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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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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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29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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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격변의 시[검주]찰나의 연, 사제

DUMMY

불청객이 그답지 않게 변명하며 쓴웃음을 흘리자, 역시나 답지 않은 미소로 화답한 검주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생뚱맞은 말을 했다.


“여태껏 얼마나 생각없이 죽였으면 적이 다른 걸 알면서도 몸에 익은 검을 떨치지 못하느냐?”

“예? 무슨 말씀을..”

“우둔한 놈이 이렇게 짧은 대검을 들었다면 팔을 부러뜨렸겠지만, 선을 넘어 자격을 갖춘 자가 꼭두각시 짓이나 하고 있으니 답답하구나.”

“저기, 무슨 말씀이신지..”

“그저 보거라. 내 어찌 해야할지 보여주마.”


당최 모를 눈빛의 검사를 가만히 바라보던 불청객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하시려는지 잘 알겠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습니다.”


불청객은 존경의 염이 들기까지 하는 검사의 행동이 뜻하는 바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또한 미숙한 후임에게 선임이 이런저런 가르침을 주고 챙기는 것에 이렇다 할 거부감도 없었고. 전쟁터 한 중간에서도 가르치고 배우는 게 군인이지 않던가?


‘하나 지금은 놈들이.. 어, 그러고보니 공격이..?’


그제야 놀라서 둘러보니 급소를 꿰뚫리고 목이 반쯤 잘린 상태에서도 아귀처럼 달려들던 좀비들이 자신의 대척점에 우르르 모여 있을 뿐, 둘러싸지도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어차피 답은 하나뿐이라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길 때, 홀로 한 걸음 디딘 검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승자에 이르는 재를 타고 났으나 사제의 연이 없어 세월에 그를 묵혔음이 안타깝구나. 이미 바랜 건 어쩔 수 없다 하여도 가르쳐 깨우면 대도로 족히 이끌 텐데.. 서글프게도 내게 남은 시간이 없다.”

“사제의..연?” 과거, 쓴웃음으로 묻었던 단어를 되뇐 불청객의 눈빛에 어떤 한이 어린다.


벽에 막히고 선에 걸릴 때마다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쳤다. 그렇다고 해서 기연 같은 걸 바라기는커녕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저 나아갈 방향만, 걸어야 할 길이라도 누군가 보여주길 그토록 바랐지만 눈 떠 세상을 인지하였을 때처럼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부모도 없는 놈이 스승은 무슨..’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연이 닿아 배움을 청한단 말인가? ‘그도 시간이 없다고 한 걸 보면, 그딴 건 내게..’


불청객의 얼굴에 이전의 그 쓴웃음이 걸릴 때, 등을 보인 채 무리의 앞에 선 검주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와 그의 뇌리로 파고들었다.


“일생을 두고 보면 찰나에 불과할 연이 오늘에서야 이어진 것 또한 내 길에 놓인 숙명일 터. 네가 지금 보고 있을 높다란 벽은 사유와 지각의 영역이니, 그저 빠짐없이 담거라. 혹여 사제의 연이 아니라면 허무한 춤사위고 칼부림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재미는 있을 게다.”


일면식도 없는 자가 일평생 갈구해왔던 일을, 그것도 전장 위에서 논하는 걸 듣게 된 불청객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다스리려 이를 악물었다.


‘정말로 가르침을 주시려는 겁니까?’


차마 뱉지 못한 물음에 화답하듯 대검을 한 번 휘돌려 잡은 검주가 시너 무리를 내리눌렀던 기를 회수했다. 그러자 곧바로 이단과 분노가 지하홀을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한다.


“주의 뜻!”


다시 굶주린 아귀가 되어 바닥을 박찬 시너들이 사방에서 몰려드는 것을 본 불청객의 눈빛에 다시 의문이 어린다.


‘좀 전에도 그렇고.. 왜 그에게만 몰리는 걸까?’


마치 자신의 존재가 지워진 것처럼 행동하는 무리를 보니 괜히 더 섬뜩해서 소름이 돋을 때, 요란한 악다구니를 뚫고 탁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적의 공격을 피하려고 기를 품은 게냐?”

“기?”


자신도 모르게 되뇌는 순간 무리와 검주가 격돌했다. 한데 그는 손을 쓰지 않고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피하기만 했다. 이미 합을 맞춘 듯 슬쩍슬쩍 움직이면서 그들의 우악스러운 손길과 발길질을 모조리 다 회피하는 것을 본 불청객은 섬에서부터 느낀 감각을 떠올렸다.


‘역시 그에게도 저 감각이.. 설마 저게 기였다고?’


그냥 헛소리로 치부하였던 단어를 되새길 때, 분노한 시너들이 뛰어오르고, 밑으로 기고, 온몸으로 돌진하며 그를 포위한 채 달려들었다.


‘저건 피하지 못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나서며 주먹을 움켜쥘 때,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의 것을 느끼듯 내게도 기가 있어 둘을 부딪쳐 흐르게 하면 육신도 따라 흐른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재빨리 문장을 되뇔 때 놀랍게도 검주가 한줄기 물이 되어 흐르고 또 흘러서 자신의 옆에 서는 게 아닌가? 경악해 두 눈을 부릅뜬 불청객의 동공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검주가 숨결 하나 거칠어지지 않은 어조로 물었다.


“아예 기본이 없어 말을 섞어야겠구나. 너는 네 것을 느꼈느냐?”

“예?”


멍하니 되묻는 객에게 주가 호통을 쳤다.


“시간이 없다 하지 않았느냐!”


한데 단순히 고함만 지른 게 아니었다. 기라고 하였던 감각이 공격을 감지했는데, 특정 방향이 아니라 사위를 짓누르는 거대한 힘을 알려오고 있었다. 피하기는커녕 팔다리가 붙들리고 숨통이 막혀온다.


‘이 무슨..’


이어서 첨예한 살기까지 뻗어와 목을 훑고 심장을 꿰뚫자 소스라치게 놀란 그는 본능적으로 몸부림쳤다. 하나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꿈쩍할 수가 없어 두 눈만 부릅뜰 때, 언젠가부터 초인적인 움직임을 가능하게 해줬던 열기가 압도적인 위력에 항거하며 외쳤다.


‘그 망할 놈의 틀을 부수고 인지 해!’


단련된 근육과 신경의 움직임 정도라고 여긴 미약한 기운은 놀랍게도 그의 의지에 따라서 숨통을 트이게 하고 짧게나마 반격을 도모할 만한 힘까지 선사했다.


‘이 힘만 있다면!’


어느새 사지육신을 휘돌기 시작한 열기를 따라서 움직이려는 순간,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여전한 쇳소리가 들려온다.


“술과 법은 세상의 법칙을 뒤틀어 열고 강제해 깨뜨린다. 하지만 네가 느낀 기운은 그 모든 걸 멸한 뒤 다시 채워서 본래의 상태로 흐르게 한다. 이는 곧 대 포식자 무기가 오롯이 하나라는 말이기도 하다.”

“대 포식자?”

“그래, 네가 선 곳은 이면이다.”

“이..면.”


이미 다프네에게 들어서 알게 된 단어를 떠올리자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뇌리를 스친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전설을 품고 있어 헛웃음을 흘리게 하였던 초인, 그를 지칭하는 다양한 닉네임 중 가슴을 설레게 했던 단어 하나가 자연스럽게 뱉어졌다.


“검..주, 당신이 검주 송광극입니까? 혼자서 그 괴물.. 브루트강의 뿔을 잘랐다던..”


아련한 미소를 입가에 띤 검주는 다시 짓눌려 움직이지 못하는 무리를 향해 시선을 옮기며 말을 돌렸다.


“인간을 상대로 네 살검은 거의 무적일 게다. 정제된 힘으로 짧게 급소만 치고 빠지면서 힘을 비축하는 데다가 실전에서 익힌 다양한 스킬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하니 숫자에 관계없이 할 만 했겠지. 하나 이 전장은 다르다. 그딴 식으로 꼴사납게 버둥거리면 민폐만 될 뿐이다.”


얼굴을 붉힌 불청객은 아프가니스탄에서부터 낙원,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도주하며 만났던 몇몇 포식자와 추종자를 떠올렸다.


‘놈들에게 진 건 둘째치고 단 한 번도 치명타를 주지 못했어.’


그들이 생포 명령을 받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으리라. 아니,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이 오늘 구울과의 일전만 해도 어떤가? 조장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다리를 절뚝이고 있었겠지.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검주의 말이 이어진다.


“내가 너의 검을 알려주면 배우겠느냐?”


배움이라는 단어 자체가 낯설어 망설이던 불청객은 그의 외눈을 마주한 채 몇 번이고 심호흡하다가 동방의 예법을 따라서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언급하신 찰나의 연, 새기고 또 새기겠습니다. 부디 제게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나이가 차서 굳고 또 바랬지만, 세상에 둘도 없을 원석인 제자를 흐뭇하게 본 스승은 길가에 널린 자갈이라 더 마음을 아프게 하였던 놈을 떠올리며 물었다.


“부를 이름은 가졌느냐?”

“그게.. 저는 학살 1조의 선임요원인 도살자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먼저 부대를 언급하지 않고, 어설프게나마 상대가 입에 담으면 죽여서라도 신분을 숨겼던 도살자가 가감없이 정체를 밝히자 검주의 눈빛에 묘한 감정이 어린다.


“학살 1조의 도살자?”


이런 전장에서야 섬뜩한 단어들이었지만, 평상시 들으면 조금 유치할지도 모르는 단어를 되뇌이던 검주는, “그분과의 연이 결국 이어지는구나.”라고 중얼댄 뒤 물음을 달리했다.


“부모에게 받은 이름은 없더냐?”

“저는 고아입니다. 민간인들과 생활할 때는 그냥 제임···”


말끝을 흐리며 잠시 고민하던 제자는 이내 스승의 외눈을 마주보며 당당히 말했다.


“저는 도살자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그래, 알겠다. 전장에 다 흘리고 코드네임만 남았나 보구나.”

“코드네임을 아십니까? 그러면 부대도..”

“모를 이유가 없지, 모를 이유가..”


탄식하듯 뱉어낸 숨결이 하얗게 얼어 흩어지는 찰나 간 그의 외눈에 어린 장면과 모습들이 점점이 흩어진다. 아마도 많은 사연이 있겠지만 그의 말대로,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그냥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지난 과거일 뿐이었다.


“도살자.”


스승이 부르자 난생 처음 제대로 된 선생을 만난 제자가 넙죽 답한다.


“예, 스승님.”


작가의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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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 대격변의 시[전투]시너 vs 남명진 +2 17.10.13 392 1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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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 대격변의 시[전투]사제의 연. +2 17.10.11 290 9 11쪽
264 대격변의 시[전투]제신 +7 17.10.10 306 14 14쪽
263 대격변의 시[전투]우물 밖 +2 17.10.10 245 10 15쪽
262 대격변의 시[검주]흔적 +12 17.10.04 326 17 15쪽
261 대격변의 시[검주]검주vs제신 그리고 혼돈 17.10.04 285 11 14쪽
260 대격변의 시[검주]검주vs제신, 깨달음 +3 17.10.02 368 12 16쪽
259 대격변의 시[검주]검주vs제신 17.10.02 263 8 13쪽
258 대격변의 시[검주]엽인 +15 17.09.29 356 13 10쪽
» 대격변의 시[검주]찰나의 연, 사제 +2 17.09.29 290 11 10쪽
256 대격변의 시[검주]보답 17.09.29 233 10 10쪽
255 대격변의 시[검주]마환 vs 송광극 +9 17.09.29 318 15 16쪽
254 대격변의 시[검주]조우 +2 17.09.28 295 11 13쪽
253 대격변의 시[검주]무적{無敵} +8 17.09.27 320 8 13쪽
252 대격변의 시[전투]송광극 +10 17.09.26 235 11 12쪽
251 대격변의 시[전투]일보직전 17.09.26 727 10 13쪽
250 대격변의 시[전투]슈지, 마지막 도주로 +4 17.09.25 245 11 12쪽
249 대격변의 시[전투]진입 +6 17.09.24 245 12 13쪽
248 대격변의 시[전투]증명 +4 17.09.22 236 11 13쪽
247 대격변의 시[전투]의지 +2 17.09.22 219 8 13쪽
246 대격변의 시[전투]자각 +8 17.09.21 231 1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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