격에 뒤로 나자빠져 버린다.

은신 마법이 풀렸고, 놈의 모습이 드러났다.

볼품없는 누더기를 걸친 사내.

특이점이 있다면 얼굴을 해골 가면으로 가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가서 붙잡아.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고.”


몸놀림이 재빠른 부하들을 내보냈다.

어차피 지휘부의 전력은 나와 아델레만 있어도 충분하다.

전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그녀와 함께 여기저기서 달려드는 마물을 해치웠다.


키리릭! 키릭!


기껏해야 하급 마물이었다.

기동성이 빨라서 방어 진영을 우회하여 접근해온 것일 뿐, 위협은 되지 않는다.


‘애초부터 우리를 한 번에 굴복시킬 목적으로 보낸 것이 아니겠지.’


이런 식의 급습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질 터였다.

위치를 들키는 횟수가 빈번해질수록, 더 자주 공격당하고 피로도가 빨리 쌓여갈 것이다.

그러니 눈에 띠는 감시책은 그때그때 제거하는 편이 좋았다.


“이 놈입니다요.”

“행색이 누추한 걸 보니 야인인 것 같은데요?”

“가면을 썼습니다만 남자로 추정됩니다.”


데커, 타르샤, 이실롯.

정예대원 3명이 야인을 포박해서 끌고왔다.

녀석을 무릎 꿇린 후,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가 시켰냐?”


상식적으로 이런 녀석이 마물의 배후일 리 없었다.

아무리 잘 쳐줘봤자, 그저 그런 끄나풀일 뿐이다.

가까이 다가온 이유도 날 어찌 해보려는 것이 아닌, 무언가 확인하려는 목적일 것이다.


“크으, 죽여라.”


야인은 분한지 이를 갈았다.

어차피 살아서 돌아가긴 틀렸다고 생각하는지, 대답을 회피한다.


“타르샤.”

“부르셨나요, 대장님?”

“들고 있는 단검 줘봐.”


날이 서슬퍼런 단검이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든 후, 주저하지 않고 야인의 허벅지에 내리꽂았다.

푸욱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야인의 비명이 터져나온다.


“으아아악!”


마물은 거진 정리되어 가는 중이었다.

이쪽과 거의 동수에 가까운 규모였지만, 하급 개체에 불과하다.

사상자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소란을 일으켜도 딱히 상관은 없었다.


“죽는 게 두렵지 않다는 눈치로군. 하지만 고통은 어떨까?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를 오랫동안 괴로움에 사무치도록 해줄 수 있어.”


포로로 잡힌 이들이 공포에 사로잡히는 순간이 있다.

그건 바로 죽음이 아닌, 고문.

악질적인 고문이 며칠이고 이어지다 보면 생의 집착은 사라지고, 죽음을 갈망하게 된다.

야인이 아무리 무지하다 해도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어떻게 할래? 참고로 나는 101가지의 고문 기법을 알아. 처음부터 배운 건 아니고 너 같은 녀석을 심문하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되었지.”

“크으···”

“선택은 너의 몫이야. 하지만 장담하지. 네가 어떤 선택을 내리든 결국 너는 내가 말하라는 걸 불게 될 거야. 어떻게 아느냐고? 지금까지 안 그런 녀석이 없었거든.”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고는 녀석의 눈앞에서 묘기 부리듯 단검을 돌렸다.


“겨우 허벅지 좀 찔린 것 가지고 너무 그러지 마. 아직 시작도 안 했는걸? 벌써부터 그러면 며칠도 견디기 어려울 텐데? 애초에 그 정도의 각오도 없이 이런 역할을 자처한 거야?”


마음을 흔들어야 한다.

벼랑 끝에 몰렸다 생각할수록 인간은 나약해진다.

현실 부정을 하려 하면 그러지 못하게 아픈 곳을 찔러야 한다.

자존감마저 무너져내린 상황에서 인간은 한없이 가벼워지고, 무력해진다.


“마, 말하겠다.”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나는 희미한 미소를 띠며 야인을 바라봤다.

해골 가면을 쓰고 있어서 비록 얼굴 표정은 안 보인다만, 내게는 더 확실한 게 보인다.

인간의 심상.

영혼의 역장으로부터 발생하는 사념이 그려나가는, 한 폭의 수채화였다.

인간은 모든 정보를 이야기의 형태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미지화한다.

지금 야인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좌절과 공포 그 자체.

수면 위의 파문이 퍼져나가듯, 어두운 색채의 울림이 커져간다.

이만하면 됐다.


“그래, 꼴사나운 최후를 맞이하고 싶지 않으면 순순히 불라고. 그러면 목숨을 좀 더 오래 보전할 수 있을지 모르잖아?”

“나는 미끼다. 처음부터 네가 신경 쓸 대상이 아니었단 말이다.”

“미끼?”


미묘하게 신경이 거슬리는 단어였다.

야인의 태도가 불순하다거나 해서는 아니다.

녀석에게 신경쓰느라 간과했던 사실이 떠올라서였다.


“자세히 설명해봐.”

“그놈들은 네가 똑똑하단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를 이용해 혼란을 주려는 거다.”

“혼란이라고?”

“이쪽에서 살아가는 야인은 아무런 죄가 없다. 그놈들이 목숨을 위협해서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일 뿐이다.”


예상대로 야인의 배후에는 악마 숭배자들이 있었다.

다만, 야인 무리가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게 아닐 뿐이다.

물론, 이 녀석이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만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이렇게 단순한 심상의 소유자는 거짓말이 서투르다.

거짓말을 했으면 티가 날 텐데, 그런 기미는 느껴지지 않는다.


“계속해봐.”

“야인은 싫어도 복종해야 하는 상황이다. 여자와 어린아이가 붙잡혀갔다.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죽인다고 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무슨 명령을 내렸는데? 너에게 말이야.”

“시간을 끌라고 했다. 최대한 자신들인 것처럼 위장해서 중요한 정보를 아는 것처럼 하라고 했다.”

“그러면 함부로 죽이지 못할 테니까?”

“그렇다. 하지만 예상하고 너무 달랐다. 너는 나를 죽기 직전까지 고문하려고 했다. 너의 진심, 확실히 느껴졌다.”


야인은 조금 지능이 떨어지는지 말을 버벅였다.

아니면 단순히 흥분해서인지 모른다.

어쨌거나, 야인의 말은 신빙성이 있었다.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분간 살려두는 편이 도움이 된다.


“라일라, 치료해줘.”

“네!”


라일라가 다가와 수호주문을 영창했다.

그녀는 견습 수준이지만, 기본적인 회복 마법 정도는 사용할 줄 안다.

통증이 완화되는지 야인의 표정이 점차 나아졌다.


“고맙다. 내 말을 믿어줘서.”

“아직 널 살려둘지 결정은 안 했어. 그러니까 분발하도록 해.”

“알겠다. 이렇게 된 이상 너에게 협력해서 다른 야인을 구하려고 노력해보겠다.”

“꽤나 이타적이군? 야인은 살아남기 급급한 줄 알았는데.”

“야인이라고 해서 완전히 인간이길 포기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금기시되는 불문법이 있다. 그런데 그놈들이 멋대로 쳐들어와서 우리가 만든 규칙을 무시해버렸다.”


야인의 이야기는 조금 길어질 것 같았다.

나는 병사들을 잠시 쉬게 한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왕녀를 봤어, 못 봤어?”


왕녀가 붙잡혀 있는 장소가 놈들의 본거지였다.

아마도 서북쪽 산맥의 깊숙한 어딘가일 테지.

조금 성가시긴 하지만, 지금은 야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였다.


**


들었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았다.

최근 서북쪽 산맥의 마물이 기승을 부리면서, 야인 부족도 이쪽으로 떠밀려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좁은 영역에 인구 밀도가 높아지다 보니, 자연스레 촌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본래 야인들은 정처 없이 떠도는 걸인에 가까웠는데 어떤 계기로 단결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마물의 습격은 막아내기 어려워서 최대한 숨어 사는 쪽을 택했다.

서북쪽의 산맥은 이미 마물의 본거지가 되었으니 거기는 불가능하고, 그나마 숲이 우거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마침 마법을 다루는 녀석도 있어서 그럴 듯하게 은폐가 가능했다고 한다.

문제는 악마 숭배자들이 그곳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


“많은 야인이 죽었다. 놈들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적수가 되지 못했다.”


야인은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분개했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던 동료들도 목숨을 잃었다며.


“놈들이 말했다. 어떤 마법사를 함정에 빠뜨려야 하는데 희생양이 필요하다고. 순순히 협조해주면 여자와 아이들은 살려준다고 했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야인은 명령에 따라야했다.

당장 목에 칼을 들이대는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다.


“미끼로 던져지는 건 나뿐만이 아닐 거다. 그러니 조심하는 편이 좋을 거다. 놈들의 계획을 눈치채지 못한 척 연기하는 편이 좋다.”


머리가 나쁜 주제에 야인은 잘도 조언을 해왔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놈이 비밀을 폭로할 가능성도 생각해뒀을 텐데.’


아무리 같은 야인을 포로로 잡아두었다 해도, 당장 죽을 위기에 처하면 생각이 달라진다.

악마 숭배자들이 그런 사실을 간과할 리 없었다.

그래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단순한 미끼였다면 상관없지만, 이런 전개까지 염두에 둔 것이라면?

뭐가 진짜 함정인지 쉽게 단언하기 어려웠다.


“골치 아프구먼요. 어느 쪽도 간과하기 어렵겠습니다요.”

“이런 식으로 피로도가 누적되게 만들 작정인가 본데요? 방심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계략이에요.”


데커와 타르샤가 골머리를 앓았다.

한편, 아델레는 담담하게 현실을 직시했다.


“악마 숭배자들이 사악한 음모를 꾸미는 건 당연해요. 신앙심으로 극복해내야 합니다.”


하지만 원정대원 중에는 신의 구원을 기대하지 않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세상이 마물의 소굴이 되고, 인류의 문명이 쇠퇴했다.

구원의 대행자라던 7인의 영웅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유일신의 전지전능함을 설파하는 건 설득력이 떨어졌다.


‘뭐, 교리상으로 구실을 만들어서 둘러대긴 하더라만.’


불신자가 늘어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딱히 신성 교단을 옹호하는 입장은 아닌데, 좋은 현상은 아니었다.


‘종교적인 구원을 포기한 자들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


빛이 있는 곳엔 그림자가 드리우기 마련.

나는 그러한 양면성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적어도 기도하는 척이라도 해, 카린. 밥 먹기 전에는 말이야.”

“···대장님도 그렇게 신앙심이 투철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카린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날이 저물어서 우리는 야영지를 만들고 불가에서 스튜를 끓여 먹는 중이었다.


“라일라를 본받도록 해. 병사들이 보내는 시선이 남다르게 느껴지지 않아?”

“착한 아이가 아니라서 죄송하네요. 그런데 저희 언니하고는 어떻게 친해진 거예요? 듣자 하니, 우연히 만났다는데.”


리제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고보니, 카린에게는 제대로 설명을 안해줬다.

카린이 아는 건 리제가 내게 부탁해서 서로 만나게 도와줬다는 사실뿐.

전처인 루비아의 인격이 리제와 공존하고 있단 건 꿈에도 모를 터였다.


“어린아이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내용이야. 나중에 너희 언니에게 물어봐.”

“어른인 척하지 말아요. 자기도 미성년이면서.”


카린이 베에, 하고 혓바닥을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본 라일라가 타이르며 말했다.


“그런 말투는 삼가는 것이 좋아요. 시로네 님은 지금 원정대를 지휘하고 계시니까요.”


역시 라일라는 내 편이다.

카린을 어떻게 더 놀려먹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다름아닌, 아델레 수녀였다.


“병사들을 집합시켜야 할 것 같아요. 마물이 몰려오고 있어요.”


이런, 여유롭게 스튜 먹을 시간조차 안 주는군.

투덜거리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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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성벽 밖으로 24.01.05 16 1 11쪽
29 유리우스 제르가딘 24.01.04 20 1 12쪽
28 정예 인원을 뽑았다 24.01.03 19 1 12쪽
27 협상을 해보자 24.01.02 22 1 12쪽
26 알현실에 불려갔다 23.12.30 26 1 12쪽
25 부하를 팔아먹었다 23.12.29 21 1 12쪽
24 재각인 23.12.28 25 2 12쪽
23 할 일은 해야 한다 23.12.27 23 1 12쪽
22 귀찮은 일은 싫다 23.12.26 23 2 13쪽
21 리제 에스터리츠 23.12.25 25 2 12쪽
20 지하 고문실의 독대 23.12.23 28 2 12쪽
19 사라진 왕녀 23.12.22 26 2 12쪽
18 오래된 기억 23.12.21 36 3 12쪽
17 악인은 심판 받는다 23.12.20 34 3 12쪽
16 구원받지 못한 자 23.12.19 30 3 11쪽
15 악마숭배자 23.12.18 31 3 12쪽
14 밤은 깊어간다 23.12.16 30 3 11쪽
13 고대 마물 23.12.15 27 3 12쪽
12 비밀 통로 23.12.14 31 3 12쪽
11 도둑 길드 23.12.13 30 3 11쪽
10 초승달 밤의 도둑고양이 23.12.12 42 3 14쪽
9 진위 조사대 23.12.11 41 3 12쪽
8 유도 질문 23.12.09 43 4 12쪽
7 야간 습격 23.12.08 44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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