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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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nithr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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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8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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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8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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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DUMMY

그동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일에만 집중하려 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평상시 하듯 출근을 하고 약속을 잡고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이미 속은 타들어 갈 데로 타 들어가 전과 같이 잘 될 리 없었다. 무던히 애를 써 봐도 실적이 하락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그녀와의 부딪힘도 많아져온 터라 이미 여름 끝날 즈음부터는 폭발적인 상승세가 수그러들려는 기미가 보이고 있었고, 이윽고 서서히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시월 들어 막바지 준비에 들어서면서 또 더욱 크게 싸워가면서 확연히 줄어들었다. 마치 일장춘몽처럼. 이 죽어가는 기운 살려본다고 하긴 했으나 고작 일주일 가지고는 얼척 없는 일이었다. 하루하루 그렇게 안간힘을 쓰다가 기진하여 들어오면 약속한 것처럼 떠오르는 온갖 잡념들. 아침 해가 떠오를 때마다 그래도 박차고 일어나 부러 더 바쁜 척 뛰어다녔지만 다시 말 맹키로 쉬이 잘 되리란 건 한낱 소망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녀에게 고마운 점도 많았다. 청룡열차처럼 쉼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그 성질머리가 감당하기 힘든 건 사실이었으나 그래도 눈높이를 내게 맞춰주려 노력했던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었다. 여유가 별로 없어 버벅대던 나보다 그녀는 항상 더 많이 챙겨주고 무언가를 더 많이 해주려했다. 일이 늦어질 때마다 차를 몰고 와 태워준 적 또한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것도 없는 나와 결혼하겠다고 식도 간소화하고 신혼집까지 해오겠다는 것은 정말 말로 표현해 무엇 하랴. 어찌 보면 정말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것도 같았고, 내 지금 사정에 이번 기회 놓치면 앞으로 또 언제 장가갈 수 있으리오 하는 걱정까지 들었다. 그런 반면··· 점점 가속도가 붙어 이제는 한계 없이 훨훨 날아가고 있는, 흡사 「분노조절장애」는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녀의 성정을 평생 감내해야 한다는 걸 떠올리니 이 역시 막막하고 눈앞이 깜깜했다.

이 두 의려는 감성과 이성, 명분과 실리 사이에 끼어 엎치락뒤치락하기를 무한 반복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만나기로한 날은 곱다시 다가왔다.

난 수신 거부를 풀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신호가 가지도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나.”

“그런데?”

“오늘 만나기로 한 날이야.”

“알아. 어디로 가면 되?”

“··· 우리 처음 사귀기로 했던데, 거기서 보자.”

“알았어. 있다 봐.”


6개월 전, 서로 세상 그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 되어주자 다짐했던 곳. 그렇기에 털어내어진 아픔들이 아무도 모르게 깊숙이 묻혀져 있는 그 장소는 그닥 멀리 있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도 집에서 다섯 정거장 밖에 되지 않는 거리여서 생각도 정리할 겸 걸어가기로 했다.

때 이르게 찾아온 추위가 겉옷 위를 매섭게 훑었지만 속에 있던 더 추운 기운 때문에 외부의 한기를 느끼지 못하며 낙엽 난분분한 길 위로 발을 놀려대었다. 그런데··· 참으로 공교~했던 게 가을과 겨울의 자리다툼에서 삐져나온 바람이 애먼 나무들한테 심술을 부려쌓는 통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이파리들만 어머니와 생이별당해 세파에 흩날리다 결국은 땅에 떨어져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구는 그 모습 어찌나 처량하게 느껴지던지··· 마치 내 신세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허나 복잡했던 머릿속은 약속한 장소가 다가올수록 차츰 맑게 정리 되어갔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었고, 결혼까지 하자 했던 걸 보면 보통 연분이 아닌 것 역시 확실했다. 그렇게 준비해온 여기까지의 과정도 있었으며 벌써 신혼여행도 예식장도 다 잡아놓은 상태였다. 내 화가 나서 그리 쏘아붙이긴 했으나 기실 끝내고 싶다 해서 막 그렇게 쉽게 끝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유 다 떠나서, 비어있는 그 일주일 동안 그녀가 없는 마음이 횡 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다더니 이 짧고도 길었던 시간동안 그게 나한테도 파고들어왔는 모양이다.

생각이 이렇게 정돈되고 나자 모든 것이 명쾌해졌다. 등시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그리고 그녀가 보고도 싶어졌다.

큰 도로가에서 벗어나 개천 붙어 놓여있는 샛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자 금세 국립 4.19국립묘지 팻말이 보였다. 저곳이 두 계절 전 그녀와 사랑을 약속했었던 바로 그 장소였다.


아직 그녀는 나와 있지 아니했다. 그리고 공원 역시 닫혀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돌 조형물과 석탑 몇 개 세워져있는 입구 언저리에서 서성이었다. 해는 뉘엿뉘엿 눕는 길로 아직 이곳에 남아있던 온기들을 찬찬히 쓸어 담으며 같이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왔다. 그 비어지는 자리에 지독한 찬기가 몰려오려는 조짐이 보였다. 난 주머니로 손을 숨기며 발을 동동거리기 시작했다. 버스가 한두 대 지나갔지만 여기에 서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잠시 후 멀리서 올라오는 초록색 버스가 보였는데 별안간 찌릿했다. 저 차구나. 아니나 다를까 점점 속력을 줄이더니 마침내 앞에서 멈춰 선다. 그리고 그녀가 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왔어 희숙아.”

“응.”

“춥다. 오는데 힘들진 않았어?”

“별로.”

“암튼 고생했어. 일단 자리 좀 옮길까.”

“아니 됐어. 여기서 얘기해.”

당혹스러웠다. 내가 벌여놓은 짓이 있어 차가울 것이라곤 예상했지만 기온이 급강하하고 있는 와중에 아무데도 안가겠다니, 편시 어찌해야 할지 몰라 하는 머뭇거림이 몸을 때렸다.

“그래··· 그럼 일단 좀 앉자.”

“응.”

난 그녀를 이끌고 근방에 적당한 돌 의자를 찾아 같이 엉덩이를 붙이었다. 아직 겨울에 완전히 들어선 건 아니어서 잠시 몸을 걸치기가 어렵진 않았다.

“희숙아.”

난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있잖아. 우리 처음엔 이렇지 않았잖아. 서로 너무 좋아했잖아. 우리 여기서 처음 만났었던 그때 떠올리면서 다시 좀 잘”

“됐고 오빠,”

별안간 말을 끊고 손을 뿌리치는 그녀다.

“시간 없으니까 결론만 얘기할께. 나 다 마음 정리했어. 그리고 그거 말해주러 나온 거야. 다른 뜻은 없어. 그때 내가 분명히 말했지? 일주일 뒤에 보는 대신 그땐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나 집에도 이미 뜻을 밝혔고 부모님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 나 오빠랑은 더 이상 못 만나겠어. 그리고 오빠랑 결혼도 못하겠어.”

“희숙아.”

“난 할 말 다했어.”

“희숙아 잠깐,”

난 다시 한 번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거칠게 뿌리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숙아 어떻게 이럴 수 있니. 여기까지 준비해왔는데. 나, 나 있잖아 너 없는 그 일주일동안 생각 많이 했어.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깨달았어. 더 큰 마음으로 감싸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렇지만 이건 아니잖아. 이미 식장하고 다 잡아놨는데 이제 한 달도 채 안 남았는데 여기서 이러면 어떡해?!”

“역시··· 오빠는 자기 생각밖엔 안 하는 거야. 정작 나는 없어 나는.”

“그게 아니라,” “나는 뭐 괜찮은 줄 알아? 우리 쪽 하객이 몇 배는 더 많아. 무슨 뜻인지도 모르지? 오빠네가 입는 피해보다 우리가 입는 피해가 몇 배는 더 크다고! 난 그걸 튼 거야 지금! 지금 우리아빠 엄마 얼마나 곤란해 하시는 줄 알아? 딸자식 결혼한다고 동네방네 소문 내놓고 준비 다 해놨는데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모르겠어? 나도 그동안 꾹 참고 어떻게든 오빠랑 해보려고 노력했는데, 아니야. 오빠는 아니야. 오빠를 위해서 그렇게 희생할 필요가 없었던 거야.” “제발. 희숙아. 우리 다시 한 번 생각하자. 내가 잘못했어 진짜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나는. 갈께.”

“어 잠깐, 이렇게”

“조심히 들어가.”

“희숙아 희숙아!”

기분 탓이었던가? 드디어 살을 에는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매섭게 몰아쳐오는 그 기세에 부딪쳐 얼굴도 코도 얼얼해져왔다. 그녀는 자신이 해야겠다 마음먹은 말만 전하고선 그 이상 어떤 변명도 듣지 않겠다는 듯 일주일전의 내가 그녀에게 그랬었던 것처럼 매정하게 돌아섰다. 몇 번을 더 불러보았지만 삭풍에 나부끼는 그녀의 낙타색 트렌치 코드 자락만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날 희롱해댈 뿐이었다.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정말 이말 밖에는 더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커다란 망치로 두개골을 세게 쳐맞은 냥 머릿속은 하얘져갔다. 그 공허해진 와중에 오직 퀭- 하는 낮은 귀울림만이 고막을 가득 메웠다. 쫓아갈 생각도, 아니 발걸음을 옮길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정말 여기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집에 어떻게 가는 건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뒤 한번 돌아보는 일 없이 길을 건너 조금 전에 내렸었던 버스정류장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잠시 후 아까 그녀가 내렸던 버스와 같은 번호의 그것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으어~”

왜 그런진 모르겠으나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저도 모르게 솟구쳐 나왔다.

“허어어”

시야가 갑자기 흐려지더니 온 세상이 빠르게 물속에 잠기어갔다. 난 연신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훌찌럭임을 멈추려 애썼다. 그러나 꺼욱거리며 올라오는 울이는 멈추려들지 않았다.

그래도 난 그쪽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윽고 버스는 떠나갔다. 유몌 내린지 금방이련만 물기는 눈앞에서 쉼 없이 차올라 거듭 다시 팔뚝을 들어 좌우로 움직거렸다.

놀랍게도 그녀는 아직 그곳에 있었다.

난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종점부근인 이유도 있었지만, 애용하는 사람들조차 쌍욕 내뱉을 정도로 배차간격이 길었던 탓에 나와 그녀는 그렇게 한 동안 서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길을 건너 이쪽으로 오려는 낌새가 보였다.

그때 집에서 어떻게 이곳으로 왔는지 기억이 떠올랐다. 난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낯익은 카페 앞에 차를 대충 세워둔 나는 부른 배도 꺼트릴 겸 향긋한 봄내음에도 취해 볼 겸 민희와 잠시 산책길에 나섰다. 몇 년 전 이맘 때, 같이 갔다가 그 인파와 장삿속에 화들짝 놀랐었던 진짜 윤중로에 비하면 정말 호젓하고 운치 있어 둘이서 차분히 거닐기에 매우 좋았다.

예전엔 어떠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상당히 조심스러워 우린 사이로 벌려져있는 반 발짝 정도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잠시 후, 그미가 은근 다가오는가 싶더니 스을쩍 팔짱을 끼웠다. 실수인지 가슴도 살짝 스친 것 같았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헤헤.”

살짝 쭈뼛거린 나를 올려다보며 그미 배시시 웃는다.

“이러고 싶었지?”

“어, 아···.”

바보 멍충이 해삼 멍게 말미잘! 아니 다른 때는 그 입 잘도 놀려쌓더니 왜 이럴 때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어, 아, 어 거리기만 하고 있을까!!

“오랜만이다. 이렇게 오빠랑···.”

“어, 그니까···.”

“··· 그니까. 키득키득. 이거 내가 자주 하던 말이었는데.”

“그니까.”

“뭐에요~. 나한테 할 말은 없어요?”

“아, 저 그게···.”

할 말··· 많지. 엄청나게. 단지 어떻게 꺼내야 할지를 모르고 있을 뿐···.

“외국 생활은 할 만해?”

“췌- 고작 그거야?”

“걱정되지 아무래도.”

“그래, 그거 걱정되는 사람이 그렇게···.”

“···.”

“··· 지낼 만해요.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한국 음식 생각나면 재료 사다가 집에서도 많이 만들어 먹어요. 덕분에 요리 실력도 많이 늘었고. 역시 사람은 자취를 해야 하나봐.”

“그래? 한국요리까지···? 재료가···.”

“다 있어요 요즘엔. 근데 좀 비싸요.”

“맞아 나도 외국 나가보니까 소주 엄청 비싸더라. 거의 만원 넘는 곳도 있던데? 게다가 두바이 하면 물가 디게 비싸지 않나?”

“그렇긴 한데 싼 것도 있어요,”

“그래? 뭐지?”

“기이름!”

“아···.”

한방 먹었다. 도저히 저 대답엔 반박을 할 수가 없네.

“호호홋!”

“하하하··· 숙소는 어때? 지낼만해? 거기 엄청 더울 텐데···.”

“괜찮아요. 가을에서 지금까지는 생각 외로 선선해요. 이제부터 더워지기 시작하는데 한창 때는 나가있으면 막 살이 아퍼요. 그래서 그때는 거의 밖에 안 나가요. 그게 되는 게 건물 엄청 많고 또 에어컨도 무지막지하게 틀어놔요. 그래서 감기 심하게 걸린 적도 있어. 히히히.”

“다행이네. 선선하다니. 아우~ 난 더운 게 딱 질색이라. 알잖아 완전무결한 이 몸의 유일한 약점이 더위라는 거.”

“? 모올랐는데요오?”

“아···.”

“집도 좋아요. 처음 갔을 때는 숙소 배정 받았는데 다른 승무원하고 같이 쓰거든요? 근데 괜찮아요 시설도 디게 잘 돼있어. 수영장도 있고~ 뭐 암튼 없는 게 없어. 한번 들어오면 나가기가 싫다니까.”

“좋네. 그렇게 하고 싶어 하더니. 멋지다. 꿈을 꾼만큼, 또 그 꿈을 이뤄나가고.”

“응~ 암튼 엄청 좋아.”

소소한 일상들을 이렇게 대화로 풀어나가고 있던 약간은 어색한 남녀 사이에 찬 기운 살짝 섞여있는 재넘이가 불어왔다. 그 봄의 정취에 가슴과 머리가 형언할 수 없이 시원해졌고, 더불어 그 기운은 이미 민희의 체취와 벚꽃의 향기에 정신이 몽롱해져있던 몸을 몰래 달떠오르게까지 만들었다. 몽환적 기분에 도취되어진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잔뜩 폐부를 부풀려 신비롭게 떠다니고 있는 밤의 대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흐으으읍··· 하아~.”

이 모습에 잔잔히 입을 다물어가던 민희도 똑같이 따라한다.

“흐으으읍··· 하아~.”

“아아~ 좋다.”

“아아~ 나도 좋다.”

“진짜 좋은 데 이런 기분.”

“나도 진짜 좋다, 이런 기분!”

“따라쟁이.”

“따라쟁이!”

“쳇-.”

“췌-.”

“그만하자.”

“그만하자!”

여기까지 하니 갑자기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민희도 같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호호히히힛.”

그때 공원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크게 맴돌던 웃음이 점차 잦아들었다. 의식하지 않으려 했으나 어둠을 배경으로 서있는 석탑 몇 개와 돌 조형물에까지 눈길이 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어느새 여기까지 걸어왔구나.’

잠시 그곳을 바라보았다.

···

“······.”

“뭐해요?”

“응?”

“저기 뭐 있어?”

“아 아냐. 가자. 너무 멀리까지 왔네.”

“그래요. 이제 올라가요. 나 차 마시고 싶어.”

그래. 너무 멀리까지 왔다. 이제 그만 올라가야겠어.


“이 집은··· 아직 그대로네···.”

가게 안에 들어온 민희가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그러게··· 그대로야···.”

난 살짝 긴 숨을 섞으며 그 뒤를 이었다.

“나 나간 뒤로··· 여기 또 와봤어요?”

“아니··· 이 근처는··· 거의 안 왔어. 일부러···.”

“그렇구나···.”

“나도 진짜 오랜만에 오는 거야.”

이 카페는 민희와 나의 사랑이 격정적으로 불타오르던 시절,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솟아오르는 연정의 밀화를 나누기 위해 자주 찾았던 곳이다. 경치도 썩 훌륭하고 또 그만큼 으쓱한 곳에 있어 아는 사람만 오는데다가 집에서 가깝기도 가까워 우리 둘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더랬다.

좀 오래되긴 했지만 그래도 한두 번 와본 곳이 아니어서 주문하는데 시간을 많이 빼앗기진 않았다.

“오빤 어떻게 지냈어요?”

탁자 위에서 아름답게 일렁이며 약간은 어두운 실내를 소담스레 밝혀주던 촛불 너머로 민희의 목소리가 부드러이 감돌았다.


“나?”

그러고 보니 민희를 만난 뒤로 크게 내 얘기를 하진 않은 것 같다. 주로 내가 물어봤고 그미는 답해주고.

“응. 듣고 싶어요 오빠 얘기.”

그러나 정작 이렇게 물어오니 말문이 막힌다. 진짜 떠오르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나야 뭐 이 나라에서 사는 사람 다 그렇듯 그냥 저냥 이렇게 저렇게 살아왔는데···.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까··· 내가 해주고픈 말은 따로 있건만···.

“나··· 뭐, 그냥 그렇지 뭐. 별거 있겠어? 그냥 회사 다니고, 그랬지 뭐.”

“재미없어.”

나도 재미없다. 내 살아온 거.

“음··· 그때, 그··· 다니던 회사 그만두고···,”

“그, 선배랑 같이 하기로 했다는?”

“응? 아 어, 기억하고 있었구나 민희도.”

“그럼요. 그때··· 오빠 그때 뭔가 좀 생각이 많아 보였는데···. 나한텐 아무 말 안 했지만···.”

“··· 미안.”

“······ 뭐···.”

“···그래, 뭐 아무튼, 그래서 같이 한번 으쌰으쌰 해보자 그래서 열심히 뛰어다녔는데, 생각한 만큼, 노력하는 거에 비해 가져오는 게 너무 적어서···. 안 되겠더라구. 그래 접고는 그 뒤로 또 한 일 년 이것저것 공부했지.”

“공부? 1년? 그렇게나요?”

“뭐 별거 아냐, 계좌제라 그래서 국비지원으로 공부하는 게 있거든. 그걸로 자격증 좀 땄지. 한식조리사도 따고 양식은 실격당하고 중식은 6점차로 떨어지고 그리고 커피 바리스타도 따고.”

“이것저것 많이 했네요.”

“응. 알잖아, 나 요리하는 거 좋아하는 거. 그때 그걸로 바닷가에서 세상 젤루다 이쁜 아가씨 꼬셨었잖아.”

“맞아. 오빠 요리 참 잘 했었어. ··· 그때 그렇게 맛있게 먹어주는 게 아니었는데!”

나긋나긋하게 이어가던 말의 끝마디를 돌연 크게 올려붙이는 민희다.

그 모양새에 나도 순간 벙찌어 약 움찔했으나 다시 평상심을 되찾는 데는 더욱 짧은 시간만이 소요될 따름이었다.

“뭐? 키킥. 어쩐지, 다른 애들 거까지 다 뺏어 먹더라니. 난 그때 놀~랐어. 이슬만 먹고 살 것 같던 아가씨가 배통이 그렇게 클 준.”

“치- 댔거등여?!!”

“암튼 그렇게 하나 하나 배우고 시험 보니 1년 가더라고. 뭐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에 더 나이 먹기 전에 해보고 싶었던 거나 해보자 하는 마음에. 그러다가 여행상품기획자과정을 알게 됐고 그거 공부해서 또 자격증 따고 지금은 여행사 다니고 있어.”

“여행사요?”

“응. 뭐 민희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도 뒤늦게 해외 좀 돌아다니게 됐지.”

“그랬구나···.”

“뭐 별거 없지 뭐. 민희에 비하면. 이게 다야.” “으응. 뭐··· 오빠도 나름 바쁘게 보냈네···, ······.”

한창 대화가 이어지던 중 그미 쪽에서 슬몃 뜸을 들이려는 기색이 보였다.

나도 이 이상은 별로 해줄 말이 없어 그냥 잠자코 있었다.

“···.”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미의 입은 다시 열리는 듯했다.

“···그”

지이이잉~.

그런데 그 찰나, 음료가 준비되었음을 알리는 신호가 우리사이에 있던 공기를 세차게 흩뜨려놓았다. 거참! 타이밍 진짜!!

“아, 민희야 금방 가져올께 잠깐만~.”

“응. 그래요.”

난 깊어가는 이 밤 한시라도 민희와 더 같이 있고 싶어 사냥감을 채 오는 해동청마냥 바람 같은 속도로 그미와 내 앞으로 찻잔 두 개를 물어왔다.

“자 여기.”

“고마워요.”

“식기 전에 먹어.”

“네···.”

그미와 난 뜨거운 차를 호호 불어가며 마셨다가 촛불을 보았다가 창밖을 보았다가 또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가를 되풀이하였다.

“··· 그런데,”

그리고, 이정도면 되었을 거라 생각했는지 그미 다시 천천히 입술을 뗀다.

“그런데··· 그때··· 왜 그랬어요?”

“··· 어···,”

“···.”

···

그랬다. 오늘 민희는 이걸 알고 싶어서 온 거였다. 용기를 내어.

이제는 그에 대한 이유를 말해주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나 역시 오해를 풀고 내가 왜 그때 그래야만 했었는가를 얘기해주고 싶다. 그리고 부족하기 한량없겠으나··· 그에 대한 용서를 조금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다.

그미에게···.

“··· 그···,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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