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면수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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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사가미프
작품등록일 :
2012.05.30 23:59
최근연재일 :
2012.05.30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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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03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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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7.

DUMMY

나는 감금당해 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먹고, 자고, 싸고, 고뇌하고, 명상하는 것밖에 없다. 거기다 맹수 같은 놈과 온종일 같이 있어야 한다. 말도 함부로 못한다. 이 정도까지 몰아붙여 지면, 아무리 고독에 적응되어 있는(혼자 놀기라고도 한다.) 나라도 뭔가를 갈구하게 된다.

나는 간절하게 뭔가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 그것을 만났다. 바로 TV라는 물건이었다. 어릴 때부터 TV와는 그다지 친했던 적이 없어서 그랬는지, TV는 나를 썩 내켜 하진 않는 눈치였다. 키티가 쓰다듬으면 잘 나오던 화면도, 내가 건드리기만 하면 일렁거리는 화면을 내보냈고, 키티가 한번 때려주면 청량한 소리를 내뱉던 그놈은, 내가 때리면 비웃기라도 하듯 더 크게 으르렁거렸다. TV는 나를 싫어하는 게 분명했다.

시간의 흐름 속에는 아주 기특한 부분이 있어서,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아니라면, 싫어하는 사이라도 미운 정이라고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물약을 한 방울씩 똑똑 떨어뜨려 준다. 나와 TV도 그 세례를 받으며 제법 친해졌다. 일렁이는 화면을 내보낼 때는 옆구리를, 괴팍한 소리를 낼 때는 뒤통수를 때리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여기 있는 TV라는 놈에게 내 전부를 주진 못했다. 이놈은 채널도 고작해야 열세 개뿐인데다 화면이 나오는 방송이라고는 세 개뿐이었으니(게다가 화면은 어찌나 작은지 14인치도 안 되어 보였다.), 집에 있는 TV를 그리워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마치 아무 생각 없이 결혼하고 나서 보니 아 그때 그 사람이 사랑이었구나 하며 그리워하는 상황과 퍽 닮았다고 할 수 있겠다.


TV는 매일 아침마다 시간과 날짜 요일을 가르쳐 준다. 컴퓨터에서는 찾아봐야 했던 것을 강제로 주입해준다. 삼 년 삼 개월가량, 아니 그 몇 달 전부터 나와 멀어졌던 시간이, 다시 나를 찾아오게 되었다. 그 시간이라는 것도 어디 쓸 데가 있어야 이게 멋지다 또는 흉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서는 그냥 육십을 세면 가장 뒤의 숫자가 바뀌는 묘하게 생긴 글씨일 뿐이다.

TV 속에서 펄쩍펄쩍 뒤며 재롱을 부리는 가수들을 노려보다가 키티에게 눈을 돌린다. 그는 잘도 잔다. 키티에게서 빼앗아오고 싶은 것 한 가지를 골라 보라면,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용기도 아니고, 나를 단번에 죽일 수 있는 힘도 아니다. 바로 눈만 감으면 씩씩대며 자 버릴 수 있는, 그놈의 잠귀신을 빼앗아오고 싶다.

배 위에 손을 얹어 본다. 오늘은 일어나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배가 고플 때도 됐는데, 아무런 신호를 보내오지 않는다. 배도 나만큼 무기력증에 빠져 있나 보다. 고개를 돌려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하얀 골판지 박스들을 본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가 생각난다. 이제 겨우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주 옛날이야기 같다.


첫날, 입구로 들어선 나는 왼편에 쌓여 있는 수십 개의 라면 박스를 보았다. 일단 눈에 보이면 자세히 보고 싶어지고, 그다음에는 만져보고 싶어지고, 만져보고 안전하다는 게 판단되면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라, 나도 박스들에 접근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구석에 새겨진 유통기한이 가리키고 있는 날짜가 지금으로부터 무려 삼 년이나 흘렀다는 것을. 이 라면들은 보통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야, 이거 유통기한 삼 년이나 지났는데?”

“유통 안 하면 상관없어. 싫으면 먹지 말고.”


내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보면 키티의 말이 맞았던 것 같다. 유통 안 하면 상관없다는 진리.

박스로 다가가 라면을 하나 꺼낸다. 버너를 세팅하고 냄비를 들고 신발장 바로 옆에 있는 수도꼭지를 돌린다. 젠장. 물이 나오지 않는다. 여전히 자는 키티에게 다가가 옆에 쪼그려 앉고 어깨를 툭툭 건드린다.

“뭐야?”

“물이 안 나오는데.”

“왜?”

“몰라.”

“물 가지고 뭐하게?”

들고 있는 냄비를 보여준다.

“라면 먹으려고.”

“아, 짜증 나네.”

짜증 나긴 나도 마찬가지다.

키티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일어선다. 나도 따라 일어선다. 그가 걸어가 창문을 열어본다. 찬바람이 물밀 듯이 밀려든다.

“얼었나 보네.”

“얼어?”

“어, 춥잖아.”

“아, 그럼 어쩌는데? 라면도 못 먹고.”

키티가 생각에 잠긴다. 더 말 시켜봐야 나에게 돌아오는 건 주먹질 또는 신경질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 기다린다.

“나가자.”

“나가, 어딜?”

“밖에.”

“약쟁이들 돌아다닐지도 모른다며.”

“그러니까 나랑 가지.”

“어디 가는데?”

“씻으러.”

“씻어, 어디서?”

그가 씩 웃는다.

“따라와 봐, 좋은데 있어.”

“좋은데?”

그의 인내심이 폭발했고 나는 한 대 얻어맞았다. 키티를 따라 밖으로 나간다. 그러고 보니 그의 머리카락과 수염은 잔뜩 자라서 엉켜 있다. 키티는 대머리가 아니었다. 나처럼 얼굴에 물도 대지 않고 있다 보니 수염도 머리카락도 무럭무럭 잘도 자라났다. 험악했던 인상이 약간 누그러져 보이는 건 익숙해져서일까, 머리카락이 자라서일까.


며칠 전 내렸던 눈은 거의 다 녹아 흔적만을 조금 남기고 있다. 춥다. 엄청나게 춥다. 걸치고 있는 것도 그리 두껍지 않은 트레이닝복 달랑 하나뿐이라 더 춥다. 집에서 나올 때 무슨 생각으로 파카도 걸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귀찮음이라는 놈은 시도때도없이 사람의 발목을 잡아끈다.

“오늘이 며칠이지?”

키티가 느릿느릿 산을 오르며 물어온다.

“십오 일쯤 됐나, 왜?”

“보름이 언젠가 싶어서.”

“보름은 왜?”

“너 또 발광하잖아.”

“미미 씨는 왜 안 와? 한주마다 와서 물건 준다며.”

“믿었냐?”

“그럼 어쩌지?”

“어쩌긴, 그냥 알아서 해야지. 안 되겠으면 그냥 산에다 풀어놔도 되겠네.”

이런 산속에 풀어놔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사람도 보이지 않고.

“어디로 가?”

그가 산꼭대기를 가리킨다.

“저쪽.”

나와 키티 두 마리의 짐승은 눈이 다 녹지 않은 산을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십 분쯤 올랐을까. 헉헉거리며 휘청거리는 나와는 달리 키티는 마치 여기가 자신의 주 무대라도 되는 듯 날렵하게 산을 타고 있다.

“야, 좀 천천히.”

돌아보는 키티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하다.

“이 새끼 이거는 할 줄 아는 게 없네. 힘이 없으면 운동을 하던지.”

“너도 운동 안 하잖아.”

“너하고 나하고 같냐?”

“그래 너 고양이지.”

“너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새끼잖아.”

“그런가.”

“씨발 나 같은 사람 만난 걸 좆나게 운 좋았다고 생각해. 다른 놈한테 걸렸으면 바로 죽었을 새끼가.”

할 말이 없다.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허리는 굽혀지고 덥수룩이 자란 수염 끝에는 땀방울이 맺혀 떨어진다. 목이 타기 시작한다.

“야 아직 멀었어?”

“거의 다 와 가.”

“얼마나 가야 돼?”

“온 만큼만 더 가면 돼.”

돌아버리겠다. 돌아내려 가자니 한숨이 나오고, 올라가자니 더 막막하다. 쉬다 보면 얼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오고, 이대로 걷자니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다. 나는 딜레마에 빠져버렸다. 무지막지하게 심각한.

“빨리 안 와?”

순식간에 멀리 걸어가 버린 키티가 되돌아보며 소리친다.

진퇴양난, 사면초가, 고립무원. 또 뭐가 있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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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10. 12.04.27 274 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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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10. 12.04.23 259 2 9쪽
39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10. +3 12.04.21 240 2 10쪽
38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9. +2 12.04.17 265 3 12쪽
37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9. +2 12.04.15 246 3 13쪽
36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9. +2 12.04.13 264 5 9쪽
35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8. +3 12.04.12 324 2 9쪽
34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8. +3 12.04.11 309 4 9쪽
33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8. +5 12.04.10 293 4 9쪽
32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8. +1 12.04.09 287 3 9쪽
31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8. +3 12.04.07 376 7 7쪽
30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7. +2 12.04.06 289 4 9쪽
29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7. +2 12.04.05 427 4 10쪽
28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7. +1 12.04.04 358 5 9쪽
»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7. +3 12.04.03 492 6 8쪽
26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7. +1 12.04.02 485 7 8쪽
25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6. +1 12.03.23 515 5 11쪽
24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6. +2 12.03.22 433 6 9쪽
23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6. +3 12.03.21 355 7 9쪽
22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6. +1 12.03.20 424 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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