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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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작품등록일 :
2023.12.01 17:08
최근연재일 :
2024.01.15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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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8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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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에서의 전투

DUMMY

성문이 열렸다.

병사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봤다.

황량한 들판에는 인류가 일구어놓은 무엇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


“말 그대로 황무지구먼요.”

“성벽의 보호가 없는 곳은 죽음의 땅일 뿐이야.”


데커와 타르샤가 낯빛이 어두워졌다.

지금까지 도시 안에서 살아왔던 자들이라면 두려워할 법도 했다.


“언젠가는 우리가 되찾아야 할 영토입니다.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요.”


아델레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실한 교인이라면 아델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카린.

카린은 그저 살아남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었다.


“에, 제대로 챙겨 온 거 맞나? 이건 이건 악마를 봉인하는 마법석이고···”


마법석을 비롯해 잡다한 등짐을 운반하는 일은 카린과 라일라가 맡고 있었다.

적당히 무장만 하면 되는 병사들과 달리, 마법사는 은근히 챙길 게 많다.

뭐, 적당히 될 대로 되란 식으로 할 거면 마도구 하나만 들고 가도 되겠다만.


‘그러기에는 쉽지 않은 여정이 될 것 같다.’


지금 상황만 놓고 보면, 적진에 대놓고 쳐들어가는 격이었다.

놈들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왕녀를 공공연하게 위협하다가 납치할 정도로 도시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주동자 일부가 잡히고 교단에서 잔당을 이 잡듯 뒤졌다고는 하나, 부족할 터였다.

뒷골목에 숨어 감시책 역할을 하는 끄나풀까지 완전히 박멸했을지는 의문이다.


‘지금쯤이면 상층부까지 보고가 올라갔겠지.’


놈들도 어떤 식으로든 대비를 할 터였다.

이쪽으로 마물을 무더기로 보내던지, 함정을 파던지.

그런 수작질을 계속 당해서 불리한 건 우리다.

결국, 시간을 오래 끌어서 좋을 건 없었다.

조금 무리가 따르더라도 서북쪽 산맥까지 강행군을 할 생각이다.


“평소보다 더 행군 속도를 내라고 전해. 위험한 지역이라고 우회하지 말고 최단 거리를 선택해서 가라고도 해줘.”


병사 하나를 불러 선두에서 인솔 중인 유리우스에게 보냈다.

그러자 곧 답변이 돌아왔다.


“바라던 바라고 합니다, 대장님.”


역시나 유리우스는 나처럼 강행돌파를 할 생각이었다.

녀석이야 융통성이 없어서 그런 것이지만, 서로 의견이 일치한다는 게 중요하다.


‘그래도 부대장의 지위를 줬으니 웬만한 명령은 잘 따르겠지.’


성기사가 직업인 놈들의 장점이 하나 있다면, 상명하복의 군대 시스템을 좋아한단 점이다.

일단 위계질서를 잡아 놓기만 하면 어지간해서는 말을 듣는 편이다.

오러와 신성 주문을 동시에 사용한다며 온갖 잘난 척은 다 하지만, 실상은 꽤 단순한 녀석들이었다.


“생각보다 잘 길들이셨군요. 마법사의 말은 잘 듣지 않는 사람이었는데요.”


아델레가 나를 칭찬했다.

그녀는 나란히 말을 타고 달리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데 야인들에 대해서는 알고 계신가요? 성벽이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자들을 통칭하는 말입니다만.”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하다가 조금 듣기는 했습니다. 도시에서 추방된 자들이라고 하더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범죄를 저질렀거나, 아니면 정치적으로 내몰렸거나 해서 쫓겨난 족속들.

그들이 어떻게 미개척지에서 살아남았는진 모른다.

하지만 예상컨대, 그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삶일 것이다.


“야인 무리를 만나면 절대 가까이 접근을 허락하시면 안 돼요. 전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로 같은 인간을 약탈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거든요.”


아델레가 경고하는 바는 알 것 같았다.

생존을 위해 인간이길 포기한 자들이니, 신용해서도 안 되고 그럴듯한 말에 현혹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수녀님. 약탈당하는 쪽은 놈들일 겁니다.”

“야인을 만나면 가진 걸 빼앗으실 생각인가요?”

“곱게 보낼 생각은 없습니다. 이쪽의 위치가 공유될 수도 있으니까요.”


야인들은 아마도 한곳에 뭉쳐있지 않고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는 편이 마물의 공격에 대응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만약 놈들 사이에서 우리의 행선지가 실시간으로 공유된다면 곤란할 수도 있다.


“야인들이 이교도 무리와 협력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죠. 수녀님께서는 가호를 통해 보신 게 없습니까? 그와 관련해서요.”

“일부 장면을 보긴 했습니다만, 그들 전부가 가담한 것인지, 아니면 일부만 해당하는 것인지는 모릅니다.”


이래서 성직자들은 골치가 아프다.

엄격한 선악론을 지니고 있지만, 자유의지라는 명목으로 매번 모호한 회색지대를 남겨둔다.

하지만 어쩌면 아델레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었다.


“야인의 경우에도 만에 하나 협상의 가능성은 남겨두겠습니다. 필요에 따라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어차피 이쪽에 우호적인지 적대적인지는 보면 알 수 있었다.

엘카만 가문의 심상 마법.

인간의 영혼을 본질적으로 투시함으로써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읽어내는 게 가능하다.


“저는 사제로서 단지 조언을 드릴 뿐입니다. 모든 결정 권한은 시로네 님에게 있어요.”


이번에도 아델레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계속해서 양보하는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내가 교리상으로 구원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창세신의 선택을 받아 지상을 구원하는 7인의 영웅.

비록 성녀라고 할지라도 구원자보다는 한 단계 낮은 칭호였다.


‘물론, 그렇다고 교단 내에서의 영향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환대하면서 불러들인다고 넙쭉 따라갔다간 손해였다.

영웅이라는 이유로, 교단 내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골치 아픈 문제를 다 떠넘겨버리니까.

실제로 아델레도 내게 성벽 도시를 지켜줄 것을 부탁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내가 도움을 받을 차례다.’


처음부터 이것은 거래였다.

아델레가 요청한 것들을 해주는 대가로 나도 협력을 받는 내용이었다.

첫 번째가 바로 흩어진 동료의 행방을 알아봐 주는 것.

둘째는 대륙을 혼란으로 이끈 주범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

현재로서는 오로지 아델레만이 가능한 일들이었다.

그녀는 여신의 가호를 이용해 과거를 들춰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어라? 저기에 뭔가 불을 사용한 흔적이 있는데요?”


내 뒤에 타고 있던 라일라가 한쪽을 가리켜보였다.

그녀의 말대로 노숙을 위해 장작불을 지폈던 그을림이 남아있었다.


“이런 노지에서 캠핑을 할 녀석들은 야인밖에 없겠네요. 긴장하는 편이 좋겠어요.”


카린이 경계하는 눈초리로 말했다.

그녀는 아델레의 뒤에 탄 채로 주위를 여러 차례 두리번거렸다.


“뭔가 사람이 살만한 마을 같은 건 보이지 않는데. 여기에서 머물렀던 야인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요?”


나는 카린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단순히 이런 흔적만으로는 야인의 행방을 알기 어려운 탓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타르샤.”

“네? 저 불렀어요?”

“추적해봐.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여도적 출신인 타르샤라면 작은 흔적만으로 뒤쫓는 것이 가능했다.

나는 병사들을 잠시 쉬게 한 후, 타르샤가 보고를 올리기를 기다렸다.


“음, 전체적으로 훑어봤는데요. 뭐하는 사람들인진 모르겠지만 북쪽으로 간 것 같아요.”


타르샤는 확신에 차있었다.

그녀와 함께 나는 북쪽을 바라봤다.

애초에 우리가 가도를 따라 향하던 방향과 얼추 비슷하다.


“설마 놈들도 서북쪽 산맥으로 향하는 건 아닐 테고.”


무언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찜찜한 표정으로 서 있는데, 아델레가 말을 걸어왔다.


“시로네 님, 병사들을 일으켜야 할 것 같아요. 마물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마물?”


고개를 돌리니 서북쪽에서 검은 무리가 들끓는 것이 보였다.

어림잡아 삼백여 마리.

야인들과 관련이 있는진 모르겠다만, 일단 처리하는 수밖에는 없다.


“유리우스에게 전해. 방어 진형으로 전환하라고.”


성벽 도시의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래도 나름 정예인 자들만 뽑아와서인지, 허겁지겁 서두르다 실수하는 모습은 없다.

마물이 떼거지로 몰려오는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게 대열을 갖추고 맞서 싸울 준비를 한다.


“너희들은 내 곁을 지키도록 해. 아마도 마물들은 이쪽을 노릴 거야.”


하급 마물이라 하더라도 무지성으로 달려드는 게 아니다.

배후에서 조종을 하는 녀석이 있으면 혼란한 틈을 타 지휘관을 노리곤 한다.

이런 경우엔 거의 확실하다 할 수 있었다.


‘솔직히 내가 호위를 받을 필요는 없다만.’


난전 중에는 아직 어린 카린과 라일라까지 신경 쓸 여유가 부족했다.

물론 아델레가 있긴 한데, 그녀도 경황이 없을 건 마찬가지일 테니까.


“저희만 믿으십쇼, 대장님.”

“안전하게 호위해드리죠.”

“접근하는 마물은 전부 때려 눕히겠습니다.”


데커, 타르샤, 이실롯.

훈련소에서부터 함께 해왔던 대원들이 내 앞으로 나섰다.

아직 쓸만해지려면 한참 멀었다만, 그래도 이렇게 세워놓고 보니 보기에 나쁘지 않다.


‘어차피 함께 나아가는 입장이다. 너희에게도 시간은 줘야겠지.’


누군가는 시련과 맞서면서 무너지고 좌절하겠지만, 그걸 극복하는 자들도 있다.

나는 그런 부류의 인재들을 꽤 잘 알아보는 편이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인간성에 대한 통찰력이 생겨났다고나 할까.

내가 주위에 두르고 있는 녀석들은 전부 투자할 가치가 있다.

애초에 그렇지 않았다면 성벽 밖으로 데리고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적당히 페이스 조절하면서 싸우도록 해. 너희들이 한두 마리 더 잡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개체 수가 조금 많긴 하다만, 나 혼자서도 마음만 먹으면 해치울 수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적당히 혼란에 빠진 척할 필요가 있어.’


마물을 이리로 보낸 녀석이 근처에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악마를 숭배하는 흑마법사일 수도 있고, 그와 결탁한 야인일 수도 있다.

만약 내가 압도적인 전력으로 한 번에 상황을 정리해버리면, 놈은 숨어 있는 채로 꽁무니를 빼겠지.

하지만 어느 쪽이 우세한지 판단이 잘 안 서면 가까이 다가오려고 할 것이다.

내가 노리는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수녀님도 잘 관찰해주세요. 단순히 마물만 보내지 않았을 수 있으니까요.”

“네, 탐지 마법을 써서 인근 일대를 살펴보는 중이에요.”


아델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마물의 군세가 밀려와 방어 진영에 맞부딪쳤다.


채챙챙챙!


병사들이 휘두르는 장검이 전장의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며 불협화음을 냈다.

개중엔 마물에게 당해 쓰러지는 병사도 있고, 부상당한 동료를 구하려는 병사도 있었다.

지속적으로 병력 손실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나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이런 쪽으로는 감이 좋은 편이라서 말이지.’


고작 마물 300마리를 상대로 완승을 거두는 것보단, 마물의 배후를 캐는 것이 더 남는 장사다.

기동성 마물이 가까이 접근해와 노골적으로 나를 노렸지만, 부하들이 처리할 때까지 내버려뒀다.

꽤 시간이 지났다 싶었을 때.


“찾아냈어요. 저만치서 은신하고 다가오는 녀석이 있네요.”


아델레가 불청객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나는 곧장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푸른 불꽃을 날려보냈다.


화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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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6 숲속에서의 대화 24.01.15 13 2 12쪽
35 숲속의 악마 24.01.12 12 1 12쪽
34 에리나 브르타니엔 24.01.11 15 1 12쪽
33 환영의 숲 24.01.10 14 2 12쪽
32 추방된 자들 24.01.09 15 1 12쪽
» 황무지에서의 전투 24.01.08 17 1 11쪽
30 성벽 밖으로 24.01.05 15 1 11쪽
29 유리우스 제르가딘 24.01.04 20 1 12쪽
28 정예 인원을 뽑았다 24.01.03 19 1 12쪽
27 협상을 해보자 24.01.02 22 1 12쪽
26 알현실에 불려갔다 23.12.30 25 1 12쪽
25 부하를 팔아먹었다 23.12.29 21 1 12쪽
24 재각인 23.12.28 25 2 12쪽
23 할 일은 해야 한다 23.12.27 23 1 12쪽
22 귀찮은 일은 싫다 23.12.26 23 2 13쪽
21 리제 에스터리츠 23.12.25 25 2 12쪽
20 지하 고문실의 독대 23.12.23 28 2 12쪽
19 사라진 왕녀 23.12.22 26 2 12쪽
18 오래된 기억 23.12.21 36 3 12쪽
17 악인은 심판 받는다 23.12.20 34 3 12쪽
16 구원받지 못한 자 23.12.19 29 3 11쪽
15 악마숭배자 23.12.18 30 3 12쪽
14 밤은 깊어간다 23.12.16 30 3 11쪽
13 고대 마물 23.12.15 27 3 12쪽
12 비밀 통로 23.12.14 30 3 12쪽
11 도둑 길드 23.12.13 30 3 11쪽
10 초승달 밤의 도둑고양이 23.12.12 41 3 14쪽
9 진위 조사대 23.12.11 40 3 12쪽
8 유도 질문 23.12.09 43 4 12쪽
7 야간 습격 23.12.08 44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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