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10.
재수가 좋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경우가 있다.
복권에 당첨되었다거나, 사 놨던 주식의 가격이 수직으로 상승해서 돈벼락을 맞았거나 하는 그런 천운을 말하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은 이미 준비되어 있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애수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절망하고 분노하다가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로 옆에 해결책이 떡하니 놓여있는 그런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사흘 동안 화살을 네 대나 맞고, 새로 산 노트북은 곧바로 잃어버리고, 몸도 마음도 갈기갈기 찢어진 채 이곳에 도착했다. 이곳이 제법 경치가 좋은 곳이라는 것도, 방도 몇 개나 있어 프라이버시가 보장된다는 것도, 거실이 넓어 TV 감상할 때 키티에게 치이지 않는다는 것도, 따뜻한 물도, 풍족한 먹을거리도, 그 어떤 것도 상처입은 나를 치유해 주진 못했다.
하지만 키티가 먼저 거실과 가장 가까운 방을 선택하고, 남은 방을 둘러보다 덩그러니 놓여있는 컴퓨터를 발견하고 나서는(연식이 제법 된 컴퓨터라 아주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귀신같이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게 재수가 좋은 게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지난 사흘 동안 각종게시판과 신문기사들만 아무 생각 없이 넘겨대기만 했다. 잃어버린 지난 한 달의 시간을 보충이라도 하려는 듯이. 그동안 게임은 손도 대지 않았다.
나는 착각하고 있었나 보다. 내가 게임에 중독되어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컴퓨터에, 인터넷에 중독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와 이 세상을 연결해주는 하나밖에 없는 끈이라 그런지도. 아니, 끈이라기보다 세상을 비춰주는 창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일방적으로 내가 그 속을 들여다보기만 할 뿐이니.
주민등록번호를 적어 넣고, 이름도 적어 넣는다. 또 별명이 문제다. 고민하고 고민한다.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다. 뜻 없는 알파벳 몇 자를 적어넣는다. 사용할 수 있는 별명이라고 한다. 허무하다. 뭐 이딴 걸로 고민하고 있었나 싶다.
문이 벌컥 열린다. 고개를 돌린다. 키티가 멀뚱히 나를 보고 있다.
“또 컴퓨터 하냐?”
한심하다는 투로 들리는 건 자격지심 때문일까.
“아, 어.”
“라면?”
“어, 먹어.”
그의 모습이 사라진다. 시선을 모니터로 옮긴다. 회원 가입 완료를 누르고 바로 글쓰기를 누른다.
- 나다. 이 미친 새끼들아. 할 거 없으면 태안에 가서 기름이나 좀 치워주던지, 엊그제 대통령 취임식 했다는데 편지라도 써서 취직 좀 시켜 달라고 구걸이라도 하든지 하지. 새끼들이 밥 먹고 할 짓이 없으니까, 어떤 새끼는 내가 원양 어선에 팔려갔다고 하고, 어떤 새끼는 내가 자살했다고 하고, 어떤 새끼는 내가 군대 끌려갔다고 하고. 지금 뭐하는 짓들이냐? 이 씨발놈들아. 나 라면 먹고 와서 보자.
확인 버튼을 누르고 거실로 나간다. 어떤 리플들이 달려 있을지 기대된다.
“그래, 그쪽에는 말해봤어?”
키티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린다. 전화 중인가 보다. 소파로 걸어가 앉는다.
“뭐라고 해? 어, 그래. 잘됐네. 그럼 두 배로 받을 수도 있겠네. 조건은 뭐 없어? 공짜는 아닐 거 아냐?”
두 배로 받는다고? 조건이 뭐냐고? 뭘 받는다는 건지, 무슨 음모를 꾸미는 건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음,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그쪽에서야 뭐 돈 아니면 받을 게 없잖아. 일단 만나기 전까지는 계속 알아봐. 어떻게 해야 하는지만 알면 헛돈도 안 쓰고 좋잖아. 그래, 어디 그게 일이천도 아니고.”
잠시 후 키티가 양손에 주방 장갑을 낀 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냄비를 앞세워 나타난다. 훅 끼쳐오는 라면 냄새에 내장이 일제히 꿈틀댄다.
“어, 너 여기 언제부터 있었어?”
“조금 전에 나왔어.”
“이 새끼 통화 엿들었지.”
“엿듣고 말고 할 게 어딨어. 다 들리던데.”
키티가 앉은뱅이 테이블 위에 냄비를 내려놓더니 나를 본다.
“먹자.”
키티가 끓인 라면은 맛있다. 라면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먹어보면 대체 뭘 넣은 거지? 하게 된다.
라면을 흡입하고 설거지를 한 후방으로 돌아간다.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본다. 새로 고침을 누른다. 리플이 세 개 달려 있다.
- 뭐냐, 넌?
- 관심병자네.
- 먹이를 주지 마시오.
새 글을 쓴다.
- 이 새끼들아, 니들이 장례식까지 한 바운스클로가 나다, 등신 새끼들. 내가 지금 들어가서 다 쳐죽여 줄 테니까 기다려라.
막상 그렇게 적긴 했는데, 이 컴퓨터에는 기본적인 것 말고는 깔린 게 없다. 공식 홈페이지로 들어가 게임을 설치한다. 손가락 끝으로 무릎을 톡톡 두드린다.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본다. 멀뚱히 혼자 서 있는 나무 너머로 새파란 하늘이 보인다.
문득 내가 뭐 하고 있는 지,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지, 불안한 마음이 든다. 헛웃음이 나온다. 바보가 된 기분이다. 아니 원래 바보였는데 이제야 깨달은 건가.
설치 취소를 누른다.
- 정말 취소하시겠습니까?
마우스 포인터를 빙글빙글 돌리다 아니오를 누른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던가. 나는 삼 개월 뒤 죽더라도 게임을 하겠다. 게임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답답해져 온다. 게임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고 할 것도 없다. 왜 이제야 느끼는 건지 모르겠다. 시한부 인생 삼 개월, 대학 중퇴자, 할 줄 아는 건 게임뿐.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 동굴에 갇힌 기분이다.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 진짜가 나타났다.
- 뭐가?
- 여기 진짜가 나타났다고.
- 여기는 가짜가 나타났다, 인마.
- 아니 여기 바운스클로.
- 뭐?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새빨간 글들이 모니터 위를 빠르게 지나간다. 여기저기서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 하며 외쳐대며 캐릭터들이 몰려든다. 길드원의 인사는 그들의 외침 속에 속절없이 사그라진다. 내 캐릭터를 도시 구석으로 이동시킨다. 떼인 돈 받으러 몰려드는 빚쟁이들 같다. 형광등 빛을 본 한여름의 모기처럼 새까맣게 몰려오는 이 꼬맹이들. 이놈들은 대체 어디까지 따라오려는 거지?
- 꺼져 새끼들아.
기도 차지 않는다. 꺼지란 말이 언제부터 웃으라는 말이 된 건지 곳곳에서 ㅋㅋㅋ, ㅎㅎㅎ, 하고 있다. 꼬맹이들은 계속 몰려들어 이젠 렉 때문에 캐릭터를 움직이기도 어려울 정도다. 빌어먹을 똥컴.
-꺼지라고 더러운 새끼들아.
-ㅋㅋㅋ.
-ㅎㅎㅎ.
길드 창을 열어 누가 접속해 있는지 본다. 스파가 있다.
- 야, 나 다른 캐릭 하나 만들어올 테니까 길드 초대 좀.
- 네, 진짜 형이세요?
- 그럼 나지, 누구겠냐. 혹시나 말고 다른 사람이 접속한 적 있냐?
- 아니요. 그냥 물어본 거예요. 그럼 접해서 귓주세요.
- ㅇㅇ.
대충 정리하자면 이렇지만, 날 따라다니는 놈들의 채팅과 따라오지 못한 놈들의 귓속말, 그리고 렉때문에 발생하는 버벅임에 정말 힘든 상황이었다.
접속을 종료하고 새 캐릭터를 만든다. 무슨 이런 경우가 있는지 모르겠다. 게임을 현실 세계로 치자면 나는 유아, 아니 청소년 연쇄살인마쯤 되겠다. 한참 사냥하며 레벨을 높이려는 캐릭터들 뒤로 은신상태로 접근해 죽이는 것이 내 취미이자 특기였으니. 종종 나에게 귓속말로 욕을 해대는 경우는 있어도, 수십 명이 나를 따라다니는 경우는 처음이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뜻 없는 알파벳조합으로 캐릭터를 만들어 접속한 후 스파에게 길드 초대해 달라고 귓속말을 한다. 금세 초대가 오고 수락을 누른다.
- 와 진짜 이거 다 뭐냐?
- 한 달 전에 형 장례식 했는데요.
- 그래, 그건 예전에 글 봐서 알아. 누가 나 죽었다고 했잖아.
- 네, 보셨나 봐요.
- 누가 그랬는지 아냐?
- 모르겠어요.
답이 나오는 게 좀 늦다. 딴 일을 하며 키보드를 누른다거나, 한 번 썼던 대답을 지우고 새 대답을 쓴단 소리데.
- 누가 그랬냐?
- ……모르는데요.
- 아니, 너 알 거야 누가 그랬어?
- ……k모씨가.
- k모씨면 기호겠네. 왜 그랬데?
- 그냥 장난이었다던데요.
- 아 씨발, 이거 아무것도 못하겠던데.
- 시간 좀 지나면 조용해지겠죠.
- 한 달 지났다며.
- 죽었다고 장례식 한 사람이 보이니까, 반가워서 그런 거 아닐까요?
- 아, 돌겠네, 진짜.
하릴없이 마우스를 꾹꾹 누르다 보니 절로 레벨이 올라간다.
- 야.
귓속말이 온다. 나와 아이디가 비슷하다. 의미 모를 알파벳조합. 그 알파벳이 다짜고짜 반말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 ㅇㅇ?
- 야.
- 누구?
- 백정.
- 오랜만이네. 이 캐릭은 어떻게 알았냐?
- 스파가 가르쳐 주던데. 너 때문에 나 칼춤백정 못하잖아.
- 왜?
- 그거 접속만 하면 애들이 죽여서.
- 널 왜?
- 전에 네가 내 아이디로 글 썼잖아.
- 아, ㅋㅋ. 사칭했다고?
- 뭐해?
- 뭐하긴 사냥하지.
- 어디야?
- 어스름 둥지.
- 아니 진짜로 어디냐고.
- 여기?
- 어.
- 왜 오게?
- 내가 거기 가서 뭐하게.
- 그럼 왜 물어.
- 궁금하니까 묻지. 어디야?
- 여기 강릉 근천데.
- 강릉?
- 어.
- 강릉 어디?
- 잘 모르겠는데. 너 의사라는 사람 알아?
- 어, 알지.
- 그 사람 친구 별장이라는데.
- 그래?
마지막 어라는 글은 입력되지 않는다. 상대방이 접속을 종료했다는 메시지만 화면 구석에 뜬다.
인터넷이 끊겼나.
- 작가의말
이렇게 해도 재미가 없는 것 같고, 저렇게 해도 재미가 없는 것 같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다 지우고 다시 썼는데도 똑같고, 정말 돌아버리겠네요. 줄거리 자체를 뜯어고쳐 볼까 싶다가도 그렇게 되면 뒤에 어떻게 될지 겁이 나고, 슬럼프에 빠졌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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