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힙투비: 마지막 하이크란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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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taray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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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3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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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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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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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 축복의 시간(5)

DUMMY

“그거 아세요? 저는 사제님이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별이 가득한 밤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어둠을 밝히는 주홍빛 폭포수와 성탑의 월광암을 등불삼아 숲으로 들어서는 카이난을 발견한 일레이네가 미소와 함께 그렇게 인사를 건네어 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벅찬 반가움에 미소를 짓는 그를 향하여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어 쉬며 일레이네는 말을 이었다.

“사실은 그 동안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몰라요. 그 일이 있은 후라서 혹시라도 마을 사람들이 사제님의 존재를 알아차리지나 않았을까...하고요. 그 길은 정령원으로 이어지는 길이었잖아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 무례한 사내, 로카를 쓰러뜨린 인물이 정령 사제님 중에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라도 하면 어쩌나 무척 불안했답니다.”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친근하게 두 손을 내밀어 오는 일레이네의 손을 조심스럽게 마주 잡으며 반짝이는 그녀의 초록눈동자를 황홀하게 내려다보았다.

“왕도에 돌아가서도 그 백인장이 당신을 괴롭히지는 않을까...저도 내내 염려가 되었습니다. 어떤가요? 그가 당신에게 앙심을 품지는 않았나요?”

“설사 그렇다고 해도 자기 입으로 말은 못하죠.”

상상만으로도 쌤통이라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서 장난기어린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왕도에는 겉멋이 들거나 허세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사람들이 아주 많답니다. 그래서 입이 비뚤어지는 한이 있어도 그 남자는 근육질에다 힘도 센 자기가 정령 사제에게 당했다고는 말을 할 수 없어요. 전투마법사도 아니고 정령사제라는 말만 들으면 누구나 비실비실하고 연약한 학자의 이미지를 생각할 테니까요. 누구도 사제님처럼....”

그녀는 강한 힘줄이 도드라져 있는 카이난의 커다란 손을 새삼 황홀한 눈길로 내려다보며 방긋 미소를 머금었다.

“이렇게나 강하고 멋진 분을 상상하지는 못할 거예요. 말해도 믿지도 않을 걸요?”

“그럼....”

마치 자신을 전설이나 음유시인들의 노래 속에 등장하는 고대의 영웅을 바라보듯이 선망의 눈길로 올려다보는 일레이네의 눈빛에 기쁨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밀려들은 카이난은 달아오르는 뺨의 열기를 감추려 고개를 숙이며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왕비님의 일은 어떠하십니까? 당신의 비밀이 여전히 당신의 잠을 방해하고 있습니까?”

“그 문제라면.... 저는 너무 두려워요.”

그의 질문에 단박에 미소 띤 얼굴이 굳어가며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일레이네는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서 마주 잡은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이맛살을 곱게 접었다.

“실은 최근...그러니까 한 주 정도 되었는데요. 제가 아주 무서워하는 사람이 두 번이나 왕비님을 찾아왔었어요.”

“당신이 아주 무서워하는 사람이라고요?”

“네. 시녀로써 이런 표현은 용서받지 못하겠지만 폐하와... 시투람 샤먼말이에요. 저는 두 분이...특히 시투람 샤먼이 굉장히 무서워요.”

-그 이름은 지나가는 말과 기록에서 접한 기억이 있다. 카이난은 자신의 기억을 불러들이며 덩달아 슬쩍 이맛살을 접었다.

“왕의 측근이신 방랑 주술사라던가...주술 사제라던가...?”

-그러고 보니 요리장 사제 콘타오른은 그를 <요상한 괴승>이라고도 표현 했었지.

“네. 정령사제도 아니고 국교신을 모시지도 않는... 먼 지방의 토속주술을 익힌 샤먼이래요. 본인은 스스로를 승려라고 불러달라고 하시는데...하여간 저는 그 분을 뵈면 굉장히 무섭고 꺼림칙한 기분이 든 답니다. 비단 저 만이 아니라 제 동료들도 무서워하지요. 뭐랄까... 가끔 저희들을 무섭게 노려보시거든요. 젊은 여자를 싫어하시는 것인지...왕비님이 회임을 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왔을 때도 입으로는 칭송의 말을 쏟아내면서도 그 회색의 눈은 얼마나 차갑고 이상한 증오의 빛으로 번뜩이던지... 아인로테님도 <기분 나쁜 승려>라고 보기를 무척 꺼려하시는 분이세요.”

“하지만 왕께서는 그를 무척 신임하신다고 들었는데요.”

머릿속에 괴승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을 부르르 떨며 일레이네는 카이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폐하께서는 시투람님의 말이라면 언제나 귀를 기울이세요. 저도 어렸을 때 일이라 자세히는 모르지만 우리나라가 주변의 여섯 나라와 싸울 때 무척 힘겨운 전쟁이었다고 하잖아요. 시투람 샤먼이 때 마침 나타나서 신묘한 주술과 기도로 우리나라를 지원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전쟁에서 승리를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폐하는 믿고 계신데요. 우리나라는 어디라더라... 맞아요. 저 얼음평원의 땅을 정복하느라 너무 국력을 소진했었기 때문에... 하지만 시투람 샤먼의 힘으로 전쟁을 이겼기 때문에 쿠드론과의 오랜 전쟁도 가능했다더군요. 가엾으신 아인로테님의 입장에서는 그 전쟁으로 나라를 잃었으니 더욱 시투람님이 꺼려지시겠죠. 하지만 폐하는 누구보다도 시투람 샤먼을 깊이 신뢰하게 되었대요. 예전에 폐하의 면전에서 왕비님에 관한 점을 치다가 우리나라의 멸망을 예언한 예언자의 목도 시투람님의 한마디에 단 칼에 쳐버리셨다고... 저도 들은 이야기인데 그래서 중신들 중에는 시투람 샤먼을 미워하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어요. 폐하를 부추겨서 자꾸 전쟁을 일으키려는 요사스러운 샤먼이라고 대놓고 맞서는 신하들도 많대요.”

“..........”

-또 다시 전쟁을 준비 중이라더니, 전쟁광끼리 손을 잡은 것인가?

카이난은 공식적인 역사나 전쟁기록에서는 거의 언급이 되지 않는 샤먼의 존재에 대해서 밀려오는 검은 구름과 같은 불길함을 느꼈다.

자신이 자라오는 내내 주변국과 싸움을 벌였던 이 나라는 급기야 굳건한 동맹인 쿠드론에게까지 싸움을 걸었다. 하지만 소국과는 달리 강건한 국가였던 쿠드론과의 싸움은 5년이나 국력을 소모하는 장기전이 되고 말았었지. 당시의 종군 사제들이나 모험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쿠드론 내에 창궐한 원인 모를 전염병과 그로 인해 정신이 피폐해진 배신자가 성문을 열어버리는 반역행위를 함으로써 전쟁이 페테브란트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고 하지만....

“...실상은 금단의 암흑 주술의 힘을 빌렸던 것일까?”

“사제님?”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을... 그런데 그 무서운 샤먼이 왜 갑자기 왕비님을 찾아온 것입니까?”

전쟁을 승리로 이끌 정도로 강력한 암흑 주술에는 무엇이 있을까...?를 궁리하고 있던 카이난은 재빨리 화제의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런 불길한 괴승이 어째서 회임을 한 왕비를 찾았다는 것이지?

“그게... 정말 음울하고 무례한 사람이에요. 글쎄 왕도 안에 국신교의 신전도 많은데 왜 하필 에루나크 정령원으로 요양행차를 하느냐고 추궁하듯이 말을 하지 않겠어요? 그러더니 별을 점쳐 봤노라고, 지금 나라에 불운한 기운이 느껴지니 태중의 아기님을 위해서라도 불운을 몰아내야 한다면서 그냥 왕궁에 머물라고 하는 거예요. 말로는 걱정이 되어서라지만 명백하게 왕비님의 행동을 제약하려는 태도였어요. 폐하도 그 샤먼의 말에 동조를 하는 바람에 아인로테님은 굉장히 불쾌해하셨어요. 일개의 승려가 상전처럼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한다고 말이지요. 일국의 왕비가 아니라 여전히 포로 신세 같다고 탄식을 하는 바람에 폐하의 마음이 약해지셔서 이렇게 무사히 요양행차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인로테님은 시투람 샤먼을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정도로 증오하게 되셨어요.”

“불운한 기운....”

그는 얼굴도 알지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정체불명의 승려가 자신과 같은 불길한 징조를 발견하고 있다는 사실에 무겁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그림자가 진 표정에 일레이네의 표정에도 그늘이 드리워졌다.

“무언가 마음에 걸리시는 것이 있나요, 사제님?”

“아니요. 다만... 최근 저 역시 상서롭지 못한 징조를 보고 있습니다. 이 징조들이 나라의 불길함을 예언하는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나라의 불길함이 원인이 되어 경고의 의미로 징조가 나타나는 것인지는 알 수 가 없습니다만...”

그는 멀리서 밤의 달빛을 받아 빛이 나는 울라한 폭포수의 월광암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보이십니까? 여기서는 조금밖에 보이지 않지만 울라한 폭포는 신성한 힘을 가진 장소, 원래 이끼 같은 것은 전혀 자라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끼가 늘어나고 있어요. 월광암의 빛을 가리려는 듯이 말입니다. 게다가 사령 케라론도 보았습니다.”

“사령? 불길한 존재인건 가요?”

“당신을 놀라게 하고 발까지 다치게 만들었던 뱀에 깃들어 있었던 존재입니다. 그것은 불행과 죽음의 냄새를 맡고 나타난다고 하지요.”

“세상에... 그 뱀!”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지는지 일레이네는 어깨를 움츠리며 두려운 듯이 중얼거렸다.

“설마 정말로 다시 전쟁이 일어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언제나 여유로운 왕궁에만 있다보니 저는 이런 불길한 일에는 둔하답니다. 모처럼 평화로운 시절인데... 왕비님도 이제 곧 아기를 낳으실 텐데 설마 이런 경사가 깃든 시기에 또 전쟁이 일어날까요?”

“소문은 있습니다. 저도 듣기만 한 이야기라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왕께서는 정복사업을 계속하실 생각이신가 봅니다.”

카이난의 우울한 예측에 일레이네의 표정은 더욱 뚜렷하게 어두워졌다.

“정말 싫은 일이군요. 전쟁이라니... 어렸을 적의 기억이 나요. 우리 마을은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이었지요. 태어났을 때부터 우리나라는 전쟁 중이었고 제가 자라는 동안은 쿠드론과의 총력전을 치르느라 모두가 허리가 빠지도록 고생을 하고 가난했어요. 저희 집만 해도 닭을 여러 마리 키웠는데도 변변한 달걀하나 마음껏 먹어보지 못했었지요. 군인들이 모두 공출을 해 가 버렸거든요. 시녀가 되어 왕궁에 들어와서 삶은 달걀을 실컷 먹으면서도 동생들 생각에 목이 메인적도 있었어요.”

과거의 슬픈 기억에 새삼 밀려오는 눈물로 눈가를 촉촉이 적시며 일레이네는 갑자기 강하게 목소리에 힘을 주어 외쳤다.

“전쟁은 싫어요. 우리 마을만 해도 남자들이 전쟁에 끌려 나갔었어요. 나의 아버지도 전쟁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마을 관리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들었어요. 집에서 제일 큰 재산이었던 밭갈이 소를 넘겨주었다고... 아, 생각만 해도 싫어요. 전쟁이 일어나면 또 다시 우리 마을 같은 시골들은 쥐어 짜이게 될 거예요. 지금도 충분히 가난한데 말이에요.”

...가여운 일레이네.

카이난은 오래전의 기억으로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무어라 위로를 해야 할지 다정한 말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려서부터 이곳 정령원의 튼튼한 벽들 속에서 자라온 그로서는 전쟁의 궁핍함도, 친인척을 잃어버리는 상실감도 경험을 해 본적이 없는 것이다.

다만 한 사람... 그는 또 다시 자신의 가장 오랜 기억 속에 존재하는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 자그마한 소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아련한 그리움에 입안의 속살을 깨물었다.

아마도 자신의 유일한 혈육? 친족? -그러나 그녀에 대한 기억이 너무나 얕아서 제대로 된 상실감조차 느껴지지를 않는다.

그러기에 그는 가만히 손을 뻗어 연약한 일레이네의 어깨를 잡으며 보다 중요한 말을 건네었다.

“사실은... 당신에게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

전쟁에 대한 기억으로 눈가에 눈물을 달고 있던 일레이네가 그 투명한 초록의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자 그는 사그라지는 용기를 애써 붙잡고서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가까운 시일 내에 저는 이곳을... 이 나라를 떠나려 합니다.”

“떠나신다고요?”

마치 청천벽력을 들은 것처럼 그녀의 얼굴이 단박에 창백해진다. 그런 그녀의 충격을 받은 얼굴을 달래기 위해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그녀의 작고 부드러운 턱을 받치며 재빨리 속삭였다.

“저도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야만 합니다. 정령원의 가장 어른이신 히가.레이온께서도 그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제가 이곳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외국에서 당분간 지내시기를 바라고 계세요.”

“당분간이라니... 얼마나요? 몇 달인가요? 몇...년이나 걸릴 수도 있는 것이지요?”

“...........”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어요.

카이난은 지극히 이성적인 자신의 예상을 그러나 차마 입으로는 말할 수 없어서 꿀꺽 목구멍으로 되삼켰다.

히가.레이온은 분명히 희망적인 말을 자신에게 들려주었었다. 믿기는 힘들지만 그는 카이난이 먼 길을 떠나더라도 일이 잘 된다면 (그 일이 무엇인지는 짐작조차 하기가 힘들다) 그는 몇 년 내로 다시 돌아와 이 아름다운 시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심어 주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저 아름다운 희망에 불과하다면? 사실 이 나라를 벗어나기만 하면 어디를 가든지 카이난은 자유로웠다. 그의 자유를 예속하는 곳, 그 자신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땅은 다름 아닌 바로 이 나라, 페테브란트가 아닌가?

“저의 목적지는 칼.이라베시 라는 나라입니다. 히가의 명으로 그곳에서 머물게 될 것 같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에요. 그곳은 대체 어디죠? 얼마나 먼 곳인가요?”

“아주...먼 곳입니다. 저도 가본 적은 없지만...”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일레이네의 일그러진 표정에 가슴이 조여들어온다. 카이난은 자신의 손길이 부디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그녀의 부드러운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이 나라를 벗어나 남쪽으로 거대한 윈자크 고원과 산맥 두 개를 넘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나라도 16개나 지나야 하고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저로서도 짐작조차 가지 않는 길입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의 손에 제 마음을 드리고 떠나고 싶습니다. 저의 영혼과 저의 수호신인 순결의 에스투람의 가호는 오롯이 당신의 것입니다.”

“세상에... 사제님. 너무 기쁘지만 조금도 기뻐할 수가 없는 고백이군요.”

급기야 눈물샘을 터뜨리며 일레이네는 넓은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거친 양모로 만들어진 수도복에 눈물로 얼룩을 만들어내며 그녀는 카이난의 가슴에 얼굴을 부볐다.

“제 마음을 아시죠? 제 마음을 사제님은 모두 알고 계시는 거죠? 저는 자나 깨나 사제님만 생각하고 있어요. 사제님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사제님만 그리워하고 있다고요. 사제님을 만날 수 있는 이 짧은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데... 그런데 어떻게 떠나신다는 잔혹한 말씀을 하실 수가 있어요?”

“일....레이네....”

카이난은 어색한 혀로 그녀의 이름을 흘려내었다. 그러자 번쩍,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눈동자가 그의 안타까운 얼굴을 향해 들어 올려졌다.

“제 이름을 불러주시는군요! 아세요? 처음으로 제 이름을 불러주신 거예요!”

“...언제나 마음으로는 당신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여린 몸을 안아들며 그는 한숨을 흘려내듯이 그렇게 고백을 했다.

“당신이야 말로 저의 마음을 아시지요? 당신이 저를 발견하기 전부터 줄곧 당신을 바라보았던 저의 마음을 당신은 알고 계실 겁니다.”

“세상에... 사랑의 여신, 리즈벳이여- 우리를 살펴주세요. ...이럴 때 정령신이 아니라 국교신의 이름을 들먹여서 죄송해요. 사랑을 관장하는 정령신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랬어요.”

카이난의 고백에 온 몸으로 기쁨과 안타까움을 표현하며 일레이네가 그의 큰 손을 잡아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간절하게, 애원하듯이 말을 이었다.

“그러지 말고 제발 저에게 기회를 주세요. 당신이 무슨 이유로 사람의 눈을 피해 살아가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제가 왕비님께 간청을 드리겠어요. 당신이 가는 곳에 저도 따라갈 수 있도록 제가 왕비님께 자유를 간청 드리겠어요.”

“..............!”

순간, 카이난은 심장이 멎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두려울 정도로 강렬한 기쁨을 느끼며 숨을 멈추었다. 그녀가 지금 뭐라고 했지? 내가 차마 입을 열어 청하지 못한 소망을 그녀는 이렇게나 쉽게, 이렇게나 순순히 흘려내는 것인가?

“진심...이신 겁니까?”

“진심으로 들리지 않으시는 건가요? 당신이 떠나신다면 저도 떠나겠어요. 이 나라를 떠나겠어요. 짐이 되지는 않을게요. 저는 여자가 할 수 있는 모든 허드렛일을 할 수 있어요. 그러니 부디....”

“아... 일레이네!”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서 그녀의 이름만을 감탄사로 흘려 내었다. 자신의 손을 꼭 잡아 가슴에 품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당겨 품으로 안아 들이며 카이난은 넘치는 감격으로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당신은 얼마나 용감하신 분인지...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용감하신 분이에요. 저 하나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겠다는 겁니까? 이방인인 나와는 달리 당신은 이 나라가 고향이며 고국이잖습니까?”

“저도 저 자신에게 놀라고 있는 중이에요.”

배시시... 자신의 대담한 발언에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드는지 얼굴과 눈가가 붉어진 일레이네가 수줍은 미소로 그의 손을 잡아 입술로 누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제 본심인 것을 어쩌겠어요? 사제님이... 카이난님이 이제 제 고향이며 나라가 되어 주실 거잖아요?”

“먼 길입니다. 고생할 거예요.”

“조금도 두렵지 않아요.”

허락이나 다름이 없는 카이난의 말에 꽃이라도 피어날 듯 화사한 미소의 일레이네가 당당하게 눈을 빛냈다.

“저는 세상물정을 모르고 자란 귀족의 여자가 아니에요. 겉보기에만 그럴 듯 할뿐, 사실은 시골의 잡초랍니다. 튼튼하고 억세죠. 당신이 어디를 가시든 씩씩하게 당신을 보좌할 수 있어요.”

-가슴에 희망이, 또렷한 희망의 불꽃이 피어오른다.

카이난은 마치 오랜 꿈속의 길이 정확하게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는 희망에 본능적으로 기도의 말을 흘려내고 있었다.

“에스투람- 순결의 에스투람이여. 이 여인을 보호하시고 축복하소서...당신이 나에게 준 모든 가호와 축복을 모두 이 여인에게 옮기시어 그녀를 지키고 사랑하소서...”

“오, 안 돼요. 안 돼요. 당신의 수호를 나에게로 옮기면 누가 당신을 보호하겠어요? 정령신님- 저는 정령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 계집이랍니다. 저에게 정령신의 가호는 필요가 없어요. 당신이 저를 지켜주실 거니까요.”

재빨리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아 기도의 말을 막아내며 일레이네는 선이 뚜렷하고 강한 카이난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섬세하게 훑어 내렸다.

바로 그 섬세한 움직임을 신호로 해서 카이난은 본능이 명하는 대로 그녀의 작은 입술을 향해 자신의 입술을 내렸다.

차가운 밤의 공기 속에 두 입술이 스치듯 닿는다. 그리고 다시금 서로를 찾는 두 입술이 이윽고 하나로 녹아들었다.

어둠을 밝히는 별과 달과 월광암의 반사광 속에서 그렇게 두 연인은 한참을 서로의 입술을 탐닉하고 있었다.


-히가.레이온의 전령이 찾아든 것은 그날로부터 4일 뒤의 깊은 새벽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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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22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3) 24.09.11 6 0 23쪽
22 21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2) 24.09.10 6 0 25쪽
21 20화 - 여기사, 소녀를 만나다 (1) 24.09.09 8 0 23쪽
20 19화 - 샴.베스타의 학살 (3) 24.09.06 7 0 23쪽
19 18화 - 샴.베스타의 학살 (2) 24.09.05 6 0 21쪽
18 17화 - 샴.베스타의 학살 (1) 24.09.04 6 0 25쪽
17 16화 – 전조(前兆) (3) 24.09.03 5 0 23쪽
16 15화 – 전조(前兆) (2) 24.09.02 5 0 23쪽
15 14화 – 전조(前兆) (1) 24.08.30 5 0 28쪽
» 13화 - 축복의 시간(5) 24.08.29 8 0 20쪽
13 12화 - 축복의 시간(4) 24.08.28 7 0 26쪽
12 11화 - 축복의 시간(3) 24.08.27 7 0 20쪽
11 10화 - 축복의 시간(2) 24.08.26 7 0 24쪽
10 9화 - 축복의 시간(1) 24.08.23 6 0 25쪽
9 8화 - 시녀 일레이네 (4) 24.08.22 5 0 24쪽
8 7화 - 시녀 일레이네 (3) 24.08.21 7 0 16쪽
7 6화 - 시녀 일레이네 (2) 24.08.20 6 0 17쪽
6 5화 - 시녀 일레이네 (1) 24.08.19 9 0 18쪽
5 4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4) 24.08.16 6 0 23쪽
4 3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3) 24.08.15 6 0 22쪽
3 2화 - 정령원의 비밀사제 (2) 24.08.14 5 0 19쪽
2 1화- 정령원의 비밀사제 (1) 24.08.13 8 0 18쪽
1 프롤로그 24.08.13 9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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