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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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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18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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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격변의 시[전투]남 vs 매

DUMMY

그때의 피맺힌 대화가 이제야 실감 나기 시작한다.


‘간을 버린 삶.’



그와 동시에 뒤틀린 현실을 되잡아서 나아갈 힘을 준 유일한 기둥이자 겨우 숨을 쉬고, 잠이 들고, 일어나서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준 지붕이 너무나도 그리워졌다.


‘스승님.’


잠깐이라도 보고 물을 수 있다면 명확한 답을 제시해주실 텐데, 지금으로선 그저 가르침을 떠올려 볼 뿐이었다.


‘우둔한 놈!’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진다.


‘타의에 휘둘린 채 은근히 강제된 삶을 살고, 주어진 극단적인 선택만을 해오다 보니 자존은커녕 인간으로서의 정체성마저도 정의할 수 없을 게다. 억울하고 원망스럽겠지. 하나 그 뒤틀린 현실 마저도 오롯이 네 책임이다.’

‘저는.. 거부했습니다.’

‘정녕 그랬느냐?’

‘저는..’

‘네가 여태껏 걸어온 길이 어떠하였든 진정으로 싫었다면, 정녕 거부하려 했다면 그저 한 발 옆으로 물러서기만 하면 됐다. 하나 물러선 곳이 절벽일지도 모르기에 너는 계속해서 걸어왔지 않느냐?’


당시 스승의 외눈에 어떤 아픔이 어렸었다.


‘그래, 이기적이게 들릴지 몰라도 이게 현실이구나. 그리고 너는 앞으로도 수많은 선택 앞에 서서 결정을 내려야 할 게다. 따르는 막중한 책임도 감내해야겠지.’

‘그러면 스승님, 만약에 제가 절벽으로 뛰어내리는 바보 같은 선택을 해도 혼내지 않으실 겁니까?’


정말 오랜만에 미소를 그린 광극은 적적한 밤하늘을 보며 말했다.


'내게 제자는 하나고,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았다.’


우둔한 제자는 당시 스승의 외눈에 서린 감정의 색깔을 이제야 깨달았음에, 애타게 그를 불렀다.


“스승님, 저는 또 선택하였습니다. 제가 옳은 일을 한 겁니까?”


대답이 들릴 리 없음에도 그는 확답을 얻었다. 손에서 미끄러진 베레타가 바닥에 부딪혀 둔탁한 울림을 뿌릴 때, 핏줄을 만나 송곳니를 감췄던 우 장검이 붉게 물든 검신을 드러냈다.


“나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혼란스러워 웅얼거리던 목소리가 하나의 신념을 담아 뚜렷해지자, 뼈에 새긴 원한이 되살아나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속삭여왔다. 이 저주받은 삶을 지탱해 온 사명을, 스승이 전해준 엽인의 의지를 오롯이 세우니 충혈된 외눈에 어린 광기가 자연스럽게 입으로 뱉어진다.


"남명진은 그때 죽었어."


한 가정의 아들이자 오빠였던 어느 사내의 죽음을 천명하는 순간, 가져야 할 이름이 떠올라 절로 이어졌다.


“부정..하라.” 이제 너는 일그러진 과거를 부정하라. 뒤틀린 현실 속 네 적을 부정하라. 곧 다가올 전장 위 내 적을 부정하라!


이는 혼돈이 새겨준 또 하나의 정체성 이었음에 핏줄을 향해 살의를 머금을 수 있게 하였다. 왼손으로 대검까지 뽑아서 늘어뜨린 명진이 걸음을 옮기자, 그의 변화를 감지한 명희는 식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오..빠.” 음울하게 그를 부르며 천천히 일어섰다.


한데 결심한 자와 달리 그녀의 눈에 어린 건 애절한 슬픔이요 아픔이었으니.. 명희는 간절한 목소리로 빌었다.


“그냥 떠나. 두 번 다시 돌아오지마.”


그녀는 오늘에서야 제대로 된 식을 행하고 기억을 되찾았다. 모든 상황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손에 들린 것이 시체고 입안을 맴돌아 목을 타고 넘어가는 달콤함의 정체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역함이나 거부감 따위를 느끼진 않았다.

배고픈 아이가 어미의 젖을 먹는데 무슨 죄책감을 느끼겠는가?

그날 가족이 죽어가던 모습도 뜨문뜨문 떠올랐지만, 역시나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그리고 이성과 본능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같은 목소리를 내며 주인의 명을 알렸다.


‘식욕을 충족하라. 각성해 적을 멸하라. 이는 나의 권능이 되었음이니 받들어 행하라.'


백여 구가 넘는 인간을 먹었을 때쯤 육체는 각성했지만, 본능을 억제 할만한 자제력이나 명석한 사고 등을 갖추지는 못했다. 간혹 느껴지는 단편적 감정들, 지독한 슬픔과 자살충동 등이 느껴져서 멈칫했지만 무엇보다 주인의 명령, 식욕의 충족이 먼저였고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배..고파.”


피와 인육을 입에 넣기만 하면 그저 모든 게 평온해졌다. 그래서 도망간 먹잇감을 쫓았는데, 핏줄을 보고 말았다.


'오빠?'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심장박동을 느끼는 순간 놀랍게도 본능을 통제할 수 있어 움직임을 멈췄다.


당연히 죽었다 여긴 혈육을 보니 그저 죽고 싶었다. 왜냐고? 그래야만 내 핏줄이, 다행히도 살아남은 가족이 안전할 테니까.


'오빠를 해칠 수는 없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힘들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오빠는 여태껏 본 인간 중 가장 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을 죽이기에도 충분할 만큼 말이다. 그래서 식을 행했다. 내 추악한 모습을 보면 결단을 내리리라.


‘오빠, 나는 이걸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그렇게 마음먹었는데, 너와 난 그때 죽었다라는 목소리를 듣자 모든 게 달라졌다. 남명희로서의 사고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죽었다고? 그러면 지금의 난 뭐야?’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디자인이 되어있었다는 듯, 자살충동을 이끌었던 이성은 눈처럼 녹아내렸다. 다시 주인의 명이 들려와 머릿속을 휘젓는다.


‘받들어 행하라.’


그래도 오빠를 해칠 수는 없었기에 허겁지겁 인육의 찌꺼기를 훑었다. 너무 달콤해서 더 역겨울 때 오빠는 검을 뽑았고 자신을 향해 진득한 살기까지 풍기며 다가왔다.


'안..돼.'


본능은 당장에라도 손톱을 뽑아 맞서라고 했지만, 아직 손끝에 그의 심장박동이 남아있었기에 억지로 외면했다. 해서 떠나라고 말한 뒤 식에 집중했다. 그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구울의 감각은 새로운 먹잇감이자 적의 움직임을 세밀히 관찰해 알려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외면할 때,


“남명희, 너는 그때 죽었어.” 서글픈 목소리가 다시 들려와 돌이킬 수 없는 선고를 내리고 경계를 그었다.


마지막 인성의 조각이 부서지며 그녀의 얼굴에 한줄기 혈루를 그리게 하였다. 하나 그래도 내 오빠라, 하나 남은 핏줄이라서 마지막으로 경고하려고 했지만, 명진은 말없이 고개를 저어 천륜을 부정했다. 한 명의 엽인으로서 바닥을 박찼다.


“그러지 마. 오빠.. 오빠, 하지 마!”


명희의 비명 같은 외침이 짐승의 포효로 화해 교회를 떨어 울릴 때, 쇄도해간 엽인의 우 장검이 벌떡 일어서는 구울의 머리를 향해 종으로 휘둘러졌다. 구울은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허리를 틀어 검을 피했고, 엽인은 기다렸다는 듯 적의 심장을 향해 대검을 쑤셔 넣었다. 순식간에 파고든 검날이 적의 피부를 베고 근육을 갈랐지만, 힘이 부족해 뼈까지 뚫지는 못했다. 그저 빨리 끝내고 싶다는 마음가짐 따위로 어찌 적을 죽일 수 있으랴?


‘좆 같은..’


생각지 못한 데미지에 분노한 구울이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후려쳐오자 그는 미련 없이 대검을 포기하고 왼팔을 접어 귀 옆에 붙인 채 이를 악물었다.


‘물러서면 안 돼, 여기에서 끝내야 해!’


구울의 주먹이 팔을 강타하자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몸 전체가 마비됐다. 귀에다 대고 범종이라도 친 것처럼 웅웅대며 머릿속이 진동했지만,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그들의 압도적인 육체능력을 정면으로 맞서지 말라던 스승의 가르침이 뼛속 깊숙이 새겨진다.


‘아직은 괜찮아.’ 풀린 허벅지에 힘을 주고 억지로 허리를 들어 균형을 잡았다.


그새 감각이 돌아온 오른손이 검을 놓치지는 않았다고 전해주는 순간 그는, “움직여!” 외마디 기합을 지르며 우 장검을 휘둘렀다. 쇄도해간 검날이 적의 왼쪽 허리에 박히자 양손으로 검병을 잡고 허리를 틀며 무게를 실었다.


‘제발, 제발 이대로 끝내자.’


하지만 순식간에 강화된 구울의 근육이 검신에 실린 힘을 웃돌았음에, 장검은 근육조차 가르지 못하고 옅은 상처만 남겼다.


‘빌어먹을!’


상대는 호리호리하고 전체적으로 말라서 가냘프게 보였지만, 어찌됐든 이스가리옷의 구울이었다. 마치 갑옷처럼 기형적으로 발달한 근육은 인간의 것과 질적으로 달라서 얕게 파고든 검신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또한 그로부터 뿜어져 나온 힘과 속도는 인간의 것과 차원을 달리했다.


‘당한다.’


순식간에 코앞으로 폭사해온 주먹을 간신히 허리 젖혀 피하자 풍압에 짓눌린 코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일순 현기증까지 일어 비틀거리던 엽인은 무기가 없는 상태에서의 육박전은 자살행위라는 것을 깨닫곤 우 장검도 포기한 채 정신없이 물러났다. 하지만 분노한 구울이 이대로 그를 보내줄 리 만무했다.


“죽어!"


가슴과 옆구리에 어설프게 꽂힌 검을 신경질적으로 뽑아 던진 구울은 압도적인 속도로 적에게 따라붙어 길게 뽑아낸 손톱을 휘둘렀다. 무기와 균형을 모두 잃은 상태라 피하거나 맞설 방법이 없어 눈앞이 깜깜해질 때 자연스럽게 스승의 목소리가 스친다.


‘박투, 치고 받는 건 불가능하다. 기를 품지 않으면 연이어 피하는 것조차 몸이 따라가지를 못할 게다.’

‘어찌해야 합니까?’

‘살을 주고 뼈를 취해라. 혹여 그마저 힘들다면 가진바 모든 걸 쏟아부은 뒤에 엽인답게 죽어라.’


가르침을 떠올리니 하나의 길이 보였고, 재미있게도 죽음을 결심하니 공격의 궤도가 눈에 들어왔다.


'할 수 있다.'


그는 오히려 한 걸음 불쑥 나아가며 오른팔을 접어 휘둘렀고 타격점에 이르려던 구울의 팔목을 정확히 타격했다. 공격에 실린 힘의 대부분을 위로 틀었음에도 팔꿈치가 통째로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다.


‘한 번 더!’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구울에게 붙다시피 접근했다. 피와 오물에 절은 지독한 악취가 코를 찌를 때 그의 왼손은 등 뒤의 세 번째 검을 붙잡았다.


‘명희야, 이제 끝내자.’


그는 숱하게 익혀온 대로 검병에 새겨진 문양을 조작하고 이를 악물었지만, 끝끝내 뽑지 못하고 절망을 뱉었다. 구울과 눈이 마주치는 그 찰나 간에 눈앞에 선 저 괴물이 친동생이라는 걸 절감한 것이다. 역한 피비린내 속에서 어머니가 즐겨 썼던 섬유 유연제의 향기가 흘러와 코끝을 맴돈다. 아마도 착각이겠지.


“빌어먹을.”


그는 발악하듯 왼팔을 뻗어 손바닥으로 구울의 턱을 가격했지만, 그냥 바위를 때린 것 같았다. 해서 눈살을 찌푸릴 때, 쾅! 팔꿈치에 맞아 궤도가 틀어졌던 구울의 손이 여지없이 그를 강타했다. 차에 치인 것처럼 날아가서 바닥을 나뒹굴던 명진은 숨을 쉴 수가 없어 캑캑대다가 겨우 숨통이 트이자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명희야.’


그나마 다행인건 자신이 세 번째 검을 쓰지 못한 것처럼 동생 역시 손톱을 집어넣었다는 건데, 그 애달픈 남매의 정이 이 뒤틀린 상황을 돌이킬 수는 없어 보였다.


‘그냥 끝내야 해.’ 붉게 물든 채 서 있는 핏줄을 보며 그는 다시금 결심을 굳혔다.


동생을 저 끔찍한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리라. 하지만 어찌한단 말인가? 세 번째 검을 쓰지 못한 건 동생의 향기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이제 어쩌지? 잠깐만..’ 번뜩 든 생각에 절로 고개가 움직인다. ‘그라면..’


그의 외눈에 비친 터프가이는 명희를 처리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스승과 섬뜩할 정도로 비슷한 향기를 풍겼기에 동생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하려면 내가 해야지.’


작가의말

시련의 아이콘, 남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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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대격변의 시[검주]검주vs제신, 깨달음 +3 17.10.02 368 12 16쪽
259 대격변의 시[검주]검주vs제신 17.10.02 263 8 13쪽
258 대격변의 시[검주]엽인 +15 17.09.29 356 13 10쪽
257 대격변의 시[검주]찰나의 연, 사제 +2 17.09.29 289 11 10쪽
256 대격변의 시[검주]보답 17.09.29 233 10 10쪽
255 대격변의 시[검주]마환 vs 송광극 +9 17.09.29 318 15 16쪽
254 대격변의 시[검주]조우 +2 17.09.28 294 11 13쪽
253 대격변의 시[검주]무적{無敵} +8 17.09.27 320 8 13쪽
252 대격변의 시[전투]송광극 +10 17.09.26 235 11 12쪽
251 대격변의 시[전투]일보직전 17.09.26 727 10 13쪽
250 대격변의 시[전투]슈지, 마지막 도주로 +4 17.09.25 245 11 12쪽
249 대격변의 시[전투]진입 +6 17.09.24 245 12 13쪽
248 대격변의 시[전투]증명 +4 17.09.22 236 11 13쪽
247 대격변의 시[전투]의지 +2 17.09.22 219 8 13쪽
246 대격변의 시[전투]자각 +8 17.09.21 231 10 14쪽
245 대격변의 시[전투]필연 +8 17.09.20 283 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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