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의 쌀먹왕자에게 조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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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괴짜가 두 배

DUMMY

36화.



전생에 군인으로 살아 보면서.

그리고 고려의 왕자로 태어나 10년을 넘게 살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었다.


사람은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

이득이 될 사람이든, 손해를 끼칠 사람이든 겉으로는 좋은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공민왕과 이성계와 정몽주.

이 삼위일체를 이뤄가며 나를 굴리는 악마들에게 고생한 바에 따르면.

사람은 반드시 밑바닥을 경험시키면 본성이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다.


아, 결코 군인 시절 사단장님이 매번 주말마다 등산길에 호출하며 내 한계를 시험해서가 아니다.

절대로.


“그래서, 정도전이 염전에서도 군말 없이 일하고 있다고?”


그렇게 정도전이 이성계의 검증을 통과하며 개같이 구른 지 몇 주 후.


늦은 저녁, 보고서를 든 정몽주가 세자궁으로 찾아왔다.

다음 검증의 단계로 넘어간 정도전에 대한 보고였다.


“예. 행수 최대식이 함께 일하는 인부를 다섯이나 붙여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사온데······.”


내 측근 후보는 얄짤없이 속옷까지 벗겨가며 검증해야 한다고 그랬던가?

대식이 그놈. 악독하다, 악독해.


극한 직업-염전 인부 편이라고나 할까.

정도전은 최대식의 아래에서 먼지 한 톨이 나올 때까지 바닥을 시험당하고 있었다.


내가 시켰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정도전에게 약간의 동정이 가는 걸 느끼며, 나는 정몽주의 보고를 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보름이 넘었는데도 도망치기는커녕 그에게서는 불만 한 마디가 안 나왔다고 하였사옵니다.”

“그래?”

“오히려 밤마다 인부들을 모아, 고려의 미래는 이렇게 될 것이라며 일장 연설을 한다던가요.”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부터 정도전이 괴팍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정몽주가 중얼거렸다.


뭐, 어느 정도 독한 놈인 줄은 나도 알긴 했다만.


애초에 정도전은 내 기준에서 위험인물 축에 드는 사람이었다.

내가 없이 역사가 그대로 흘러갔다면 이성계에게 붙어 역성혁명의 선봉이 되었을 역적··· 아니, 사람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정도전이 혹시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아래, 그를 일부러 극한 상황에 투입한 것이었다.

혹여나 원 역사대로 고려에 대한, 그리고 세자인 나에 대한 반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측근으로 써먹기 곤란할 테니까.


“흐음······.”

“일단 소신의 생각으로는 삼봉을 다음 단계로 넘기는 게 어떨지 싶사옵니다만······.”


일단 이 정도면 2차 검증 합격.

정몽주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최대식 정도 되는 광신도면 모를까. 염전 인부 일이라는 게 어디 쉽던가.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에서 밀대로 소금을 밀어야 하지.

그렇게 만든 소금을 자루에 담아 어깨에 몇 개나 짊어지고 창고로 옮겨야 하지.

또, 대식이 말로는 요새 염전을 확장 중이라는데 거기에도 고강도 노동이 필요할 터.


괜히 염전 인부를 노예에 빗대는 게 아니었다.

그건 평소에 중노동을 안 해본 사람들이 견딜 만한 강도가 절대 아니었다.


게다가 최대식이 게슈타포, 아니 위장한 공작원을 붙였음에도, 정도전에게는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았다.

대식이가 봉은사를 탈출했던 신돈에게 붙였던 그 끄나풀이 아무것도 캐내지 못했던 것이다.


아, 신돈 그놈.

그러고 보니 강남행 배를 탔다가, 장강을 거슬러 올라 어딘가로 사라졌다던가.

홍건적이 쳐들어오기 시작할 무렵에 받았던 첩보는 거기서 업데이트가 끊겨 있었다.


어쨌든.

20세의 젊은 정도전은 아직 역심이 생기지 않은 걸까.

아니면 가면을 어지간히도 두껍게 쓰고 있는 걸까.


하지만, 저 나이에 두꺼운 가면을 장착하기는 웬만해선 불가능한 법이다.

그래서 일단은 정도전을 다음 검증의 단계로 넘기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좋아. 그렇게 하지.”

“알겠사옵니다. 그렇다면 최 행수에게 따로 연통을 넣겠사옵니다.”


음.

이 정도면 정도전도 이성계처럼 쏠쏠한 측근으로 굴릴 수 있으려나.


하기야, 역사에서 신진사대부라 불린 사람들이 고려 멸망의 선봉에 선 건 사실이긴 했다.

하지만 그들의 개혁 의지와 나라를 ‘정상화’하려는 열정을 받아줄 왕이 있었다면.

그러면 역사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굴러갈 수도 있었겠다는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까놓고 말해 공민왕 사후 제대로 된 왕이 고려엔 없었던 게 사실 아닌가.


그렇게 정도전에 대한 경계심을 한 꺼풀 벗겨냈을 때였다.

왜인지 모르게, 정몽주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은 게 눈에 띄었다.


“정 수찬, 무슨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라도 있어?”

“아, 아니옵니다. 소신은 그저······.”


정몽주 이 인간.

그래도 스승이랍시고 6년 넘게 함께했던 세월이 있어, 이젠 내 앞에서 꽤 풀어진 모습을 보이곤 했다.

뭐, 나도 세자라고 뻣뻣하게 굳은 태도로 대하는 것보다는 이 편이 좋긴 했지만.


문제는 우리 포은 선생님은 이성계와 정반대로 감정의 표출이 활발했단 점.


“우리가 하루 이틀 본 사이야? 솔직히 뭐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니까 이러는 거잖아.”

“저하······.”

“뭐라 안 할 테니까 솔직히 말하자. 혹시 정도전 일로 무언가 꺼림칙한 거라도 있는 거야?”


그때 내 머리에 스친 건 저번의 철퇴 사건이었다.

그의 머리를 철퇴로 후려칠 후레자식 방원이도 아직 태어나지 않았는데도, 정몽주는 철퇴에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가.

혹시 대역적 정도전에게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된 것이었는데.


“사실 그것이······.”


하지만.

정몽주의 설명을 들어보니 그건 완벽한 기우였다.


“······정 수찬, 정도전은 당신 동향 사람에, 사제(師弟) 아냐?”

“무슨 말씀을! 그런 사이니까 더 이렇게 엄격하게 대해야 하는 것이옵니다!”


그랬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동향 출신에, 목은 이색 아래에서 함께 수학한 사형제 사이.

오히려 학연과 지연으로 엮인 동생을 낙하산으로 꽂게 되어 더 깐깐하게 구는 걸까.


그러나, 정몽주는 이 예상마저도 가볍게 흘려냈다.


“저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도전이 그놈··· 아니, 삼봉은 성정이 오만한 구석이 있고 뽐내기 좋아하는 성격이옵니다!”

“그러니까, 미리 초장부터 기를 잡아 놔야 한다?”

“바로 그렇사옵니다!!”


잊고 있었다.

정몽주는 친할수록 막 나가는 성격이라는 걸.

애초에 급도 안 맞는 이성계한테도 한 점 꿀리는 모습 없이 맞먹고 있지 않았던가.

뭐, 이성계는 정몽주의 그런 모습을 더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긴 한데, 아무튼.


“절대 소신이 지인을 측근으로 추천했다는 이유로 이러는 것이 아니옵니다!”

“그런 거지?”

“애초에 목은 선생의 문하에는 이숭인, 권근 같은 수재들이 있고, 삼봉과 어울리는 이들 중에 조준처럼 쓸만해 보이는 자도 있사옵니다만······!!”


이야.

포텐셜 빵빵해 보이는 유망주 명단 어서 오고.


확실히 그 바쁜 와중에도 자신의 주변에서 유망주 레이더를 열심히 돌려댄 걸 보면.

정몽주는 나와 고려에 대해 진심이었다. 정말로.


그리고, 자신이 스카우트한 유망주 명단을 들고 와 내게 굳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들 역시 학연과 지연으로 저하께 추천을 드릴 예정이긴 하옵니다만! 삼봉은 궤가 다른 인물이라 고언을 드리는 것이옵니다!”


그러니까.

정도전뿐만 아니라 버릇없는 후배, 유망주들은 초장부터 조져놔야 말 잘 듣는다.

이거 아냐?


정몽주의 진심을 확인하자, 나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그걸 본 정몽주도 묘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이심전심으로 마음이 전달된 모양이었다.


“좋아.”

“저하, 그렇다면······.”

“정도전도 그렇고 앞으로 추천한 인재들, 정 수찬이 알아서 관리하라고.”


손아귀를 들어 어깨를 눌러 보이는 시늉을 하며, 정몽주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건 곧, 마음대로 뉴비들을 당근과 채찍으로 조련해도 좋다는 뜻.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정몽주가 눈을 번쩍 빛냈다.

너무 그러지 마, 무섭잖아.


“옛! 그 명, 충실히 수행하겠사옵니다!”


애초에 정몽주는 이성계의 브레이크 역할로 거둔 측근이다.

그러니, 이렇게 쓰는 게 맞긴 한데.


왜인지 모르게.

나는 훗날 정몽주의 마수에 틀어 잡힐 고오급 인재들에게 애도를 표하고 있었다.


원 역사에서도 반대파가 되었음에도 신진사대부 세력과 교류가 깊었던 정몽주였다.

그런데, 이제 쭉 같은 배를 타게 된다면.

우리 유학 스승님의 꼰대질과 관리질을 그들이 잘 버틸 수 있을까.

미리 정몽주를 겪어 본 선배로서 코딱지만큼은 그들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적당히 하라고.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아무렴 저하께서도 이겨내신 ‘교육’을 그들이 못 이겨내겠사옵니까. 사람이면 그 정도는 해야지요.”


정몽주는 잠깐의 고민도 없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마구 흘려대고 있었다.

뭐, 높은 자리에서 중요한 일을 하려면 시련을 겪으며 강해져야 하는 법이긴 하다만.

그렇게 정몽주가 제공하는 지옥불 풀코스에 화끈하게 단련되고 나면.

분명 유망주들은 고려의 미래를 짊어질 노예···아니 재목으로 성장할 것이었다.


그리고, 정몽주가 벌써 몇 년째 계속 나를 공부시키려 달려드는 어그로.

그것 또한 새 유망주들이 조금은 분산해 줄 수 있을 것이었고.


그렇게 포은 선생에게는 나를 대신할 새 장난감이 내려졌다.

나와 같은 시련을 겪을 피해자들이 늘어난 것 같아, 조금은 기분이 좋았다.

나만 당할 순 없지.



**



“이봐.”


땡볕이 내리쬐는 경기 어딘가 왕실의 농지.

잠시 새참 시간을 틈타 이랑에서 휴식을 취하던 관리자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누구······ 행수님?”

“행수님은 무슨. 몇 살 차이도 안 나는데. 대식이 형이라 불러. 최형이라 부르던지.”


흙투성이가 된 사내에게, 최대식은 부하가 샘에서 떠 온 찬물을 건넸다.

아마 이 농지에서 제일 높은 사람일 그가 웬일로 살가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최형······? 그래도 됩니까?”

“그럼. 어차피 정도전 당신도 나처럼 결국 세자 저하의 심복으로 일할 사람 아니겠어?”

“그야 그렇습니다만······.”

“물 식는다. 일단 쭉 들이켜고 말하라고.”


머뭇거리던 정도전은 결국 최대식이 건네준 물바가지를 원샷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러나 바가지가 내려간 후에도 정도전의 눈에 서린 경계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제게 이렇게 친근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뭡니까, 행수님?”

“어허, 최형이라 부르라니까?”

“······솔직히 말합시다. 염전에서부터 내 근처에 끄나풀을 몇 명이나 붙여 놓고,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냔 말입니다.”


정도전은 눈치가 빨랐다.

최대식이 세자를 지키기 위해 종교적 광기로 육성한 감시망은 고려 제일일 텐데도.

본인의 타고난 육감인지, 아니면 논리적인 분석을 통해 내린 결론인지, 정확히 감시망을 간파해냈던 것이다.


‘오호라. 요놈 봐라?’


최대식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게 정상인데.

이 정도전이라는 놈은 감시망의 위에 누가 있는지까지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역시, 우리 미륵불께서 시험에 들게 한 인재는 다르구만!’


물론.

최대식의 기묘한 사고방식에 따라, 감탄은 또다시 이상한 곳으로 흐르고 있었지만.


어쨌든, 최대식은 어린 나이부터 상인의 길 위에서 열심히 구른 자.

이 정도 놀라움을 얼굴에서 숨기는 건 숨 쉬는 것처럼 익숙했다.


“알고 있었어?”


여전히 짙은 미소를 띠며, 최대식은 정도전을 한 번 더 시험했다.

그러나 그 위장된 미소마저 불쾌하다는 듯, 정도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대답했다.


“이제 그만합시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뭐가 충분하단 건데?”

“염전과 농지에서 일하게 하는 이유, 이제 절절히 알았습니다. 어째서 포은 사형이 저하를 그토록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지도.”


하지만 정도전은 세자의 의도를 절반만 이해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의 검증 과정을 소금과 쌀로 대표되는, 세자가 지금까지 이뤄낸 업적을 체험하는 시간 정도로 여기는 것일까.


하긴, 세자처럼 정도전의 원 역사에서의 행적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그 이상을 넘겨짚기는 불가능하긴 했다.

지금 정도전이 겪는 검증은 말 그대로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나오는, 미래에 저지를지도 모를 범죄에 대한 예방이었으니까.


물론, 그럼에도 정도전은 어느 정도 세자가 이룬 업적에 충분한 감명을 받은 듯했다.

그런 정도전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최대식은 입가를 슬며시 구긴 채 말을 이었다.


“충분하단 건 내가 판단하지. 고려를 구원하실 미륵불의 측근으로 위험한 놈이 굴러 들어오면 곤란하거든.”

“또 그 괴력난신 타령이군. 여기 농부들이 지껄이는 헛소리의 근원이 당신이었습니까?”


하지만 최대식이 나름대로 해준 덕담에 대한 정도전의 반응은 싸늘했다.

애초에, 원 역사에서 <불씨잡변>이라는 책까지 지어가며 불교를 극도로 혐오하는 모습을 보였던 정도전이 아니던가.

최대식의 미륵불 타령에 저렇게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헛소리는 그쯤 하십시오.”

“······.”

“저하께서는 포은 사형의 말대로 요순과도 같은 성군의 자질을 타고나신 분. 미륵불 따위 괴력난신과는 상관없으니.”


그리고, 당연히 정도전은 최대식의 미륵불 세뇌빔에 면역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새 측근 후보가 세자에게 광적인 충성을 다하도록 설계한, 최대식의 계획이 망가진 상황.


하지만 최대식은 그리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정몽주와 오랫동안 어울리며, 유학자에게 ‘요순(堯舜)과도 같다.’는 말이 얼마나 큰 칭찬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미륵불이든 요순이든.

최대식에게는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 아니긴 했다.

그에게는 오직 상습숭배 대상인 세자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숭배받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그으래?”

“그러니 이제 그 미륵불 타령은 내 앞에서 하지 말아주십시오. 기분 나쁘니까.”


하지만 정도전은 최대식의 생각을 알지 못한 채.

더 이상의 불교 광신도 행동을 멈춰달라고 요청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최대식의 대응은 그 똑똑한 정도전의 예상을 한참 빗나갔다.


“그 마음, 이해해.”

“뭐라구요?”

“나도 한때는 이놈의 썩은 불교 따위, 세상에서 없어지라고 저주한 적이 있었거든.”


최대식도 고려 말 불교의 폐단을 온몸으로 겪었던 사람이었다.

한때, 최무선과의 대화에서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낸 적도 있지 않았던가.

승려라는 자들이 사리사욕을 내세우며 백성들의 땅과 재산을 수탈하고, 끝내 노비로 만드는 꼴을 최대식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


최대식의 간증을 들은 정도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새 정도전의 눈에서 경계심이 반쯤 사라져 있었다.

마치 생각지도 못한 동지를 만난 듯한 태도였다.


“그럼 대체 세자 저하를 어째서 미륵불이라고······.”

“이봐. 유학자라고 하더니, 불교 공부는 많이 안 한 모양이네?”

“그, 그건······!!”

“정 수찬님 말씀으로는, 유학자들은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일을 함부로 입에 담지 않는 게 미덕이라 하던데?”


최대식의 일침에, 정도전이 자신도 모르게 신음했다.

얕보던 광신도에게서 성리학으로 한 방을 크게 먹고 만 것이었다.


사실, 최대식은 어쩌다 소 뒷걸음질에 쥐를 잡은 격이긴 했지만.

정도전의 불교에 대한 이해는 원 역사에서도 실제로 낮긴 했다.

불교를 까겠다고 지은 <불씨잡변>부터가 불교 교리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쓴 책이 아니던가.


“뭐,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상관이 없다니? 그럼······.”


하지만 정도전이 불교에 대해 가졌던 몰이해 따위.

최대식이 알 바는 아니었다.

애초에 지금 타락한 불교의 꼬라지를 옹호하면서 미륵불 타령을 한 것도 아니었고.


“나도 그렇고, 세자 저하도 그렇고, 지금 권력을 가진 놈들과 결탁한 땡중들을 가만히 놔둘 생각은 없으니까.”

“······!! 그렇다면······!!”

“이봐, 미륵불이 어떤 부처인지는 알아?”


어느새 정도전은 최대식의 페이스에 한참 말려든 상태였다.

그가 극도로 혐오하는 불교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음에도 별 반응 없이 듣고 있었던 것이다.


“미륵불은 말이야. 세상이 혼란할 때 그걸 구원하러 나타나실 부처님이야.”

“혼란한 세상······. 지금 같은 때 말입니까?”

“뭐, 우리 위대하신 세자 저하께서 미륵불의 화신이란 사실을 당신이 받아들이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차피 유학자란 인간들이 자신처럼 세자를 숭배할 거라고는 최대식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정몽주를 숱하게 겪으며 배운 사실이었다.


“그런 분이 세상에 강림하시면, 당연히 이 세상의 썩어빠지고 모순된 것들을 싹 쓸어버리시겠지. 안 그래?”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거, 당신이 말한 요순성세 이야기랑 무언가 닮은 부분이 있지 않아?”


역시나 정도전 또한, 미륵불 이야기를 듣고 딱히 솔깃해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방금 최대식이 한 이야기 중에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는 건 확실했다.


“저하께서 요순의 재림이 되실 분이시든.”

“미륵불의 화신인 몸이시든.”

“이 썩어빠진 세상과 불교를 뒤집어엎을 분이란 건 확실하다, 이 말이군요.”

“바로 그거야.”


무언가 후대에 태어났으면 죽창과 붉은색이 어울릴 만한 발언을 하며, 정도전이 눈을 빛냈다.

그 순간, 최대식은 처음으로 정도전의 모습이 마음에 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좋습니다, 최형.”


어느새 정도전에게 바뀐 자신의 호칭을 들으며, 최대식은 일이 잘 풀렸음을 직감했다.


“사실 포은 사형에게 저하를 섬기라는 제안을 들었을 때는 조금 걱정이 된 건 사실이긴 합니다만······.”


탁탁.

염전에 이어 농지에서 구르느라 먼지투성이인 몸을 털어내고는, 정도전이 일어섰다.


“이미 저하께서 고안한 발상들이 고려를 근본부터 바꾸고 있는 것도 그렇고······.”

“그래. 내가 괜히 그분을 숭배하는 게 아니라니까?”


웬일로 최대식의 기습적인 숭배에, 정도전은 반박하지 않았다.

경계심이 한껏 묻어있던 그의 얼굴은 어느새 맑게 개어 있었다.


“그만한 분이시라면, 열과 성을 다해 모실 만하겠군요. 최형.”

“물론이지. 잘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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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33화. 포기하지 마라, 내가 널 포기하기 전까지 +17 24.09.05 5,087 196 19쪽
32 32화. 명군과 명장의 자질 +15 24.09.04 5,144 185 16쪽
31 31화. 넌 못 지나간다 +13 24.09.03 5,143 17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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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6화. 여진해병 이지란과 기합찬 야만전사들 +15 24.08.29 5,452 171 14쪽
25 25화. 용의 피를 타고난 아이 +14 24.08.28 5,479 187 13쪽
24 24화. 고려가 힘을 숨김 +14 24.08.27 5,450 193 18쪽
23 23화. 천 리 바깥을 꿰뚫는 눈 +13 24.08.26 5,363 195 14쪽
22 22화. 카사르테무르 +17 24.08.25 5,417 203 15쪽
21 21화. 마음을 사는 방법 +20 24.08.24 5,446 211 15쪽
20 20화. 동심결(同心結) +18 24.08.23 5,509 196 13쪽
19 19화. 고려세자삼합과 황좌의 게임 +19 24.08.22 5,622 201 15쪽
18 18화. 천기누설 +18 24.08.21 5,621 206 13쪽
17 17화. K-상추쌈과 삼겹살 +13 24.08.20 5,816 189 14쪽
16 16화. 700년 전의 한류(韓流) +15 24.08.19 5,926 189 18쪽
15 15화. 큰 그림 그리기 +16 24.08.18 5,898 193 14쪽
14 14화. 화력고려의 태동 +15 24.08.17 6,051 209 15쪽
13 13화. 하, 총 마렵다 +14 24.08.16 6,028 202 13쪽
12 12화. 염전 인부 대식이 +15 24.08.15 6,092 234 14쪽
11 11화. (딸깍) +18 24.08.14 6,233 220 16쪽
10 10화. SSS급 유망주의 삶은 고달프다 +15 24.08.13 6,451 213 13쪽
9 9화. 수확물 두 배 이벤트 +17 24.08.12 6,686 223 18쪽
8 8화. 사기템 +17 24.08.11 6,682 245 12쪽
7 7화. 기적의 볍씨 +14 24.08.10 6,792 233 14쪽
6 6화. 연철의 연금술사 +13 24.08.09 6,894 228 17쪽
5 5화. 은이 필요해요. 아주 많이 +12 24.08.08 7,217 234 14쪽
4 4화. 동북 촌놈과 재능충 +17 24.08.07 7,865 242 17쪽
3 3화. 명마 고르기 +23 24.08.06 8,218 259 15쪽
2 2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혼혈왕자 +17 24.08.05 8,808 258 13쪽
1 1화. 고려에서도 쌀먹이 가능할까요 +36 24.08.05 9,775 25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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