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의 쌀먹왕자에게 조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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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연철의 연금술사

DUMMY

6화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귓가를 요란하게 울렸다.


분명 일이 잘못되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말없이 다가오는 공민왕은 그만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이고, 아바니. 내 오늘 성계 때문에 큰일 치르겠구마!”

“그 주둥이 닥치라.”


퉁두란이 이렇게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건 처음이었다.

세자인 내게 인사를 올리면서도, 이성계에게 잡혀 처음 개경 구경을 할 때도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그에게로 다가오는 사람은 고려의 왕이었으니까.


“여진족? 여기에?”

“제가 데려왔습니다. 이자가 없었으면 이 교위는 아직도 옛 복주(福州, 9성 개척 시절 단천의 명칭) 땅을 헤매고 있었을 것입니다.”


변발한 여진족이 궁을 침범한 걸 보고 호위무사들을 힐난하려던 것도 잠시.

공민왕은 내 설명을 듣고 곧바로 이성을 되찾았다.

감정이 없는 왕의 성격이 이럴 때는 다행이었다.


“공주에게서 네가 이상한 짓을 꾸미고 있단 이야기를 들었다. 연철을 은으로 바꿀 수 있었다고?”


노국공주가 자신은 이상한 짓을 꾸민다고 한 적이 없다며 조용히 속삭였지만, 공민왕의 추궁은 여전히 매서웠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타이밍이 이상할 정도로 완벽하긴 했다.

왕의 개혁 정책에 딱 알맞은 적기에 가장 필요하던 무기가 손에 들어온 격이 아닌가.

그것도 어린 아들에 의해.


“대답해라, 세자. 어떻게 된 일이더냐?”


공민왕이 매섭게 나를 재촉했다.

하지만 나를 의심하기 전, 왕은 자신의 행동부터 반성해야 했다.

그러게, 누가 어머니랑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고민을 하나부터 끝까지 다 털어놓으래?


덕분에 논의가 진행된 열흘 동안 왕의 고민은 거의 그대로 내게 전달됐다.

그건 노국공주를 그저 아내가 아닌, 정치적 파트너로 대한 공민왕의 태도 때문이었지만.

어쨌든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왕은 확실히 공주에게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왕이 새 화폐에 쓸 은 수급에 골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게 행운이었다.


‘······그렇습니까?’

‘진이 네게는 어려운 이야기일지도 모르나, 알아둬야 한단다. 너도 언젠가 전하의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해야 할 테니까.’


처음에는 노국공주도 후계자에게 국정에 대해 조기교육을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제, 내가 막 만들어낸 은덩이를 본 그녀는 처음으로 경악을 숨기지 못했다.

물론 정숙하신 우리 어머니는 곧 놀란 표정을 지워냈지만. 아무튼.


‘역시······ 보우선사께서 하신 말씀이 맞았구나.’


보우라면 공민왕이 국사(國師)로 모시며 봉은사에 머물게 하는 큰스님일 터.


솔직히 말해서, 나는 많은 변명을 준비했어야 했다.

납으로 은을 만들다니.

다섯 살짜리가 이런 일을 저지르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던가.

아무리 세간에서 천재, 신동이라 불리는 나라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준비해 간 변명은 노국공주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어머니는 너무나 쉽게 내 말을 믿어주었다. 그것도 마치 경건한 무언가를 대하듯 하면서.


‘보우 선사요?’

‘아니, 아니다. 네가 알기엔 너무 이른 이야기야.’


마음에 걸리는 게 없진 않았다.

그러나 노국공주가 입에 담은 의문의 말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이제 내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5년 정도.

홍건적에게 개경이 따이기 전에 뭐라도 하기엔 시간이 너무나 촉박했던 것이다.


그렇게 연은분리법은 150년을 앞서 고려 땅에 다시 구현됐다.

아주 성공적으로.


“전하, 그 무슨 말씀을······?”

“납은 납, 세자께서 건드린다고 은이 될 리 없지 않습니까?”


물론 왕을 따라온 대신들은 하나같이 예상했던 반응을 취했다.

처음에는 이성계와 퉁두란도 완전히 같은 반응을 보였던 터라 익숙했다.


“어린 세자께서 무언가를 착각하신 게 아닐는지요?”

“저 동북 촌뜨기과 여진족 놈이 세자께 좋지 않은 바람을 불어넣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노국공주는 대신 놈들처럼 저따위 헛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어서 다행인가.

이제는 불똥이 이성계와 퉁두란에게 옮겨붙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대신들의 공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공주께서도 세자 저하 관련된 일이면 판단력이 흐려지시는 게 아닐까 걱정됩니다.”

“방금 정사를 논하는 곳에 갑자기 들이닥치신 것도 그러하고······. 이전과 조금 달라지시지 않았습니까.”


이 새끼들이······. 왕을 까는 건 몰라도 어머니를 까는 건 내가 용서 못 했다.


그러나, 내가 놈들을 조지러 나설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내 대답을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던 공민왕의 이마 한구석.

그곳에 이미 굵은 핏줄이 크게 돋아 있었던 것이다.


그때, 딱 때맞춰 숯 더미를 지켜보던 야장이 신호를 보냈다.

이제 슬슬 내용물을 꺼낼 때가 됐다는 신호였다.


“시행하라.”

“예, 옛!”


내가 아니라 왕에게서 예상치 못한 명령이 튀어나오자, 야장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야장이 놀란 건 잠시였다.

숙련된 대장장이는 곧 자신이 할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으랏차!”


야장의 기술과 퉁두란의 괴력이 몇 차례 빛을 발했다.

결국 깨진 질그릇과 숯에 파묻혀 있던 화로가 열기를 내뿜으며 모두의 눈앞에 나타났다.


“세자께서는 대체 무슨 일을······?”

“저런 방법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멍청한 놈들 같으니. 니들이 뭘 알아?

결국 화로 안에 담긴 납을 흠뻑 머금은 재를 부지깽이로 이리저리 헤치길 몇 차례,

곧 잿더미 사이에서는 순백의 빛을 발하는 금속 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저 납 광석에 섞인 은을 재와 함께 고온으로 녹여 재에 흡수된 납만을 제거하는 단순한 원리일 텐데.

이미 몇 번 본 광경이었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미래 기술을 알고 있었던 걸 넘어 세상에 일찍 구현시킨다.

역덕으로서 이만큼 가슴 뛰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아니?”

“자, 잠깐! 어차피 연철은 겉보기에는 은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저것만 봐서는······.”


물론, 아둔한 멍청이들이 연은분리법의 진가를 바로 알아챌 리는 없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달랐다.


“······내첨사.”


빗발치는 의문 사이로 야장이 달아오른 은덩이를 집게로 집어 물동이로 던졌을 때.

그 모습을 입가를 구긴 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공민왕이 시종하던 환관을 불러냈다.


“······알겠사옵니다, 전하.”


왕의 명을 받고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던 환관은 얼마 안 있어 지푸라기가 묻은 웬 덩어리를 하나 들고 나타났다.

왕이 그를 빙고(氷庫)로 보냈으니, 그가 든 물체의 정체는 뻔했다. 얼음이었다.


“내 듣기로 은은 무엇보다 냉한 성질이 강해 얼음의 냉기를 쉽게 흡수한다고 했느니.”


실은 과학적으로는 순도 높은 은의 열전도율이 높아 얼음을 쉽게 녹이는 거지만.


그렇게 얼굴을 잔뜩 구긴 공민왕으로부터 지시가 떨어졌다.

명령을 받은 환관은 다 식은 은덩이 위에 조심스레 작은 얼음조각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오오······?”

“아니, 그럼······.”

“세자가 만든 물건이 경들 말대로 연철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아니 그런가?”


냉기가 휘몰아치는 듯한 공민왕의 말에 대신들은 입이 얼어붙은 듯했다.


모두의 눈앞에서 은 위에 올린 얼음이 급속도로 녹아내렸던 것이다.

반면, 야장이 미리 가지고 온 납덩이 위에 올린 얼음은 채 반도 녹지 않은 상태였다.

그 말은 곧, 화로 안에서 꺼낸 금속이 단순한 납은 아니라는 뜻.

고려인들이 알기로 저만큼 얼음을 빨리 녹일 수 있는 금속은 순은뿐이었다.


뒤이어 왕에게서 은덩이를 건네받은 야장이 이것저것을 시험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자신의 경험상 이것은 은이 맞다는 선언.

방금까지 불신이 빗발치던 대신들 사이에서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설마 지금 내 앞에서 세자가 결과를 조작했다는 불충한 소리를 할 신료는 없을 터이고······.”


기세가 오른 공민왕이 눈썹 끝을 까딱거렸다.

설치된 화로 옆, 같은 조건으로 재실험이 준비되어 있는 다른 구덩이를 확인한 듯했다.


나는 언제든지 똑같이 납 광석에서 은을 뽑아내 보여줄 자신이 있었다.

연은분리법의 골자와 원리를 아는 이상 재현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니까.


“······세자 너 역시 내게 거짓을 고할 배짱은 없으렷다.”

“전하, 소첩을 봐서라도 그런 말씀은······.”


다섯 살짜리 아들에게 저토록 매정한 소리를 하다니.


노국공주가 옆에서 가벼운 핀잔을 줬지만, 웬일로 왕은 아내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아마 지금의 발견이 그만큼 왕과 고려에 있어 중요한 발견이기 때문이리라.


안 그래도 한반도는 은이 많지 않아 문제였던 곳이다. 원나라에게 은을 뜯길 때도 없는 은을 바닥까지 긁어 줘야 했을 정도로.

하지만 마침, 원 제국은 혼란에 빠졌고 기씨 일파를 숙청하면서 당분간 원과의 교류는 거의 끊어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왕은 그래서 이 틈을 타 화폐 개혁을 시도했던 것인데.


이런 황금 같은 타이밍에 은 생산량을 순식간에 몇 곱으로 만들 기술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다.

저 냉혹한 남자가 혹할 만도 했다.


“물론입니다, 전하.”

“연철 한 근에 은 두 돈이라······. 그런데, 이 방법은 누가 고안하였느냐? 이성계가 알고 있었다면 진작 동북면에서 쓰고 있었을 테고, 그렇다면······.”


신뢰가 어느 정도 쌓였는지, 공민왕은 이제 기술의 출처를 묻고 있었다.

뒤이어 서릿발 같은 왕의 시선이 변발을 시원하게 민 퉁두란에게로 가 닿았다.

숨이 턱 막혔는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퉁두란은 말도 못 하고 고개를 흔들기 바빴다.


“저 여진족도 아니라면, 여기 있는 야장의 고안인가?”

“대단히 송구하오나 전하, 소인도 아니옵니다.”

“뭣이?”


모든 예상이 빗나간 공민왕이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지금까지 왕이 그만큼 감정을 드러낸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경악에 잠긴 그 눈동자는 당연히 나를 향해 있었다.

방금까지 두근거리던 가슴이 차갑게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그럼 세자의 고안이라고? 어떻게?”


사실, 저 의심병 환자를 상대로는 연은분리법을 보여주는 것보다 지금이 더 문제긴 했다.

다섯 살짜리 꼬마가 갑자기 나라가 뒤흔들릴 만한 발명을 해냈다는 사실을 쉽게 믿을 사람은 없다. 하물며 공민왕 같은 사람이야.


하지만 이 연은분리법이 빨리 널리 쓰이게 하려면 지금의 고비는 반드시 넘어야 했다.

그나마 기댈 만한 건, 공민왕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손익을 냉철하게 계산하는 성격이란 건데.

그렇게 막, 변명을 준비해 말라가는 입술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역시 지난 임진년(1352년)의 그 소문이 진짜였던 건가?”


쥐 죽은 듯 조용하던 공터에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몰래 귓속말을 나누던 신료 둘에게 꽂혔다.


“추밀원사, 지금 전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 무슨 불경한 짓을······!”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시중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니, 웬만큼 소문에 밝은 사람이라면 알음알음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그렇습니다. 세자 저하가 태어나셨을 때······!”


문하시중 홍언박에게 한 소리를 듣던 신료 둘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흥분에 들떠 마구 말을 꺼내다 그제야 공민왕이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단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되었다.”


왕이 내게서 등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변명도 채 듣지 않았는데, 무언가 마음이 바뀌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전하······? 그 말씀은······.”

“세자가 어떻게 은을 불리는 법을 고안하였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더냐.”

“그, 그건 그렇사옵니다만······.”

“지금은 이 방법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고민할 시간이다. 아니 그런가?”


공민왕의 말에 주변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제 왕의 메마른 눈동자는 다시 나를 향해 있었다.


“세자.”

“예. 전하.”

“오늘 내게 보여준 것을 정리해서 빠르게 상신하도록. 너라면 할 수 있겠지.”


연은분리법에 대해 보고서를 꾸며 왕에게 올리란 소리였다.

다섯 살짜리 꼬맹이가 들을 소리는 절대 아니었지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묘하게 눈썹 한쪽 끝을 올린 왕은 새로운 논의를 열러 대신들을 이끌고 편전으로 돌아갔다.

큰일을 해낸 내게 치하의 말 따윈 당연히 없었다.

그답다면 그다운 모습이었다.


“잘했습니다, 세자. 이 어미는 세자를 믿고 있었다고요.”


그래도 공민왕에게서 못 받은 애정 표현은 노국공주가 차고 넘치게 채워주었다.

남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쁜 어머니에게 꼬옥 껴안기는 거, 솔직히 기분 꽤 좋았달까.

뭐 어쨌건, 정작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할 필요가 없어진 내 입장에선 좋긴 했다.

어쨌건 왕이 돌아서며 막대한 포상을 약속하기도 했고.


“퉁두란이라고 했나?”

“예? 예. 맞습둥.”

“당신도 바빠지겠네. 아마 독로올에 은광을 개발하게 되면 전하께서 당신 힘을 빌리실지도 몰라.”

“자, 잠깐······. 그 말씀은 고려의 대왕께서······? 히엑!”


변발만 빼면 얼굴은 멀끔한 미남인 놈이 어울리지 않는 비명은 무슨.

이렇게 되면 아마 퉁두란의 귀부가 꽤 앞당겨질지도 몰랐다.

이성계 역시 단천 일대에서 함께 생고생한 대가로 승진하는 게 정상일 것이었고.


하지만 정작 이번 일로 포상을 제일 많이 받을 나는 생각이 복잡했다.

아무래도 내가 태어날 때,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이었다.

출생의 비밀이라······. 뭔 아침드라마 같은 막장 꼬라지가 벌어지진 않겠지.



***



그렇게 어린 세자가 연은분리법을 ‘발견’한 이후, 공민왕의 개혁은 탄력을 받았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은이 수급되며 숨통이 트이자, 왕은 원 역사보다 조금 더 유연한 화폐 개혁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게 새로 나온 은전인가? 그런데 이 종이쪽은 또 뭐야?”

“왜 이리 소식이 늦나? 이것도 돈일세. 저화라고 하지.”


왕의 포고가 떨어진 다음 날, 개경의 상점가는 새로 실시된 화폐를 사용하려는 사람들로 몸살을 앓았다.


은전이야 원래 쇄은을 쓰고 있어 익숙해 별문제가 없었다.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건 새로 추가된 지폐였다.


단천 은광에서 나올 은이 많긴 하지만, 고려 전역의 은 유통을 책임질 정도까진 아니란 게 밝혀진 이상 어쩔 수 없는 결말이기도 했다.


“뭐야. 이거 원나라에서도 비슷한 걸 쓴다는 얘기가 있던데. 교초였나? 이거 괜찮은 거 맞아? 이 종이쪽을 누가 믿고 물건을 내주나?”

“엥? 정말 안 쓴단 말인가? 눈치 빠른 저기 영통(永通)에서는 이미 저화를 우선으로 받고 있던데.”

“그쪽이? 대체 왜?”

“자네 정말 못 들은 겐가? 지금까지 쌀과 포목으로 내던 세금을 나라에서 이제 이걸로 받겠다잖아. 힘들게 지고 갈 필요 없이.”


개경 근처에서만 시험적으로 시행된 정책이었지만 백성들의 반응은 생각 외로 나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오승포(五升布)처럼 올이 숭숭 뚫린 쓰레기 면포도 교환하기 편리하다는 이유로 화폐처럼 사용하던 상황이었다.

그것의 연장선이라 생각하면 지폐도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저화라 불린 지폐는 그 가치를 쌀로 보증하기까지 했다.

어쨌든 화폐로 쓰이던 현물과 교환이 보증되어야 화폐를 쓸 것이라는, 공민왕의 고민 끝에 나온 결정이었다.


“그럼 이걸 들고 경창(京倉, 개경의 세곡 창고)에 가면 쌀로도 바꿔준단 얘긴가?”

“그래! 그러니까 세금 낼 일 많은 상인들이 저화를 환장하고 받고 있지. 그 사람들이 쌀이랑 공물로 세금 내느라 운송비가 얼마나 들던가?”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일단 나도 써보는 게 좋으려나?”


연은분리법의 영향일까.

조선 초에 시행되었던 원 역사와 달리, 저화의 사용도 앞당겨지고 말았다.


다만, 원 역사에서 태종이 저화를 풀었을 때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공민왕은 지폐로 쌀 태환 사기를 칠 생각이 전혀 없었던 데다, 급히 전국으로 새로운 화폐를 유통할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전혀 다른 의도 아래 시행된 비슷한 정책.

그 결과가 어떨지는 하늘만이 알 것이었다.



**


그리고 그렇게 화폐 개혁이 포고된 다음 날.

왕은 개경의 왕립 사찰, 봉은사에 행차했다.


태조대왕의 영령에게 이번 정책의 길흉을 점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왕의 뜻은 따로 있었다.


작가의말

1. 조선 초 저화의 실패 원인은 최근 제기된 학설을 따라가 봤습니다.

교초가 실패한 건이 영향이 있었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닌, 태환 능력 이상의 저화를 함부로 발행하고, 저화의 신뢰도를 조정이 스스로 깎아 먹은 것이 문제였다는 학설입니다.

 

2. 개경의 시전 거리, 대시(大市)에 관한 묘사는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따왔습니다. 영통 상호 역시 고려도경에 적힌 그대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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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43화. 승자가 패자에게 거둘 권리 +13 24.09.15 4,092 143 19쪽
42 42화. 함주 평야 회전 +11 24.09.14 4,151 169 16쪽
41 41화. 함정의 함정의 함정 +11 24.09.13 4,215 161 20쪽
40 40화. 동북면의 늑대들 +14 24.09.12 4,307 164 16쪽
39 39화. 각오 +11 24.09.11 4,398 173 15쪽
38 38화. 묵직한 무장의 결의 +10 24.09.10 4,576 154 19쪽
37 37화. 미래를 위한 한 걸음 +14 24.09.09 4,763 163 16쪽
36 36화. 괴짜가 두 배 +15 24.09.08 4,930 175 18쪽
35 35화. 두 명의 불도저 +17 24.09.07 5,067 182 16쪽
34 34화. 전부 내가 짊어지겠다 +13 24.09.06 5,147 173 19쪽
33 33화. 포기하지 마라, 내가 널 포기하기 전까지 +17 24.09.05 5,089 196 19쪽
32 32화. 명군과 명장의 자질 +15 24.09.04 5,146 185 16쪽
31 31화. 넌 못 지나간다 +13 24.09.03 5,144 175 13쪽
30 30화. 세자가 정체를 숨김 +12 24.09.02 5,243 158 16쪽
29 29화. 귀여운 세자의 서경 사수 쇼 +8 24.09.01 5,285 164 17쪽
28 28화. 폭풍전야 +11 24.08.31 5,298 163 14쪽
27 27화. 노병은 죽지 않는다 +12 24.08.30 5,349 174 16쪽
26 26화. 여진해병 이지란과 기합찬 야만전사들 +15 24.08.29 5,453 171 14쪽
25 25화. 용의 피를 타고난 아이 +14 24.08.28 5,481 187 13쪽
24 24화. 고려가 힘을 숨김 +14 24.08.27 5,450 193 18쪽
23 23화. 천 리 바깥을 꿰뚫는 눈 +13 24.08.26 5,363 195 14쪽
22 22화. 카사르테무르 +17 24.08.25 5,417 203 15쪽
21 21화. 마음을 사는 방법 +20 24.08.24 5,447 211 15쪽
20 20화. 동심결(同心結) +18 24.08.23 5,510 196 13쪽
19 19화. 고려세자삼합과 황좌의 게임 +19 24.08.22 5,624 201 15쪽
18 18화. 천기누설 +18 24.08.21 5,623 206 13쪽
17 17화. K-상추쌈과 삼겹살 +13 24.08.20 5,817 189 14쪽
16 16화. 700년 전의 한류(韓流) +15 24.08.19 5,927 189 18쪽
15 15화. 큰 그림 그리기 +16 24.08.18 5,899 193 14쪽
14 14화. 화력고려의 태동 +15 24.08.17 6,052 209 15쪽
13 13화. 하, 총 마렵다 +14 24.08.16 6,030 202 13쪽
12 12화. 염전 인부 대식이 +15 24.08.15 6,093 234 14쪽
11 11화. (딸깍) +18 24.08.14 6,234 220 16쪽
10 10화. SSS급 유망주의 삶은 고달프다 +15 24.08.13 6,453 213 13쪽
9 9화. 수확물 두 배 이벤트 +17 24.08.12 6,687 223 18쪽
8 8화. 사기템 +17 24.08.11 6,683 245 12쪽
7 7화. 기적의 볍씨 +14 24.08.10 6,794 233 14쪽
» 6화. 연철의 연금술사 +13 24.08.09 6,897 228 17쪽
5 5화. 은이 필요해요. 아주 많이 +12 24.08.08 7,219 234 14쪽
4 4화. 동북 촌놈과 재능충 +17 24.08.07 7,867 242 17쪽
3 3화. 명마 고르기 +23 24.08.06 8,219 259 15쪽
2 2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혼혈왕자 +17 24.08.05 8,809 258 13쪽
1 1화. 고려에서도 쌀먹이 가능할까요 +36 24.08.05 9,776 25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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