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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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작품등록일 :
2023.12.01 17:08
최근연재일 :
2024.01.15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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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4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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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우스 제르가딘

DUMMY

성기사는 고지식하다.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만났던 성기사는 전부 그랬다.

태생부터가 성직자와 비슷한 탓인가?

조금 더 불만을 말해보자면,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여신에게 축복받은 재능이니 뭐니 떠들어대는데 웃기기 그지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7인의 영웅, 여신으로부터 세상을 구하라고 선택받은 흑마법사다.


‘매번 마왕을 봉인한 것은 나였다.’


성기사라는 족속들의 한계였다.

융통성이 없어서 항상 악마들의 간교한 꾀에 당하기나 한다.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자질이나 가능성은 충분한데, 그놈의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이 문제였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깽판이나 치지. 출정 전날 밤에 나타나서 결투 신청이나 하고.’


부하들이 만찬을 즐기는 걸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둘이서만 빠져나왔다.

내가 말없이 노려보자 유리우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결투를 하기 싫은 거야? 너도 동의해서 함께 밖으로 나온 건데.”


여전히 맥락을 못 잡는 걸 보니, 이 녀석도 구제불능이다.


“뭐, 귀찮긴 해. 어차피 내가 이길 게 뻔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자신감이랄까?”

“자존감은 높아서 좋군. 나도 자기애가 결여된 녀석하고는 맞붙기 싫었어.”


유리우스는 마음에 든다며 이를 드러냈다.

딱히 호감을 유도하려고 한 말이 아니라 더 짜증이 났다.


“너 같은 성기사는 자기애가 너무 강해서 문제야. 심지어 그게 문제라는 사실조차 눈치 못 채지.”

“이상한 비난이군. 정작 주위에선 별말 없는데 말이야.”


그건 네가 유망한 귀족 가문의 자제이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대부분이 부하일 텐데 상관에게 눈치없는 말을 할 리가 없다.

안봐도 뻔했으나, 말을 아끼기로 했다.

어차피 힘으로 굴복시키면 알아서 명령에 따를 녀석이다.


“아무튼, 룰은 정했나? 마법사를 상대로 무식하게 치고받고 하자는 건 아닐 테고.”

“달리 방법이 있을까? 마법사라고 해도 거리를 벌리는 식으로 싸우면 충분히 가능할 텐데?”


이 녀석, 어떻게 승부를 볼지 생각도 제대로 안 해뒀다.

나는 골치가 아파져서 관자놀이를 짚었다.


“억지를 부리는군.”

“공간 확보는 충분히 되었어. 내가 수호 결계를 펼치면 주위에 피해는 가지 않을 거야.”


말을 마친 후 유리우스는 곧바로 주문 영창을 했다.

그러자 왕궁 옆의 공터가 오묘한 색채의 결계에 휩싸인다.

이것이 바로 성기사의 강점.

성기사는 물리적인 압박을 가하면서 동시에 수호 주문까지 영창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싸우면 자신이 유리할 거라 생각하겠지.’


어떻게 보면 공정한 시합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공간이 제약된 상황에서 마법사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거리를 벌리기 위해 텔레포트할 수 있는 범위가 좁아지는 탓이다.


‘뭐, 상관없다. 실력의 격차라는 것이 있으니까.’


불리한 면이 있다 하더라도 유리우스는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

성벽 내부의 일류 마법사인 라크슈가 그러했듯 말이다.


“시작해도 되겠어? 이왕이면 빨리 끝내고 나도 만찬을 즐기고 싶어서 말이야.”


유리우스가 장검을 뽑아 들었다.

제르가딘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보구.

보통 저런 건 고유명사가 붙는데, 별로 관심은 없었다.


“어서 덤벼. 이쪽이야말로 시간 낭비는 질색이니까.”


나는 도발하듯 손짓을 해보였다.

그러고는 커다란 루비가 박힌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에스터리츠 가문에서 대대로 전승되는 마도구, <에스페란자>.

이것을 활용하면 술식의 시전이 한결 편해지고 위력도 20% 정도 증폭된다.


‘20% 정도면 상당한 거지. 그만큼의 실력 격차를 메울 수 있는 거니까.’


시원찮은 마도구는 보석을 박아넣어도 소수점 이하의 효과밖에 나지 않는다.

2~3% 이상의 효율은 나와줘야 그나마 마도구 취급을 받는달까.

이러한 이유로, 마도구 자체를 소지하지 않고 기동성이나 방어에 신경 쓰는 마법사도 있었다.

어쨌든, <에스페란자>의 성능을 시험해볼 좋은 기회다.


“지하 감옥에서 출몰한 고대 마물을 쓰러뜨렸다지? 실력 한번 보여줘!”


유리우스가 먼저 호기롭게 달려들었다.

장검에 디바인 오러를 실어서 단번에 승부를 보려고 든다.

오러가 깃든 병장기는 수호 결계도 베어버리기 때문에 주의를 요했다.


‘하지만 피하면 그만이다.’


오러를 사용하는 성기사를 한두 번 상대해본 게 아니다.

전투 경험이라면, 산전수전 다 겪어본 내가 압도적으로 우월했다.


‘심상 세계를 전개할 필요도 없겠어.’


순수하게 실력만으로 압도해야 나중에 뒷말이 나오지 않을 터였다.

텔레포트로 거리를 벌린 후, 나는 주문을 영창했다.

흑마법사라면 기본적으로 배우는 공격 마법.

마력탄이었다.


피융―!


파공음과 함께 마력탄이 쏜살같이 날아갔다.

위력은 제대로 적중할 경우 바위도 뚫을 정도다.

무방비 상태에서 급소를 맞거나 하면 즉사한다는 이야기.

하지만 오러를 다루는 자를 상대할 땐 한 발로는 부족했다.


피융―!

피융―!

피융―!


미처 반응하지 못할 만큼 빠른 간격으로 마력탄을 연발했다.

이렇게 하려면 술식을 외우는 속도뿐만 아니라 마나의 흐름에 대한 민감도 또한 높아야 한다.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수준의 묘기는 아니었다.


“원거리에서 관통하는 마법을 난사하는 전법이로군. 확실히, 그렇게 하면 상대가 곤란하겠어.”


유리우스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녀석은 수호 주문으로 빛의 방패를 생성해낸 상태였다.

강도가 제법 높은지, 여러 발의 마력탄이 중화되며 가로막힌다.


“역시, 이것만으로는 승부가 나지 않는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기에 별로 아무렇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 차례다! 오러 블레이드!”


유리우스가 빛의 방패를 해제하며 외쳤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장검을 들어 올리며 갖은 폼을 다 잡는다.


‘필살기를 쓸 생각이군.’


어떤 장면이 펼쳐질지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는 침착하게 다시 에스페란자를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이쪽도 수준을 조금 높여볼까.’


내가 사용하는 흑마법은 영혼의 본질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물론, 살아있는 사람의 영혼에 한정해서 말이다.

타락해버린 흑마법사는 사자를 권속으로 거느리곤 하는데, 그것과는 추구하는 방향성이 다르다.


‘소울웨폰은 인간이 고유하게 지닌 영혼의 역장을 마력으로 형체 부여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오러 블레이드와 비슷하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기력도 영혼의 역장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기력을 고순도로 정제한 것이 디바인 오러 혹은 내공이다.

따라서 소울웨폰도 본질적인 속성은 유사한 점이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소울웨폰은 영혼의 역장 그 자체이므로 오러나 내공보다 훨씬 다양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지금부터 소울웨폰의 진정한 위력을 보여주마.’


다름 아닌, 나 자신의 소울웨폰을 소환할 생각이었다.

100% 완성도로 구현하면 의식을 잃게 되니, 대략 10% 정도가 좋겠다.

너무 적은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오해였다.


“이 정도로도 충분해.”


허공에 푸른 불꽃이 생겨났다.

여느 때처럼 조그마한 형체.

그런데 점차 늘어나듯 몸집이 커지더니 이윽고 늑대의 형상으로 변했다.


“호오? 새로운 소환술인가? 정령 마법이라기엔 뭔가 느낌이 다르군.”


유리우스가 호기심이 동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은 내가 어떻게 맞설지 궁금한지, 오러가 응집되는 대로 곧장 장검을 휘둘렀다.

푸콱 하는 묵직한 파공음과 함께 비취색의 오러 블레이드가 이쪽으로 날아온다.


“···.”


가만히 선 채로 오러 블레이드와 마주봤다.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전력의 격차를 몸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봐, 움직여! 그걸 정면으로 받아내면 죽는다고!”


유리우스가 우려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지가 날려 보내놓고 내 걱정은 왜 하는지 모르겠다.


“안 죽어. 쓸데없는 참견이야.”


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어느덧 오러 블레이드는 눈앞까지 도달해있다.

아찔한 상황이었지만, 별 문제는 없었다.

푸른 불꽃의 늑대가 발톱을 휘두르자, 오러 블레이드는 가볍게 튕겨 나가버린다.


“뭐, 뭣이?”


믿기지 않는 상황에 유리우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녀석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세상에서 오러가 가장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수련해왔을 테니까.


‘하지만 오러도 세상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힘의 한 형태일 뿐이다.’


본질을 파고 들어가 보면 위계의 차이는 없어지고 방식의 차이만 남게 된다.

소울웨폰이 오러보다 대단하다기보단, 내가 저 녀석보다 더 뛰어난 실력자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이 녀석의 이름은 펜리르야. 내 영원한 파트너라 할 수 있지.”

“펜리르? 그런 놈을 어떻게 길들인 거냐?”


유리우스가 식은땀을 흘렸다.

펜리르가 이빨을 드러낸 채 녀석을 향해 낮게 으르렁대고 있었다.

그 기세가 위협적이어서 뛰어난 성기사조차 평정심이 흔들릴 정도다.


“길들인 게 아니야. 처음부터 내 것이었지.”


유리우스가 엘카만 가문의 흑마법에 대해 알 리 없었다.

신성 교단이 역사기록에서 철저히 존재감을 지워버린 덕분이다.

설령 들어본 적이 있더라도 내 소울 웨폰의 정체에 대해서는 모를 것이다.

그건 전처였던 루비아만이 알고 있는 특급 비밀이다.


“한번 막아봐. 펜리르와 나의 합동 공격을.”


전방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펜리르는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리더니, 유리우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굶주린 듯한 야수의 맹렬한 기세에 유리우스는 그저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펜리르는 소울 웨폰 그 자체인 존재였다.

녀석과 닿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하급 마물은 불타며 정화되어버린다.

오러를 다루는 성기사라 할지라도, 물어뜯기거나 하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다.


“이봐, 좀 더 분발하는 게 어때? 여긴 네가 상성상 유리한 전장이라고?”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에스페란자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아까 그랬던 것처럼 마력탄을 연달아 날려보내기 시작했다.


“크윽!”


유리우스가 황급히 빛의 방패를 생성해냈다.

하지만 오러와 신성 주문을 동시에 사용해도 합동 공격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유리우스는 펜리르가 휘두르는 발톱에 멀리 나가떨어졌다.

허둥지둥하며 뒤늦게 장검으로 일격을 받아내려다가 균형을 잃은 것이다.


“으악!”


그래도 조금은 버틴 편이었다.

다른 녀석이었다면, 지금쯤 숨이 붙어있지도 않을 터였다.


“어때, 더 하고 싶어?”


바닥에 쓰러진 유리우스를 향해 의향을 물었다.

그러자 지쳤는지 맥이 빠진 답변이 들려온다.


“···그만하자. 나의 패배다.”


주위를 감싸고 있던 결계가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유리우스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이 지팡이를 들고 있는 이유를 알아?”

“잘은 모르지만 뭐, 대충은.”

“라크슈 백작도 너처럼 대결을 신청했다가 패배했다. 그리고 전적인 지원을 약속했지.”

“그렇군. 네가 이 정도로 대단한 마법사일 줄은 몰랐다.”


유리우스는 순순히 나의 강함을 인정했다.

녀석은 장검을 딛고 일어선 후 말을 이어나갔다.


“너라면 분명 이번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 거다. 그러니 따르겠다. 성기사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서열 싸움은 이제 끝난 것 같았다.

나는 펜리르를 역소환한 후 홀가분하게 뒤돌아섰다.


“그럼 되돌아가자고. 오늘 밤의 만찬은 지금부터다.”


조금 융통성 없지만, 쓸만한 부하가 하나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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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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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숲속에서의 대화 24.01.15 13 2 12쪽
35 숲속의 악마 24.01.12 12 1 12쪽
34 에리나 브르타니엔 24.01.11 15 1 12쪽
33 환영의 숲 24.01.10 14 2 12쪽
32 추방된 자들 24.01.09 16 1 12쪽
31 황무지에서의 전투 24.01.08 17 1 11쪽
30 성벽 밖으로 24.01.05 16 1 11쪽
» 유리우스 제르가딘 24.01.04 21 1 12쪽
28 정예 인원을 뽑았다 24.01.03 19 1 12쪽
27 협상을 해보자 24.01.02 22 1 12쪽
26 알현실에 불려갔다 23.12.30 26 1 12쪽
25 부하를 팔아먹었다 23.12.29 21 1 12쪽
24 재각인 23.12.28 25 2 12쪽
23 할 일은 해야 한다 23.12.27 23 1 12쪽
22 귀찮은 일은 싫다 23.12.26 23 2 13쪽
21 리제 에스터리츠 23.12.25 25 2 12쪽
20 지하 고문실의 독대 23.12.23 28 2 12쪽
19 사라진 왕녀 23.12.22 26 2 12쪽
18 오래된 기억 23.12.21 36 3 12쪽
17 악인은 심판 받는다 23.12.20 34 3 12쪽
16 구원받지 못한 자 23.12.19 30 3 11쪽
15 악마숭배자 23.12.18 31 3 12쪽
14 밤은 깊어간다 23.12.16 30 3 11쪽
13 고대 마물 23.12.15 27 3 12쪽
12 비밀 통로 23.12.14 31 3 12쪽
11 도둑 길드 23.12.13 30 3 11쪽
10 초승달 밤의 도둑고양이 23.12.12 42 3 14쪽
9 진위 조사대 23.12.11 41 3 12쪽
8 유도 질문 23.12.09 43 4 12쪽
7 야간 습격 23.12.08 44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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