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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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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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6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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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29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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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격변의 시[검주]보답

DUMMY

당대를 이끌어갈 거라고 극찬 받았던 박투의 천재는 실 끊어진 연이 되어 훌훌 날아가다가 대리석 벽에 처박힌 뒤 그대로 널브러졌다. 단 한 번의 실수요 방심이라 참으로 억울하겠지만, 이곳은 찰나에 생사가 갈리는 전장이며 무사가 아닌 엽인 송광극의 사냥터였다. 그렇게 스러진 마환을 보며 광극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와는 한 번 정식으로 겨뤄보고 싶었단다. 이런 식으로 하기는 싫었지만, 내 사냥은 이제 시작되었구나.”


아마도 정식으로 손을 섞었다면 지금처럼 쉽게 무너뜨리진 못했으리라. 물론 검을 들었다면 일합이었겠지만 말이다.


‘몇 남지 않은 연을 내 손으로 끊어내다니.’ 힘없이 돌아서는 광극의 눈가로 주르륵 핏물이 흘러내린다.


타점을 흐리고 타격에 실린 힘을 온몸으로 분산시켰음에도 마환의 발차기에 실린 충격에 이마가 깨진 듯했다. 허무한 눈으로 손을 들어 핏물을 훔친 광극은 쓸쓸히 뇌까렸다.


“이 또한 내 업이겠지.”


시너를 죽이면서 격의 차이를 보여줬음에도 마환이 계승자를 보낸 후 홀로 맞선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자신을 향한 뒤틀린 애증과 호승심이 만든 덜 여문 판단, 반항심 따위였으리라. 평소였다면 과거 자신도 그랬기에 웃으며 받아주었겠지만, 언제나 현실은 참혹했다.


‘아직 끝나지도 않았고.’


피 묻은 손을 서글픈 눈으로 내려다보던 그는 전장의 메케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가 뱉어내며 사냥에 불필요한 감정을 털어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그는 마환이 준 이런저런 정보를 머릿속에서 배제한 뒤 자신이 겪은 단편적인 사실만 조합해갔다. 지금 당장에라도 제자의 원수를 쫓고 싶었지만, 마환이 했던 말 때문에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육림과 잘웨니.’ 생소한 이름이 아니었다.


이 세계에 속한 자들 중에서 저 이름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바알제불의 구울과 함께 수많은 엽인에게 절망을 가져다 준 자들이었다.


“마몬이 부활한 걸까? 아니면 그녀가..”


짐승의 왕에게 노여움을 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두 가주들 중 탐욕의 주인을 떠올려 본 광극은 마환이 했던 지옥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그 이름만으로도 이면을 떨어 울릴 자들이 바로 이 성스러운 장소에 도사리고 있었다.


'무덤은 무덤이구나.' 자칫 잘못 판단해서 제신이나 이스가리옷과 대면한다면 한 인간으로서 다짐한 복수는 물거품이 되리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술에 먹힌 인간을 압도하며 무적을 느꼈지만, 서글프게도 천적을 상대함에 있어서는 항상 부족했다. 그들은 지금도 포식자고 자신은 여전히 피식자였으니까. 그것도 빌어먹을 놈의 밤에 진혈을 무한히 쌓은 천적과 대면해야만 했다. 제자의 복수를 위해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육림과 잘웨니는 견묘지간이니 부딪힐 테고, 슈지의 이라면 당연히 돕겠지. 시너를 보니 이 교회는 이스가리옷의 둥지가 분명하고 제신은 그를 치려고 왔겠구나.’


뛰어난 사냥꾼일수록 탁월한 식견으로 사냥감의 움직임을 미리 짐작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 이상의 지성에 비교불가의 연륜까지 쌓아올린 포식자들의 사고를 읽고 행위를 엿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준비해 온 게 없으니 틈을 만들지도 못할 테고..’


그들은 인간이 오랜 시간 준비하고 고심한 계획을 손쉽게 부수고 비웃음을 흘리다가도 한낱 금수처럼 충동적으로 움직이다가 덫에 걸려 소멸하기도 했다. 그래서 당면한 사실만 보고 의문을 풀어가며 움직이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데 왜 이스가리옷은 불필요한 시너를.. 그것도 B급 이상을 저렇게 많이 만든 걸까?’


진혈을 이용한 각인의 술은 과거 그들이 인간의 전쟁에 신으로서 간섭할 때 사용하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인간을 상대할 때나 발현하지 포식자 간의 세력다툼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시너가 무서운 건 젠장 맞을 도덕심, 인류애 따위 때문이니까.’


물론 A급 시너라면 얘기가 또 달라지겠지만, 방금 자신이 해치운 시너는 잘해야 B급 정도에 불과했다. 진혈의 술로 활기를 극대화시킨 인간으로는 자신은커녕 마환도 막지 못했다.


‘제신 같은 거물과의 전투를 앞두고 왜 이스가리옷은 진혈을 의미없이 소모했을까?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시너들의 괴성이 점점 가까워져 오긴 했지만, 조정자를 둔 움직임은 아니었다. 해서 그는 이상할 정도로 적막한 지하홀을 쭉 둘러보다가 본당의 문이 눈에 들어오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환의 정보대로라면 저곳에 이스가리옷이 있을 텐데, 이런 소란 속에서도 움직이지를 않아?’


바로 코앞에서 벌어진 시끌벅적한 전투를 모를 리가 없을 터, 약 100여 명에 가까운 병력을 학살했음에도 그는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분명히 뭔가 있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의 답을 오랜 경험으로 빠르게 도출해가던 그는 불현듯 떠오른 정보와 여러 상황을 조합하다가 신음을 흘렸다.


“설마, 그럴 리가.. 하지만 그것 말고는 없어.”


그는 오늘 벌어진 기괴한 전장의 의미를 깨닫곤 멍하니 있다가 이내 분통을 터트렸다. 그리곤 허탈한 듯 웃음을 흘렸다.


“그래, 어차피 이런 거였지.” 다가올 미래를 엿보자 제자의 죽음이 더 덧없고 아프게 다가온다.


또한 거대한 수레바퀴 앞에 선 사마귀로서의 허허로움이 사지육신을 휘감아 모든 걸 무너트렸다. 그냥 이대로 스러지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일평생 바랐던 경지에 서서 한바탕 칼부림도 해봤으니, 그 우둔한 놈이 강을 잘 건넜는지 따라가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어.’


어차피 곧 수명이 다할 목숨, 당면한 상황마저 무의미해진 자는 그냥 이대로 삼도천에 발을 담그려 했다. 때마침 시너들이 1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타고 쏟아져 내려오지 않았다면 이만 손에서 끈을 놓았으리라. 우두커니 선 검사를 발견한 시너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른다.


“이단을 멸하라!” 광극은 이미 그들을 느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러고 보면 시너도 참 많이 죽였어. 그래, 야우가 시너들에게 찢겨 죽었었지? 그때 구하지 못한 게 한이었는데 이렇게 따라가게 생겼군.’


안쓰러울 정도로 그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몰려드는 광기에 몸을 맡기려 할 때, 기관단총의 요란한 총성이 광기와 이단자 사이에 섞여 들었다.


‘누구지?’


자연스럽게 의문을 품고 인기척을 따라 눈을 떠보니 익숙한 MP5 두 정을 양손에 나눠 든 채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사내가 보였다.


‘백인이었군.’


합일을 이루어 검무를 출 때 입구에 서서 자신을 관찰하던 그의 존재를 인지했었다. 하지만 워낙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고 기척을 애써 지우려고 해서 내버려 뒀다. 혹여 달려들어도 베면 그만이니까. 한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참전하기로 마음먹었나 보다.


‘나를 공격하지 않는 걸 보면 양대 세력에 속한 자는 아닐 테고, 딱히 낯이 익지 않은 게 세력의 무사도 아니야.’


그렇게 하릴없는 생각이나 할 때, 놀랍게도 자신과 비견할 만한 사격술로 총알을 낭비하지 않은 불청객이 대검을 꺼내 든 채 자신 앞에 섰다. 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 광극은 입을 열었다.


“나를 아시오?”


의외로 유창한 영어에 힐끔 시선을 돌린 불청객은 이내 수십의 시너를 마주하며 대답했다.


“모릅니다.”

“한데?”

“당신이 무슨 생각으로 죽음을 기도하는지 내가 간섭할 바는 아니지만, 보답은 해야 하니까.”

“보답?”


바로 답하지 않고 호흡을 가다듬은 불청객은 알 수 없는 말을 하곤 바닥을 박찼다.


“보고, 배웠으니까.”

“배웠다?”


광극은 기관단총을 쥐었을 때와는 판이해진 불청객이 벌이는 한바탕 살벌한 검무를 보며 탄성을 흘렸다.


“싸워서 익힌 살검이로다.”


불필요한 동작을 완벽히 배제한 채 더 효과적으로 적을 죽이기 위한 움직임들이 연계되며 사방으로 피를 뿌린다. 직선적인 공격에 실린 속도와 힘은 그마저도 감탄할 정도로 응축돼 있어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정녕, 오랜만에 보는 투사로구나.”


마환은커녕 계승자를 보고도 눈살을 찌푸리던 그의 눈빛에 기특함이, 입가에는 만족이 그려지다가 이윽고 웃음으로 터져 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기를 품었다가 이용하고 흘리는 경지라니, 저 살검을 내가 조금만 더 다듬어 주면..’


제자까지 잃어 세상을 포기하려 했던 스승은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혈전의 장으로 들어섰다.


‘뭐 어차피 할 일도 없고.’


시너를 처음 상대하는지 힘겨워 정신없이 칼춤을 추던 불청객은 뒤쪽에서 불쑥 나타난 기척에 놀라 다급히 돌아서며 대검을 쑤셔 넣었다. 한데, 익숙한 살인의 느낌이 아니라 팔이 턱 붙잡히더니 상대가 손에 든 대검을 앗아가는 게 아닌가?


‘빌어먹을!’


당황해 물러서며 적을 살피던 그는 지고한 경지로 하늘을 보여준 검사가 우두커니 서 있자 겨우 한숨 돌리며 손을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죽지 않는 놈들은 처음이라서 쉽게 적응이 되질 않는군요. 그 칼, 돌려주시겠습니까?”


작가의말

사내라면 보답을 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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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 대격변의 시[검주]흔적 +12 17.10.04 327 17 15쪽
261 대격변의 시[검주]검주vs제신 그리고 혼돈 17.10.04 287 11 14쪽
260 대격변의 시[검주]검주vs제신, 깨달음 +3 17.10.02 369 12 16쪽
259 대격변의 시[검주]검주vs제신 17.10.02 264 8 13쪽
258 대격변의 시[검주]엽인 +15 17.09.29 358 13 10쪽
257 대격변의 시[검주]찰나의 연, 사제 +2 17.09.29 291 11 10쪽
» 대격변의 시[검주]보답 17.09.29 235 10 10쪽
255 대격변의 시[검주]마환 vs 송광극 +9 17.09.29 320 15 16쪽
254 대격변의 시[검주]조우 +2 17.09.28 296 11 13쪽
253 대격변의 시[검주]무적{無敵} +8 17.09.27 322 8 13쪽
252 대격변의 시[전투]송광극 +10 17.09.26 236 11 12쪽
251 대격변의 시[전투]일보직전 17.09.26 728 10 13쪽
250 대격변의 시[전투]슈지, 마지막 도주로 +4 17.09.25 246 11 12쪽
249 대격변의 시[전투]진입 +6 17.09.24 246 12 13쪽
248 대격변의 시[전투]증명 +4 17.09.22 238 11 13쪽
247 대격변의 시[전투]의지 +2 17.09.22 220 8 13쪽
246 대격변의 시[전투]자각 +8 17.09.21 232 1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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