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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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작품등록일 :
2023.12.01 17:08
최근연재일 :
2024.01.15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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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5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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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밖으로

DUMMY

즐거웠던 만찬이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별로 잠이 오지 않았기에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는 신경 쓸 게 많아지겠군.’


지금까지는 성벽 안에서만 지내왔었다.

그래서 내부적인 문제를 해결하면 됐다.

하지만 성벽 밖으로 나서고 나면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가장 우선적으로 경계해야 하는 것은 바로 마왕 봉인 직후에 휘말렸던 초월 마법이다.

시공간을 왜곡하고 7인의 영웅까지 휘말리게 했던 대이변.

그로 인해 무엇이 변했는지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단순히 10년이라는 세월만 흐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가능성은 충분했다.

다만, 그런 것은 직접 맞닥뜨리기 전엔 알 수 없다.

현재로선 시원찮은 악마숭배자 몇 명 만난 게 전부였다.

놈들을 심문하여 밝혀낸 사실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확실한 목표는 생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왕의 눈은 파괴해야 해.’


마왕의 눈이 있는 한, 에뮤리아 대륙에 평화는 없을 것이었다.

본래 마왕만이 다룰 수 있는 전설적인 유물.

어떻게 이쪽으로 가져온 건진 모르겠지만,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마왕성에 숨겨져 있었던 물건이었는데, 이제는 접근이 가능해졌다.


“여러모로 고민이 많으신 모양이군요.”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불청객의 얼굴을 쳐다봤다.

루비아.

늦은 시간이라 그녀는 에스터리츠 백작가의 저택에 있어야 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갑자기 찾아오고.”

“저는 괜찮아요. 당신에게 진 것 때문에 기분 나쁜지 백작이 잔소리를 좀 하긴 했지만, 그게 다였어요.”

“그럼 심심해서 왔나 보군.”

“당신이 이러고 있을 것 같길래요. 뭔가 마음의 각오가 필요한 전날에는 잠을 못 이루곤 했었죠.”


역시 루비아는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나는 씁쓸하게 웃은 후 왕궁 정원의 벤치에 다시 기대어 앉았다.


“전에 내 기억을 보았으니 잘 알 테지. 지금까지는 그저 마왕을 봉인하는 임무의 연속이었어.”


환생하고 나면, 성장기가 지난 이후의 미래가 거의 정해져있었다.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해야만 겨우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러한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영혼이 마모되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정말로 살아있는지조차 무감각해질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졌고, 세상은 내가 모르는 것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곤란한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반복되는 여정에 변화가 생겨나서일까.

그러고 보니, 누군가의 전생 기억을 일깨운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쩌면 이번 생에는 당신을 구원할 수도 있겠군요. 그런 심경의 변화를 느끼는 걸 보면.”


루비아가 내 옆에 앉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름 모를 유성 하나가 기다란 꼬리를 흘리며 떨어졌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자리를 지켰다.


“첫 번째의 기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나요?”


정적을 깬 쪽은 루비아였다.

그녀가 묻는 건 환생이라는 굴레에 들어서기 전의 일들이었다.

신화시대에 7인의 영웅이 떠났던 최초의 모험.

여신을 만나 권능을 부여받고, 맹세의 언약을 맺었던 동화 속의 이야기다.


“중요한 장면만 드문드문 떠오르고, 완전히는 돌아오지 않아.”

“이상한 일 아닌가요? 당신은 전생을 망각하지 않는데요. 어떻게 최초의 모험만 그럴 수 있죠?”

“어쩌면 내가 잊어버리겠다고 스스로를 속박한 것일 수도 있어. 무슨 이유인지는 짐작이 안 가지만.”

“기억해내려고 노력해봐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시답잖은 이유였을지도 모르니까요.”


루비아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봤다.

나는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덕분에 대륙의 평화가 이어져 올 수 있었잖아. 내가 영웅들의 파티에 합류하지 않았으면 문제가 발생했을 거야.”

“하지만 지쳐가고 있었죠. 당신은 새로운 해결법을 찾아내야 해요. 이번 생에 반드시.”

“새로운 해결법이라.”

“잘 생각해보도록 해요. 저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할 테니까.”


말을 마친 후 루비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녀를 올려다봤다.


“뭐야, 가게?”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어요. 전처로서 멀리 떠나는 남편을 배웅나온 정도죠.”

“눈물 나게 고맙군.”

“빈정거리지 좀 마요. 아, 그리고 에스터리츠 가문에 대해 알아낸 게 하나 있어요.”


뭔가 떠올랐는지, 루비아는 발걸음을 멈칫했다.

그녀가 뒤돌아보며 말을 다시 이어나갔다.


“에스터리츠는 제 가문인 에스테리아 가문의 분파예요. 지금 가주인 라크슈가 5대째인 것 같더군요.”

“어떻게 알아낸 거지?”

“저택의 장서실에 있는 고서를 뒤적여보니 나오던데요? 어쩐지, 생전의 저 자신과 비슷한 외모인 이유가 있었어요.”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환생이 반드시 격세유전을 거쳐서 이루어진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강한 구속력이 있는 운명의 경우엔 이야기가 달라지지.

내가 알기로 에스테리아 가문은 예전부터 영웅들의 가문과 피를 섞어왔다.

리제와 만나게 된 것도 아마 그 영향일 것이다.


“확실히, 혈통이 지닌 구속력은 무시할 수 없군.”

“그래서 말인데, 당신이 휩쓸렸다는 초월 마법도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요?”

“무슨 말이야? 설마···”


뜻밖의 지적에 나는 순간 놀랐다.

생각해보니 7인의 영웅이 한자리에 모여 각자의 권능을 쏟아부었었다.

강대한 존재인 마왕에 맞서서 말이다.

혼돈과 질서의 대충돌.

그것만으로 어떠한 술식의 발동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죠? 지금까지 그런 형태의 초월 마법은 목격된 적이 없어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죠.”

“분명 동료들이 전원 생존하긴 했어. 그전까지는 누군가 최소한 한 명씩은 죽음을 맞이해서 마왕이 봉인될 때까지 함께하지 못했지.”

“바로 그거예요. 잘은 몰라도 누군가 오랫동안 준비해온 계획일 거예요. 그런 짓을 벌이려면 사전에 해둬야 할 일이 많으니까요.”


음모를 꾸밀 시간이라면 충분히 있었다.

우리가 마왕의 군세에만 신경 쓰는 동안, 이단아들의 비밀결사인 <그리토리앙> 같은 무리가 활개치고 있었을 테니까.

지난 환생동안 간과하고 있었던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고마워, 루비아. 덕분에 조금 단서를 얻은 것 같아.”

“감사의 표시는 나중에 한꺼번에 받겠어요. 그때까지는 잘 서로 지내도록 해요.”

“의외로 다시 결혼하자는 이야기는 안 하는군?”

“당연하잖아요? 7인의 영웅이 당해버린 대혼돈의 시대인데. 당신이 예기치 않게 죽어버리면 저는 미망인이 되어버리는 걸요?”


루비아는 놀리듯이 혀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총총걸음으로 자리를 떠난다.


“미망인이라, 그렇군.”


7회차의 그녀와는 조금 일찍 사별하고 말았다.

남은 생명력이 많이 남아있지 않았던 탓이다.

나도 그런 아픔을 다시 남겨주기는 싫다.


“부디 이번엔 정답을 찾길 바라, 루비아.”


영혼의 소생.

그와 관련된 연구를 마칠 수만 있다면, 더는 시한부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나는 바쁜 몸.

누군가가 대신 해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점점 멀어져가는 루비아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침묵했다.


***


날이 밝았다.

원정대로 편성된 이들은 제각기 무장을 한 채 왕궁 앞으로 모여들었다.

현왕 코르시우스는 강단 위에 서서 일장 연설을 했다.


“그대들의 출정은 모두가 기억할 것이다. 비록 병력의 규모는 작으나 이번 임무는 내 딸을 구출해오는 것인큼···”


날을 새서 그런지, 집중해서 듣기엔 조금 졸렸다.

하품이 나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연설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럼 무운을 빈다. 그대들의 앞날에 창세신 아르테시아 님의 축복이 가득하길.”


말을 마친 코르시우스가 나를 바라봤다.

이제 병사들을 이끌고 진군하라는 의미였다.


“부대 앞으로!”


부대장인 유리우스가 최전방에서 나 대신 구령을 외쳤다.

그러자 대기 중이던 병사들이 오와 열을 맞춰 가도를 따라 행진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출발이구먼요.”

“조금 긴장되네. 술이 덜 깬 기분이야.”

“얼마나 많은 마물과 대면할지 궁금하군.”


내 직속 부하들도 최후미에서 대열을 따라 나선다.

말을 타고 이동하며 가도 양옆으로 몰려온 인파를 눈으로 훑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우리가 출정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중이다.


‘역시 나왔군, 백작.’


개중엔 라크슈 백작과 루비아도 있었다.

에스터리츠 가문의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을 향해 마도구, 에스페란자를 들어올렸다.


‘가문의 보구를 빌려준 걸 너무 아까워하지 말라고.’


나중에 내가 손수 사용했단 사실이 알려지면, 더 값어치가 뛸 물건이었다.

신성 교단이 은폐해버려서 그것도 없었던 일이 되어버리려나?

아무튼, 에스페란자는 임무가 끝날 때까지 잘 사용해주겠다.


‘그건 그렇고, 수상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군.’


악마숭배자들이 붙잡혔다지만, 아직 잔챙이는 성벽 안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어디선가 숨어서 이쪽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겠지.

하지만 상관없었다.

놈들의 본거지로 대놓고 쳐들어가는 상황이다.

척후병이 있든 말든 별 영향은 없을 터였다.


“저희가 출정할 때 성문을 잠시 개방한다고 하던데요? 마크셔 대장도 얼굴을 볼 수 있을 거예요.”


뒤에 타고 있는 라일라가 말했다.

그러자 반대편의 말에 올라탄 카린이 시큰둥하게 덧붙인다.


“같이 가면 안 되는 걸까? 마크셔 대장도 굉장히 강하다고 들었는데.”


분명, 마크셔가 원정대에 편성되었다면 전력상으로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성벽을 수비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있다.

치안대장 아들러가 내란죄로 붙잡혀간 상황이라, 아무래도 자리를 비우긴 곤란했다.


“우리끼리도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안 그런가요, 시로네 님?”


옆에서 나란히 말을 몰고 있던 아델레가 물었다.

그녀는 카린을 뒤에 태운 채로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여신의 가호를 통해 무언가 본 거라도 있습니까? 아니면 계시라도?”

“어젯밤에 꿈을 꿨어요. 대륙에 흩어진 영웅들의 모습이 차례로 나오더군요. 아르테시아 님께서 이제 본격적으로 당신을 이끌려는 모양이에요.”


7인의 영웅에 대한 근황이라면 상당한 소득이었다.

물론, 단순히 간밤의 개꿈일 수도 있겠지만 수녀도 확신하는 이유가 있을 터다.


“여기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좀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흩어져 있는 영웅들이요.”

“음, 잠시만요. 원소 술사 에리나는 조만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다음 차례는 마궁사 프리실라, 혹은 암살자 루시우스가 되겠군요.”


에리나와 재회하는 건 사실상 확정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프리실라와 루시우스는 어느 쪽과 먼저 만날지 선택해야 하는 모양이다.


“프리실라가 낫겠군요. 루시우스하고는 의견 충돌이 좀 있는 편이어서.”

“그건 시로네 님의 결정에 맡길게요. 저는 그저 당신을 지원하는 역할이니까요.”


아델레는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고삐를 당겼다.


“이제 곧 성문입니다. 속도를 내도록 하죠.”


멀리서부터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험을 시작하기 위해 처음으로 넘어야 할 관문.

그 너머에 있을 것들을 상상하며 우리는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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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6 숲속에서의 대화 24.01.15 13 2 12쪽
35 숲속의 악마 24.01.12 12 1 12쪽
34 에리나 브르타니엔 24.01.11 15 1 12쪽
33 환영의 숲 24.01.10 14 2 12쪽
32 추방된 자들 24.01.09 15 1 12쪽
31 황무지에서의 전투 24.01.08 17 1 11쪽
» 성벽 밖으로 24.01.05 16 1 11쪽
29 유리우스 제르가딘 24.01.04 20 1 12쪽
28 정예 인원을 뽑았다 24.01.03 19 1 12쪽
27 협상을 해보자 24.01.02 22 1 12쪽
26 알현실에 불려갔다 23.12.30 26 1 12쪽
25 부하를 팔아먹었다 23.12.29 21 1 12쪽
24 재각인 23.12.28 25 2 12쪽
23 할 일은 해야 한다 23.12.27 23 1 12쪽
22 귀찮은 일은 싫다 23.12.26 23 2 13쪽
21 리제 에스터리츠 23.12.25 25 2 12쪽
20 지하 고문실의 독대 23.12.23 28 2 12쪽
19 사라진 왕녀 23.12.22 26 2 12쪽
18 오래된 기억 23.12.21 36 3 12쪽
17 악인은 심판 받는다 23.12.20 34 3 12쪽
16 구원받지 못한 자 23.12.19 30 3 11쪽
15 악마숭배자 23.12.18 31 3 12쪽
14 밤은 깊어간다 23.12.16 30 3 11쪽
13 고대 마물 23.12.15 27 3 12쪽
12 비밀 통로 23.12.14 31 3 12쪽
11 도둑 길드 23.12.13 30 3 11쪽
10 초승달 밤의 도둑고양이 23.12.12 42 3 14쪽
9 진위 조사대 23.12.11 41 3 12쪽
8 유도 질문 23.12.09 43 4 12쪽
7 야간 습격 23.12.08 44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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