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을 위한 노력(2)
외무부 청사로 걸어가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프랭클린 댈러노 루즈벨트.
줄여서 FDR.
2차 세계 대전기에 가장 거대한 족적을 남긴 시대의 거인.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순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지도자.
그리고 지금은 죽은 사람.
마지막이 핵심이다.
지금, 이 지구에서.
루즈벨트는 죽었으니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루즈벨트는 단순히 대전기 대통령이라는 말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가진 정치적 능력, 행정적 능력, 외교적 능력 등등은 명백히 일반적인 정치인을 능가했다.
미국 대통령은 재선 이후에 또다시 대권에 도전하지 않는 전통이 있다. 이는 최초의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스스로 3선 불출마를 선언했기 때문인데, 그게 원칙이 되어 내려져오는 것.
그런데 FDR은 그 원칙을 깨고 3선에 성공했다.
이것만으로도 그 정치력이 보일 지경이다. 비록 전시 프리미엄을 달았다고는 하나 조지 워싱턴 이래로의 전통을 깨고 3선에 도전한 건 그가 유일했다.
물론 이후로는 3선 금지가 법제화되었다. 미국인들의 반발은 상당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거 독재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으니 말 다했지.
역으로 말하면 FDR은 그런 반발까지 감수하고 3, 4선에 도전했으며 또 성공했다는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그래.”
뉴딜 정책도 빼놓을 수 없겠지.
루즈벨트가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내세운 정책. 실질적으로 큰 영향이 있었는지는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도움을 주었다는 것까지 부정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그걸 떠나서 뉴딜은 미국의 시장경제 개입과 복지사회 등등 후대 미국 사회에 다각도로 영향을 미친 정책.
경제학적인 의미, 공황 극복의 의미, 노동자 복지 정책의 선례 등등. 뉴딜은 수많은 사람들을 구제했으며 FDR의 업적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힐 정도의 족적을 지닌다.
그런데 이 지구에서는 그게 없어질 판이다.
미치겠구만, 진짜.
대체 역사를 어디까지 비틀 셈이냐.
간단히 요약해보면.
그는 대공황을 극복했으며 2차대전의 미국을 승리로 이끌었고 21세기 초강대국 미국의 설계자라는 칭호까지 얻은 대통령이다.
이것만 따져보면, 당장 나에게 손해될 건 없다. 아니 오히려 이득일 수도 있다.
미래 연합국의 위대한 대통령 중 하나인 루즈벨트가 죽었으니, 추축국의 총통인 내 입장에서는 간접 버프를 얻은 셈이지.
그런데 세상살이가 그렇게 단순할 리 있겠나. 20세기에도 세계화란 단어는 있었다. 모든 국가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열강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물며 아직 배상금도 다 못 갚은 독일과 엄연한 1차대전의 승전국 중 하나인 미국이라면 더더욱.
뭔가 복잡한 나비효과가 발생할 게 분명했다.
그게 뭔지는 모를지언정, 무려 루즈벨트급 되는 인물이 암살당했는데 아무 일도 없으면 내 성을 마이어로 갈고 말지.
“총리 각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어쨌든.
지금은 외교부의 브리핑을 들어볼 시간이다.
.
.
.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는 친서방 외교 정책으로 많은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그는 영독 해군조약을 체결해 스트레사 전선을 붕괴시켰고, 라인란트 재무장 때 불거진 외교적 마찰들을 온건하게 마무리지었다. 국제연맹 탈퇴 때도 나름대로의 역량을 발휘해 서방세계가 어느 정도 묵인하도록 만들었다.
37년 즈음에 리벤트로프에게 권력을 빼앗기기 전까지, 노이라트는 실력있는 외교관으로서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했다.
물론 이건 전부 미래의 이야기다.
지금은 1933년. 라인란트 재무장은커녕 국제연맹 탈퇴조차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이다.
더군다나 그의 외무장관 임명조차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노이라트에 대해 긁어모은 정보들을 되새겼다.
‘서류에서는 32년 정도라고 나와 있던데.’
32년이면 히틀러가 정부에 직접 관여하기 어려운 시절. 파펜 내각 때 기용된 사람인만큼 내게 호의적이지 않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물론 아닐 수도 있겠다만······ 노이라트의 정치적 입지나 의견 같은 것들을 일일이 기억할 정도면 나치독일 사학자 했지. 나는 그가 나치즘에 호의적인지 아닌지 전혀 모른다.
덕분에 나는 제법 긴장한 상태였다.
외무부 청사면 사실상 기존 관료주의 집단의 소굴 같은 곳인데, 거기로 나치당 당수가 기어들어가면 호의보다는 적대를 생각하는 게 당연한 일일 테니까. 나치가 어디 외교에 신경이나 썼나.
그리고 내 긴장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노이라트는 깍듯하게 인사했고, 내게 적대적인 스탠스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 관료들이 적대 섞인 시선을 보낼라치면 미리 말리는 역할이었지.
그는 행동으로서 내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2주간 베를린이라는 마굴에서 다져진 안목으로 보건대, 이건 내게 잘 보임과 동시에 나와 적대하기 싫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그걸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인다.
다만 대놓고 들러붙어 아부하진 않았는데, 이건 외무부 자체를 나치당 아래에 들이는 건 싫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치의 하부기관 중 하나로 전락하는 건 싫다는 뜻.
요약하면 중립적인 입장이었다. 너희를 적대하지 않을 테니 우리의 권한도 침범하지 말아줄래? 정도의 제안을 던지는 것.
괜찮은 일이었다. 36년에 라인란트 재무장을 시도하기 전까지는 나도 외무부에 간섭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물론 외무부의 정치적 동향 파악 외에도 할 일은 더 있었다.
“루즈벨트와 함께 부통령으로 출마했던 사람이 누구요?”
“존 낸스 가너(John Nance Garner III)입니다. 오늘 오전에 취임식을 치렀으니 이제 대통령이라 말해야겠지요.”
루즈벨트 암살 사건의 여파 파악.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미국 정계가 동향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고, 그걸 파악하기 위해서는 새 대통령의 정치적 스펙트럼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가너. 가너라.
정말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그 대역물에서 잠깐 언급된 것 같긴 한데 이것도 확실하진 않았다.
말인즉슨 내 미래지식을 사용하기엔 부적절하다는 뜻. 결국 외무부와 방첩부를 통해 이 시대에 걸맞는 정보를 확인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나는 가장 중요한 질문부터 던졌다.
“그의 정치적 성향은 어떻소?”
“당장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만, 민주당 소속이며 미국 남부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노이라트는 미국 전도를 펼치더니 그 중에서도 동남부 지역을 콕 집어 가리켰다.
딕시들의 집결지. 고립주의, 인종차별, 주권(州權)주의 등등 딱 봐도 국익에 별반 쓸모없는 사상들만 모아놓은 쓰레기 세력. 괜히 링컨이 이놈들을 줘팬 게 아니지.
원 역사에서는 루즈벨트가 무려 12년 동안 해먹으며 민주당에서 이 남부 세력을 완전히 물갈이해 버렸는데, 여기서는 어떨지 모르겠다.
가너가 남부의 지지를 받고 있다면 그에 걸맞는 정책들을 내놓아야 할 테니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아직 가너 행정부의 명단은 공개되지 않았고?”
“루즈벨트가 어느 정도 기틀을 잡아놓은 각료진이 존재하긴 하나, 결국 가너가 승인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인지라······.”
“가너의 정치적 입지가 그리 클 것 같진 않은데, 그냥 루즈벨트의 유산을 승계할 가능성은 없소?”
“비록 경선에서 지긴 했지만, 가너도 후버 행정부 시절 하원의장과 장관직을 지냈고 30년에는 민주당 원내대표까지 역임하며 커리어를 쌓은 인물입니다. 이제 대통령이 되었으니 수많은 권한까지 얻었겠지요.”
“자기가 원하는 정책 정도는 충분히 밀어붙일 수 있다는 거군. 그게 루즈벨트에게 정면으로 중지를 치켜드는 일이라도.”
“그렇습니다.”
노이라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냥 가너가 루즈벨트의 노선을 따르겠다 선언한다면 별일 없을 터였다. 이미 아는 역사가 그대로 흘러가겠지.
그런데 만약 그걸 죄다 걷어차 버린다면? 자기 권한을 최대한 활용해서 새 파벌을 끌어모으고 거기의 수장으로 군림하며, 자기가 원하는 정책들을 통과시키기 위해 온갖 협잡질을 벌인다면······.
애시당초 루즈벨트가 끌어모은 사람들은 루즈벨트 없이 모일 수 없는 세력이었다.
뉴딜 연합(New Deal coalition).
FDR이 결성한 거대한 정치세력. 기존 민주당이 가진 거의 모든 지지세력에 더해 대공황으로 인해 촉발된 새로운 집단까지 모조리 끌어안은 괴물.
이 세력의 구성원을 나열해보자면.
민주당 내 진보주의자들.
남부의 보수적인 백인 계층 - 일명 딕시크랫(Dixiecrat).
흑인과 유대인을 비롯한 미국 내 소수민족.
거대 노동조합으로 대표되는 미국 내 노동자 계층.
가톨릭교.
사회주의자 등등······.
이 정신나간 파벌은 정치계에서 어마어마한 반향을 불러왔다. 루즈벨트가 가진 진보적 성향에 반한 이들과, 미워도 민주당에 붙어있을 수밖에 없는 남부 딕시 보수주의자들의 결합.
뉴딜 연합은 기존 정치구도를 작살내고 승리를 거머쥐었으며, 루즈벨트는 너무나 쉽게 천조국 황상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과연 가너가 이걸 유지하려 들까? 아니, 그러려고 해도 이걸 유지할 역량이 될까?
딕시들은 끊임없이 루즈벨트의 진보 성향에 반감을 품었다. 민주당이라서 어쩔 수 없이 지지했을 뿐.
사회주의자들은 미국의 공산화,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보다 훨씬 더 진보된 정책들을 원했다.
소수민족들은 모든 민족에게 동등한 권리가 부여되길 바랐고, 그 기대를 가지고 뉴딜 연합에 합류했다. 노동자들은 뉴딜이 자기들의 삶을 조금 더 개선시켜 줄 거라 믿었다.
원하는 것들이 죄다 제각각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연합을 유지하려면 뉴딜 정책 외에도 본인의 정치역량이 어마어마하게 중요하다. 아침부터 밤까지 정치적 회동을 가져도 지치지 않는 정치괴물이 아니라면 누가 이딴 걸 유지하겠는가.
당장 사회주의자들은 가톨릭교도를 싫어했다. 왜? 자본론께서 말씀하시사 신은 없다고 했으니까.
딕시들은 진보정책에 반감을 품었다. 소수민족에게 권리 주는 건 더 싫어했다. 뉴딜 정책의 시장경제 개입은 더더욱 혐오했다. 그놈들은, 조금 과장하면 남북전쟁 이전 미국 각주가 따로 놀고 노예들이 목화밭에서 목화 따던 그 시절을 원했다.
노동조합은 뉴딜이 대공황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언제든 뛰쳐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민주당 내 진보주의자들은 딕시크랫 저 새끼들 어떻게 좀 해보라고 끊임없이 등을 떠밀어댔다.
요약하면, 결코 합쳐질 수 없는 물과 불의 결합. 루즈벨트야 여기 금이 갈 때마다 정치적 회유, 협박, 술수, 음모, 선동 등으로 어찌어찌 유지했다지만, 가너가 그럴 역량이 될까?
가너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고작 하원의장 좀 지내고 장관 좀 지낸 일개 정치인일 뿐이다. 그놈이 4선의 괴물 FDR이랑 비빌 수 있다고? 에반데. 많이 에반데.
결국, 답은 정해져 있었다.
“뉴딜연합은 붕괴하겠군.”
“저희도 그렇게 예상하고 있습니다.”
“가너가 누구 편을 들리라 생각하나?”
“남부의 편을 든다면 딕시크랫의 부활, 진보주의자들의 편을 들면 사회주의의 부활이겠지만······ 아직까지는 알려진 정보가 없습니다.”
“그렇겠지. 워싱턴 D.C.의 동향에 더더욱 집중하도록 하시오.”
루즈벨트가 죽은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외교부가 이 이상의 정보를 수집하기엔 정보력이 딸릴 터.
나는 다음에 따로 독대하자고 노이라트와 일정을 잡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밖으로 나가면서 비서를 불렀다.
“어디까지 진척됐지?”
“강령 자체는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그래? 내 방에 서류 올려두고, 보안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도록. 사민당 같은 놈들이 알게 되면 분명 우릴 방해하려 들 테니.”
비서가 물러나고, 나는 가방에 든 문서 한 장을 꺼내들었다.
[민족과 국가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한 법률].
한국어로 번역하면.
[수권법].
나치당의 독재 체제를 완성하기 위한 걸음. 완성을 위한 단 한 걸음이 눈앞에 있었다.
누가누가 더 빨리 죽나 대결이라도 하듯, 루즈벨트가 죽으니 바이마르 공화국도 자살을 향해 저돌맹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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