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의 쌀먹왕자에게 조선은 없다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판타지

새글

귀차™
작품등록일 :
2024.07.16 15:47
최근연재일 :
2024.09.19 12:20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261,123
추천수 :
8,969
글자수 :
291,037

작성
24.09.06 18:20
조회
5,147
추천
173
글자
19쪽

34화. 전부 내가 짊어지겠다

DUMMY

34화.



“이, 이게 무슨 일이냐, 대체!!”


한편.

신나게 안주성을 몰아치던 홍건적 장수 파두반의 군세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이들은 안주성 결사대를 위해 성에 보관 중인 식량과 물자를 노리던 홍건적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서경성을 공격하던 홍건적 본대와는 떨어져 소식이 약간 늦은 상황.

그런 파두반의 군세에게 갑자기 나타난 이성계의 가별초는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모양새 그 자체였던 것이다.


“크아악!!”

“으악!”


말 위에서 홍건적 기병들이 연달아 낙하했다.

홍건적 중로군이 자랑하던 5천 철기 역시 강력한 가별초 앞에 눈 녹듯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시대의 군마는 쉽게 말해 스포츠카.

하루에 엄청난 양의 건초와 물을 먹여야 건사할 수 있는 고급 운송 수단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고려군의 청야 작전 함정에 홍건적이 제대로 당한 걸 생각하면, 이들 철기라고 멀쩡할 리가 없었다.


“쓸어버려라!!”

“예! 상만호!!”


북부 대공 이성계의 지휘 아래.

고려 최강의 정예 기병대 가별초는 홍건적의 5천 철기를 마구 유린하고 있었다.


비실거리는 말을 타고 안주성을 공격하던 홍건적 철기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이미 말이 쓰러져 잡아먹은 지 오래인 홍건적 기병은 다른 기병 주변에 위치했다 파상공세에 함께 쓸려나갔다.


이 철기들은 한때 화북과 요동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홍건적 최강의 부대.

그들이 와해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리고.


“크아아악!! 대체 어떻게······!!”


분노를 참지 못한 파두반이 말을 몰아 뛰쳐나갔다.

아무리 잔혹한 장수로 소문난 파두반이라지만, 제 새끼 중한 줄은 알았다.

애지중지하는 부하들이 적의 손에 맥없이 쓰러지는 꼴을 그도 눈 뜨고 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게 파두반의 분노에 맞서던 가별초 기병 몇이 순식간에 낙마했다.

핵심 무장이라 굶지 않았고, 분노에까지 휩싸인 파두반은 여전히 강력했다.

하지만.


“이 새끼. 우리 애들로는 안 되는 놈이었구마.”

“넌 뭐냐?”


제 새끼 중한 줄 아는 북부 대공은 고려군에도 있었다.

묵직한 동북 사투리와 함께, 마치 근육으로 온몸이 꿈틀거리는 듯한 무장이 파두반에 맞서 앞으로 나섰다.


이성계였다.


“뭐냐, 넌?”

“난 동북면 상만호 겸 병마사, 그리고 고려국 세자 저하의 심복 이성계다.”

“오호라······. 거물이 납셨구만?”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주지. 이름을 대라, 홍건당의 괴수.”


칼날 길이만 석 자에 달하는 대도를 들이밀며, 이성계가 싸늘하게 뇌까렸다.

하지만 이성계의 도발에 파두반은 잔뜩 화가 끓어오른 모양이었다.


“괴수? 이 새끼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나?”

“······.”

“이 몸은 대송국(大宋國) 동계홍건군 중로군 대수령님을 모시는 대장군 반성. 어디 소국 고려의 일개 지방 호족 따위가······!”


그러나, 파두반은 자신의 웅장한 명함을 채 읊지도 못했다.


피식.

허공에 남은 코웃음 소리와 함께.

이성계가 서 있던 자리로부터 삽시간에 회색으로 빛나는 줄이 죽 그어졌다.


캉.

접촉은 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한 차례의 접촉에, 파두반은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


파두반은 이성계가 검째로 자신을 베어버리는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빠른 속도로 돌격해 오는 이성계의 움직임을 눈으로 포착하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어느새, 파두반이 뽑아 든 검은 동강 난 채 허공에 불꽃만을 남기고 있었다.

부러진 검신은 이미 땅으로 낙하한 상태였다.

뒤이어.


툭.

뒤늦게 낙하한 파두반의 자존심이 땅바닥을 굴렀다.

그것은 파두반의 투구에 달려있던 장식용 술.

이성계가 휘두른 검의 궤적이 조금만 낮았더라도, 파두반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었다.


“이거, 이거. 나도 피로가 조금은 쌓인 모양이군.”


휙. 휙.

저 무지막지한 대도를 장난감 다루듯 돌리며, 이성계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피곤해도 저하의 명을 어길 수는 없지.”


파두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파두반에게는 방금의 말을 곱씹을 시간조차 없었다.


또다시 개시된 이성계의 돌격.

주변을 둘러싼 병사들이 숨을 죽이고 두 장수의 단기접전을 지켜보는 가운데.


“크아악!!”


파두반이 잘려 나간 어깻죽지를 움켜쥐고 비명을 내질렀다.

두 번째 검을 뽑아 든 그의 오른팔은 이미 땅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승부는 났다. 홍건적의 괴수.”

“지, 지랄하지 마! 난 아직 안 죽었······.”


그러나.

파두반이 세상에 남긴 말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어느새 날아온 짧은 화살이 파두반의 오른쪽 눈을 깊숙이 파고들었던 것이다.

그 화살의 정체는 이성계의 특기인 애기살, 편전.

그 누구도 이성계가 활집에서 재빨리 강궁을 뽑아 드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 뒤를 이은 건, 마치 번개에 비할 만큼 재빠른 속사.

상대인 파두반마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지옥으로 떨어졌으니 오죽했을까.


털썩.

그렇게 홍건적 중로군 최흉의 장수는 고려 땅 위에서 숨통이 끊어졌다.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는 듯, 남은 한쪽 눈알만이 희번덕거릴 뿐이었다.


“제 실력을 모르는 자의 최후는 추하구나. 이 이상은 시간 낭비에 불과했을진대.”


적의 절명을 확인하고, 이성계는 슬며시 들고 있던 강궁을 도로 안장에 달린 활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가별초에 내리는 냉정한 명령과 함께, 절명한 파두반을 등지고 말을 돌렸다.


“마저 쓸어버려.”

“옛!!”



**



고려의 명줄을 위협하던 홍건적의 대침공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성계는 결국 파두반에 더해 적의 대수령 사류(沙劉)까지 베어버리며 일등의 무공을 세웠다.

나머지 홍건적의 두령급 장수, 관선생은 성문을 열고 공격에 나선 최영의 손에 쓰러졌다.


홍건적 20만 중 압록강을 넘어 도망칠 수 있었던 건 불과 수천에 불과했다.

일개 도적 떼에게 개경까지 점령당하는 치욕을 겪은 역사는 지워지고, 영원히 후대 사서에 전해질 대첩으로 바뀐 것이다.


“와아아아아!!!”

“고려의 영웅들이 돌아왔다!!”

“홍건적으로부터 우리를 지킨 수호신들이다!!”


그리고 지금,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는.

역사에 남을 대승을 거둔 영웅들의 개선식이 한참 치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고역을 치르고 있었고.


“주상 전하, 만세! 만세! 만만세!!”

“세자 저하, 천세! 천세! 천천세!!”


원나라에 들어가면 경을 칠 만한 구호였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이제 황제와 1황후를 잘 꼬셔놓은 상황.

이 정도는 무지렁이 백성들이 약간의 착각을 했다고 변명하면서 삼겹살 한번 입에 쑤셔 넣으면 끝날 일이니까.


다만, 내가 고생하는 건 다른 쪽 이유였다.


“서경성 전투에서 세자께서 선봉을 맡으셨다고?”

“지나가는 곳마다 홍건적이 쓰러졌다는구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건적을 쥐락펴락!”

“서북 천리 주름잡아 세자 저하 가신다!!”


아니, 마지막 저건 좀 위험한데.

어쩌다 보니 백성들 사이에서는 지난 서경성 전투가 이런 식으로 와전되어 있었다.


생각을 좀 해 봐라.

아무리 내가 포텐셜 쩌는 SSS급 유망주여도, 이 나이에 그건 삼진 에바 아니겠냐?


하지만 백성들에겐 팩트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수십 년간 억눌리고 팍팍한 삶을 살아왔던 그들에게 구원자가 나타났다는 게 중요했지.


“세자 저하!!”

“서경에서 제 친척들을 구해주셨다 들었사옵니다!!”

“저하께 받아먹은 죽을 평생의 영광으로 삼겠사옵니다!! 감사하옵니다!!”


문제는.

내가 서경에서 몸을 비틀어가며 보였던 서경 수호 쇼의 전말이 개경에 전달되면서.

이미 상당히 왜곡되어 있었던 세자 신화가 한층 더 광기를 띠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저하!! 미륵의 화신이시여!!”

“고려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강림하신 부처시여!!”

“전륜성왕 그 자체인 고려의 후계자시여!! 정수리를 보여 경의를 표합니다!!”


거기에, 대식이 이 새끼가 나관중의 극본을 안 불태운 건지.

아니면 서경으로 내려왔던 서북면 피난민들이 친척을 찾아 개경으로 오면서 퍼진 것인지.

개경 곳곳에서 나는 견딜 수 없는 상습 숭배를 마주쳐야 했다.


솔직히 말해서.

다섯 살에 처음 마주한, 백성들의 담백한 기대도 내겐 버거웠던 터였다.


근데 지금 이 상황은 도를 넘었다.

이건 거의 슈퍼스타의 방한 현장.

혹은 열광적인 사이비 종교 그 자체 아닌가.


하.

그렇다고 그 치욕의 역사를 안 바꿀 수도 없었던 노릇이고.


“저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 것이옵니까?”

“저하의 건강이 최우선이옵니다! 부디 옥체를 염려하시옵소서!!”


게다가, 내 뒤를 따르는 장수들.

안우, 이방실, 김득배처럼 짬으로는 고려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장수들부터 최영까지.

이들은 내가 조금만 기분이 달라진 기색을 보이면 곧바로 달려와 나를 살펴댔다.


뭐, 서경에서 한 짓을 생각하면 고려에서 손꼽히는 장수들의 인심이 좋을 만은 했다.

하지만 그런 대단한 장수들이 내게 굽신거리는 걸 본 백성들의 반응이 문제였다.


“역시, 그 소문이······!!”

“그러지 않고서야 저런 대단한 장군들이 세자 저하께 저리 깍듯할 수는······!!”


재령에서 울리는 포성을 천둥으로 착각한 소문이 널리 퍼져 있단 건 이미 알았는데.

이번엔 내가 입에서 발사한 번개 숨결이 홍건적을 쓸어버린 게 분명하다는 헛소문이 백성들 사이에서 돌고 있었던 것이다.


웬만한 B급 작가 뺨치는 민초들의 상상력에, 나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어야 했다.

하지만.


“정 상장군?”

“저하께서는 고려의 보물이시옵니다. 부디.”


묵직한 한마디로 나를 염려하는 정세운.

그를 보면 나는 이 정도 사소한 고난은 이겨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애초에 정세운 같은 장군이 결사대로 자원했던 것도 그렇고.

안주성에서 처절한 전투 끝에 팔 하나를 잃고 돌아온 것도 그랬지만.


만약 역사가 그대로 흘러갔다면.

저 충직한 장군은 홍건적을 몰아내고도 어처구니없이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그것도······.


“다 왔군요, 저하. 연경궁이 보이옵니다.”


나를 따르던 방 환관이 도착지에 거의 도달했음을 알리는 순간.

나는 저 연경궁에 들어앉은, 정세운을 죽인 이를 떠올리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개경까지 점령한 홍건적을 물리쳐 몰아낸 뒤.

정세운과 그를 보좌한 안우와 이방실을 합쳐 세 명의 원수. 삼원수는 백성들의 영웅으로 등극한다.

당연히, 왕이 안동으로 몽진한 사이 목숨을 바쳐 홍건적을 쓸어버렸으니 민심이 그들을 따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 고려의 맨 윗자리에는 심각한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자리를 흔들만한 아랫사람이 등장하는 걸 병적으로 혐오하는 자가.


“전하께서도 기뻐하시겠군요. 아니 그렇사옵니까?”

“으응······.”

“저하?”


싱글벙글한 방 환관의 물음에 내가 시원찮게 대답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래.

정세운을 숙청한 범인은 권신 김용.

그리고 그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건, 내 아버지 공민왕.

홍건적을 물리친 영웅도 그의 의심병을 피해 갈 수는 없었던 걸까.


물론, 정설은 정세운을 시기한 김용이 공민왕을 기만해 그를 숙청했다는 쪽이긴 하다.

실제로 김용이 이전까지 공민왕의 왕명을 위조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도 하고.


어쨌든 그 결과 정세운은 억울한 최후를 맞이하고.

김용에게 속은 안우, 이방실, 김득배는 정세운을 죽인 죄로 처형당한다.

하지만 그 전까지 공민왕의 행적을 생각해 보면, 과연 김용이 단독으로 움직여 영웅들을 숙청할 수 있었는지는 다소 의문이었다.


물론, 김용과 공민왕, 둘 중 누가 진범인지는 내가 직접 까 봐야 아는 일이겠다만.


어쨌든, 그래서 나는 단순히 홍건적에게 대승을 거두는 데서 끝내고 싶지 않았다.


혹시나 내가.

원 역사에서 정세운을 비롯한 장수들에게 몰렸던 스포트라이트를 빼앗아 온다면.

그렇다면 그동안 고려를 지켜왔고, 앞으로도 지킬 훌륭한 인재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저하, 상태가 좋지 않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시옵소서.”


하지만.

이렇게 역사를 긍정적으로 바꾸고 나서도 찝찝한 뒷맛이 조금 남은 이유는 왜일까.


아마, 전생에서 겪었던 일 때문일까.

중위 나부랭이 따위가 손쓸 수 없었던, 참군인 그 자체였던 상관이 군에게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그 기억.

엘리트 코스를 타던 내가 군에 헌신하고자 하던 마음 자체를 깨끗이 지워버리는 계기가 된,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의 기억 때문일까.


어쨌든.

그래서 나는, 편하게 개경에서 ‘딸깍’해도 되는 일을 굳이 키우기로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서경으로 나아가 백성들 앞에서 퍼포먼스를 펼치고.

성벽 위에서 의연한 세자의 모습을 연출하며 병사들과 장수들의 마음을 얻었다.

그 전까지 화약, 쌀농사, 소금으로 빌드업을 준비한 건 말할 것도 없다.


솔직히, 피가 난무하는 전장에 선 건 전생에서도 없었던 일이라 조금 힘들긴 했지만.

아무튼, 그 결과.


“세자 저하, 천세!!”

“주상 전하, 만세!!”

“고려 왕실이여, 영원하라!!”


개경의 온 백성들은 이제 나와 공민왕을 찬양하고 있었다.

원래는 정세운을 비롯한 삼원수에게 모든 민심이 쏠렸어야 할 역사가 바뀐 것이다.


솔선수범해 병사들과 백성들의 사기를 올리고.

이지란을 이용한 기가 막힌 유인책으로 홍건적 전원을 서경성에 붙들어놨을 뿐만 아니라.

적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준 화기를 개발한 데다, 서경성 전투 중반부터는 장수들마저 나를 믿고 따르는 지경이었다.

이러니, 이 모든 일을 이뤄낸 어린 세자에게 민심이 쏠리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물론, 원래대로라면 백성들의 민심은 완전히 나만을 향해야 정상이겠다만.

나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분명 공민왕의 의심병은 혈육이라고 해도 안심해도 될 수준이 아니었기에.


‘굳이 이런 소문을 퍼뜨려야 할 이유가 있사옵니까? 사실 서경에서의 일은 저하께서 알아서 다 하신 게······.’


그런 판단 아래 내려진, 내 공을 공민왕과 왕실을 향해 일부 돌리라는 명령.

내 숭배가 일상인 최대식이 불만을 제기하는 건 당연했다.


‘대식아.’

‘예.’

‘홀로 튀어나온 못은 필히 망치를 맞기 마련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냐?’

‘······알겠사옵니다.’


하지만, 뭐.

대식이가 내 말을 거역할 리가.


결국 최대식과 영통 상단을 통해, 내가 서경에서 한 일들이 공민왕의 명령 아래 이뤄졌다는 프로파간다가 널리 퍼졌다.

그 때문에 지금 백성들 사이에서 나와 왕을 찬양하는 소리가 함께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고려왕들은 혈육과의 권력다툼을 계속해서 벌여왔다.

하물며, 공민왕처럼 원 역사에서도 피도 눈물도 없는 모습을 보여준 왕은 어떻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공을 세우고도 최대한 조심스러운 스탠스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대식이의 감이 조금 예리하긴 했다.

놈에게서 시작한 상습 숭배가 이제 조금 견디기 어려운 수준까지 올라온 건 사실이었으니까.

숭배 대상이 왕과 왕실로까지 옮겨지면 내게로 향하는 숭배가 좀 줄어들지 않겠는가.


뭐, 숭배 소스를 제 손으로 날려버리게 된 최대식이야 약간 불만이 생겼겠지만.

다 이것도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어요. 떽.


그렇게 연경궁이 조금씩 가까워지는 걸 보며, 슬며시 가슴이 조여드는 걸 느끼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 누런 용포를 입은 사람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개선장군을 맞는 관습대로, 궁 밖으로 나와 귀환하는 이들을 기다리는 공민왕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걱정한 것들은 기우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왔느냐.”


공민왕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다행인 것은, 그에게서 적의나 적대감 비슷한 감정은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


혹시 내가 대식이를 시켜 퍼뜨린 헛소문이 이렇게 효과가 좋았던 건가.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내 추풍오에서 훌쩍 뛰어내리려던 순간.


“혼자 행차하지 말라고 그리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전하!”


갑자기 연경궁에서 종종걸음으로 뛰어나온 사람이 있었다.

그녀의 존재로 인해, 무미건조하던 분위기마저 확 바뀌는 게 느껴졌다.

왕을 그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그건, 내 어머니 노국대장공주.


“내 분명 공주에게 말하지 않았소. 개선 행렬이 궁에 일찍 도착할 것 같으니, 미리 나가 있자고.”

“하지만······. 전하는 여전히 여인의 마음을 모르십니다! 여인은 사내와 달리 쉬이 움직일 수 없는 게 당연한데······!”


순식간에 주변을 감돌던 긴장감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내 생각이 짧았다.

늘 나와 공민왕 사이에는 어머니 노국공주가 있을 것이었는데.

굳이 어림짐작으로 쓸데없는 짓을 사족으로 더해버린 모양이었다.


그렇게 쓴웃음을 지으며, 나는 왕에게 절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때였다.

내 귀를 의심케 할 정도로, 예상치 못한 말이 들려온 것은.


“고생했다.”


엥?

당신 누구야?

그 공민왕이 저런 표현을 썼다고?

나한테?


고려에 태어나서 당황을 숨길 수 없었던 건 처음이었다.

기분 탓인지 코딱지만큼 목소리가 부드러워진 것 같기도 하고.

이러면, 왕에게까지 공을 돌린 게 헛짓거리는 아니었던 걸까.


그런 복잡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뒤를 따라 줄줄이 내린 무장들이 무릎을 꿇고 경례하는 것을 본 공민왕이 나지막이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다들 수고가 많았소. 그럼 들어가지.”


그만큼 홍건적으로부터 고려를 구한 일이 크나큰 일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역사를 바꾸며, 공민왕에게도 어떤 영향을 끼쳤던 걸까.


어쨌든 좋았다.

일단 당분간은 아무 잘못 없이 공민왕에게 미운털이 박힐 일은 없는 모양이었으니.


그리고, 원 역사에서 숙청을 피할 수 없었던 장수들도 당분간은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뭐, 본인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크게 바뀌었는지 절대 알지 못하겠지만.



**



얼마 뒤.

원나라의 수도 대도의 황궁.


“홍건적 놈들. 끝까지 쓸모가 없구나.”


이마에 힘줄이 돋은 기황후가 읽던 문서를 구겨 집어 던졌다.

그것은 고려에서 올라온 문서로, 끝에는 개경 조정에서 끗발 날리는 어느 권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뭐, 바얀테무르와 그 핏줄을 끝장내는 건 굳이 홍건적이 아니라도 가능하지.”


아직도 뼛속에 깊숙이 새겨진, 혈육을 잃은 원한을 뚜렷이 표출하며.

기황후가 중얼거렸다.


“네놈들이 저지른 짓거리, 나만 눈에 거슬리는 게 아닐 거거든. 후후.”



작가의말







 

 

본문에 어렴풋이 언급되었지만.

 

원 역사 홍건적의 2차 침공에서 고려를 구해낸 3원수+1인의 최후는 참담합니다.

 

정세운은 왕명을 꾸며낸 김용에게 숙청당하고.

안우, 이방실, 김득배는 김용의 거짓말에 속아 정세운을 베었다가 그대로 처형당하거든요.

그리고 뒤이어 이어진 김용의 난으로 고려는 안 그래도 모자란 인재풀이 메말라 버리는 최악의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그 결과, 최영과 이성계라는 두 명장이 짬을 뛰어넘어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으니 럭키☆비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이렇게 형성된 신규 세력이 고려를 멸망시키고 말았으니 결코 좋은 결과가 아니었죠.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3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공민왕의 쌀먹왕자에게 조선은 없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내일, 9월 20일부터 아침 08:20에 업로드됩니다! NEW 21시간 전 34 0 -
공지 [이전 제목]공민왕의 혼혈왕자로 살아남기 24.09.01 175 0 -
공지 [이전 제목]고려 세자가 쌀먹으로 대륙을 찢음 +2 24.08.31 283 0 -
공지 월화수목금토일, 점심 12:20에 연재됩니다! 24.08.05 4,900 0 -
47 47화. 위기는 곧 기회 NEW +11 16시간 전 1,987 106 16쪽
46 46화. 첫눈과 아이스크림 +11 24.09.18 2,880 137 12쪽
45 45화. 불신(佛神)이 아니라 불신(不信) +14 24.09.17 3,313 131 15쪽
44 44화. 짭짤한 황금 +11 24.09.16 3,780 133 16쪽
43 43화. 승자가 패자에게 거둘 권리 +13 24.09.15 4,093 143 19쪽
42 42화. 함주 평야 회전 +11 24.09.14 4,151 169 16쪽
41 41화. 함정의 함정의 함정 +11 24.09.13 4,216 161 20쪽
40 40화. 동북면의 늑대들 +14 24.09.12 4,308 164 16쪽
39 39화. 각오 +11 24.09.11 4,399 173 15쪽
38 38화. 묵직한 무장의 결의 +10 24.09.10 4,579 154 19쪽
37 37화. 미래를 위한 한 걸음 +14 24.09.09 4,764 163 16쪽
36 36화. 괴짜가 두 배 +15 24.09.08 4,931 175 18쪽
35 35화. 두 명의 불도저 +17 24.09.07 5,068 182 16쪽
» 34화. 전부 내가 짊어지겠다 +13 24.09.06 5,148 173 19쪽
33 33화. 포기하지 마라, 내가 널 포기하기 전까지 +17 24.09.05 5,090 196 19쪽
32 32화. 명군과 명장의 자질 +15 24.09.04 5,147 185 16쪽
31 31화. 넌 못 지나간다 +13 24.09.03 5,145 175 13쪽
30 30화. 세자가 정체를 숨김 +12 24.09.02 5,244 158 16쪽
29 29화. 귀여운 세자의 서경 사수 쇼 +8 24.09.01 5,285 164 17쪽
28 28화. 폭풍전야 +11 24.08.31 5,298 163 14쪽
27 27화. 노병은 죽지 않는다 +12 24.08.30 5,349 174 16쪽
26 26화. 여진해병 이지란과 기합찬 야만전사들 +15 24.08.29 5,454 171 14쪽
25 25화. 용의 피를 타고난 아이 +14 24.08.28 5,481 187 13쪽
24 24화. 고려가 힘을 숨김 +14 24.08.27 5,451 193 18쪽
23 23화. 천 리 바깥을 꿰뚫는 눈 +13 24.08.26 5,364 195 14쪽
22 22화. 카사르테무르 +17 24.08.25 5,418 203 15쪽
21 21화. 마음을 사는 방법 +20 24.08.24 5,448 211 15쪽
20 20화. 동심결(同心結) +18 24.08.23 5,510 196 13쪽
19 19화. 고려세자삼합과 황좌의 게임 +19 24.08.22 5,624 201 15쪽
18 18화. 천기누설 +18 24.08.21 5,623 206 13쪽
17 17화. K-상추쌈과 삼겹살 +13 24.08.20 5,818 189 14쪽
16 16화. 700년 전의 한류(韓流) +15 24.08.19 5,927 189 18쪽
15 15화. 큰 그림 그리기 +16 24.08.18 5,900 193 14쪽
14 14화. 화력고려의 태동 +15 24.08.17 6,052 209 15쪽
13 13화. 하, 총 마렵다 +14 24.08.16 6,030 202 13쪽
12 12화. 염전 인부 대식이 +15 24.08.15 6,094 234 14쪽
11 11화. (딸깍) +18 24.08.14 6,235 220 16쪽
10 10화. SSS급 유망주의 삶은 고달프다 +15 24.08.13 6,453 213 13쪽
9 9화. 수확물 두 배 이벤트 +17 24.08.12 6,687 223 18쪽
8 8화. 사기템 +17 24.08.11 6,684 245 12쪽
7 7화. 기적의 볍씨 +14 24.08.10 6,795 233 14쪽
6 6화. 연철의 연금술사 +13 24.08.09 6,898 228 17쪽
5 5화. 은이 필요해요. 아주 많이 +12 24.08.08 7,220 234 14쪽
4 4화. 동북 촌놈과 재능충 +17 24.08.07 7,870 242 17쪽
3 3화. 명마 고르기 +23 24.08.06 8,221 259 15쪽
2 2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혼혈왕자 +17 24.08.05 8,810 258 13쪽
1 1화. 고려에서도 쌀먹이 가능할까요 +36 24.08.05 9,777 256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