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면수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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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사가미프
작품등록일 :
2012.05.30 23:59
최근연재일 :
2012.05.30 23:59
연재수 :
5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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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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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07,496

작성
12.04.05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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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7.

DUMMY

“야, 씻어.”

눈을 뜬다. 홀딱 벗고 있는 키티가 보인다.

“뜨거운 물도 나오네.”

머리도 박박 밀었고 수염도 없다. 저 식칼 하나로 전부 해결한 건가.

부엌으로 가 과도를 뽑아들고 욕실 앞에서 옷을 벗어 던진다. 굳게 닫힌 문을 연다. 먼저 자리 잡고 있던 희뿌연 김이, 내가 들어가자 뿔뿔이 흩어지더니, 거울 앞에 멈춰 서자 빈자리로 찾아든다. 수도꼭지를 틀어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로 거울에 서려 있는 겁없는 김을 죽여버린다. 수염이 제법 자란 내 얼굴이 거울 속에 나타난다. 그러고 보니 키티가 나를 죽이겠다고 한 날이 석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샤워기를 머리 위에 댄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이 눈앞을 가려,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볼 수 없다.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는다. 뜨뜻한 물의 온기가 온몸을 휘감아오자 절로 오줌이 나온다. 나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누가 좀 가르쳐주면 좋겠다. 제발 나 좀 살려주면 좋겠다.

손바닥 위에 비누를 얹은 채 문질러 거품을 낸 후 얼굴에 문지른다. 가지고 들어온 과도에 물을 묻히고 얼굴에 가져다 댄다. 빛을 반사하는 칼날을 보자 조금 겁이 난다. 키티 따라 하려다 피를 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조심스럽게 칼을 내리긋는다. 이런 건 백 번 조심해도 모자라다.

거칠거칠한 턱을 만지며 욕실 밖으로 나가서 옷을 주워입는다. 내가 앉아 있던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키티가 일어서며 뒤돌아본다.

“야, 여기사는 건 어때?”

으쓱한다. 독재자에게 내 말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여기가 더 좋지 않나?”

으쓱한다. 잠깐 정적이 흐르고, 불안한 마음이 들어 한마디 던진다.

“미미 씨는?”

“안 오잖아.”

“기다려야지. 그래야 서울로 돌아가지.”

키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온다. 키티를 본다. 왠지 모르게 불안하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채 한 발 뒤로 물러선다. 내가 비켜난 자리에 그가 주먹을 들이민다.

“자, 가위바위보.”

엉겁결에 가위를 낸다. 키티는 보자기다. 내가 이겼다.

“내가 졌으니까 며칠 여기서 살게.”

“무슨 소리야?”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본다.

“내가 이겼으니까 내 마음대로, 아냐?”

“아니, 지는 사람이 여기 살기였어.”

“씨발, 이게 무슨 경우…….”

멱살이 잡힌다. 몸이 끌려간다. 주먹이 얼굴로 날아든다. 강렬한 세 번의 번뜩임이 나를 찾아온다. 어금니에 찍혔는지 볼 안쪽에서 피가 새어 나온다. 정말 더러워서.

“내가 먼저 살고 네가 뒤에 와서 살면 되잖아.”

입을 꾹 다물고 끄덕인다. 찬성할 수밖에 없는 내가 한스럽다.

“가는 길, 알지?”

으쓱한다.

“왔던 길로 돌아가면 돼.”

욕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는다.

이 저녁에 그것도 혼자, 저 산을 기어 올라가라고? 씨발 개 같은.

현관으로 걸어간다.

“씨발.”

“뭐?”

귀도 밝다. 나쁜 새끼.

문을 발로 찬다.

“이 새끼가.”

재빨리 밖으로 튀어 나간다. 기다렸다는 듯 칼바람이 나를 찔러댄다. 춥다. 수염을 깎고 나니 더 추운 것 같다. 분하고, 억울하고, 너무 춥다. 돌아서 서 있는 힘껏 문을 걷어찬다.

“씨발.”

길게 한이 서린 목소리로 고함지른다. 맥없는 메아리가 욕을 한다. 메아리조차 내 편은 아닌가 보다. 씨발.

산 정상을 올려다본다. 때려죽인다 해도 저기를 올라갈 수는 없다. 허벅지의 근육도 맞장구치듯 부르르 떨린다. 마을로 향하는 길을 따라 내려간다. 조금 걷자 다리가 욱신거린다. 절반쯤 내려가다 멈춰 선다. 아아, 돌겠다. 물이 안 나와서 여기까지 온 건데. 다시 돌아간다.


다행히 후환은 없다. 키티는 자신이 남게 된 데 썩 만족스러웠는지 더 필요한 게 없는지 물어온다.

“약쟁이 만나면 어떻게 해?”

“올 때도 안 만났잖아. 갈 때도 안 만나겠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심리학이라도 공부할 걸 그랬나 보다. 또 속은 건지, 아니면 진실을 말하는데 내 머리에서 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지 모르겠다.

물을 가득 담은 커다란 솥을 들고 다시 길을 따라 내려간다. 모든 길은 통하게 마련이다. 길을 잃기라도 한다면 파출소라도 가야지 어쩌겠어. 게다가 대충 산 반대편이니 저 산만, 저 봉우리만 기억하고 있으면 되지 않겠어?

굳게 먹었던 마음도 마을을 눈앞에 두니 흐물흐물 녹아 버린다. 약쟁이. 씨발. 몰랐으면 모르지만 일단 그 존재를 알고 난 이상 겁이 난다.

속에 있는 게 보인다고 했나? 어떻게 보일는지 모르겠다. 피라미드 벽화처럼 이차원적으로 보이려나? 아니면 영화에 나오는 늑대 인간처럼 보이려나? 내 꿈처럼, 그냥 짐승 그대로 보이려나?

차마 마을로 다가가지 못하고 논두렁길, 밭머릿길을 따라 하염없이 걷는다. 한참을 걷자 팔이 빠질 것 같다. 두 손으로 물이 가득 찬 솥 -십 키로는 족히 넘을 것 같다.- 을 들고 험악한 바람에 싸대기를 맞아 가며.

돌겠다. 너무 빡세다. 낮에 내가 좀 혹사당했던가. 정말 힘들어 미칠 것 같다. 목적지라도 보이면 그나마 덜하겠지만 -눈앞에 목적지가 있다고 해도 날도 저물어버린 이토록 캄캄한 밤에 하우스를 알아볼 수 있는 시력을 컴퓨터가 남겨뒀는지도 의문이다.- 도저히 못 걷겠다. 물통을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아 호호 입김을 분다. 키티 말대로 산꼭대기로 올라갔으면, 얼어 죽어 몇 달 뒤 시체로 발견될 것 같다. 어쩌다 내 신세가 이렇게 돼버렸을까. 너무 싫다. 제자리에서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해보고 기지개도 켜본다. 소매를 끌어내려 손을 감싸고 솥을 든다.

그래, 가자.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잖아. 살아야지. 암, 살아야지.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그로부터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나는 하우스를 찾아내고 만다. 운이 좋았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겠다. 아니한가지 경우가 더 있구나. 하느님이 보우하사……. 내가 무사한지 모르겠다. 일단 자고 일어나봐야 알겠다.

하우스 안으로 기다시피 들어가 TV를 켜본다. 제대로 된 화면이 안 나온다. 몇 번 때려도 그대로인 걸 보니 TV의 장난은 아닌 듯하다. 정규 방송 시간이 끝났나? 그대로 드러눕는다. TV 끌 힘도 없다.


온몸이 욱신거린다. 어제 종일 굶어서 그런 지배도 너무 고프다. 떠들어대는 TV를 무시하고 기어가 냄비에 물을 붓는다. 내가 이 물을 위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대충이라도 짐작한다면, 이라면은 맛있게 끓여져야 한다. 나는 버너 위의 냄비를 노려보며 침을 삼킨다.


TV와 전기난로, 라면과 함께 사흘을 보냈다. 물론 씻지는 않았다. 저 물이 어떤 물인데 고작 씻는 데 쓴단 말인가.

21일이다. 어젯밤 하늘을 봤는데 보름달 같았다. 하지만 꿈을 꾸지는 않았다. 나는 이미 사람이 아니게 된 건가. 개 소리다. 아마 보름달이 아니었겠지. 오늘이나 내일쯤이 진짜 보름달이 뜨는 날일 것이다. 걱정된다. 걱정한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거나 하지도 않지만.

냄비에 물을 받아 버너 위에 올린다. 솥에 있는 물이 바닥을 보인다. 슬프다. 아직도 수도꼭지는 얼어 있다. 다시 그리 가야 한단 말인가. 그냥 근처에서 나무뿌리라도 캐 먹으며 살까. 키티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행복할까. 거기 식량은 있었던가. 모르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버티다가 굶어 죽을지도. 한편으로는 멧돼지라도 잡아먹으며 잘살고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물이 끓기 시작하고 몸을 일으켜 세우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린다. 화들짝 놀라며 그곳을 본다.

젠장. 궁금한 건 궁금한 거고 싫은 건 싫은 거다.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시뻘건 괴물체를 들고 있는 키티가 시야 한가운데 서서 히죽 웃고 있다. 말없이 고개를 돌리고 스프와 면을 냄비 속에 넣는다. 키티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시뻘건 그것을 냄비 속에 넣어버린다.

맙소사. 맙소사.

입이 벌어진다.

“괜찮아. 내장도 다 뺏고 머리도 잘랐어.”

머리를 잘랐다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밖에서 손질 다 하고 왔다니까.”

여전히 그를 본다.

“못 봤어? 가죽도 다 벗겼어.”

침묵.

“이렇게 한번 먹어보고 싶었어. 맛있을 거 같지 않냐?”

이미 들어갔는데 어쩌겠나. 끄덕여준다.

“뭔데.”

“토끼.”

멧돼지가 아니고 토끼였구나. 토끼는 겨울잠도 안 자는 건가.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국물을 본다. 그 속에 토끼라고 불렸던 고깃덩이도 본다. 다 불어터진 면도 보인다. 키티를 본다. 쩝쩝대며 잘도 먹는다.

“맛있어?”

그가 끄덕인다.

“무슨 맛인데?”

“라면 맛.”

냄비를 한참 동안 들여다본다. 도무지 식욕이 돋질 않는다.

“먹기 싫냐? 내가 먹어?”

고개를 젓고 냄비 속의 고깃덩이를 젓가락으로 쿡 찔러 본다.

이건 대체 뭘까. 토끼가 맞긴 한 걸까.

건져 올린 고깃덩이의 귀퉁이를 잡고 북 찢는다. 숨을 멈추고 입에 집어넣는다.

이걸 무슨 맛이라고 해야 하나. 라면 맛. 라면 맛 토끼.

국물을 마셔 본다. 절로 토악질이 나온다. 느끼해서 못 먹겠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친다. 내가 이 물을 어떻게 가지고 왔는데.

“여긴 왜 왔어?”

“왜, 오면 안 돼?”

“아니, 그건 아니고.”

“보름이잖아. 너 지켜주러 왔지.”

퍽 잘도 지켜주겠다. 갈비뼈나 부러지지 말든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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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1 하야공주
    작성일
    12.04.05 07:46
    No. 1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Gellita
    작성일
    12.06.06 18:15
    No. 2

    으앜ㅋㅋㅋㅋ 맨날 원훈이 불쌍해서리 ㅋㅋㅋㅋㅋㅋ 왜 저러고 살아야돼... 으어... 진짜 불쌍하다...
    키티는 우기기의 대가네요 ㅋㅋㅋㅋ 아니 애초에 거기로 간다고 했으면 됐을 텐데 미미 기다린다고 거길 또 돌아가.. ㅠㅠ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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