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굴의 아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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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소유
작품등록일 :
2024.08.14 21:13
최근연재일 :
2024.09.0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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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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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프롤로그 ~ 1화

DUMMY

화려한 금빛의 머리카락을 자랑으로 여기는 아름다운 소녀가 서서 책을 보고 있었다.

그곳은 깔끔하고 화려한 서재 속에서 유독 먼지가 쌓여 있었는데, 소녀의 손에 쥐어진 책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난 왜 이런 책이 본가 서재에 있었다는 걸 모르고 있었을까?”



어떤 유명한 영웅의 일기를 각색해서 소설로 만든 책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소녀처럼 소리 지르며 책 속으로 뛰어들었겠지만 지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서재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정말 짧았기 때문이다.

곧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녀는 곧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염도 머리칼도 새하얗게 물든 주제에 눈이 의심될 정도로 정정한 노인이 보였다.


“라파엘라 아가씨. 주인어른께서 부르십니다.”


“아······”



라파엘라라고 불린 소녀는 큰 한숨을 토해내더니 고개를 숙였다.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차올랐지만 지금 우는 모습을 보였다간 상황이 더 나빠질 게 뻔했다.

혀를 씹어먹는 심정으로 눈물을 집어 삼키며 자신의 뺨을 거칠게 두들겼다.

백옥처럼 새하얀 피부에 붉은 손자국이 남고 말았다.


“아가씨···”



“아, 미안합니다 폴.

저기··· 아버님께서는 역시 화가 나신 게 맞는 거죠?”



폴이라고 불린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라파엘라에게는 그게 곧 대답이었다.


“하긴······ 저··· 폴.”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


“아버님께서 저를 태워 죽이시지는 않겠지요?”



“아가씨. 주인어른께서 그럴 분으로 보이십니까?”



“예.”


라파엘라는 즉답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기에 질문을 했던 폴이 당황하고 말았다.

잠시 말문이 막혀 있다가 곧 입을 열었다.


“주인어른께서 정말 그럴 작정이셨으면 아가씨를 집으로 부르셨겠습니까?

나아가서 이번 일에 대해서 아가씨께 책임을 묻겠습니까?”


“역시 그렇겠죠?”



아무리 엄하고 무서운 사람이라고 한들 하나 밖에 없는 제 딸을 죽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건 성격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정신이 나간 사람일 뿐이다.


“걱정 마시고 얼른 가보십시오.”


라파엘라는 여전히 두려움을 품은 채 제 아버지가 있는 방으로 갔다.

이 넓고 높은 저택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방이었다.

가는 데만 10분이나 걸렸다.

라파엘라는 조심스레 방문을 두들겼다.


“아버님···”



“그래 들어와라.”



그 말에 따라 문을 연 순간, 라파엘라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았다.


“윽!”



목구멍을 태우는 듯한 뜨거운 열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삽시간에 피부가 건조해졌으며 눈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흔들리는 시야 끝에 보이는 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는 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미안하구나.

지금 좀 조절이 안돼서 말이다.”


“아, 아닙니다.

잠깐 당황했을 뿐입니다.”


곧 라파엘라의 몸에서도 열기가 피어났고, 육체가 환경에 적응했다.

고통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제 아버지처럼 머리카락이 불꽃처럼 황황히 타오르고 있지는 않았다.


“얘기는 전부 다 들어서 알고 있다.

카타리나, 아니 왕비와 국왕에게 모두 들었어.”



“······그럼 저는 이제 앞으로.”


“우선 약혼은 없던 일로 하기로 결정했다.

대외적으로도 그렇게 발표를 할 거다.

그러니 당분간은 아카데미아에 가지 말거라.

괜한 녀석들이 시비를 걸게 뻔하니까.”



“죄··· 죄송합니다. 제가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 먹칠도 이런 먹칠이 없지.

너와 오스카 왕자가 졸업하면 바로 혼인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그리고 너와 왕자의 본격적인 후계수업도 준비되어 있었어.

이미 가르침을 받을 교사들까지 전부 수배가 끝난 상태였다.”


“윽···”



“더 좋은 방법은 없었던 거냐?”



“모르겠습니다.”



“이야기는 다 들었다고 말했잖느냐.

난 네가 그 자식의 뺨을 후려친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어디서 주워 온 자신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쓰레기 자식이었으니까.”


“아, 아버님!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그 놈의 부모 되는 인간들에게 전부 다 듣고서 든 생각이다.”


그렇게까지 말했건만 라파엘라는 영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결국 불길이 섞인 한숨을 토해냈다.


“하아··· 네가 내 성격을 반만 닮았더라면.

아니, 일레인도 딱히 온화한 편은 아니었는데.

생각해보면 우리 아버지가 우유부단했던 것 같군.

닮아도 그런 것만 닮다니.”


“저······ 저는! 라피아드 가문을 위해서!”


“됐다 이 녀석아.”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활활 불타고 있는 정장의 안 주머니에서 종이로 된 티켓을 꺼냈다.

티켓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지만 타고 있지는 않았다.

그걸 라파엘라에게 주었다.

라파엘라는 눈물이 방울방울 매달린 눈동자로 티켓을 받았다.


“잠시 머리 좀 식히고 오너라.”


“이··· 이건?”



티켓에는 마실리스 행이라고 적혀 있었다.

라파엘라가 그 문자를 읽고 이해하는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곧 눈물이 잦아들고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마실리스로 유배를 떠나는 것이 제가 받는 형벌인 겁니까···?”



“아니야 이 녀석아!

가서 기분 전환 좀 하고 오라는 거다.

설마 내가 너한테 그런 미친 짓을 시키겠냐!”



“하지만 마실리스는 관광지 같은 곳이 아니잖습니까.

여긴 최전선 아닌지···?”



“그래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크라이시스트 왕국은 항상 마물과 전쟁을 벌이고 있으니까.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마실리스가 가장 안전한 곳이다.

특히 지금 너한테는 더욱.”



라파엘라는 막연하게 상상했다.

마실리스는 항상 눈과 칼바람이 휘몰아치고 낮이 짧으며 밤이 지배하는 곳이다.

마실리스를 지키는 거대한 벽 너머에는 끔찍한 마물들이 득실거리며 먹고 살 수 있는 것들 또한 마땅치 않다.

게다가 마실리스 본토는 곡물을 재배할 수 없는 걸로 유명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곳으로 보내는 게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아니, 이것이 형벌을 받는 것이라면 이해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기분 전환이라니?


“마침 마실리스의 후계자가 너하고 비슷한 나이라고 들었다.”


“아··· 그래서···”


마실리스 가문의 후계자에 대해선 라파엘라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마실리스란 이름은 알고 있지만 그곳의 소식은 흥미거리가 아니었으니까.


“너나 왕자 놈, 강파르, 아이브와 다르게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후계 수업을 받아온 녀석이다.

듣기론 근시일 내에 대공위를 물려 받는다고 들었다.”


“예? 방금 저하고 비슷한 나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라파엘라는 울음도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지는 그것을 보며 마음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쪽은 우리 같은 중앙 귀족하고 돌아가는 시스템 자체가 달라.

거기서 말하는 귀족과 우리들이 말하는 귀족은 서로 다른 생물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지.

그러니 가서 기분 전환도 하고, 또 배워와라.”



“배우다... 니요···?”



“왕세녀가 되지 못할지언정 라피아드 공작은 되어야 할 것 아니냐!

나는 작금의 귀족 시스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전에는 일레인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받아들였지만 이번 일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런 쓰레기가 왕자고, 소공작이라는 놈이 옆에서 바람잡이나 하는 꼬라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전선에 서보지도 않은 꼬맹이들이 귀족인냥 꺼드럭대는 것도!”



조금 수그러드는가 싶었던 머리칼의 불꽃이 갑자기 폭발했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이 엄청난 소리를 내뿜었고 폭풍을 만들어냈다.

방의 유리창이 모조리 박살 났다.

천장에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넌 가서 마실리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고 와라! 알겠냐!”


“네, 넵!”



라파엘라는 고개를 푹 숙이며 아버지에게 작별을 고했다.

직후 도망치듯이 방을 뛰쳐나갔다.

그 순간 문이 폭발했다.

라파엘라는 간신히 폭풍에 휘말리지 않았다.


“으아아··· 방심하고 있어서 죽을 뻔했어.”



정말 무서운 건 그가 가볍게 화를 냈을 뿐이라는 거다.

진심으로 가문의 불꽃을 토해냈다면 라파엘라는 잿가루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을 그녀도 알기에 팔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보다 이 기차표 오늘이잖아···

시간은 적혀 있는 게 없는데 전용기라도 준비하신 건가.”



라파엘라는 딱히 가기 싫다는 생각은 없었다.

아버지가 말한대로 지금 아카데미아로 돌아가봤자 좋은 꼴은 절대 못 본다.

왕자와 그 간통녀를 보는 순간 다시 이성이 날아가고 히스테리를 부릴 것이 뻔했다.

아카데미아에 있는 다른 귀족들한테 조리돌림을 당하는 건 보너스다.


“아버님은 전선에 서보지도 않은 꼬맹이들이 귀족인냥 꺼드럭댄다고 했었지···

나도 거기에 포함되는 건 알고 말하신 거겠지···?”



그가 말하는 건 아카데미아가 준비한 모의 훈련 따위가 아니다.

그가 젊을 적에 겪었던 진짜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라파엘라는 그렇게 확신했다.


“가져갈 물건은 딱히 없으니까 그냥 갈까.

가다가 추울 수 있으니 두꺼운 옷만 챙기고··· 아니 그것도 그냥 가서 살까.”



아버지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책임감만이 그녀의 몸을 움직였다.

마음 같아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책임감으로 찍어 누른 채 억지로 움직였다.

라파엘라가 저택 문을 나서자 차가 마중을 나왔다.

늙지만 정정한 집사인 폴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라파엘라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차에 올랐다.


“마실리스로 가실 겁니까?”


“정확히는 철도역까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거절하셨더라도 주인어른께서 화를 내시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거절을 하겠습니까······”



아무리 들어도 억지로 쥐어 짜는 목소리였기에 폴은 더 묻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 목적지까지 차를 운전했다.

철도역은 생각보다 멀었다.

라피아드 가문의 영지가 대륙 남부에 있는 것도 한몫 했다.

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국도를 돌아서 외곽에 있는 철도역으로 향했다.

라파엘라는 창문 밖을 스쳐 지나가는 왕국의 풍경을 아련하게 쳐다봤다.


“저는 마실리스에 가본 적은 없지만.

그렇게 나쁜 곳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런가요?”


“환경이 척박한 건 부정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거기 사는 사람들, 특히 마실리스 가문의 사람들이 아주 호의적이라고 하더군요.”


“누가 그럽니까?”


“시내에서 마주치는 모험가들이나 용병들이 그러더군요.

최고의 의뢰주는 단연 마실리스 대공 가문이지만 최악의 일자리는 마실리스라고.”



“하하··· 그 말을 들으니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긴 합니다.”



마실리스 대공 가문.

즉 라파엘라와 같은, 아니 라파엘라보다 더 격이 높은 몇 없는 귀족 가문이다.

크라이시스트 국왕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존재라고 봐도 손색이 없다.

단지 마실리스는 너무 먼 곳에 있었고 무엇보다 폐쇄적이었기에 알고 있는 건 없었다.

알고 있는 것이라곤 최전선을 지키는 군인 가문, 다시 말해 군벌이라는 것 정도다.


“아무래도 저는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어째선지 비장한 목소리와 함께 차가 멈췄다.

창 밖을 내다보니 검문소가 있었다

검문소에는 군인이 서 있었다.


“아니 왜 군인이?”


군인은 엄숙한 표정으로 초소에 나왔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서류철과 차량의 번호를 대조하더니 차창을 두들겼다.

라피아드 가문의 집사인 폴과 뒷좌석에 앉은 라파엘라를 알아보더니 크게 경례를 올렸다.


“충성!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라피아드 공녀 저하! “


라파엘라는 그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폴을 쳐다보았다.

룸 미러 너머로 시선이 부닥친 폴은 자연스럽게 설명을 했다.


“주인어른께서 예약하신 기차표는 마실리스 가문이 직접 관리하는 기차입니다.”


“직접 관리한다는 건?”


“즉 군수물품을 비롯한 교역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기차라는 뜻입니다.”


“······아버님께서 대체 왜 그런 걸 예약하신 건지 알고 있습니까?”


그 질문에는 폴이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마실리스 소속의 군인이 대답했다.


“이 시기에는 민간에서 이용할 수 있는 기차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물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민간 기차는 노골적으로 호송하는 것이 힘들어서 마물들이 곧 잘 노립니다.”


라파엘라는 그 말만으로도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이 탈 수 있는 공간이 있기는 한 겁니까?”


“예!

물자를 호송하는 것이 주목적이라고는 하나 결국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관리자 또한 열 두 가문에서 파견된 귀족이기 때문에 편안함은 보장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실리스의 귀족이 이용하는 기차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최대한의 아늑함은 보장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최소 백작위 이상의 고위 귀족이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라파엘라는 차에서 내렸다.

어차피 내린다는 선택지 밖에 없지만 말이다.


“길은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라파엘라가 내리자 폴도 내렸다.

폴은 꾸벅 허리를 숙이며 라파엘라를 배웅했다.

그렇게 마실리스 군인의 안내를 받으며 기차역에 도착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단 한 사람도 만날 수 없었다.

대신 매우 거대한 기차를 볼 수 있었다.

라파엘라는 생전 처음보는 크기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차 따위의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음에도 들뜬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그렇게 한참을 구경하다가 기차에 올랐다.

객차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으스스하다고 느낄 법도 했거늘, 라파엘라는 고요함 속에서 편안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긴장을 풀고서 아무 자리에나 들어갔다.

자리라고 했지만, 방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귀족이 이용한다는 건 빈 말이 아니었는지 방은 객차 하나에 두 개 밖에 없었다.

방 안에는 침대와 옷장, 냉장고와 화장실, 그리고 간단한 요리를 할 수 있는 시설이 있었다.

냉장고 안에는 음료와 물이 가득했으며 찻장에는 간식과 인스턴트 음식들이 들어 있었다.

라파엘라는 크게 만족하며 입고 있던 블라우스를 풀어헤쳤다.

다시 말해 교복이었다.

넥타이를 풀어 헤치자 쇄골과 가슴골 사이로 땀이 흘러내렸다.

계절은 아직 겨울을 맞이하지 않았으니 돌아다닌 만큼 열이 오른 것이다.

뺨도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그 상태에서 방금 전에 둘러본 기차에 대해서 고찰하기 시작했다.


“마실리스는 판타지아 대륙 북쪽 끝자락에 있어.

그러니 이 기차는 사실상 대륙을 횡단하는 기차야.

그런데 그런 물건을 고작 군용 화물 운송용으로만 쓰다니.”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다른 기차들보다 압도적으로 커다란 크기였다.

라파엘라도 물자운송을 위한 기차를 여럿 본 적이 있다.

그녀도 귀족, 그것도 공작위의 영애다.

타 영지 혹은 왕에게 받칠 온갖 것들을 옮길 때 기차를 이용한다.

관련 사업에 깊게 관여한 적도 있어서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압도적으로 거대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너무 아까워.

애초에 마실리스랑 크라이시스트 사이에서 뭘 운송한다는 건지 모르겠네.

마실리스에서 유명한 특산품이 있던가······ 있긴 하겠지.

마실리스는 아주 넓으니까.

게다가 환경도 워낙 척박하잖아.

그런 곳에서만 나는, 내가 모르는 특산품이 있을 거야.

그러고보니 그 군인이 군수품이라는 얘기를 했었지?”


군수품이라고 하면 더더욱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크라이시스트 왕국의 현 재정 상황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다.

일단 주변에 적국은 없으며 따라서 군수물품을 구매할 이유는 없다.

물론 치안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은 필요할 것이다.

다만 그걸 위해서 멀리 있는 마실리스와 교류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라파엘라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결국 자기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뭐··· 마실리스에서 지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말을 끝맺으면서 크게 하품을 했다.

정신적 피로와 육체적 피로가 함께 이완이 되면서 졸음이 쏟아진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이를 꽉 깨물고 버텼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옷도 갈아 입지 않고, 샤워도 하지 않은 채 블라우스만 풀어헤치고서 눈을 감았다.

그렇게 깊은 잠에 빠졌다.


잠에 들고서 몇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번쩍 떴다.


“흐에?”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식은 땀을 흘리면서도 얼빠진 소리를 했다.

반쯤 풀린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아 맞다···

마실리스로 가는 기차에 탔었지···

방금 그건 무슨 소리였지?”


입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침을 닦아내고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을 통해 시간을 이해하고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 닥쳤다.

라파엘라는 몸을 파들파들 떨었지만 아랑곳 않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얼마 안가서 떨림이 멈추었다.

뺨을 후리는 칼바람 속에서도 추위를 느끼지 않는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설마 잘못 들은 건가?”


그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다시 폭발음이 들렸다.

기차가 흔들릴 정도의 진동, 폭풍과 같은 바람이 휘몰아쳤다.

라파엘라의 몸이 휘청거리며 창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으아아악!? 갑자기 뭐야!?”


곤두박질 칠뻔한 몸뚱이를 간신히 붙잡고 필사적으로 창문 안쪽으로 도망쳤다.

재차 폭발음이 들려왔다.

이번엔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겁을 집어먹고 창 너머만 물끄러미 쳐다봤다.

폭발음이 들린 것과 동시에 거대한 눈폭발이 일어났다.

연거푸 폭발을 일으켜 지독한 눈안개를 일으켰다.

그 안개 너머에서 희미한 실루엣들이 보였다.

그건 마치 사람의 상반신 같았다.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했으니 분명 인간은 아니니라.


“뭐지? 뭐에 올라탄 것 같이 생겼는데···?”


공포심과 호기심을 모두 품은 채 실루엣이 드러나기를 기다렸다.

곧 그것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것은 뭔가를 타고 있는 인간 따위가 아니었다.

인간처럼 생긴 상반신이 거칠게 흔들거렸으며 거미 같은 다리가 사납게 눈밭을 짓밟았다.

그 속도는 기차에 필적할 정도로 빨랐다.


“뭐, 뭐야 저게? 설마 북부의 마물···..?”


그렇다.

그것은 인간들이 마물 혹은 괴물이라고 부르는 생명체였다.

거대한 낫이 집게발처럼 달려 있었는데 그걸 난폭하게 휘두르며 기차를 향해 달려왔다.

그 수가 한 마리가 아니었다.


“뭐가 저렇게 많은 거야! 게다가 저렇게 생긴 마물은 처음 본다고!”


라파엘라가 겁에 질려서 발만 동동구를 때 다시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것과 거의 동시에 눈에서 폭발이 일어났고, 어디선가 자동차가 달려왔다.


“이제 들어보니까 대포소리였구나!

그럼 마실리스군이 상대하고 있는 거겠지?”


그제서야 폭발음의 정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무언가를 하려는 강렬한 욕구가 그녀를 사로잡혔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객차의 방문을 거칠게 열어 젖혔다.

그런데 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그녀는 마치 문을 열려고 하는 것처럼 어정쩡한 자세로 손을 뻗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눈동자가 마주친 순간 라파엘라는 깜짝 놀라서 외쳤다.


“어!? 비서스 선배!?”


“뭐야! 손님이라는 게 정말로 라파엘라 양이었어?”



비서스라고 불린 소녀는 라파엘라의 손을 낚아채고 어딘가로 이끌었다.


“어, 어디에 가려는 겁니까?!”


“어디긴 안전한 곳이지.

일단은 전투 상황이니까 귀빈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잖아.”


“기차에 있으면 일단 안전한 거 아닙니까?”


“그렇긴한데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일단은 가장 안전한 곳으로 갈거야.”


“거기가 어디입니까?”


“우리 대장이 있는 곳.

지금은 아마 기관차 쪽에 있을 걸?”


“대장···?”


라파엘라는 그제서야 비서스의 복장을 알아보았다.

장식 하나 없는 순백색의 코트를 입고 있었다.

유일하게 어깨와 가슴에 계급장이 붙어 있었다.

옷깃 사이로 옷 안쪽을 엿볼 수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새하얀 옷이었다.

그런 것보다도 특징적인 것은 그녀가 어깨에 메고 있는 물건이었다.

바로 사람 크기만큼이나 거대한 총이었다.


“그러고보니 마실리스의 귀족들은 모두 유소년기에 군인으로서 생활한다고 했었죠···

설마 진짜였다니.”


“아~ 하긴 아카데미아에서 총을 들고 돌아다닐 수는 없으니까.

군복도 입을 수 없고.”


“그럼 마블러스 선배나 블라디미르 선배도 함께 있는 겁니까?”


“응. 지금 대장하고 같이 있어.

근데 우리가 갈 때쯤엔 두 사람 다 요격조로 차출되어서 인사는 힘들 거야.”


“요격···?”


“창문 밖에 못 봤어?”


“아뇨 봤습니다.

끔찍하게 생긴 괴물이 있었던데···”


라파엘라는 무의식적으로 괴물이 생김새를 떠올렸다.

인간처럼 생긴 상반신이 거대한 낫을 휘두르며 거미 같은 다리로 눈밭을 질주했다.

게다가 그 크기도 엄청나게 거대했다.

뭣보다 숫자가 많았다.


“그런 걸 요격하러 간다고요···? 그 두 사람이?”


“당연히 혼자 보낸단 소린 아니지.

그것들은 변종이라고 해서 겉보기보다 죽이는 게 어렵거든.”


“겉으로 봤을 때도 죽이기 힘들어 보였는데···”


“정 안되면 뭐, 대장이 출격하겠지?

솔직히 그러는 편이 총알도 아끼고 체력도 아껴서 좋을 텐데.”


“그 대장이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군인 인건 알겠는데 대단한 사람입니까?”


“가서 보면 알 거야.”


대화를 나누는 사이 기관차에 도착했다.

그 근처에는 수많은 마실리스 군이 서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비서스를 향해 경례를 올렸다.

비서스는 가볍게 경례를 받아주고 기관차 내부로 들어갔다.

안에는 조용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만은···”


“위로 올라갔나 보네 따라와.”


그렇게 말하며 문 옆에 난 계단으로 올라갔다.

계단 끝에는 육중한 철문이 버티고 서 있었다.

비서스는 그것을 가볍게 열었다.

멀뚱히 있던 라파엘라는 급하게 계단을 올라갔다.

비서스를 따라 밖으로 나간 순간, 맹렬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읏!”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는 바람 속에서 몸을 가누는 것이 고작이었다.

보다 못한 비서스가 그녀를 잡아당겼다.


“대장! 손님 데리고 왔어!

이제 직접 출격할 거지?”


비서스는 반갑고 힘차게 소리쳤다.

라파엘라는 그녀의 시선을 쫓았다.

그곳엔 한 남성의 뒷모습이 보였다.

뒤에서 보기만 해도 관록이 느껴질 정도였다.

라파엘라는 마실리스 안에서도 힘이 있는 귀족일 거라고 추측했다.

인사를 건네고자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하아.

그래 알았다 알았어.

내가 처리할 테니 다른 녀석들한테는 귀환하라고 전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엄호 분대는 그대로 있으라 하고.”


라파엘라는 놀라서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목소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론 너무 어렸다.

비서스는 활짝 웃으며 경례를 올렸다.


“라져!”


“어··· 저기···”


“미안하지만 인사는 나중에 하지.

지금 좀 급해서 말이야.”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기차 밑으로 뛰어내렸다.


“어!?”


라파엘라는 놀라서 달려들려고 했지만 바람이 거세서 곧 엉덩방아를 찧었다.


“뭐야 저 사람···?”


사람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눈밭을 가로지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순식간에 멀어져서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손에는 칼 한자루만 달랑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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