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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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nithrone
작품등록일 :
2024.05.08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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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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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1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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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DUMMY

뜨거운 찌개 위에 피어오르는 허연 김 사이로 녀석의 사뭇 진지한 표정이 어려 왔다. 장난으로 건넨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암만 우리가 치기 어린 삶을 놓지 못하고 있는 철 지난 청춘들이라 해도 지켜야할 선이 있는 법이건만···. 그러나 왠지 지금 여기서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묘하게 전해져왔다.

그래도 한 번은 거절해야함이 옳겠지.

“···야 근무시간인데 어떻게···.”

“한 잔만 하자.”

“··· 그래···.”

··· 난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한 병의 소주는 금기의 서약을 걷어내며 우리의 상 위로 올라와 빛깔도 영롱한 자태를 뽐내기 시작했는데, 그 품이 마치 고혹적인 여인의 푸른 눈동자가 주변 만물을 향해 노골적인 유혹의 시선을 교태 섞어 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양팔은 그 꾀임의 손길을 거부하지 못하고 무언가에 이끌린 듯 신비로이 서있는 푸른 눈동자의 모가지를 ‘따다닥’소리가 나도록 잔인하게 비틀어대었다. 그러자 만년의 빙설이 녹아내린 듯한 투명한 눈물 속에서 남몰래 숨어있던 진한 알코올향이 주변의 공기입자와 만나 아름다운 춤을 추며 사위로 퍼져 나와 우연히 그 앞에 자리하고 있던 두 사내의 코를 간지럽혔다.

꼴꼴꼴···.

“무슨 일 있냐.”

난 첫 잔을 친구에게 안배하며 입을 열었다.

“···.”

하지만 손을 들어 받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다.

한참을 뜸 들인 친구. 입술을 달싹이는 것마저 힘겨워 보였는데···.

“너는 장가가지 마라.”

풉~!

뿜었다. 속으로. 녀석의 얼굴을 보니 도저히 겉에 드러내놓고 행동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간 움찔하는 동작은 어찌하지 못했다.

“···.”

다시금 입을 다무는 왕을 따라 나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내 모습에 이번엔 녀석이 병을 들어 내 잔을 채워주려 했다.

덕분에 간신히 들어 올려 진 손 사이로 이야기를 잇대어나가려는 시도를 넘겨볼 수 있었다.

“왜, 무슨 일 있냐?”

“후우~.”

왕은 긴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난 분위기를 그래도 좀 바꿔보려고 살짝 농으로 받아쳤다.

“뭐야 이 새끼들. 하나같이 다 장가가지 말라고 지랄들이네?! 지네들은 다 가 놓고.”

사실이 그러했다. 우리 나이 삼십대 중반. 결혼하기 힘든 세대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몇 십 명 되는 친구 중 삼분지 일은 어찌어찌 꾸역꾸역 배필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들 있었다. 그러나 여유 있게 사는 몇 놈을 제외하고는 다들 하나같이 하는 소리가 있었으니, 바로 좀 전 눈앞에서 친구가 얘기한 ‘너는 장가가지마라.’···.

도대체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난 주는 술을 받은 뒤 잠자코 왕에게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내 기다린 보람 무색하게 녀석은 지 앞에 있던 술잔을 들어 채 말릴 사이 없이 입에 털어 넣을 뿐이다.

“어, 어?”

난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으나 이미 상황은 끝나있었다. 그리고 친구는 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지부지처를 연이었다. 분명 기분 좋음에 따라오는 건배가 나올 자리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고도 녀석은 대꾸 대신 깊은 한숨을 한 번 더 뱉어내다가 종내 입을 열 도리 밖에 없어지자 마침내 그 무거워 보이는 아래턱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희망이 안 보인다 희망이···.”

“건 또 무슨 소리여? 희망이 안 보인다니.”

“말 그대로야. 희망이 안 보인다고.”

“···.”

무슨 말을 어찌 해야 할지 몰라 난 그저 가만히 녀석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받는 돈이 이백이 조금 넘거든? 세금 떼고.”

어이씨~ 그래도 나보다 많이 받네. 난 일단 기본급만 180인데.

“알잖냐. 나 집에서 삼천해줬던 거.”

이 대목은 기억이 난다. 왕이 결혼하기 전에 지 총각 이제 끝난다고 둘이서 진하게 잔 한 번 맞댄 적 있었는데, 그때 돈이 없어 결혼준비하기가 진짜 힘들다는 고충을 심하게 털어 놓았었더랬다. 당시 녀석의 말을 되새겨 보자면···,

‘야. 진~짜 돈 없으니까 결혼하기도 힘들다. 미치겠다 아주 미치겠어 그냥. 전세 하나 구하는 데 그 코딱지만 한 집 한 켠이 무슨 일억이 다 넘어 가냐? 아파트는 꿈도 못 꾸고, 모아 놓은 돈도 얼마 없는데 이것 갖곤 택도 없다 택도 없어. 그나마 아버지가 삼천 해주시긴 했는데 혜정이가 모아 놓은 돈이랑 합쳐도 답이 안 나온다. 직장생활하며 열심히 모아 논 돈 식장 한 번 잡고 신혼여행 알아보고 나니 끝나더라. 다 대출이야 다 대출. 내 나이 서른하난데 뭐 이뤄놓은 게 하~아나도 없네. 진짜 이번에 결혼준비해보니까 내 자신이 너무 비참하더라. 정말 한심해도 이렇게 한심할 수가 없는 거 있지. 등신같이 집에다 손이나 벌리고. 내가 울 압지 사정 뻔히 아는데···. 후우··· 준호야. 내가 뭘 잘못한 거냐?’

··· 아니···, 잘못한 거 없다 친구야. 어쩌겠냐. 우리네 사정 다 거기서 거긴데. 그냥 넌 표준이야 표준. 한국 삼십대 남성의. 그저 커다란 사건이나 사고 없이 무난하게 살아온. 그나마 넌 나은 거다. 최소한 빚은 없으니.

아··· 이제 생기겠구나. 그것도 아주 크게···.

생각해보면 그러하다. 이 「한국 남성 표준」이라는 것이. 요즘 다들 대학 안 간 친구가 없으니 일단 군대 2년을 더해 사회에 나온다 치면 평균연령 스물일곱. 여기다가 이것저것 끼게 되면 1~2년은 선물로 붙는다. 근데 군대 관련하여 1년 정도 휴학하는 것이 통념이라 간단하게 28세로 사회 진출 나이를 잡아보자. 요즘같이 이태백이라는 말이 난무하는 시대에 운 좋게 취업에 바로 성공하면 좋겠지만, 대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은 이미 산출되어져있는 여러 자료를 통해 손쉽게 접할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고 바로 지금 시기를 기준으로 산출된 평균 취업 준비 기간은 대략 11~13개월. 그냥 편하게 1년으로 잡으면 29살에서 30살 즈음에 직장인이 된다고 보는 게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 이제 회사도 다니고 하니 드디어 돈을 벌어보자. ···큭큭큭, 돈을 벌어보시겠다? 감히? 이 땅 이 나라 이 사회에서? 안타깝지만 스물아홉, 서른에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바로 돈을 모을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걸? 최소한 내가 살아온, 그리고 서민들이 살고 있는 테두리 안에서는. 왜냐, 이미 많은 이들이 학자금 대출이라는 중병에 걸려있는 환자들이거든. 거의 천 단위로 놀지 않을까 하는 규모의. 더 구체적인 금액을 얘기할 순 있지만, 그거야 개인마다 차이가 천차만별이어 매우 조심해야 할 부분이라 자세한 언급은 피하겠다. 무론 이 부채가 없는 친구들도 있다. 아 당연 있지 설마 그럼 없겠냐? 우리나라 청춘인구 몇 백만이 넘을 진데. 그러나 나 역시 한국에서 대학물을 먹어 본 입장으로 얘기하자면, 거의 대부분의 친구들이 어떻게 1~2학년까지는 버티고 버텨도 결국 고학년이 되고나면 매 방학 끝나갈 무렵 여기저기서 대출받으러 다니느라 정신들이 없더라.

이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여기서 ‘나는 학자금대출 없이 다녔는데.’ 라는 말로 딴지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 암튼 적게는 천에서 많게는 삼천까지의 빛을 떠안고 회사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이 땅의 많은 청춘들. 정말 운 끗발나게 좋아 대기업에 들어가거나 공무원이 된 친구들을 우선 잠깐 논외로 친다면 거의가 수습 3개월 기간을 거쳐 대략 이백 안 되게 월급을 받는 정식직원이 된다. 자, 그럼 열심히 갚아나가 보자. 일단 200으로 잡고 대출금이 천이면 그나마 다행. 피나게 상환하면 1년 안엔 끝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면 진정한 저축의 시대가 도래 하는 걸 목도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러나 200이하로 잡고 2~3천의 대출금을 갖고 있다면? 상황은 좀 달라진다. 아마 2~3년은 족히 걸릴 걸? 하지만 웃기는 건 그래봤자 도긴 개긴 이라는 것. 결국 짧게 잡아 나이 서른, 많게 잡아 서른 셋. 그리고 시간은 야속하게도 우리네 청춘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어느새 결혼 적령기를 살짝 지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터이니···. 더욱더 슬픈 사실은 마침내 주변에서 장가가라는 성화에 못 견딜 나이가 되어봤자 모아놓은 돈이 거의 없거나 많아도 1~2천 이라는 것. 정말 많으면 3천.

그러니 너무 자책할 필요 없구나 친구야. 그저 하나의 사회 현상일 뿐이야. 그래도 넌 2년제 나와서 사회생활 일찍 시작한 편이야. 다른 놈들보다는 나아.

그러나 그때도 난 묵묵히 듣고 있기만 했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그 과정이, 한 여자를 내사람으로 만들어 품안의 보금자리에 들이는 그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물론 말할 나위 없이 불발로 끝나버리긴 했지만···.

각설하고, 그렇게 어렵사리 만들어 놓은 신혼의 꿈이었다. 난 나의 실패한 경험을 나중에서야 얘기해주며 그래도 넌 나보다는 낫다며 용기를 북돋워줬고 진심으로 녀석이 이 힘든 과정을 이겨내고 행복하게 살아주길 바랐었다. 제발 나처럼 나자빠져 쓰러지지는 말라고.

“알지. 그거 내가 왜 몰라.”

“벌써 3년이나 지났는데 그거 지금까지 한 푼도 못 드리고 있다.”

녀석은 한 잔을 더 마신 후에도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술을 부어댔다. 내가 끼어들 계제가 없었다. 그러하는 와중 우리 사이로 있던 김치찌개는 보글거리며 맛있는 냄새만 자랑질 하고 있다. 그 모습에 심술이 발동한 나는 국자를 들어 정연히 소리 맞춰 올라오고 있던 박자 속을 사정없이 헤집어 놓았다.

“야 국물 좀 먹어라. 계속 술만 들이키지 말고.”

“그래도 나하고 혜정이가 같이 벌었을 때는 한 사오백 되니까 어느 정도 감당은 되는 듯 했거든? 근데 딸 낳고 혼자 벌라니까 이거 미치겠더라. 대출이자만 거의 오십이야 오십. 원금은 꿈도 못 꾸고···. 그나마 결혼하면서 들어온 축의금으로 급한 거 메꾸고 혜정이랑 아껴 살며 조금씩 저축하긴 했는데, 그거 이제 바닥나간다. 혼자 벌어서는 마이너스야 마이너스. 대출금에 공과금에 식비에 거기다가 아기 분유 값과 기저귀 값은 또 왜 그리 비싸냐. 할 수 없이 모아놓은 돈을 꺼내 쓰기 시작했는데, 아마 이번 달이나 담달이면 끝날 거야. 그러면 또 어딘가에서 조금씩 돈을 빌려야 된다는 소리잖아. 근데 더 문제는··· 이제 시작이라는 거야. 앞으로 내 월급이 올라야 얼마나 오르겠냐. 일 년에 십 이십? 애는 계속 커가고 돈 들어갈 곳은 많아지는데, 혜정이가 직장 다시 다닐라치면 앞으로 몇 년이야. 게다가 다시 다닌다 해도 경단녀니까 애 낳기 전만큼은 못 벌어 올 꺼 아니냐. 그때도 사 오백 갖고 아등바등했는데, 것보다 못한 돈으로 계속 살아가야할 걸 생각하니 정말 답이 안 나온다. 아니, 그때까지 갈 것도 없다. 지금 당장이 걱정이다 당장이···. 내가 결혼을 왜 했지이 싶다.”

열심히 살아온 3년. 시간은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갔건만 사정은 처음 시작했던 그때에 비해 전혀 나아지고 있지 않다는 슬픈 하소연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 나쁜 쪽으로만 흘러가고 있다는···.

“···.”

“미안하다. 이런 얘기해서.”

“무슨 소리야? 이런 얘기 할라고 친구 만나는 거 아니냐.”

어렵사리 피어난 미소가 왕의 입가를 살짝 적시었다. 난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야. 짠 한번 하자.”

피식- 하는 조금은 더 큰 미소가 보인 듯했다. 녀석은 드디어 잔 든 손을 내밀었다.

챙~!

마침내 우리의 술잔이 밥상 정상에서 랑데부하였다. 힘든 과정이었다.

왜 녀석이 회사원의 금기를 깨가면서까지 낮술을 하자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야 좋은 얘기는 없냐? 그래도?”

그래도 설마 그렇게 힘든 일만 있을까. 평생 한 번 만나기 힘든 반쪽을 찾아내어 같이 살 부대끼고 사는데. 아직 장가를 못 가본 나로서는 사랑하는 누군가와 한 천장 이고 지낸다 상상함만으로도 심장부터 온 몸까지 쫄깃짜릿거려 오는구만.

“너 인마 여자 친구 이쁘다고 예비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랑했었잖아.”

“음··· 모텔비 안 드는 거?”

“씨발!!”

“근데 그것도 끝이다. 우리 은채 때문에··· 지금은··· 없네.”

속으로 또 한 번 씨발 했으나 겉으론 웃음이 나왔다.

“푸흣.”

“허헤헤.”

억지스러웠지만 어쨌든 간만에 밥상 위가 밝아진 것 같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침울해지는 녀석 탓에 나 역시 서서히 웃음을 거두었다.

“······.”

“···.”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드냐.”

“···사는 거 원래 힘들다.”

“암튼, 너는 장가가지 마라. 가더라도 무슨 수를 쓰든 돈 많이 벌어서 가라. 그땐 내 안 말릴께.”

똑같다 똑같애. 다 똑같은 일률천편들이다. 장가간 친구들 하는 소리가 다. 여기서 그 소리를 또 듣네. 이게 과연 셰익스피어형님이 말씀하신 ‘결혼은 문 밖에서 문 안을 기웃거리는 것인데, 사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인가? 철모르던 시절에는 단순히 결혼해서 사나 그냥 사나 다 거기서 거기다 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었는데, 직접 경험하고 있는 주변인을 계속 접하고 나니 「문 안에 없다는 것」은 어쩌면 남자로서의 자존감, 혹은 희망이 사라진다는 속내로 한 말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친구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가지 말라고 성토를 해대니 어차피 갈 수도 없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더욱더 격렬하게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간다.

되짚어보면 정말로 결혼생활의 즐거움이나 행복감 같은 것을 말하기보다는 죄다 힘들다는 소리만 나불거리고들 들어갔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있을라니 결혼에 대한 환상이 생기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에 대한 불안감만 한 아름 가득이다. 더 나아가 부모님세대가 입버릇처럼 얘기하던 ‘장가가야 빨리 자리 잡는다.’는 말에까지 의구심이 들게 될 정도면 정말 이건 결혼이라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닌가 하는 억측마저 널뛰는 걸 막지 못하겠다. 진짜로 남자는 장가가면 빨리 자리 잡을까? 정말로? 내, 윗세대 적 경우를 겪어본 적이 무하여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지레짐작밖에 할 순 없지만, 그래도 지금을 살아가는 동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지는 이 아무리 우둔한 머리로도 대충은 그림이 그려진다. 고도 성장시대였던 그때, 당장은 힘들어도 갈수록 나아질 거라는 믿음 충만한 밥상 위에 달랑 수저 두 개만 올려놓고 시작하는 게 가능했던 그 시절에 비해 지금은, 이미 모든 것이 성장하여 더 이상 올라설 곳 없어 보이는 성숙도의 과시감만 남아 있는 지금 현 세대는 웬만큼 갖춰놓고도 더욱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시작조차 꾀해보기가 힘든 씁쓸한 몰골로 과거의 그 자리를 갈음하고 있음을. 모두 다가 먹고 살기 팍팍했기에 그저 사람만 괜찮다 싶으면 이것저것 크게 따지지 않고 짝을 만날 수 있었다던 부모님세대와 달리, 뚜렷한 빈부의 격차가 드러나고 있는 현시에는 사람 따위 따지기보다는 오직 그가 소유한 부에만 관심을 보이는 천박한 자본주의가 대세를 누리고 있음에 앞서 말한 씁쓸함이 배가 되어 우리의 가슴을 후벼 파내고 있다.

월세는 싫다. 하다못해 전세는 되어야지. 거기에 아파트면 더 좋고. 다 허물어져가는 빌라 한 칸 값도 감당하지 못하는 처지지만 그래도 이 부동산 저 복덕방 문을 열심히는 두들긴다. 그러나 1억 돈 훨씬 넘어가야 겨우 엄두 슬쩍 내어 볼 수 있다는 근간의 사정이 돌아다니는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 뿐···. 물론 「자가」라는 말은 입 밖에 내어 놓지도 못한다. 모순. 모순이다. 그럼 잠깐 이쯤에서 장가갈 나이가 된 남자들 통장잔고가 얼마나 되는 지 한번 상상해 볼까? 1억? 아님 2억? 푸하하~ 평범한 월급쟁이 생활 평생 해봐야 만질 수나 있을까 하는 돈이 그 돈이다. 근데, 꼴랑 이삼백 갖고 삼사년 모은 걸로?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는 표현은 아마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진 말일 것이다. 이렇게 백년가약 한번 맺으려면 하릴없이 은행에 손부터 내밀어야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길거리 떨어진 담배꽁초마냥 널리고 널려 있는 것이 엄혹한 우리네 현주소일진데, 시작부터 영락없이 떠안게 될 빚더미 일랑 잊어버리고 산뜻한 출발선에 올라서는 게 가능하다고 믿는 인간 과연 이 나라에서 몇이나 될까. 그래도 달콤했을 밀월의 며칠을 지내고 돌아오면 아무 짓 하지 않았음에도 매달 통장에서 저절로 돈이 뭉텅이씩 빠져나가는 놀라운 마법에 걸려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는 것은 필연적인 순서. 이내 신혼의 단꿈은 깨어져나가고 잔인한 현실에 노출되어 있는 자신들을 목도하게 됨을 막을 길 없다. 평생 한 번 모으기 힘든 돈이지만, 그 돈이 있어야만 결혼을 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악독한 모순. 미래에 응당 축적되어져야 마땅할 부를, 그것도 비싼 이자까지 물어가며 현재에 저당 잡혀야만 앞날을 설계할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에서 말이 되게 이루어지는 아주 아주 악독하기 그지없는 모순. 이것이 우리세대들의 눈앞에 펼쳐져있는 아비규환의 지옥도인데 정말 「장가가야만 빨리 자리 잡는다.」는 말이 과약 작금에 통용되기 타당한 소리라 볼 수 있을까? 그런데도 이따위 말을 이시대의 총각들에게 입버릇처럼 지껄이는 노땅들을 보고 있노라면··· 대략 정신이 멍~ 해진다. 그래, 운 좋게 전후 사정 다 봐줘서 월세에서 시작해도 괜찮다는 여자를 만난다 치자. ··· 힘들걸? 요즘 그런 여자 찾기가 볏단 속에서 바늘 찾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건 굳이 입 아프게 얘기할 필요가··· 그래도 있겠지. 찾아보면. 어딘가엔. 이라는 말로 내가 방금 전에 내뱉었던 언사에 발끈하게 될 수많은 「자신이 지혜롭다고 여기고 있는」 여성동지들의 비난으로부터 피해나갈 구멍을 살짝 마련해 본다. 그러나 딱한 건 주위를 돌아봤을 때 그 정도로 속 깊은 아가씨를 만난 경우가 극도로 희박했다는 사실이다. 여담을 하나 보태, 열이면 열둘 그러한 여자를 만난 내 친구들은 그 어떤 일과 그 무슨 일이 닥쳐왔다 하더라도 절대 놓치지 않더라는 것.

여기까지가 바로 내가 눈깔에 달린 대롱으로 옆에서 지켜본 결혼이라는 놈에 대한 적나라한 의견이다. 정말 사람 진 빼놓는 녀석 아닐 수 없다. 물론 이것보다 더 많은 생각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겠지만, 우선은 여기까지만 하자. 친구가 계속 말을 이으려하는 것 같으니.

“아직 결혼 안하고 있을 때가 좋은 거야.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천국이었어 천국.”

“다들 그러데. 안 갈 수 있으면 안가는 게 좋다고.”

“그러니까. 나도 그 얘기 친구들한테 들을 땐 몰랐는데 정말 사실이더라. 될 수 있으면 가지마라.”

“그렇게들··· 힘든가. 근데 어차피 난 가지도 못해.”

“그때 일··· 때문이냐.”

“그래~ 잘 알면서.”

“후우~ 난 니가 부럽다.”

“? 미친~?!”

순간 언성이 조금 올라갔다. 한 십분지 일 즘은 진심이 섞여있었다.

“뭘 세상에 부러워 할 게 없어 그 따위 걸 부러워하냐? 이 미친놈아.”

“케헤헤··· 아니 그냥··· 화났냐?”

“화 낼 일도 없다 짜식아.”

“그래··· 한 잔 더 하자.”

“그려~.”

맑은 소리를 내며 술잔이 한 번 더 부딪혔다.

커허어~ 쓰다 써. 마지못해 마시고는 있지만 정말 쓰다. 사실 난 소주를 별로 안 좋아하는 데···. 그 쓴 뒷맛 어서 사라지라고 속으로 외치며 연신 찌개국물을 입술 사이로 가져다 나른다.

“한 잔 더 받아라.”

간신히 입안을 달랜 후 병을 들어 왕의 잔 앞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어느새 푸른 눈동자 안에 어른거리던 액체가 바닥에서만 살짝 찰랑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벌써 막잔이네. 쪼금씩 나눠먹자.”

녀석의 옥배를 7부 능선까지만 채운 나는 병 밑둥어리를 친구를 향해 들치며 어서 받으라는 시늉을 했다.

“그래.”

순순히 응한 왕은 곧이어 내 옥배에도 술을 부어주었는데 그 양이 6부 능선에서 살짝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이정도면 서로 불만 없이 마무리를 지을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천! 기가 막힌데? 너 영업하더니 술만 배웠냐?”

“아~ 이건 기본이지. 내가 연봉 1억 찍을 사람인데.”

뻥이다. 어쩌다 우연히 맞췄을 뿐.

“1억···? 좋지··· 후우~.”

아차! 녀석의 감정이 오늘 좀 민감해져 있다는 것을 일순 망각했다.

“그래에. 너는 영업 열심히 뛰어서 돈 많이 벌어라. 그러면 장가든 뭐든 길이 보일 께다.”

“··· 알았다.”

이것으로 막잔을 하고 우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도 시간이 거니와 항상 웃는 낯으로 사람을 대하던 친구가 평소와 다르게 침울해 있으니 맛있었던 음식도 이 이상 퍼먹을 기분이 나질 않았다.

“내가 낼께.”

먼저 지갑을 꺼낸 건 왕이었다.

에헤이~ 왜 이러시나. 지금까지 신세한탄 찌인~하게 늘어놓은 양반이. 허세는 게 무슨 허세란 말인가.

“시끄러웜마. 그리 힘들다고 해쌓더니 이래놓고 돌아서면 내 맘이 편하겠냐?”

“그래도···.”

“됐고, 어차피 나 회사 다시 다니니까 너 함 사줄라고 벼르고 있었어. 그리고 나 백술 때 니가 떠 먹여준 게 얼만데.”

“그래 그럼.”

“그려.”

왕은 더 이상 쓸데없는 저항 따위 하지 않고 가만히 친구의 협상안을 받아들였다.

난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 짧은 새 어제 점심값 굳혔던 것이 떠올랐다. 하루 전 이맘때도 남정네 둘이서 서로 돈 내겠다고 계산대 앞에서 옥신각신했었는데···. 어차피 점심식대는 영업비에 포함되어 있는지라 어저께 안 내었던 돈과 오늘 내야할 돈을 합치면 아주 깔끔하게 정리가 될 것 같다. 이 회사에 와서 처음 외근 다닐 때는 사용하는 건건이 마다 영수증을 첨부하여 결제를 올렸었는데, 그렇게 며칠 지나니 부장이 귀찮다고 그냥 엑셀 파일에 내역만 써내라고 방침을 바꾸는 통에 지금은 그냥 한도 7000원을 넘지 않은 선에서 요량 것 서류를 작성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 따라서 오늘 긁은 2인분을 어제 날짜로 하나, 오늘 날짜로 하나 적어내면 더 이상 흠잡을 데가 없겠다. 당근 소주 값은 빼고. 캬~ 이야말로 생색은 생색대로 내고, 실리는 실리대로 챙기는 아름다운 명장면이로구나!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마당 쓸고 동전 줍고.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 때고. 도랑치고 가재잡고 발 담그고 물 구경하고. 일전쌍조. 일거양득. ··· 고만하자 이 미친놈아. 암튼 여기서도 고맙구나, 정수야.

“사장님 계산이요~.”

한창 물이 오를 대로 오른 가게 안을 분주히 오가던 아주머니를 향해 소리 지르는 것 보다는 약간 작은 외침을 날려 보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 바쁜 분이 언제 여길 올지 알 수 없었기에.

“네 삼촌~ 잠시만요~.”

허걱, 이젠 나까지 삼촌이 되어버렸네!

저 멀리서 대답을 던진 이모는 앞치마 주머니에 들어있던 행주를 꺼내 손을 닦으며 쏜살같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곧이어 매대에 있던 기계에서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와 동시에 통장에 있던 돈이 카드를 통해 찌개집 금고로 흘러들어갔다.


작가의말

오래전 헤어졌던 연인에게서 온 전화 한통.

과연 천준호의 선택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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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일주일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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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금요일 NEW 5시간 전 2 0 23쪽
51 금요일 24.09.11 2 0 24쪽
50 금요일 24.09.07 4 0 24쪽
49 금요일 24.08.30 7 0 22쪽
48 금요일 24.08.22 8 0 27쪽
47 금요일 24.08.16 8 0 20쪽
46 목요일 24.08.08 8 0 22쪽
45 목요일 24.08.03 7 0 18쪽
44 목요일 24.07.27 8 0 18쪽
43 목요일 24.07.18 8 0 20쪽
42 목요일 24.07.12 6 0 20쪽
41 목요일 24.07.05 8 0 22쪽
40 목요일 24.06.28 7 0 12쪽
39 목요일 24.06.20 10 0 22쪽
38 목요일 24.06.15 12 0 26쪽
37 수요일 24.06.13 10 0 24쪽
36 수요일 24.06.12 7 0 26쪽
35 수요일 24.06.11 6 0 23쪽
» 수요일 24.06.11 8 0 24쪽
33 수요일 24.06.09 6 0 13쪽
32 수요일 24.06.09 6 0 13쪽
31 수요일 24.06.07 9 0 15쪽
30 화요일 24.06.06 6 0 14쪽
29 화요일 24.06.05 10 0 14쪽
28 화요일 24.06.04 8 0 15쪽
27 화요일 24.06.03 6 0 14쪽
26 화요일 24.06.02 8 0 13쪽
25 화요일 24.06.01 5 0 18쪽
24 화요일 24.05.31 11 0 13쪽
23 화요일 24.05.30 8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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