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을 잡았더니 세상이 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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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작품등록일 :
2023.12.01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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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5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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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3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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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고문실의 독대

DUMMY

신성 아르테시아 교단.

에뮤리아 전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유일신 신앙이었다.

태초에 여신 아르테시아가 만물을 창조했고, 세 종족에게 세상의 질서를 맡겼다는 믿음.

신화시대의 이야기라서 이제는 진위여부조차 밝히기 어렵지만, 대다수가 신봉하는 종교였다.


‘사실상 대륙의 주류 신앙이라고 할 수 있지.’


아르테시아 말고 다른 존재를 믿는 종교도 있긴 했다.

하지만 이들은 오랜 기간 배척받아오며 점차 변방으로 밀려나거나 자연소멸하고 말았다.

그래서일까.

강성해진 신성 교단에 불만을 품고 대척점에 서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비밀결사 단체, <그라토리앙>.


원래는 악마 숭배자들의 본거지까지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신성 교단이 이교도를 지나칠 정도로 배척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온 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결성한 모임이랄까.

금지된 흑마법이나 연금술을 순수하게 연구하는 학파도 제법 있었다.

그게 나쁜 거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따지면 엘카만 가문의 심상 마법도 원래는 용인되지 않은 탐구영역이었다.


‘내가 7인의 영웅으로 선택되는 바람에 신성 교단에서도 적잖이 곤란했었지.’


7인의 영웅은 신성 교단의 최대 권력자인 교황마저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다름 아닌, 여신에게 직접 질서의 수호 임무를 받은 인물들이니까.

창조신의 선택을 받아, 격세유전을 통해 환생한다는 것 자체가 신성불가침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에뮤리아 대륙이 혼란에 빠질 때마다 개고생해서 마왕을 봉인해야 하니, 그 정도 대우는 받아야겠지.’


그래서인지 이름도 여신에게 서약했을 당시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하냐면, 대대로 영웅을 배출하는 7대 가문은 기본적으로 신성 교단의 극진한 보호를 받는다.

따라서 대가 끊길 위험이 거의 없고, 혹시나 비혼주의자가 태어나는 불상사가 있을 수 있으니 후계자를 아주 많이 생산한다.

이 때문에 밤일을 고되게 해서 복상사를 한 가주도 드물지 않게 존재한다.


‘다행히 나는 그런 적은 없다만, 가주 자리를 이어받을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긴 했지.’


아무튼, 격세유전을 통해 영웅의 영혼이 환생하게 되면 그 어머니가 태몽을 통해 여신의 계시를 받게 된다.

이 아이가 자라서 마왕을 물리칠 영웅이 될 것이니, 장성할 때까지 잘 키우라는 내용이다.

그러면 어머니는 옛 영웅의 이름을 지어주는 식으로 전통이 계승되는 것이다.

설령 어머니가 다른 이름을 지어주더라도, 신성 교단과 가문의 압박에 의해 개명을 하게 된다.

그만큼 7인의 영웅에 대한 일은 정말 민감하게 처리되는 경향이 있다.

신성 교단이 7인의 영웅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7인의 영웅이 계속해서 존재해왔고 신성 교단에 그에 맞춰오는 구도였다.


“그랬던 당신들이니 우리를 찾으려 노력했던 것은 당연했겠군요. 마왕은 물리쳤지만, 이후의 결과가 문제투성이였으니까요.”


아델레의 뒤를 따르며 나는 말했다.

우리는 현재 성벽 도시에 있는 교단의 비밀구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내성에 있는 교구성당의 지하공간.

평범한 이들은 출입할 수 없고, 이렇게 책임자를 대동해야만 하는 구역이었다.


“7인의 영웅을 발견하면 즉시 보고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전에 당신이 진짜 시로네 엘카만인지 확인할 필요성이 있었어요.”


아델레가 변명하듯 대꾸했다.

그녀는 내 정체가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리기 전까진 많은 걸 비밀로 했었다.

얼마 전에 해주었던 이야기도 포함해서 말이다.


“이런 식으로 은밀히 절 데려온 걸 보면 내부 사정도 좋지 않은 것 같군요. 보통은 환영회를 열면서 만찬을 준비하는데.”

“그 점은 양해해주시길 바랄게요. 어차피 당신이 기대하지 않았단 건 알고 있지만요.”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가 길었기에 우리는 잡담을 더 나누었다.

듣는 사람도 없었기에, 어느 정도는 진솔한 대화가 가능했다.


“하긴, 7인의 영웅 중에서 저는 그다지 존경받는 쪽은 아니었죠. 애초에 금지된 흑마법을 쓰는 일족이었으니.”

“교단에서 당신이란 존재를 용인하기 위해 계율을 뜯어고치느라 힘들었단 말은 들었습니다. 기록상으로도 최대한 존재를 지우려 노력한다는 것도요.”


그렇다.

나는 7인의 영웅이지만, 동시에 숨겨져야만 하는 대상.

다른 영웅들의 그림자와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것쯤은 첫 번째 환생 때부터 알고 있었기에 이젠 아무렇지 않았다.


“여신의 가호를 통해서 제 과거를 얼마나 들춰봤습니까? 저에 대해 잘 아는 느낌이군요.”

“그냥 조금요. 덕분에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습니다.”


정체를 알아갈수록 재미있는 여자였다.

성녀 알리사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과거시를 지닌 데다, 그녀가 사라진 기간동안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불리우는 칭호 또한 검은 성녀.

여신은 무슨 생각으로 또 다른 성녀를 세상에 탄생시켰는지, 영웅들이 곤경에 처했는데 왜 지켜보고만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런 것쯤은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건가.’


마왕을 물리쳤다고 이후의 문젯거리를 방관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맹세의 서약>은 정확히 따지자면 에뮤리아 대륙의 혼란을 잠재우는 것.

마왕은 대표적인 문젯거리였을 뿐이었다. 단지, 다른 사고가 터지지 않아서 그동안 모두가 이렇게 되는 가능성을 간과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델레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앞으로는 확실히 협력해주시기 바랍니다. 정체를 의심했다는 식의 변명은 이제 더는 안 통하니까요.”

“물론이에요. 저도 당신을 속여서 얻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손해만 볼 뿐이죠.”


아델레는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나를 바라본다.


“더 하실 말씀이 있는지요? 여기는 그 녀석이 감금되어 있는 곳입니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계속하긴 어려운 자리니 이 대화부터 끝맺음을 하죠.”


저번에 산채로 붙잡은 흑마법사를 말하는 것이었다.

놈에게 용무가 있는 건 아닌데, 고문을 받으면서도 입을 다물고 벼르는 바람에 이곳으로 오게 됐다.


“저를 보자고 하겠다는 이유가 뭡니까? 이상할 정도의 집착이군요.”

“당신이 7인의 영웅인 걸 알고 나서 태도가 많이 바뀌더군요. 말을 많이 아끼는 편인지라 자세한 것까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직접 물어보는 편이 빠를 것 같다.

고개를 끄덕이자, 아델레가 옆으로 비켜섰다.


“당신과의 독대를 원합니다. 완전히 포박된 상태이니 별 위협은 되지 않을 겁니다.”


완전히 해방된 상태여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버리는 카드로 쓰일 정도로 조무래기인지라, 여차하면 쉽게 무릎 꿇릴 수 있었다.


“밖에서 긴장하고 대기하세요. 목숨을 걸고 쓰는 술식에는 당할 수도 있습니다.”

“엄살이 심하시군요. 문제가 생기면 바로 개입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델레는 어서 들어가라며 손을 내저었다.

옥문을 열자, 어두컴컴한 석실에 사내가 앉은 채로 묶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앞으로 발을 내디디며 입을 열었다.


“보기보다 멀쩡하군. 의외로 고문을 즐기는 타입인가봐?”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옥문이 닫혔다.

문틈으로 비치던 눈부신 빛이 사라지자, 사내가 서서히 고개를 든다.


“왔군, 시로네 엘카만. 네가 7인의 영웅인걸 못 알아본 것이 패착의 원인이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물론 약점을 노리고 공략해왔다면야 조금 곤란해졌을지 모르지만.


“네가 아무리 발악해도 이런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아르테시아 여신의 이름 앞에 맹세하지.”

“여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주제에 잘도 그런 말을 떠드는군. 너의 정체성을 망각했는가? 너는 우리와 같은 흑마법사다. 구원이 내려올 거라며 위선이나 떠는 성직자와 달리, 세상의 진리를 연구하는 족속이지.”


흑마법사는 갑자기 열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나는 같잖다는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전부 들어주었다.


“세상의 진리라고? 호오,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하지만 너는 단지 악마의 권능에 기대서 사리사욕을 탐하고 싶었을 뿐이잖아?”

“그것이 뭐가 나쁜가? 성직자 놈들이 내세우는 이분법적인 선악론으로 세상이 얼마나 평화로워졌지? 흑마법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너라면 이런 세계가 지긋지긋할 텐데?”


계속해서 내가 자신과 동류라는 식으로 대화를 유도한다.

솔직히 이런 식의 회유가 예전부터 없진 않았다.

소위 흑마법사라 불리우는 녀석들이라면, 나와 싸우기 전에 함께할 것을 권유했었지.

그럴 때마다 나는 서로가 어떤 면에서 다른지를 확실히 설명해준다.


“지긋지긋하긴 하다. 구원하려고 해도 제대로 안 되는, 절망으로 가득한 이 세계가.”

“역시 그렇지?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단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위선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시작부터 불공평했으니까. 너희 영웅들만이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그것 또한 사실일지 모르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희와 근본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

“끝까지 억지를 부리려는 것이냐? 좋다, 말해봐라. 대체 무엇 때문에 너와 내가 함께할 수 없는지를.”


흑마법사는 이빨 빠진 얼굴로 웃으며 기다렸다.

내가 어떠한 대답을 하더라도 자신이 논쟁에서 이길 거라고 자신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길게 숨을 들이켰다.

고문실의 어둡고 지저분한 공기가 폐를 가득 메우며, 기분을 착잡하게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너는 구원받기를 원하지만, 나는 구원받기를 포기했다. 그렇기 때문에, 너와 나의 흑마법은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세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죽기 전에 봐왔던 마지막 장면의 심상 세계는 언제나 똑같았다.

혹독한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원지대의 한복판.

어느 누구의 지나간 발자취도 없고, 그저 나만이 홀로 눈밭에 서서 세상을 관조하고 있다.

구원의 손길을 기대할 수 없는 그곳에서 나는 매번 안식을 찾았다.

내가 그곳을 무덤으로 삼음으로써 모든 여정은 끝이 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스스로 구원받기를 포기했다고? 그러면 너는 무엇을 위해 투쟁하고, 고민하며 살아가지? 네 자신이 긍정하지도 못하는 이 세계에서 말이야.”


흑마법사가 조롱하는 어조로 말했다.

역시 녀석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다.

잠시간의 침묵 후에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혹한의 시련과 마주하는 시기에 태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나의 운명이다. 그래서 나는 살아가는 동안 내가 마주하는 세상을 결코 긍정할 수 없겠지.”

“그래서 절망하는 건가?”

“아니, 오히려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다. 내가 세상의 혼란을 잠재우고 나면 언젠가 다시 봄이 올 테니까. 나는 <맹세의 언약> 때문에 결코 봄을 맞이한 세상을 살아가진 못하겠지. 나의 흑마법은 생명력을 갉아먹으니까.”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봄이 오고 나서도 다시 겨울은 찾아올 테지만, 그러한 순환엔 의미가 있다.

다음 봄에는 더 많은 영혼의 색채가 다채롭게 꽃피우길.

나는 엘카만 가문의 흑마법으로 모두를 구원하진 못하더라도, 구원받은 자들을 위한 봄을 준비할 것이었다.

내가 오래된 신념을 말하자 흑마법사는 코웃음을 쳤다.


“흥, 궤변이로군. 더는 듣기 싫다. 네놈이 이번 생에도 어떤 길을 걸어갈지 뻔하니까.”

“이제 네놈의 차례다. 왜 나를 불렀지? 이런 잡담이나 하자고 고문을 버틴 건 아닐 테지.”

“이유 말인가? 아아, 실은 간단해.”


흑마법사가 잠시 뜸을 들였다.

이윽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알고 있다. 네 동료 중 이쪽에서 가까운 곳에 떨어진 한 명의 위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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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숲속에서의 대화 24.01.15 12 2 12쪽
35 숲속의 악마 24.01.12 12 1 12쪽
34 에리나 브르타니엔 24.01.11 15 1 12쪽
33 환영의 숲 24.01.10 14 2 12쪽
32 추방된 자들 24.01.09 15 1 12쪽
31 황무지에서의 전투 24.01.08 16 1 11쪽
30 성벽 밖으로 24.01.05 15 1 11쪽
29 유리우스 제르가딘 24.01.04 20 1 12쪽
28 정예 인원을 뽑았다 24.01.03 19 1 12쪽
27 협상을 해보자 24.01.02 22 1 12쪽
26 알현실에 불려갔다 23.12.30 25 1 12쪽
25 부하를 팔아먹었다 23.12.29 20 1 12쪽
24 재각인 23.12.28 25 2 12쪽
23 할 일은 해야 한다 23.12.27 23 1 12쪽
22 귀찮은 일은 싫다 23.12.26 23 2 13쪽
21 리제 에스터리츠 23.12.25 25 2 12쪽
» 지하 고문실의 독대 23.12.23 28 2 12쪽
19 사라진 왕녀 23.12.22 26 2 12쪽
18 오래된 기억 23.12.21 35 3 12쪽
17 악인은 심판 받는다 23.12.20 34 3 12쪽
16 구원받지 못한 자 23.12.19 29 3 11쪽
15 악마숭배자 23.12.18 30 3 12쪽
14 밤은 깊어간다 23.12.16 30 3 11쪽
13 고대 마물 23.12.15 27 3 12쪽
12 비밀 통로 23.12.14 30 3 12쪽
11 도둑 길드 23.12.13 30 3 11쪽
10 초승달 밤의 도둑고양이 23.12.12 41 3 14쪽
9 진위 조사대 23.12.11 40 3 12쪽
8 유도 질문 23.12.09 43 4 12쪽
7 야간 습격 23.12.08 43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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