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면수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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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사가미프
작품등록일 :
2012.05.30 23:59
최근연재일 :
2012.05.30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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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06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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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7.

DUMMY

한순간에 시야가 밝아진다. 꿈이다. 빌어먹을 꿈이 시작됐나 보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나는 지금 달빛을 벗 삼아 산을 오르고 있다. 도시에 있을 때는 미처 몰랐지만, 보름달은 컴컴한 한밤중에도 주위 사물을 또렷이 분간할 수 있게 해줄 만큼 밝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다. 마른풀 냄새, 눅눅한 흙냄새, 청량한 바람냄새, 은은한 나무냄새. 산의 냄새들이 고스란히 콧속으로 스며든다. 썩어가는 낙엽의 비린내까지도 그저 좋기만 하다.

아늑하다. 평온하다. 예전과는 달리 감당하기 어려운 분노는 느껴지지 않는다. 왜일까? 다른 짐승의 불쾌한 냄새가 나지 않아서일까, 눈을 어지럽히는 휘영청 한 불빛들이 보이지 않아서일까? 모르겠다.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다. 지금은 그저 짐승 안에서 온몸으로 자연을 느끼는데 만족할 뿐이다. 이 얼마나 괜찮은가. 춥지도 덥지도 않고, 전혀 힘들지도 않고, 내가 신경 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온갖 감각들은 모조리 느낄 수 있으니. 마치 고급 승용차 뒷좌석에 비스듬히 앉아 느긋하게 창밖의 경치를 감상하고 있는 것 같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자식이 자꾸 고개를 숙여 냄새를 맡아대는 통에 보고 싶지도 않은 땅바닥이 계속해서 보인다는 것이다.

이대로 밤이 계속됐으면 한다. 이런 기분이 얼마 만에 나를 찾아온 걸까.


어느새 정상에 다다랐다. 그 고생을 하며 이곳을 오른 지 불과 한 주도 지나지 않아 다시 이곳을 찾게 될 줄은 몰랐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유쾌할 뿐이다. 천천히 고개가 돌아간다. 기이하게 포개져 있는 몇 개의 바위가 보이고, 능선을 타고 길게 늘어진 산성도 보인다. 그리고 북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하나의 냄새가 나를 찾아온다. 냄새와 함께 나를 찾아온 감정은 설렘이다. 무엇의 냄새인지는 전혀 모르겠다. 어디선가 맡아 본 것 같으면서도, 아주 생경하기도 하다.

일단 냄새의 진원지로 가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할 무렵, 곰은 이미 달려가고 있다. 바위를 타오르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스치며 달려간다. 냄새는 사그라졌다가도 이내 강하게 풍겨오기도 한다. 한마디로 종잡을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꾸물댔다가는 놓쳐버릴지도 모른다.

가파른 비탈을 구르듯이 내려가고, 얕은 길 개울을 훌쩍 뛰어넘으며 달린다. 점차 가까워가고 있음을 느낀다. 조만간 확인할 수 있을 테지. 냄새의 주인을. 혹시 암곰은 아닐까 생각해보다 혼자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나는 사람인데…….

속도가 줄어든다. 눈앞의 저 고개만 넘으면 보일 것이다. 냄새의 근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층 짙어진 향으로 알 수 있다. 절대로 곰과 교미하는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 덜컥 멈춰 선다. 냄새 속에 뭔가 다른 것이 섞여 있다. 뇌 한쪽 구석에서 급박한 위험신호를 보내온다. 젠장. 진짜 곰인가 보다. 내 이성은 안된다고 하는데도 곰은 몸을 웅크린 채 계속해서 냄새를 향해 움직인다. 짐승 새끼 안 된다고! 가지 마……. 발정기인가.


핑.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고막을 두들긴다. 오른쪽 어깨가 후끈 달아오른다. 그곳에는 화살이 깊게 박혀 있다.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맞은편에서 꿈틀대는 형체가 달빛을 받고 고스란히 드러난다.

핑. 오른쪽 허벅지에도 나무장식을 하나 달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별 고통은 없지만, 그래도 이건 위험하다. 사냥꾼인가 보다.

짧은 시간 고민한다. 도망칠 것인가, 반격할 것인가. 도망친다면 추격당할 것이고, 반격한다면 둘 중 하나는 죽어서 이산을 나가겠지. 도망치기로 한다. 나는 나를 믿는다. 곰을 믿는다. 그 속도를 믿는다.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을 것 같았으면 며칠 전에 얼어 죽었을 것이다.

곰이 자세를 더 낮추더니 달리기 시작한다.

이봐. 이봐. 그쪽이 아니라고!

곰은 나와 반대의 생각을 했나 보다. 사냥꾼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핑핑 소리가 몇 번 연속해서 들린다. 달빛을 반사하며 은빛 꼬챙이가 머리 옆을 스쳐 지나간다. 얼마 남지 않았다.

젠장. 죽일 것 같으면 빨리 죽여버리라고. 머리 한가운데 화살을 박고 죽어버리기 전에.

사냥꾼이 뒤돌아서서 반대편으로 달려간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도망치려나 보다. 잘됐다. 이로써 내가 죽을 경우의 수는 사라졌다. 나는 사냥꾼을 이미 용서해 줬지만, 곰은 계속해서 그를 쫓아간다. 많이 놀라고, 많이 분했나 보다.

어쩌겠나. 전부 다 당신이 잘못한 건데. 그러게 멀쩡한 사람한테 함부로 그런 걸 쏘면 안 되지.

그때 왼편에서 무서운 냄새가 나를 덮쳐온다. 달려가는 와중에 곰도 그쪽을 본다.

뻑. 퍼런 뭔가가 옆구리를 들이받는다. 그대로 옆으로 날아간다. 반대편에 서 있던 굵은 소나무에 부딪혀 허리가 꺾인다. 꿈을 속에서 고통을 느끼긴 처음이다. 엄청나게 아프다. 나를 들이받은 뭔가를 노려보며 일어선다.

맙소사. 잔뜩 수그리고 있는 놈은 이미터는 족히 될 것 같다. 푸르스름한 가죽 위에 표범처럼 검은 점이 듬성듬성 박혀 있다. 눈에서는 시퍼런 불꽃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젠장. 도망쳐야지, 뭐 하고 있어. 미련 곰탱이 새끼.

놈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온다.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다. 간격이 좁아진다. 십여 미터는 될 법했던 간격이 오 미터, 사 미터…….

달빛을 받아 완전히 드러난 그 짐승은. 맙소사!

푸르스름한 그것은 털이 아니고 비늘이다. 놈은 온통 번들번들한 비늘로 뒤덮여 있다. 비늘이라면 물고기나 파충류한테 있는 게 아닌가. 이놈은 절대 도마뱀이나 물고기같이 생기지 않았다. 그냥 고양잇과 동물 같아 보일 뿐이다.

그런데 저건 또 뭔가. 머리 한가운데 삐죽 솟아 있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을 본다. 뿔인가. 뿔은 단단한 걸 말하는 게 아닌가. 저 흐물흐물한 게 뿔은 아닐 테고 대체 뭐지.

놈과 나 사이의 거리가 삼 미터 정도 될까. 놈이 덜컥 멈춰 선다. 입을 벌리고 울어 재낀다.

멍. 멍멍. 쇠망치로 머리통을 한 대 맞은 듯 멍해진다. 이건 개 소리 아닌가.

놈의 머리 위에서 흐물거리던 기운이 한데 뭉쳐지며 짙은 색을 띠어가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진짜 뿔처럼 딱딱해지려나 보다.

드디어 나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돌아선다. 달린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무턱대고 달린다. 뒤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빌어먹을. 저놈은 대체 뭐란 말인가. 개 소리는 빠르게 가까워진다.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달린다. 정말 돌아가시겠다.

살얼음이 낀 개울에 발을 딛자 얼음이 폭삭 주저앉아 버린다. 밖으로 드러난 나무뿌리가 손과 발을 잡아끈다. 제법 달린 것 같은데 도산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밤도 끝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놈들이 작당하고 나를 죽일 생각인가 보다.

아무래도 오늘 죽게 되나 보다. 죽는다는 생각이 들자 제일 먼저 키티가 떠오른다.

날 지켜준다고 했잖아. 지금 어딨는 거야.

비탈길 아래로 미끄럼타듯 쭉 미끄러져 내리다가 커다란 돌부리에 걸려 멈춘다. 개 짖는 소리는 비탈 위에서 들려온다. 일어나며 뒤돌아본다. 놈은 내가 내려온 언덕 위에 늠름하게 서서 날 내려다보고 있다.

아, 돌겠다. 저놈은 사냥꾼이 데리고 다니는 놈인가? 대체 저놈을 뭐라고 부르는 걸까? 사냥꾼은 지금 어디 있을까?

다시 몸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언덕을 마저 내려가 다시 뒤돌아본다. 개 소리를 내는 짐승은 여전히 그곳을 지키고 서서 뒤돌아보고 있다. 무시당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내 속의 곰은 그런 것 상관없이 고개를 돌리고 산속을 질주한다.


나는 살아야 한다. 지금 나를 조종하고 있는 곰도 마찬가지 생각을 하고 있겠지. 개 소리는 더 들리지 않는다. 쫓아오기를 그만뒀나 보다. 나는 살 수 있다. 곧바로 나무를 타고 올라간다. 거의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본다.

돌겠다. 정말 환장하겠다. 씨발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산봉우리도 내가 아는 그것이 아니다.

나무를 내려간다. 정처 없이 걷는다.


시야가 흐릿해진다. 곧 어둠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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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12. 12.05.13 255 1 9쪽
47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12. 12.05.09 206 1 8쪽
46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12. +1 12.05.07 209 1 8쪽
45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11. +2 12.05.05 221 8 9쪽
44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11. +2 12.05.02 241 1 9쪽
43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11. 12.04.30 207 2 10쪽
42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10. 12.04.27 274 3 9쪽
41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10. 12.04.25 209 2 8쪽
40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10. 12.04.23 259 2 9쪽
39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10. +3 12.04.21 241 2 10쪽
38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9. +2 12.04.17 266 3 12쪽
37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9. +2 12.04.15 247 3 13쪽
36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9. +2 12.04.13 264 5 9쪽
35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8. +3 12.04.12 325 2 9쪽
34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8. +3 12.04.11 309 4 9쪽
33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8. +5 12.04.10 293 4 9쪽
32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8. +1 12.04.09 289 3 9쪽
31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8. +3 12.04.07 377 7 7쪽
»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7. +2 12.04.06 290 4 9쪽
29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7. +2 12.04.05 427 4 10쪽
28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7. +1 12.04.04 359 5 9쪽
27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7. +3 12.04.03 492 6 8쪽
26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7. +1 12.04.02 485 7 8쪽
25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6. +1 12.03.23 515 5 11쪽
24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6. +2 12.03.22 433 6 9쪽
23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6. +3 12.03.21 355 7 9쪽
22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6. +1 12.03.20 424 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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