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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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작품등록일 :
2023.12.01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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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5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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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30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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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현실에 불려갔다

DUMMY

공업지구에는 쓸만한 물건이 제법 있었다.

마법석은 물론이고, 각종 광물과 금속으로 넘쳐났다.

원재료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공할 수 있는 공업사와 세공사도 꽤 있었다.

과연, 예전에 번성했던 소왕국의 중심수도였다.


“변방 도시치고는 제법이네. 이 정도면 어지간한 마도 장비는 만들어낼 수 있겠어.”

“그러게. 나중에 필요하면 하나 장만해야겠어.”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품 안엔 이미 많은 쇼핑백이 있었다.

함께 둘러보며 구매한 거긴 했지만, 참 종류별로 다양하게 모았다.


“그거, 흑마법을 연구하려고 산 거 맞지? 내 부탁을 들어주려고 말이야.”

“왜요, 의심되면 가져가시던가요. 어차피 제 돈으로 산 거지만.”

“네 돈이 아니라 리제의 돈이겠지. 에스터리츠 가문의 장녀 말이야.”

“그게 바로 기억을 잃고 살던 제 인격이니까 저나 다름없어요. 지금 일시적으로 분리된 건 서로를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죠.”


루비아의 말이 맞았다.

언젠가는 둘이 합쳐져 하나의 인격체로 통합될 것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 있다.


“널 불러낸 건 나지만, 리제의 삶도 존중하도록 해. 네가 말했던 것처럼 리제는 또 다른 너 자신이니까.”

“알겠어요. 그런데 호칭이 계속 신경 쓰이네요. 리제에게는 그렇게 불러도 되지만, 저는 전처로서 제대로 불러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떻게 불러주길 바라는데?”


루비아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그녀는 발걸음을 멈춘 후 고개를 돌려 날 바라봤다.


“당연히 부인, 이라고 불러야죠. 아니면 하다못해 자기라고 하던가.”

“남들이 오해하잖아. 너는 지금 에스터리츠 가의 처녀야. 어떤 혼담도 오가는 상태가 아니지.”

“그러면 하는 수 없네요. 절 아가씨, 라고 경어로 부르세요. 아니면 마나님이라고 하시던가.”


무엇 때문에 호칭에 그리 목을 매다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녀는 자신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여겨주길 원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저 지나간 인연이라고 치부하며 부려먹듯 대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단 의미다.


“그러면 왈가닥 아가씨라고 할게. 그건 리제든 너든 공통된 사항이니까.”

“쓸데없는 수식어는 좀 빼시고요. 그러니까 여자에게 인기가 없는 거라고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이번 생에는 누굴 만났는지 모르잖아.”

“당신, 아무도 안 만났잖아요. 보면 모를 것 같아요?”


루비아가 내 왼손 약지를 가리켰다.

그녀의 말대로 반지가 없었다.

누구와도 혼사를 진행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왕을 물리친 지 얼마 안 되었어. 그전까진 여유가 없었고.”

“하지만 초월 마법에 휘말려서 10년 후의 미래로 와버렸죠? 그러니까 당신은 모태솔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 점은 인정하지. 하지만 네가 있잖아.”

“그러니까 저에게 깍듯이 대하시라고요. 당신 따위를 제대로 바라봐주는 여자는 없으니까.”


말은 저렇게 하지만 불안한 모양이었다.

내가 다른 여자와 연애감정을 느끼거나 할까봐.

경험상 붉은 머리칼의 여인들은 질투심과 독점욕이 상대적으로 강하다.


‘그래서 붙잡혀 살았었지.’


생전에 루비아는 신성 교단하고도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교리상 7인의 영웅은 후계자를 많이 양성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정실 말고도 첩을 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루비아가 결사반대하는 통에 성직자들이 매번 진땀을 빼고 돌아갔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여러 번 임신해야 했는데 그 횟수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그 후손이 살아가고 있을지 몰라.’


마안을 개방하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평화로운 시대만 계속되었다면 지금쯤 후손의 수가 매우 많을 테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동안 세상이 10번이나 멸망할 뻔했고 영웅의 가계는 마물에게 먼저 노려지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신성 교단이 가능한 많은 후계자를 남기라고 강조하는 것이었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요?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아무것도 아니야.”

“당신, 뭔가 이상한 생각 했죠? 보면 알 수 있어요. 그 미묘한 표정.”

“신경 쓰지 마.”


이래서 전처는 귀찮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금방 알아치고 반응해온다.

마음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을 때, 반대쪽 길목에서 병사들이 나타났다.

녀석들은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유지하면서 걸어오더니 우리 앞에 멈춰섰다.


“시로네 님, 잠시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도시를 순찰하는 치안유지대는 아니었다.

갑옷에 새겨진 문양으로 보아하니 왕실수호대 같다.

이름하여 로얄가드.

상대적으로 실력이 뛰어난 자들로만 구성된, 왕의 친위대라고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저희의 왕께서 중요한 용무로 친히 뵙고자 하십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양손에 들고 있던 짐들을 내밀었다.


“이건 에스터리츠 백작가에 갖다 줘. 잡동사니 싸들고 왕을 알현할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겠군요. 저희가 옮겨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앞장서. 뒤따라갈 테니까.”

“옆에 계신 분은 에스터리츠 가의 영애이신 것 같은데, 저희가 저택까지 바래다 드릴까요?”

“그러도록 해. 이 아가씨가 괜히 끼었다간, 소란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순간 발등에 뭔가 찍히는 통증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헛소리하지 말라며 루비아가 옆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그럼 다음에 또 만나, 왈가닥 아가씨.”


그녀와는 오랜만의 재회였다.

다시 만나는 날을 기약하며 나는 손을 흔들었다.


***


알현실은 무거운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왕녀가 사라진 지도 며칠이나 지났으니, 분위기가 심각한 건 당연했다.


“전부 물러나 있으라.”


권좌에 앉아있던 왕이 말했다.

그러자 가신을 비롯한 모두가 재빠르게 알현실을 빠져나간다.


‘어지간히도 살얼음판이었나 보군.’


그도 그럴 것이, 단순히 왕녀만 사라진 게 아니었다.

성벽 내부의 핵심 인물이 귀족과 결탁하여 상위 악마를 소환하려 했다.

만약 성공했더라면 대재앙이 일어났을 거고, 도시가 절멸의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소동을 일으킨 주동자가 잡히지 않았단 점이다.


‘이러한 혼란이 계속되면 왕의 무능함이 돋보이겠지. 그러면 왕실의 권위가 실추된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신성 교단에 도움을 요청해야만 했을 것이다.

예로부터 신성 교단은 왕실의 견제수단이었기에 사이가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총체적인 난국 상태가 되면 서로 손을 잡을만한 이해관계가 충분해진다.


‘신성 교단은 나를 해결자로 추천했겠지. 다름 아닌, 7인의 영웅 중 1명이니까.’


이로써 내 비밀을 알게 된 사람이 하나 늘은 셈이었다.

나는 권좌에 앉아 무언가를 깊이 생각 중인 노인을 올려다봤다.

성벽 도시, 메르헨의 왕.

코르시우스 메르손이었다.


“마왕은 확실히 토벌한 것이 맞는가, 북부 영지 출신의 영웅이여.”


이윽고 코르시우스가 입을 열었다.

신성 교단에게서 대략적인 건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내게 직접 확인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렇다. 그건 내가 확실히 보증하지.”

“헌데, 마물은 어찌하여 더 기승을 부리고 이교도들의 난동은 더 대담해진단 말인가?”


모든 책임을 내게로 전가하고 싶을 터였다.

하지만 그게 억지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나는 태연하게 받아쳤다.


“마왕도 계속해서 당하다 보면 다른 궁리를 하지 않겠어? 정 궁금하면 마계로 직접 가서 물어보지 그래?”


다른 가신들이 보면 무엄하다 하며 꾸짖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일국의 왕을 상대로도 절대 위축되지 않을 만큼의 명성을 지니고 있다.

영웅으로서의 내 신분은 신성 교단에서 보증하고 충분한 권위를 실어준다.

흑마법을 사용한단 이유로 알게 모르게 배척당하기는 한다만, 기본적으로는 영웅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코르시우스도 내 언행을 지적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


“그래도 영웅이라면 짐작 가는 바가 있을 것이다. 성직자들의 말에 의하면 서북쪽의 산맥을 정벌해야 한다는데 사실인가?”


계속해서 내게 사실 확인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만큼 왕의 입장에서는 이곳의 누구도 신용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교역로가 막혀서 신성 교단조차도 지금은 같은 교구 단위로만 활동하는 중이다.

교황의 말이 대륙 전역에 미치지 못하다 보니, 교단 내부적으로 통제가 잘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7인의 영웅 중 하나인 나만큼 믿을 만한 자가 없을 것이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골치 아픈 문젯거리가 그곳에 있다. 계속 내버려 두면 성벽 도시를 위협해오겠지.”

“그 문젯거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설명해줄 수 있겠나?”


코르시우스는 내 눈을 들여다봤다.

그가 가장 관심있어 하는 내용이라는 의미였다.

아마도 왕녀의 행방과도 연관성이 있다 생각하는 것일 테지.

내 생각도 그러했다.


“어떤 흑마법사들에 의해 고위 악마가 소환되었다. 아마도 마왕이 봉인된 이후였겠지.”

“고위 악마라고?”

“그렇다. 놈들은 나도 모르는 수단을 동원해서 대륙을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봐도 전례가 없는 일이지.”

“토벌한다고 떠났던 성직자들이 전멸하다시피 한 이유가 있었군. 그렇다면 다시 묻겠다, 영웅이여.”


코르시우스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한층 더 무거워진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너는 이 문제를 해결 가능한가? 만약에 나와 교구 성직자들의 지원을 받는다면 말이다.”


이 질문을 하려고 지금까지 빙빙 말을 돌린 거였다.

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변수가 있으니,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못한다면 다른 사람도 못하는 거겠지.”


여기서 괜히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줬다가 실패하고 돌아오면 곤란했다.

물론, 실패하면 생존해서 귀환하기도 어렵겠지만 말이다.

내가 모호한 답변을 내놓자, 코르시우스는 재미있단 반응을 보였다.


“허허. 과연, 예로부터 몇 번이고 난관을 헤쳐온 영웅만이 할 수 있는 말이로군.”


지금까지 보여줬던 모습과는 달리, 허심탄회한 웃음이었다.

의심으로 가득했던 목소리에 조금이나마 신뢰가 담기는 듯한 기분이다.

주위의 인물들조차 불신하며 고독하게 일생을 살아왔던, 노년의 왕은 자신을 대등하게 바라보는 영웅에게서 무엇을 느낀 것일까.

잘은 몰라도, 그것은 똑같은 고독함을 공유하는 자에 대한 연민과도 같은 것일 터였다.


“어렸을 때, 동화책에서 7인의 영웅이 떠난 모험을 보았었지. 그 중엔 흑발에 신비한 눈을 지닌 소년도 있었어.”

“내 이야기로군.”

“영웅들이 난세에 환생한단 비밀을 듣고 나서 기대해왔지. 언젠가 그 소년을 만나게 될 날이 있을까? 하고 말이야.”


코르시우스는 아무래도 나를 좋아했던, 상당히 드문 취향의 사람이었던 것 같다.

7인의 영웅 중에선 인지도도 가장 떨어지고, 무슨 활약을 했는지도 모르겠는 흑마법사.

그런 존재를 왜 만나고 싶었는지 이유가 궁금해졌다.


“왜 하필 나지? 인기는 검성 카이젤이나 성녀 알리사가 더 많을 텐데.”

“글쎄. 딱히 이유는 없었다. 굳이 대자면, 영웅 중에서도 가장 고독한 영웅처럼 보였기 때문이랄까.”

“그렇다면 제대로 봤군. 나만큼이나 저평가된 영웅도 없지.”

“만나서 즐거웠다, 시로네. 비록 죽음이 가까워진 무렵에나 이뤄진 소원이지만 이 순간을 잊지 않으마.”


코르시우스는 회상에 젖은 목소리로 진심을 털어놓았다.

어렸을 적에 보았던 동화책의 모습과 똑같은 소년으로 나타나서일까.

당시에 품었을 순수한 동경심이 오랜 세월을 넘어 확실히 전해져온다.


“더 늦지 않아서 다행이군. 그러면 너를 보지 못했을 테니.”

“시간이 얼마 안 남았긴 하지. 그러니 내 딸을 부탁한다, 영웅이여. 이 도시에 어둠을 몰고 온 악마를 물리치고 그녀를 구원해다오.”


7인의 영웅이라면 누구나 이런 분위기에 약하다.

하지만 어차피 나서서 처리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둬. 최선을 다해볼 테니까.”


필요한 준비는 미리 해두었다.

이제, 모두가 선망하는 동화 속의 장면이 하나 더 추가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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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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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숲속에서의 대화 24.01.15 13 2 12쪽
35 숲속의 악마 24.01.12 12 1 12쪽
34 에리나 브르타니엔 24.01.11 15 1 12쪽
33 환영의 숲 24.01.10 14 2 12쪽
32 추방된 자들 24.01.09 15 1 12쪽
31 황무지에서의 전투 24.01.08 17 1 11쪽
30 성벽 밖으로 24.01.05 15 1 11쪽
29 유리우스 제르가딘 24.01.04 20 1 12쪽
28 정예 인원을 뽑았다 24.01.03 19 1 12쪽
27 협상을 해보자 24.01.02 22 1 12쪽
» 알현실에 불려갔다 23.12.30 26 1 12쪽
25 부하를 팔아먹었다 23.12.29 21 1 12쪽
24 재각인 23.12.28 25 2 12쪽
23 할 일은 해야 한다 23.12.27 23 1 12쪽
22 귀찮은 일은 싫다 23.12.26 23 2 13쪽
21 리제 에스터리츠 23.12.25 25 2 12쪽
20 지하 고문실의 독대 23.12.23 28 2 12쪽
19 사라진 왕녀 23.12.22 26 2 12쪽
18 오래된 기억 23.12.21 36 3 12쪽
17 악인은 심판 받는다 23.12.20 34 3 12쪽
16 구원받지 못한 자 23.12.19 30 3 11쪽
15 악마숭배자 23.12.18 31 3 12쪽
14 밤은 깊어간다 23.12.16 30 3 11쪽
13 고대 마물 23.12.15 27 3 12쪽
12 비밀 통로 23.12.14 31 3 12쪽
11 도둑 길드 23.12.13 30 3 11쪽
10 초승달 밤의 도둑고양이 23.12.12 42 3 14쪽
9 진위 조사대 23.12.11 41 3 12쪽
8 유도 질문 23.12.09 43 4 12쪽
7 야간 습격 23.12.08 44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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