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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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nithrone
작품등록일 :
2024.05.08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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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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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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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DUMMY

왜 내게 말을 못해~ 이미 지나간 일들 진부한 옛 사랑얘기~


그래 알겠다 알겠어. 이제 그만 좀 진부해해라 내 일어날 테니. 한참을 귓가에 맴돌았던 것 같다 저 노래구절이. 난 간신히 정신을 챙기며 머리맡에 놓여져 있을 전화기를 더듬더듬 찾아 집어 들었다.

???

취기가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한껏 찡그리며 시간을 확인해보니 잠이 확 달아나는 거 있지.

오메! 아이구!! 늦어부렀다!!!

어쩐지 노래가 끊이지 않고 들려오더라니, 10분 간격으로 계속 울어대던 거였구먼!! 큰일이다 큰일! 이대로라면 영락없이 지각이다!

꽝꽝거리는 머리를 흔들며 상체를 일으키자 세상에나, 어제 입고나간 옷이 그냥 그대로 몸에 끼워져가 있는 거다. 도대체 얼마를 퍼마신 거냐!!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다. 절대로 지각하지 않는 것을 직장인의 첫째 덕목으로 삼아온 나에게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는 크나큰 사건이 오랜만에 터진 것이다. 더더군다나 어제는 누가 술을 짓궂게 권한 것도 아니고 그냥 스스로 처마신 것 아니냔 말이다! 우아우아 일단 이럴게 아니라 빨리 움직여야 한다.

급한 대로 드레스 셔츠를 벗어던지고 우선 먼저 주전자에 물을 부어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았다. 아무리 급하다 해도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아침밥을 거스를 수는 또 없는 법! 내 이럴 때를 대비해 평상시에 컵라면을 솔찬히 쟁여두었지!

이 야단법석에 어머니께서 안방 문을 열고 나오신다.

“아들 왜 그래, 늦었어?”

“예 예 엄니, 급해 급해~.”

“아이고~ 어제 아주 그냥 술이 떡이 되어 들어오더니! 웬일로 전날은 일찍 들어오나 했다.”

“아이구 그러니까 말이야, 간만에 그냥 대취해 버렸네!”

“기억은 나냐? 바로 방으로 들어가더니만 씻지도 않고 엎어지데. 들어가서 옷을 벗기려고 해도 뭔 놈의 팔다리가 그리 무겁던지, 하다하다 에이~ 하고 그냥 나와 버렸다.”

“알았슈 알았슈~ 엄니 나 들어가 씻는 동안 라면에 물 좀~.”

“아니 아침부터 무슨 라면이야?!”

“아 이거 이럴 때 먹으려고 사둔 거 에요~. 아 몰라 나 들어 감다!”

평소에는 화장실 업무를 마친 뒤 밥을 먹고 나서 옷을 입는 둥하며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이빨을 닦으러 들어가지만 오늘은 그런 거 없다. 아주 그냥 한 번에 세수와 양치질을 끝내버리고는 냅다 튀어나왔다. 면도는 어찌했냐고? 그건 일단 보류. 어차피 이따 저녁 때 들어와 선녀를 만나러 가기 전에 다시 한 번 지대로 보수 공사를 해야 하니 지금 건너 뛸 수 있는 건 최대한 건너뛰어야 한다!

아마 5분도 안 걸렸을 거다. 어머니께서는 그 사이 라면에 물을 부어 놓으시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삐 움직이고 있는 아들을 쳐다보셨다.

“미안해. 내가 좀 깨워 줄 걸. 평상시 워낙 잘 일어나서 나도 신경 안 쓰고 자고 있었네.”

난 방으로 돌아가 아까 벗어재꼈던 드레스 셔츠를 다시 껴입으며 대꾸했다.

“그게 왜 어머니께서 미안할 일이에요. 늦게 일어난 건 난데.”

“그래도···.”

급해도 걸칠 거 다 걸친 나는 아예 가방까지 챙겨들고 나와 라면이 익고 있는 식탁에 앉아 무서운 속도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타이는 안하니?”

“네. 오늘은.”

미리 말했듯이 생략할 건 과감히 생략한다! 지금 넥타이 따위가 중요한가? 그런 거 하루 쯤 안한다고 해서 세상 뒤집어지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눈앞에 있는 컵라면 한 사발이 말도 못하게 더 중허다. 아무래도, 설혹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렇게 회사 가다가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되었을 때 넥타이를 안 하고 온 것 보다는 아침을 먹고 오지 않은 것이 저승길 올라가는 내내 더욱더 후회가 될 테니.

“계속 회사 사람들하고 있었냐?”

“네네. 후룩~.”

“그 시간까지?”

“쩝쩝. 어쩌겠습니까.”

“아이고 참, 왜 그리들 마셔댄대?”

“뭐 사회생활 하는 사람들 그렇죠 뭐.”

설익은 면발과 뜨거운 국물을 번갈아 입속으로 들이붓는 와중에도 난 어머니의 물음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가뜩이나 사회생활에 치여 가족 간의 대화가 많이 줄어든 형편인데 그나마 짧게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멍청한 폭음 때문에 날아갔다고 생각하니 그런 한심한 나 자신한테 겉으로 표 나지 않게 화가 났다.

“근데, 어제 집에 어떻게 왔는지는 기억 나냐?”

어···? 그러고 보니 내가 어떻게 들어왔지? 어제 민희랑 통화한 후 기분이 좋아져서 술 갑자기 들이부은 것까진 생각이 나는데··· 일어나보니 내방이었다는. ··· 끊겼었구나.

“아 물론이죠~!”

이건 무조건 잡아떼야 한다. 만약 기억 안 난다고 했다간 정말 어미가 자식을 쳐다보는 눈 길 중에서도 가장 최하급에 속하는 시선을 목도하게 될 것이 극명하기에.

“··· 뜨문뜨문.”

“···잘~하는 짓이다. 회사 사람들 술 많이 먹는다고 뭐라 하더니 너도 또~옥같네.”

“···.”

이제 더 이상 대답해선 안 된다. 마침 라면도 거의 다 먹어가겠다 어서 빨리 이 난국에서 빠져 나갈 때가 왔음이다.

아무 대꾸도 않고 후후 불어가며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목으로 넘긴 나는 뒤처리를 어머니께 부탁하고는 황급히 현관문을 나섰다.

평상시 느긋하게 경치 감상해가며 10분 정도 걸어갈 정류장까지의 거리도 오늘은 3~4분대로 주파해냈다. 내가 이리 발을 동동거리는 이유는 잠자리 틀어넣은 동네 특성상 약속 된 시간에 늦을시 단축할 수 있는 방법이 도무지 없는 까닭이다. 지하철을 탈라 쳐도 어차피 같은 정류장에서 버스를 탄 뒤 환승해야 하고, 또 회사 가장 가까운 역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오거나 아니면 다시 버스를 이용해야만 한다. 그 시간이 여기선 더 오래 걸린다. 게다가 택시를 탄다 해도 서울시내 아침 출근길에서 전용차로로 달려가는 버스만큼 빠를 리 만무하다. 사정이 이러하니 항상 여유시간을 앞서 잡고 집을 나설 수밖에. 하지만! 다행히도 기상하여 여기로 오는 동안의 모든 과정을 일사천리로 처리해버린 탓에 살짝 아슬아슬한 시간대까지는 진입한 것 같다. 서두른 보람이 있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 만약 버스운행이 계획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 버리면 바로 지각할, 넋 놓고 안심할 수 없는 시간대이기도 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 혼자만 술 많이 먹은 게 아니니 다른 직원들도 다 늦게 오길 바라는 요행에 승부수를 걸 수밖에···.

이런··· 말해놓고도 참 비열하고 사악하게 느껴지는 건 또 왜이냐···.

음··· 그런데···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항상 적중하는 게 세상의 법도인 듯. 그리 서둘러 달려왔건만 내가 타야할 버스는 오랜 시간을 기다린 뒤에야 그 애증 가득한 모습을 삐질 거리며 나타나준다. 이거 약간 위험한데?


오늘은 왜 이리 늦게 왔냐고 기사아저씨한테 따지고 싶었지만 괜히 그래봤자 분명 다들 미친놈 취급할 것이 뻔하기에 그냥 뚱한 표정을 안고 늘 앉던 자리로 힘겹게 기어가 쓰러지듯 무너져 내렸다. 전화기를 보니 8시 정각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버스가 살그머니 말썽을 일으킨 게 못내 야속했으나 이젠 다른 방도도 없다. 난 할 만큼 했다. 나머진 가장 편한 자세를 취하고 모든 걸 하늘에 내맡기는 수 외에는 없겠다.

아 근데 그랬더니 긴장이 풀어지며 잊고 있던 숙취가 다시 고개를 쳐들고 지랄이다? 머릿속은 두개골을 망치로 사정없이 내리 맞듯 꽝꽝거리고 입속은 바짝바짝 말라 오는 것이 아주 죽겠다 죽겠어. 몸 여기저기 욱신거리기까지 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간밤 귀갓길에 몇 번 나자빠지기라도 했나보다. 게다가 제 아무리 안온하게 있으려 해도 도무지 그게 안 된다. 전날 했던 과음이 몰고 온 숙취에게 시달려 본 사람은 다들 알 것이다. 어떤 자세, 어떤 행위를 해봐도 불편하기가 매 한가지임을. 뭘 도대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방법은 그저 하나, 개중 가장 나은 자세를 잡고 억지로 참을 청하는 것 뿐.

그래도 기분은 좋다. 어제 민희와 통화한 것이 꿈은 아니었으니. 벌써부터 저녁이 기다려진다. 그미는 과연 얼마나 변했을까.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눈감은 얼굴 밖으로 실실 웃음이 새어나간다.


결국 5분 늦게 출근 도장을 찍었다. 하하하. 그래도 많이 늦지 않아 다행이고 그것보다 더 다행인건 아무도 나와 있지 아니하였다는 거! 음하하하하. 이대로 가만히 뒤이어 오는 직원들을 보며 난 안 늦은 척하고 있으면 Everything is OK!

그러나··· 내 속은 아직 내 속이 아니라네. 운 좋게 토는 쏠리지 않았지만 숙취와 항상 같이 다니는 두통이란 놈이 머리를 빠갤 듯이 조여 오는 통에 하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까지 좀 엎드려 있기로 했다. 막간을 이용해 민희에게 연락을 해보고도 싶었으나 미인은 잠꾸러기라는 말을 철썩 같이 따르고 있는 그미의 행동양식을 존중해 참고 또 참았다. 그러한데다가 모처럼의 긴 휴가를 받아 한국에 온 것이기 때문에 방해만 받지 않는다면 아마 오후가 되어서야 그 아리따운 눈망울에 햇빛을 쏘여줄 게 분명하다. 기다리자. 지금까지 몇 년을 기다려왔는데 이 잠시를 못 기다리겠냐.


운기조식에 몰두한지 대략 2~30분 정도 지났을 때인가 저 멀리 복도에서 우리 직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른 회사들은 다들 아침업무로 사무실에서 바삐 움직이는지 쥐 죽은 기척 하나 고막으로 전해져 오지 않던 공허한 현간에 갑자기 울려 퍼지기 시작한 뜀박질 소리는 그 위풍당당함과 늠름함으로 미뤄 짐작하건데 백퍼 우리 회사 사람들의 그것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나도 이제 슬슬 내공심법을 거두어야지. 극히 조심스럽게 천천히 천천히. 급격히 기를 뒤틀었다가 자칫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빠져들 수 있으니.

“안녕하십니까.”

“와~ 천 대리님 역시 와있었어!” “괜찮아요? 어제 많이 먹은 것 같은데.”

“뭐 저만 먹었나요, 괜찮습니다.”

“사장님은요?”

“안계십니다. 아마 사장님이 가장 많이 드셨을 걸요? 오늘 아침엔 전화도 안 하시네요.”

“맞어. 사장님 맨날 천 대리님한테 전화해서 누구누구 지각했냐고 물어보지?”

“아 아뇨아뇨, 그것 때문에 전화하시는 것 아닙니다!”

“다 알고 있어요 우리. 으유 이 고자질쟁이!”

“헛?!!”

안되겠다. 내상도 어느 정도 회복했으니 이 이상 앉아있지 말고 빨리 나가야겠다.


“저희 인차투어는 이번여행엔 제대로 된 가이드가 좀 붙어야 하는데 하는 고민 같은 거 가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네.”

“그냥 프리로 뛰는 가이드를 그때그때 불러오는 게 아니라 저희 회사의 이름을 걸고 일하는 사람들만 있거든요. 일단 한번 이용해보시면 분명 다음에도 또 저희 인차투어를 찾으시게 될 겁니다.”

“네.”

“굿모닝 아시아나 트레져 아일랜드도 물론 좋은 회사지만 저희는 이름에서도 아실 수 있듯 특히 인도차이나 반도··· 베트남-캄보디아지역······.”

“네.”

“······ 그러니까 ··· 그 부분에 있어서는 ······ 그렇습니다.”

“네. 잘 알겠네요.”

사장님은 하는 일이 매우 바쁜지 앉으라고 해놓고는 앞에서 내가 암만 열심히 떠들어대도 컴퓨터화면에서 눈도 돌리지 않은 채 그냥 네 네 거리는 마른 대답만 되풀이하고 있다. 나도 맥이 빠져 최소한의 설명만 마치고 일어서려했다. 근데 그 찰나 먼저 사과를 해 오는 것 아닌가?

“아 미안합니다. 지금 일이 좀 급해서요. 앉으시라고 해놓고는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요즘엔 바쁜 게 좋은 거죠. 그래도 이렇게 잠깐이나마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기, 이번 주는··· 계속 바쁘고, 다음 주에 한번 들러주시죠. 그때는 제가 시간 꼭 비워 놓겠습니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이렇게 갑자기 불쑥 찾아온 것 자체가 큰 실례죠.”

“뭐, 영업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저두 예전에 다 거쳐봐서 압니다. 일단 그래도 찾아오셨으니 그 차는 천천히 다 드시고 가세요.”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선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열심히 일하는 사장님 혼자 있는 사무실에 아무 상대도 없이 덩그러니 앉아 마시고 있어 무엇 하리.

“안녕히 계십시오. 그럼 다음 주에 찾아뵙겠습니다.”

라는 큰 인사말 남기고는 찻물이 든 종이컵을 이끌고 문 밖으로 몸을 옮길 밖에.

시간은 벌써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다른 날보다 일찍 사무실을 나섰지만 방문할 곳이 많아서 그랬던 건 아니고, 순전히 술이 덜 깨 해롱대는 모습을 회사 내에서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던 때문이다. 그랬기에 생각 없이 올라선 교통편에서도 내내 쳐져 있다가 영업지역까지 와서, 평소 눈 여겨 봐뒀던 장소를 찾아들어가 사람들 시선을 피해 좀 누워있다 나온 터였다. 원래 운기조식은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곳에서 시전 해야 효과가 배가 된다는 건 강호에 몸담고 있는 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그 탓인지 조금은 심신을 운용할 정도가 되어 근처에 있던 여행사 몇 곳을 방문했으나··· 아직 이정도 회복상태 갖고는 어림도 없다. 오늘 오전 일은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잠깐 걸어 조금 전까지 생기生氣와 사기邪氣가 우위다툼을 벌였던 은둔지로 찾아 돌아와 뜨듯한 기운 아직 감돌고 있는 녹차를 천천히 홀짝였다. 하루 중 두 번째로 중요한 점심 밥 시간이 목전에 다다르고 있었지만 이번 차는 눈물을 머금고 건너뛰는 수밖에 없겠다. 지금 속사정으로는 제 아무리 좋은 무언가가 들어간다 한들 그것조차도 도저히 감당 해내기가 힘들 것 같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일단은 좀 쉬고 싶다.

그런데··· 민희는 지금 쯤 무얼 하고 있을까. 아직도 자고 있을라나?

난 바지주머니 속에서 고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잠들기 전 그미와 주고받았던 내용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침에 확인해보니 어젯밤과 오늘새벽사이 내가 보낸 생일축하 문자의 흔적이 단말기에는 남아 있었다. 아마 만취한 상태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띄운 것 같은데 아직껏 그 축전에 대한 답이 오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자고 있는 게 확실하다. 그 순백의 자태를 공원 의자에 누워 상상하고 있을라 치니 예전에 그미 옆자리에서 같이 별을 새다 잠들고 그미와 아침햇살을 맞이하며 같이 일어나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정말 그렇게만 되면 여한이 없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머리가 지끈거리는 와중에도 계속 그미에 대한 생각이 떠나갈 줄 몰랐다.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만날 수 있겠구나.


오후 영업은 한 시를 훌쩍 넘겨서야 재개 되었다. 그때서야 몸과 정신을 제대로 가눌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슬펐다. 오전시간을 아깝게 허비한 만큼 점심 이후부터는 열심히 돌려고 노력했고 또 움직이는 와중에 「고마워요 오빠 나 이제 일어났어요 ㅎ」라는 문자까지 천사가 보내주어 힘이 북돋았으나, 모든 방문지마다 적용되는 그 「최소체류시간」이라는 걸 무시할 수 없어서 다른 날만큼 이상은 해내지 못하였다. 그저 ‘내일부터 더 열심히 하면 되잖아!’라는 멍청한 말로 스스로를 토닥이고는 공식적인 외근일정에 막도장을 찍었다.

사무실로 오는 길에는 어제 너무 감격에 겨운 나머지 미처 정하지 못했었던 구체적인 일정을 확실히 매듭짓기 위해 민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시금 들떠오는 감정을 진정시키며 그미의 번호를 눌렀더니 대번 들려오는 말소리가

“오빠 어제 술 많이 먹었죠?!!”

하는 약간 높은 음의 어조였다.

어쩐지··· 간밤 내가 보냈던 생일축전 외에도 몇 번 더 전화를 건 형적 또한 발견 되었었는데, 개중에는 짧은 동안 통화한 기록도 있었다. 그 시간이 무시할 만큼 짧다고 여겨 애써 외면하고 있었으나··· 무슨 사달이 났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 아··· 미안. 내가 좀 어제 많이 먹어서···.”

아이구··· 도대체 뭔 소릴 했는지···.

“으이그~ 하여간~ 여전하네 여전해!”

“민희야 진짜 미안···.”

“어제 뭐라고 했는진 알아요?”

“어··· 그, 그게···.”

“어이구~ 완전히 취했었구만 취했었어! 뭐에요? 그 시간에. 난 놀라서 받았더니만 계속 암말도 안하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고 계속 불러도 대답두 없고!”

다행이다. 다행이 전화에다 대고 뻘소린 안한 모양이구나. 정말 다행이다! ··· 후우~, 이런 걸 다행이라고···. 차라리···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자.

“아··· 미, 미안해···. 나, 민희한테 연락 온 게 너무 기뻐서 어제 실수 좀 했나봐···.”

“됐어요!!”

“···.”

“오늘 어디서 볼 꺼에요!”

“응?”

“오늘 어디서 만날 꺼냐구요! 안 볼 꺼에요?”

“아, 아냐 봐야지!”

“몇 시에!”

“퇴근하고 바로 갈께.”

“그러니까 몇 시에~!”

“어, 집으로 바로가면··· 한 일곱 시 반에서 여덟 시? 여덟 시 아 아니, 여덟 시 반에 갈께.”

“어디로!”

“내가 민희 집 앞으로 갈께.”

“좋아! 오늘은 늦으면 안 돼요~~! 알았죠?”

“응. 안 늦어 안 늦어. 내가 그때 갈께.”

“그래요. 그럼 이따 봐요.”

“그래 이따 봐. ···민희야.”

“네 오빠.”

“화 많이 났어?”

“화 난 것 같아요?”

“응.”

“그래요. 많이 났어.”

“아···.”

“그러니까 이따 와서 풀어줘야 되요!”

“아!”

“알았죠?”

“응 그래야지. 꼭.”

“이따 하는 거 봐서 맘에 안 들면 나 화 안 풀 거야.”

“그래그래. 나 하는 거 봐서.”

“이따 멋지게 하고 와야 돼요~.”

“응. 민희도 이쁘게 하고 나와~.”

“난 안 그래도 이뻐~~.”

“그래···. 민희 뭘 해도 이뻤지.”

“놀랄 준비나 해요. 오빠랑 만날 때 보다 몇 배는 더 예뻐졌으니!”

“그래. 기대하고 있을께.”

“그럼 끊어요. 나 이제부터 꽃단장해야 돼.”

“그래. 먼저 끊어 민희야.”

“네 오빠.”

성공적으로 약속을 잡았다.

엣헴~!! 이쯤 되면 나도 실력이 대단하지 않나? ··· 관두자.


저녁 8시 30분. 시간은 충분하다. 6시 반, 빛의 속도로 사무실을 나가 버스를 잡아타면 집까지 늦어도 8시 안으론 떨어지니 아침에 못 다한 공사를 보완하고 잽싸게 튀어나가 민희한테로 가며 케잌을 사면 끝! 선물을 준비할까도 생각해보았지만 시간도 촉박하고 지금 우리 관계에서는 그런 게 오히려 부담스럽게 작용할 거 같아 그냥 생일케잌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서로의 집도 그리 멀질 않아서 차를 몰고 근처에 있는 빵집에 들러 좀 예쁘장하고 고급진 놈으로다 고를 여유도 충분하다.

이런 내 맘을 눈치 챈 버스는 거침없이 시내를 가로질러갔고, 차장 밖으로 펼쳐져있는 세상은 푸르른 봄맞이 옷을 고색창연하게 갈아입으며 서로서로 경쟁하듯 그 멋들어진 신모를 뽐내었다. 난 그 눈부신 광경을 바라보며 새삼 에움의 아름다움에 취해 더 진해질 봄의 향연이 이끄는 대로 온 몸을 내맡기고는 파랗게 돋아나오는 새싹들과 함께 흥겨운 어깨춤을 덩실거렸다. 이미 백승미라는 사람은 마음속에서 지워진지 오래였다. 영근이형과 그가 걸어오는 전화가 주었던 짜증도 사라져있었다. 오직 오늘 저녁에 어디서 무얼 어떻게 해야 민희의 얼굴에서 화사한 웃음이 피어오를까 하는 생각만이 가슴속에 꽉 들어차있어 다른 무언가가 감히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민희와 처음 만난 건 내가 서른 한 살 나던 해의 여름 어느 바닷가에서였다. 일단 도입부부터 놓고 보자면 실로 로맨틱하다는 생각이 확 밀려들어온다. 여름 바다와 여인,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된 사랑이야기. 그러나 세상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멋스럽게 일어난 사건 뒤에는 그걸 이룩해내기 위해 치열하게 벌어진 필연의 과정들을 빼 놓을 수 없다. 이제부터 털어놓을 나의 이야기 역시 그러하다.

당시 난 처참했던 전 여자와의 힘겨운 연애로 인해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져있는 상태였다. 거의 폐인수준으로. 그리고 그때 입었던 타격은 반 십년이 넘어간 지금까지도 회복되지 않고 있을 만큼 나의 생활 전반을 피폐하게 만들어 놓았다. 아직도 두어 해는 넘어가야 이 상흔의 치유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예견 할 수 있을 정도이니 지금 얘기하고자 하는 시절의 내 모습은 정말 제대로 된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었다. 그런 날 그나마 정상적인 길로 돌아올 수 있게끔 해준 것이 「나의 민희」였다. 운이 좋았던 건 그때가 외적으로는 내가 가진 매력을 최대한 발산하던 몇 해 안에 들어가는 시기였었다는 거다. 속이야 남모르게 썩어 문드러져 가건 말건. 그렇다고 막 키가 크고 얼굴이 잘 생겼다는 그런 얘기가 아니라 남을 배려할 줄 알고 말도 재미지게 하며 어디 가서도 싹싹하게 굴어 남녀노소 누구와도 모나지 않게 잘 어울리는 나름 괜찮다 자부하고 있는 성격과 더불어 꾸준히 해온 자기관리 덕분에 탄탄하게 잘 다듬어진 몸을 갖고 있었다는 것쯤으로 해두자. 타고난 하드웨어는 어찌하지 못하니 소프트웨어라도 부지런히 갈고 닦자는 마음으로 오랜 동안 절차탁마해온 세월이 어떻게든 결실을 이루어낸 눈물겨운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이마저 없었다면 중키에 보통 안 된다 자신하는 얼굴로 어찌 연애를 할 수 있었겠는가 큭큭큭. 그렇게 부단히도 노력해오던 내가 단 한 번의 잘못 된 만남으로 인해 사람구실하기를 포기하는 길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으니 그걸 옆에서 보고 있는 친구들의 마음은 또 오죽이나 아팠을까.

여하튼 이리저리 해류에 휩쓸리는 바닷말처럼 그냥 생각 않고 되는대로 세파에 몸을 굴리고 있던 당시의 어느 날이었다. 친한 친구 하나가 같이 바닷가에 놀러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던져왔었는데···, 돌려줄 대답은 응당 거절의 말 외엔 없었다. 내 상황이 어딜 가서 유희를 즐기고 있을 만치의 정신상태가 아니었던 데다 또 그런 곳에 쓸 돈조차 없는, 한마디로 개그지 신세였기 때문에. 아 그런데 이 친구, 포기는커녕 더 간절하고 구구절절하게 매달리는 것 아닌가? 이번 여행에 자기 애인이 혼자인 친구들을 데려오기로 했으니 남자 쪽에서도 짝을 맞춰가야 한다고. 그것도 2박 3일로. 이러한 상황이라면 어떤 좋은 곳을 가던 서로 어색하고 쑥스러울 분위기가 모두의 머리 위로 무심히 내려앉게 되리란 건 당연한 귀추. 그 난세를 빠르게 평정하기 위해서라도 이 몸의 도움이 살금 필요한데 그것도 그거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혹시 그 중에 좋은 인연이 있게 되면 새로운 사랑으로 고통만을 남기고 간 나쁜 사랑을 씻어낼 수있지 않겠느냐는 큰 유혹의 뼈대 또한 맞춰갖고 와서. 더구나 친구는 그래도 몇 번 보았다고 준호오빠 재밌으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번에 그 오빤 꼭 와야 된다는 여친님으로부터의 엄명을 들먹이며 애써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렇게까지 나오니 도망칠 수가 있나. 또 극구 사양하는 내게 녀석은 억지로 경비마저 빌려주었고···. 우리의 그해 여름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날짜도 잊혀 지지 않는 7월 29일. 뜨거운 태양이 자기 아래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려죽이겠노라 작정이라도 하듯 뇌살적인 열기를 뿜어대던 그날, 그 숨 막히는 아지랑이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된 민희와 난···, 우리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베가와 알타이르가 빛의 대화 신비롭게 속삭이며 내려다보는 가운데, 생애 최고의 여름을 함께 나누어 가졌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던···.


우리가 바닷가로 떠나기 위해 모였던 거리에서 민희를 처음 본 순간 난 기이 그미의 마법에 걸려있었다. 두 번의 밤과 세 번의 낮을 보내는 동안 난 평소보다 더 활발하게 뛰어다녔고 더 많이 웃고 다녔다.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요리기술중 자타가 공인하는 맛을 낼 수 있는 음식만 골라 자랑 섞어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사이 난 쉬지 않고 그러나 티 나지 않게 민희를 훔쳐보았다. 저렇게 예쁜 여자랑 사귀게 될 남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는 약간은 자신감 부족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가면서. 어쩌다 그미의 단아한 아름다움과 마주하기라도 하면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아까 말했듯 그때는 내가 그나마 갖고 있던 매력이 정점을 달리던 시절이었고, 또 그러한 활력 넘치는 풍의에 같이 놀러갔었던 여자들도 적잖이 호감을 비춰왔었다. 오롯 민희만이 알 듯 모를 듯 모호한 태도로 일관하며 도도하게 굴었을 뿐···. 나중에 들은 얘긴데 자기가 그렇게 행동할 때마다 안절부절 거리며 애타하는 내 모습이 꽤나 귀여웠었다는···. 그냥 나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쥐락펴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며칠 새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길을 잃고 헤매이던 폐인 천준호는 차차 사라져갔고, 슬픔과 괴로움에 찌들려 보내야했던 지난날의 고통 또한 같이 여름 밤바다의 물결 속으로 떠밀려 멀어져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눈 속엔 오로지 이 번민 가득한 세상에 유일한 희망이 되어줄 하늘 빛 선녀의 고아한 모습만이 그윽히 차올랐다.


이렇게 보낸 달콤한 휴가의 끄트머리에서, 난 용기 내어 눈부신 자태로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일렁대던 노을 빛 태양보다 더 밝게 반짝이고 있는 민희의 눈동자를 바라보았고··· 잠시 후 그미의 손을 잡았다.


작가의말

오래전 헤어졌던 연인에게서 온 전화 한통.

과연 천준호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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