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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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nithrone
작품등록일 :
2024.05.08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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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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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1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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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DUMMY

“잘 먹었다.”

“잘 먹긴 뭘 인마. 내가 더 잘 먹었지.”

“미안하다. 너 일해야 되는데 술 하자고 해서.”

“일은 나만 하냐? 그리고 난 영업이야 영업. 어디 가서 쳐 자빠져 자도 돼.”

월말마다 옥죄어 오는 실적의 압박을 감내할 수만 있다면.

“그래, 그럼.”

하고 나머지 인사를 건네려는데 녀석이 잠시 머뭇거린다. 이대로 헤어지기엔 뭔가 아쉬움이 남는가보다.

“준호야.”

“어? 왜?”

“커피 한잔 할래? 커핀 내가 살께.”

이거이거 오늘 이 친구 아주 그냥 한잔 병이 도졌구먼? 아까부터 자꾸 한잔 한 잔 타령하는 것이!

잠시 대답 대신 짧은 의려가 머릿속을 스쳐 다녔다. 지금 시간이 12시 30분. 앞으로 남은 시간은 30분. 일을 하러 가려면 그 몇 십 분을 이용해 움직여야 하는데···. 하지만 이미 술을 먹은 몸. 이 냄새를 어찌할까 하는 고민 역시 무시 못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취기도 빼야하니 씨발꺼 그냥 마셔버리고 이동하자. 커피 한 잔으로 입안 좀 헹구고 껌 좀 사다 씹고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한숨 자고 나면 정상으로 돌아오겠지.

“어디 아는데 있냐?”

“응.”


우린 허름했던 골목을 벗어나와 조금은 더 세련돼 보이는 시가로 가는 곳을 옮겼는데, 그렇게 애써 찾아온 카페 안에서도 왕은 별말이 없었다. 하지만 술을 한잔 하고 나니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 것도 같아 보였다.

“손님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내가 가져올께.”

선불을 지급한 왕에게 그 고마움에 대한 보답을 하고저 난 잽싸게 엉덩짝을 움직이었다.

“응 그려~.”

회사생활의 「꽃」인 점심시간이 후반부로 이른 터라 매장 안은 여자남자 할 것 없는 수많은 정장쟁이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여기가 직장 밀집지대인 탓인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주문을 하고는 밖에서 기다리다가 때 되어 나오는 음료를 받아들고는 그 길로 어디론가 삼삼오오 떠나가 버린다. 그걸 노린 때문인가? 가게는 매우 작고 협소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커피집 주인의 아주 현명한 전략일 수도. 임대료가 당연히 살인적일 이 종로바닥에서 그 부담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앉아서 시간 때우는 카공족을 상대하는 대신 빨리 사들고 빨리 가버리는 직장인들로 회전률을 높여 수익을 극대화하는. 그러한 점주의 고뇌가 묻어나도록 배치된, 일견 빽빽해 보일 수 있는 탁자 사이로 난 요리조리 춤을 추며 아메리카노 한 잔과 복숭아 아이스티 한 잔을 무사히 날라 왔다.

“잘 먹을께.”

“별 것도 아닌데 뭘.”

별 거 아닌 게 아니라네 이 친구야.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인구 중 9억은 굶주리고 있다구. 순전히 운 좋은 거 하나만으로 이런 나라에 태어나 이렇게 배곯지 않고 지낸다는 것에 우린 늘 감사해하며 살아가야한단 말이지. 그러니 그게 무엇이 되었든 「먹을 것」을 사준다는 행위에 대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마워해야 함이 매우 마땅한 우주적 이치!

이와 같은 복안을 알아주듯 얼음 속에 싸여있던 시원한 도실 맛 찻물이 더욱더 상큼하게 몸과 마음을 일깨워주누나.

후아~ 술기운이 다 날아가는 느낌이다.

“괜찮냐?”

난 여전히 말이 없는 왕을 향해 조심스러운 입을 열었다.

“괜찮지 그럼.”

“아니아니, 너 술 말이야.”

“아이~씨. 얼마나 먹었다고.”

“허허허. 녀석 살아났네.”

피식- 하고 녀석이 웃는다.

“조만간 제대로 한잔 하자. 뭐,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요즘 세상살이가 좀 팍팍하긴 하지···.”

“그러니까 말이다. 어른들이 남자는 장가가야 자리 잡는다고 했는데, 요즘엔 그 말뜻이 뭔지도 모르겠고···.”

···

조금 전에 나도 떠올렸던 생각인데··· 친구 놈도 느끼고 있었구나. 이래서 사람 맘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하는 거였어···.

안타깝게도 난 그 말에 적당한 응수를 해주지 못했고 또 얼마간의 하릴없는 침묵이 우리 사이를 맴돌게끔 놔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암묵의 언약은 다행히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한동안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던 왕이 아직은 계절상 열어두지 못하는 접이문 밖을 바라보고 있던 내게 뜬금포를 던져온 까닭이다.

“야, 너 여자 소개 받을래?”

이건 또 무슨 소리?!

하아··· 요즘 봄바람이 살랑거려서 그런가? 다들 왜 이리 사람 맘 싱숭생숭하게 하는지 모르겠네.

“무슨 소리냐 그건 또.”

“아아니이, 괜찮은 아가씨가 한 명 있어서 말이야.”

“지랄한다. 아까는 장가가지 말라고 그래쌓더니?!”

“야. 그거하고 그건 틀려~. 장가는 장가고, 그래도 연애는 해야지~!”

그런가?

“그거 맥 끊으면 안돼야. 너 지금 내가 알기로도 한참 없었잖아. 우리 나이 벌써 삼십대 중반이야. 이때라도 하나 만들어 놓지 않으면, 너 조금 있으면 우리 아, 아니 아니 우리 말고, 나 빼고 암튼 만날 기회도 없어진다야. 얼마 안 남았어 우리 이제.”

틀린 말 같지는 않다. 사정상 결혼까지는 언감생심이라 하여도 그래도 빈 옆구리가 아련해 오는 것까지는 막지 못하고 있어온 몸이었다. 하긴 결혼으로 대변되는 속박의 구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이라는 주변의 시선만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그깟 연애쯤이 무슨 대수랴. 내가 사람을 만나건 말건, 결혼을 하건 안 하건 간에. 그러한데다가 날씨까지 춘기발동케 하는 봄이라니! 으아아! 그렇잖아도 겨우내 꽁꽁 싸매고 있던 길고 두터운 옷들 훌렁 벗어던지고 멋진 오피스룩을 뽐내며 신선한 향취 흩뿌리고 다니는 아가씨들을 넋 놓고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러하나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법. 아직은 때가 아니다. 어제 그 금제의 영역을 넘어섰다가 호되게 당하고 오지 않았던가!

“이 여자야.”

아이 씨, 이 자식!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진을 들이밀다닛!!

“누구냐?”

···

나란 놈. 어찌할 수 없는 남자란 놈···.

친구가 갖다 댄 전화기 화면 안엔 웬 낯선 처자 한 명이 생글거리며 날 쳐다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 내가 아니라 저 사진을 찍을 당시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아 각도를 맞춰주던 카메라 렌즈를 향해 웃고 있는.

“응. 우리 혜정이 친군데, 얘도 혼자 된지 좀 됐어. 글차나도 우리 각시가 걔 볼 때마다 너 소개시켜주고 싶다고 했었거든. 둘이 잘 맞을 것 같다고. 너 이번에 회사도 다시 들어가고 했으니 각시가 꼭 한번 물어봤으면 해서.”

하··· 말만으로도 참 고맙다. 좀 엇나가긴 했으나 지난주에 만났던 친구들과 영근이 형도 그렇고 오늘 만난 현태도 그렇고 날 이렇게까지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니···. 아직 이룩해 놓은 것 쥐톨만큼도 없건만, 그래도 나 세상 헛살진 않았나보다. 심지어 친구의 마눌님께서도 손수 챙겨주시려 하는 걸 보면.

그러나··· 마음만 받자.

난 집중했던 전화기 사진에서 시선을 떼어 올리며 말했다.

“아이, 생각해 주는 건 고마운데, 괜찮다.”

“어? 야 왜!”

“아냐아, 지금은 내가 좀 그래.”

“야, 그냥 한번 만나보기만 하래두? 얘 결혼 갖고 그렇게 사람 들들 볶을 애 아냐.”

“야, 아무리 그래도 혜정씨 친구면 삼십대 초반 아니냐. 여자나이 그 정도면 자기는 안 그렇다 해도 주변에서 가만두질 않는다. 그러다가 만약 결혼얘기 덜컥 나오면? 내가 지금 답을 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몇 해 기다린다고 치자 그럼 걔 벌써 중반이야. 안 돼 안 돼. 혼자서는 어찌어찌 살겠는데, 남의 집 귀한 딸 시궁창으로 끌고 들어올 순 없다 야. 우짰든 말만으로도 고맙고, 혜정씨한테도 잘 말해줘라.”

“···.”

내가 이렇게까지 완강하게 나오자 왕, 잠시 멍하니 있다가 하는 수 없이 전화기와 그걸 든 손을 같이 자기 쪽으로 회수해간다. 그렇지만 꼭 잊지들 않고 덧붙이는 한마디가 있지.

“야 얘 진짜 괜찮은 앤데···.”

큭큭큭. 바로 요거.

야 인마, 나 어제 지인짜 괜찮다는 애 벌써 하나 만나고 온 몸이시다.

“고마워. 고마운데, 사실 나 어제 한 명 만나고 왔어.”

“그으래~?”

갑자기 친구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바로 전의 약서운해 하던 표정은 어딜 갔는지···. 그리고 하아··· 인전 저 면상을 보니 또 아니 말을 끄집어 낼 수 없게 생겼네.

“사실은 어제···,”

난 엊저녁에 있었던 일을 신부한테 고해성사하는 멍청한 신자마냥 낱낱이 왕에게 털어놓았다. 최대한의 공정함을 잃지 않은 객관적 사실로만 채운 주관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 그렇게 되얐다.”

“······.”

모든 내용을 전해 듣고 있던 왕은 점점 표정이 일그러져 가더니 종내는 눈살을 찌푸리며 탁자에 괸 왼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 그게···.”

무슨 생각이 들어찼는지 입술을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게 다다.”

“···후우. ···처언. 문제가 좀 심각한데?”

그리 심각할 것까지야. 난 아무렇지도 않은 데 뭘.

“걔 나이가 몇이라고?”

“스물아홉이라고 했던가, 서른이라고 했던가. 기억도 잘 안 난다. 암튼 뭐 그 정도 될 거야.”

“스물아홉···, 서른이라···.”

녀석은 무어 그게 대단한 일이라고 겉으로 곱씹어보고 앉았다.

“그래··· 여자 나이 그 정도면··· 근데 그럼 안 돼지이.”

“···.”

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뭐 그에 관해서는 더 이상 할 말도 없고.

“넌 뭐가 문제였던 것 같냐?”

“모르겠다. 관심도 없고, 생각도 안 난다. 내가 나가고 싶어서 나간 것도 아닌데 뭐.”

“일단 니 말만 들어보면···, 나가서 이상한 말 한 것 같지는 않고, 잘못한 것도 별로 없어 보이는데···.”

“뭐 아는 형이 요즘 애들 같지 않다고 자꾸 해 싸서 얼굴이나 함 볼 겸 나가 본건데, 내가 보기엔 그다악···.”

“요즘 애들? 큭큭. 그럼 옛날 애들은 그랬나보지이!”

“퍼헛!”

순간 나도 모르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친구가 재치 있게 던진 말 한마디 때문에.

“하하하하 그게 그렇게 되나?”

“그러엄~ 옛날 애들은 그랬나보지~. 뭐 툭하면 요즘 애들 타령이야 타령이. 요즘 애들이 무슨 잘못을 얼마나 그렇게 했다고.”

맞는 말이다. 어른들의 입을 통해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소리, 「요즘 젊은 것들」. 고대 수메르의 점토판이나 한비자 오두五蠹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 유구한 옛날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랜 역사의 궤적동안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두고두고 회자되어온 기성세대들의 최종병기 바로 그것! 나 또한 학창시절 내내 선생들로부터 들어왔던 말이 ‘이번 학년이 정말 제일 심각하다. 너희들 정말 커서 뭐 될라고 그러니?’였던 걸 감안하면 가히 늘 인류번식의 최전방에 속해있는 신세대들은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정명의 수레바퀴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항상 최악의 세대를 경험한다는 듯 ‘도대체 세상이 어찌 될라고 이러누···?’하며 한탄하고 비난하는 그네들의 걱정과는 달리 문명은 역설적이게도 계속 발전하고 흥성해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나」 때와는 다르게 요즘 젊은이들 정말 문제라고 그 어느 시기보다 늙은이들이 강하게 성토를 해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니 남의 일만 탓하고 걱정하는 쓸데없는 노파심의 오지랖보다는 그저 다들 너 나, 늙은이 젊은이 할 거 없이 자기 일에만 신경 쓰고 충실들했으면 좋겠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고 먼저 내 자신을 바로 세움이 모든 일의, 최종적으로는 세상을 평안케 하는 가장 근본일진데 뭐 그리 남의 일에 이 악물고 참견들 해대는지. 자기 자신을 올곧게 성장시키는 그 하나만으로도 부족함 가득한 일평생이거늘···. 응당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만행을 저지르는 꼴값에 대해서는 계도의 일침을 놓는 것이 불가하겠지만, 그렇지 않음에도 순전히 자기의 가치관에 거스른다 해서 남에게 굳이 안 해도 될 훈계를 늘어놓는 따위의 짓거리는 분명 없어져야 함이 맞다 여기는 바이다. 주변 상황이 어떻든 간에 사람들 모두 스스로의 수양에 정진하여 도를 이뤄낸다면··· 비방과 훈계질에 의해서가 아닌 순수한 인간됨에 이끌려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텐데. 덕으로 천하를 감화시켜 불과 3개월 만에 도불습유의 경지를 이룩해냈다는 공자의 그것처럼. 그저 오십보백보면서 ‘요즘 젊은 것들은 말야.’하며 싸잡아대는 비난 난무하는 세속 보다는··· 한결 나은 세상이 될 테니 말이다.

현묘한 왕의 식견 덕분에 소태가 한바탕 시원하게 지나갔고, 나 역시 한 가지 더 배우는 바가 있었다.

“암튼, 내가 지금 그러하니 당분간은 여자 생각이 없네 그랴.”

“···그래, 알겠다. 내 울 각시한테 잘 말 할께.”

“그려어. 내 함 놀러 간다고도 전해주고. 보고 싶다고.”

“큭큭큭. 알았으니, 나중에 생각 바뀌면 얘기해라. 근데 가급적 빨리해라. 얘 지금 외롭다고 난리란다.”

그래. 「봄」이니까. 꽃 피는 춘삼월. 사실은 친구야··· 나도 그렇단다···.


결국 50분까지 꽉 채우고 나서야 왕과 나는

“이제 일어날까?”

“응. 그래. 나가자.”

등속의 말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일터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이제 왁자지껄하는 커피 손님도 뜸해졌고 유일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칙칙한 사내새끼 둘마저 일어섰으니 주인장께서도 좀 쉬어가야 할 때이지 싶다. 아마 그에게는 매일 찾아오는 이 시간이 무섭게 몰아치는 폭풍처럼 느껴지겠지? 그러나 나일 강의 범람처럼 사방천지를 비옥한 흙으로 뒤덮어주고 가는.

“이제 어디로 가냐?”

“아, 나,”

글쎄··· 어디로 갈까··· 어디가 만만할까?

그래, 차편도 수월하고 거리도 가까운, 그리고 어제 이미 눈 여겨 본 곳도 몇 군데 있는 은평구 쪽으로나 가봐야겠다.

“은평구.”

“짜식. 또 나 만났다고 우리집 쪽으로 가네. 킥킥.”

“그, 그렇게 되나?”

“그래 잘 갔다 오고, 혹시 우리 집 근처에 가게 되면 우리 혜정이 맛있는 것 좀 사다 줘라.”

“하하하하. 내 꼭 그리하마. 각시한테 놀라지 말라고 미리 전화하는 거 잊지 말고.”

“그려그려~ 그럼!”

“그래!!”

우린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시답잖은 농 짓거리와 함께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러고도 난 한손에 다 마시지 못한 커피를 들고 총총히 걸어가는 왕의 뒷모습을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골목길 어귀로 사라져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될 때까지.

··· 젠장.

아침에 좋았던 기분을 더 좋게 하기 위해 친구를 만났고 또 끄트머리에 그나마 웃으며 인사를 건네받을 수 있었지만, 떠나가는 녀석의 등짝을 보고 있으려니 다시 기분이 우울해져 오는 건 왜이냐.

아마도 친구의 축 쳐진 어깨와 그 위에 얹혀져 있는 삶의 무게가 살짝 엿보였던 때문은 아닐는지···.

가장의 어깨···.

그 위에 얹혀진 삶의 무게···.

그리고 그렇게 한번 올려 안은 짐은 평생 내려놓을 수 없겠지. 저 아스라한 석양너머에서 우릴 굽어보고 있는 태초의 거신 아틀라스처럼.

옛날엔 그저 남의 일, 또는 아주 머~언 훗날에 다가올 일로만 치부하고 살아왔었는데 어느새 나와 내 친구들의 나이가 가정이라는 작은 우주를 짊어져야 할 때가 되었다니···. 아직도 실감나지 않는다는 말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철없던 어린 시절의 천방지축 아이 같은 녀석이 온 몸을 차지한 채 자릴 내어주지 않고 있건만···.


간신히 술기운을 따돌리고 북서쪽으로 기어 올라가 힘차게 발걸음을 이리저리 뻗대어보았다. 그러나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무엇보다도 흥이 나질 않아 성심성의껏 대충 몇 군데만 방문하고서는 적당히 때맞춰 복귀하기로 했다.

오늘 나가서 했던 일 중 그나마 기억에 남는 것은 친구와 먹은 낮술 빼고 오로지 전화 한 통 걸려온 게 다다. 우리 멋진 김창욱 부장님에게서.

“천 대리 정말 잘했어요. 맘에 들어요. 내 몇 번이고 검토해봤는데, 흠 잡을 데가 없네요. 그냥 우리 회사 사정에 맞게 몇 군데만 수정해서 바로 보내주면 될 것 같아요. 천 대리가 시간을 많이 단축해 준 덕에 진행하는데 여유가 많이 생겼어요. 혹시 천 대리 담당이 싱가포르 지역인가요?”

“아 예, 뭐 그렇습니다. 싱가포르도 싱가포르지만 저희회사에서 하는 나라는 다 꿰고 있어야죠.”

“맞는 말이에요. 사실 그건 기본이죠. 음~ 그럼, 이번에 싱가포르 나갈 때 혹시 천 대리도 같이 갈 수 있나요?”

“예? 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음··· 그렇겠죠?”

“예.”

“그럼 내가 김 사장한테 얘기할께요. 이번에 천 대리 좀 붙여달라고. 내가 얘기하면 될 겁니다.”

“하하. 예 감사합니다.”

“그래요. 암튼 고맙고, 또 연락해요. 우리.”

“예 알겠습니다 부장님.”

“그래요 그럼.”

이야기가 여기까지 됐다는 건 뭐 이제 깽판만 일부러 놓지 않는다면 저절로 굴러갈 상황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싶다.

이랬었던 일 덕분에 다행히 회사로 들어오는 길은 매우 가벼웠고, 동시에 내내 침잠해있던 기분도 다시 상승세로 돌아와 주었다.

허나, 시시각각 오후로 짙어져 갈수록 가슴 한 켠 새삼 사소히 무거워지는 것이··· 아침에 사무실을 나서며 했던 부장님의 말을 그래도 덮어놓고 외면한 채 있을 순 없지 않겠냔 생각이 머릿속에서 연거푸 떠오르는 탓인 갑다. 이따 갔다 와서 봐주겠다고 했었는데··· 난 그걸 무시하고 벌써 처리해버렸으니···. 이렇게 두근반 세근반하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오늘치의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는 중이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잠시 후 들어온 부장님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말을 걸어왔다.

“준호야 그거 좀 줘봐라.”

기다렸다 이 새기야.

난 준비해놓은 보고서를 잽싸게 갖다 바치며 고했다.

“여깄습니다. 그리고 그거 아까 오전에 다 마무리해서 메일로 보냈습니다.”

“뭐?”

그는 대답을 듣자 매우 어처구니없고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이정도도 예상 못한 건 아니지!

“거기서 빨리 보내달라고 재촉해서요. 할 수 없이 먼저 보내고, 그 자료 부장님 메일에도 같이 보내놨습니다.”

“그래에···?”

어떠냐 할 말 없지? 나도 더 이상 해줄 말 없다.

“쯧. 알겠다.”

너무나도 완벽한 일처리에 말문이 막힌 나머지 맥까지 풀린 모양이다. 난 할 의무를 다 마쳤다고 생각되어 홀로 생각에 잠기려하는 부장을 내삘 놔두고 자리로 돌아와 버렸다. 아, 그래도 마지막 예의를 다하는 것까지는 잊지 말아야겠지.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다행이다. 생각한대로 잘 풀렸다. 책잡히지 않고. 그 탓이겠지? 아주 야트막하게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무게감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

부장과 할 말을 다 주고 받은 나는 행여 식을세라 하던 일에 재차 뜨거운 손길을 연결시켜 나갔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입을 여는 부장이다.

“준호야.”

어쩐지. 컴퓨터를 켠 뒤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반대편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더라니 아마도 자신의 부하직원이 작성한 서류가 못 미더워 이리저리 둘러봤던 모양이다.

“예.”

“···아 아니다. 쯧···.”

싱겁긴.

이 양반아 내가 너한테 트집잡히지 않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고 다해 만든 작품이다. 저 멀리에 있는 김부장님께서도 인정해주신! 잘못된 점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을 걸? 만약 찾아낸다면, 타당한 지적일 시 내 너를 진정한 사내로 인정해주겠다. 물론 속으로만. 그러나 되도 않는 생트집을 부린다면 그땐 정말 칼부림 나는 거다! 아, 물론 이것도 속으로만.

“그냥 일해라.”

“예. 알겠습니다.”

푸하하하하!

좋은 일함이다. 갑자기 자신감 가득 차오르는구나! 이 기운 이 여새를 몰아 일일 보고서도 얼릉 마무리 짓고 멋진 저녁시간을 가져보자!!

겉으로 드러낼 수 없다는 게 적이 심심했지만 그래도 난 이 신명나는 기분에 맞춰 속으로 박차를 가해가며 남은 시간을 더더욱 열일했다. 그리고 부장도 더는 말을 걸지 아니했다.


초초히 퇴근 시간은 다가오고, 오늘 밤은 또 무얼 하고 보내나? 하는 행복한 고민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무렵, 갑자기 사장실 문을 벌컥 열고 나온 거구의 사나이가 큰소리로 외쳤다.

“야, 오늘 회식이다!”

우리 사장님이었다. 근데 난데없이 갑자기 회식이라니. 그런 말은 전혀 듣지 못했는데. 그리고 그건 이 사무실에서 나 혼자 두렁청하도록 만드는 게 아니었나보다. 다들 갸우뚱해대며 서로 할긋거리는 태만 봐도.

“어? 이것들이 왜 대답이 없어?!”

결국 누군가가 용기를 입 밖으로 끄집어낼 차례다.

“어? 사장님. 오늘 무슨 일 있나요? 회식 얘기는 없었는데?”

그러나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일은 무슨 일, 그냥 오늘 맛있는 거 다 같이 먹으러 가자는 데에~. 왜, 싫어?”

였다. 큭큭큭. 저 분 원래 저렇지?

이리하야 나의 저녁 계획은 애초부터 아무것도 없던 것이 한층 더 무참히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이 독재적 처사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새어 나오지 않을 순 없는 노릇.

“아~ 안돼요~ 사장니임~ 나 오늘,”

“이렇게 갑자기 잡으심 어떡해요오~.”

하지만 이 모든 걸 뭉개버리는 우리 대빵,

“아 시끄러! 내가 갑자기 잡고 싶은데 어떡해 그럼!”

그래도 이 양반 부리부리한 겉보기와 달리 맘은 참 약한 사람인 게 이리저리서 툴툴대니 결국은 한 발짝 물러선다.

“아 알았어 알았어 알았어. 그럼 일단 다들 참석했다가 술 한 잔씩만이라도 하고 가. 혹시 애인 만날 사람 있으면 델꾸 와도 되구.”

여기까지 후퇴하자 다들 더 이상은 토를 달지 않았다.

“근데, 무슨 일이에요 사장님? 갑자기 회식을 하자고 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눈총을 받으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였을까? 여직원들 중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차 차장님이 말 머리를 슬며시 돌려주는 듯하다.

“아, 그, 야! 우리 천 대리 있잖아 이번에 150명 짜리 해왔어!”

헑? 뭐야 이거! 왜 갑자기 나야?! 내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난 당혹스럽다는 표현으로도 하안~참 부족하리만치 당혹스러워 일삽시 뭘 어찌해야 하나 하는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그저,

“아 예? 어···.”

하고 입만 어버버 거리는 게 순간 내가 취한 행동의 전부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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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일주일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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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금요일 NEW 5시간 전 2 0 23쪽
51 금요일 24.09.11 2 0 24쪽
50 금요일 24.09.07 4 0 24쪽
49 금요일 24.08.30 7 0 22쪽
48 금요일 24.08.22 9 0 27쪽
47 금요일 24.08.16 8 0 20쪽
46 목요일 24.08.08 8 0 22쪽
45 목요일 24.08.03 7 0 18쪽
44 목요일 24.07.27 8 0 18쪽
43 목요일 24.07.18 8 0 20쪽
42 목요일 24.07.12 6 0 20쪽
41 목요일 24.07.05 8 0 22쪽
40 목요일 24.06.28 7 0 12쪽
39 목요일 24.06.20 10 0 22쪽
38 목요일 24.06.15 13 0 26쪽
37 수요일 24.06.13 10 0 24쪽
36 수요일 24.06.12 8 0 26쪽
» 수요일 24.06.11 7 0 23쪽
34 수요일 24.06.11 8 0 24쪽
33 수요일 24.06.09 6 0 13쪽
32 수요일 24.06.09 7 0 13쪽
31 수요일 24.06.07 10 0 15쪽
30 화요일 24.06.06 6 0 14쪽
29 화요일 24.06.05 10 0 14쪽
28 화요일 24.06.04 8 0 15쪽
27 화요일 24.06.03 6 0 14쪽
26 화요일 24.06.02 8 0 13쪽
25 화요일 24.06.01 5 0 18쪽
24 화요일 24.05.31 11 0 13쪽
23 화요일 24.05.30 8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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