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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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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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21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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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DUMMY

자신의 뒤를 따르는 시종조차도 따돌린 채, 에드리안은 하염없이 궁정을 걷고 있었다. 아랫사람들에게조차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해주기로 유명한 에드리안이었으나, 어째서인지 오늘은 급한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마주치는 시녀들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으며 하염없이 걸었다.


그에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굳이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 에드리안’이 아닌가? 틀림없이 안 좋은 일이 생겼거나, 몸이 좋지 않은 것이리라. 그럼에도 그들은 조금 미묘한 감정으로 에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타인에게 무관심할 때면, 어쩜 저렇게도 제 아버지인 그라니언을 꼭 빼닮았는지.


늙은 귀족들의 말에 의하면, 에드리안의 외모는 그라니언과 빼다 박았다고 했는데, 분위기가 너무나도 달라 모두들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에드리안은 정말로 그라니언을 닮아있었다.


“리안!”


이상한 분위기에 휩싸인 궁정의 복도에 해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동시에 목소리의 주인공은 멍하게 걷기만 하던 에드리안에게 달려와 어깨동무를 한다. 눈에 띄게 놀란 에드리안이 그 주인공을 바라보고는 힘이 빠진 웃음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클랜디스. 엄청 놀랬잖아.”


“놀래라고 한 건데?”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클랜디스에 에드리안은 한숨을 내쉰 뒤 주변을 둘러본다. 그리고는 조금 놀란 듯 중얼거린다.


“내가 언제 여기까지 왔지?”


“아까부터. 사실 뒤를 밟고 있었거든. 너 시녀들의 인사를 모조리 무시한 건 알고 있어? 네 평판이 좋아서 그런지 다들 걱정하더라.”


클랜디스가 에드리안의 붉은 머리칼을 한바탕 휘젓기라도 하려는 듯 헝클어뜨렸다. 그에 에드리안은 눈을 깜빡이다가 머리칼을 정리하며 입을 연다.


“내가 그랬어?”


“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오랜만에 궁정에 왔더니 네가 요즘 정신 놓고 다닌다는 소리가 꽤 들려? 설마하니 지난번에 널 괴롭혔다던 그 자식들 때문?”


“그럴 리가. 그 후로는 내 앞에 얼씬도 하지 않는걸.”


“하긴, 각하에게 된통 당했다는 소리는 들었다. 덕분에 네 꼴이 좀 우스워지긴 했다만, 더 이상 널 괴롭히지 않는다니 다행이지.”


클랜디스의 말대로 에드리안의 꼴이 우스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약간의 괴롭힘으로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는 도련님이 되어버렸으니까. 물론, 고자질한 적은 없었고, 다른 이들도 잘 아는 사실이었지만 출신이 별로인 공작가 도련님을 까 내릴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흠집을 찾아내는 것이 사교계였다.


이 정도면 차라리 양호한 터였다. 하지만 덕분에 출신이 별로인 이 한미한 도련님을 건드렸다간, 왕국에서 가장 무서운 귀족을 건드리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경고도 된 셈인지라 다행이기도 했다.


“그런가? 사실 그 날 나도 아버지한테 혼나서. 이런 일도 제대로 처리 못한다고. 사실 그 말이 맞기도 하고. 아버지한테 죄송하기도 하고...”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아무튼 그 자식들 때문이 아니라면 무슨 일이야? 나도 서류상으론 네 외사촌인데 고민거리 정도는 털어놔도 괜찮지 않겠어?”


“외사촌... 그러네. 우리 그런 사이이기도 했었지. 아무튼 미안. 이거 집안일이라서. 선 긋는 건 아닌데... 뭐랄까? 좀 민감한 사안이라서 확정되기까지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


“흠. 뭐, 너희 가문이야 어마어마한 가문이니 그런 게 있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미안해하지는 말아. 어느 가문이든 그런 건 있으니까. 대신 사적인건 언제든지 들어줄 테니. 아무튼 오늘은 걱정거리가 많으니 바로 너희 가문 저택으로 들어가려나?”


클랜디스의 물음에 에드리안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폭 내쉬고는 말했다.


“아니. 오늘은 밤새도록 함께 있어줘야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갈 거야.”







* * *







샤를리즈는 시릴이 다시 작성해온 서류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래도 머리는 좋다는 걸까? 불과 며칠 전에 하나도 모르겠다고 바락바락 대들었던 주제에 꽤나 잘 작성해온지라 샤를리즈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성질은 거지같아도 일은 제법 하네. 밥벌이는 하겠어.”


“그새 인정하는 겁니까?”


에단이 김빠진다는 듯 말하자 샤를리즈는 한숨을 내쉬며, 항복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겠어. 사실인걸. 당신도 봤을 거 아냐?”


“봤죠. 거기다 소문도 들었습니다. 시릴 씨가 그나마 만만하다고 생각했는지 로버트 씨에게 가서 일을 배우고 있다는 걸요.”


“어머? 그건 좀 기특한데?”


“그렇지요. 다혈질인데다가 자존심이 강해서 누군가에게 굽히는 건 절대 못할 줄 알았는데, 괴상하게 자기가 모르는 것에 있어서는 깔끔하게 인정하고 숙인단 말입니다. 모순이 많은 성격이에요, 여러 방면에서. 그 점이 좀 흥미롭고요.”


“그건 나도 인정. 나한테 하는 태도만 어떻게 고치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 자식 은근히 날 만만하게 보는 것 같지 않아? 안 그러면 어떻게 나한테 그런 태도로 구느냔 말이야.”


“글쎄요. 그건 차차 지켜봐야 할 일이고. 누가 이리로 오는 군요.”


그 말에 샤를리즈가 고개를 끄덕이곤, 자신의 책상에 놓인 서류들을 서랍 안에 넣어둔다. 그리고는 벌써 수십 번은 읽었을 책을 꺼내고는 대충 펼쳐든다. 에단 또한 마치 일을 하다가 너무 지쳐서 놀러왔다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얼마 후 한 사내가 노크를 한 뒤, 들어왔다. 공작 가문에 심어둔 몇몇 이들 중 하나였다. 그러고 보니 정기적으로 공작 가문의 일에 대해 듣는 날이었다. 요즘 시릴에게 정신이 빠져있었던 터라 거의 매주 있는 행사를 까먹은 것이다. 샤를리즈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웃는 낯으로 그를 맞이한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공작가에는 별 일이 없죠?”


“예. 몇몇 손님들이 드나든다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아, 얼마 전에는 프랜시스 드 블라레트가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크산느 가문 쪽 사람들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더군요.”


“크산느 가문? 아아, 왜인지는 대충 알 것 같네요.”


크산느 가문은 그라니언 가문 다음으로 현왕이 신임하는 가문이다. 그러니 왕이 분명 란에 대해 흘렸을 테고, 그의 입장에서는 란의 존재가 거슬릴 테니 어떻게든 제거하고 싶겠지. 그러고 보면, 이상하다. 현왕은 마치 란을 인정할 것처럼 그를 왕성으로 불러들여 과거사를 이야기하고, 마치 화해라도 하자는 듯 행동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크산느 가문에게 정보를 흘려 란이나 그라니언 가문을 위험하게 만들고 있지 않는가? 샤를리즈는 공작에게 들었던 과거사를 떠올렸다. 왕은 그렇게 머리가 좋지 못하다. 그러니 이건 크산느 가문이 독자적으로 움직인 것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쪽의 정보를 캐내어 약점을 잡아두고, 그걸 가지고 란과 흥정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샤를리즈는 꽤 돈이 될 만한 아이템이라도 찾은 것 마냥 빙긋 웃은 뒤 물었다.


“그 외에 별다른 건 없었고요?”


“뭐,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 마나님께서는 항상 별장에 방문하시고. 아, 아가씨께서 요즘 기운이 없어 보이시긴 했는데, 그 분이야 워낙 감정기복이 심하시니...”


“에드리안 도련님은요?”


샤를리즈가 가장 궁금해 하는 소식임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에단이었기에, 샤를리즈가 채 묻기도 전에 그가 물었다. 그러자 사내는 깜빡했다는 듯 이마를 치고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작은 쪽지였다. 그는 샤를리즈에게 그것을 내밀고는 말했다.


“도련님이야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도련님을 모시는 하녀가 샤를리즈 님께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꽤 중요한 것이라 샤를리즈 님만 보라고 했지요.”


에드리안을 모시는 하녀라면 레베카이다. 그녀는 그 쪽지를 매만지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사내는 볼 일이 끝났다는 듯, 하인치고는 꽤 멋들어진 절을 한 뒤 방을 나갔다. 그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샤를리즈는 시큰둥하게 쪽지를 펼쳤고, 에단은 내용이 궁금한 것인지 슬쩍 엿보려고 고개를 든다.


그러나 쪽지의 내용이 짧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 내용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던 것일까? 샤를리즈는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책상을 쾅! 치고는 벌떡 일어났다. 에단마저 놀란 상황에서 샤를리즈는 이를 으득 갈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그라니언 저택으로 갈 거야. 채비를 좀 해줘.”


“미리 약속도 잡지 않으시고요? 각하는 만나 뵙기 힘든 분 아닙니까?”


에단의 물음에 샤를리즈는 마치 소리를 치듯 언성을 높였다.


“각하께서 부르신 거나 다름없으니 지금 당장 준비해! 어서!”


그제야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은 에단은 고개를 끄덕인 뒤 헐레벌떡 밖으로 나갔고, 샤를리즈는 다시 한 번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폭력을 휘두르는 것과는 아주 먼 삶을 살아온 샤를리즈였기에 주먹이 아려왔지만, 머릿속을 가득채운 생각들 때문에 미처 그를 인지하지 못한다.


샤를리즈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곧 피가 배어나올 것처럼 입술이 붉어졌다. 호흡이 거칠어졌고, 손이 파들파들 떨린다. 샤를리즈는 애써 화를 삼키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는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었다.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다시 한 번 이를 으득 갈고는 중얼거렸다.


“사사건건 내 성질을 건드리더니 감히 이따위 짓을 해?”


샤를리즈는 쪽지를 집어던지고는 의자에 걸쳐있던 검은 외투를 집어 들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무작정 준비가 되길 기다리기에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다스릴 수가 없어서 몸소 마구간으로 걸어간다. 감정이 절제되지 않는 날이면 저도 모르게 향하게 되는 마구간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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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5 13.10.31 808 23 11쪽
175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3 13.10.25 804 25 10쪽
»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4 13.10.21 940 23 10쪽
173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4 13.10.18 703 20 13쪽
172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5 13.10.16 802 25 10쪽
171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5 13.10.13 905 24 8쪽
170 제 13막. 사냥. +9 13.10.11 1,063 27 9쪽
169 제 13막. 사냥. +5 13.10.08 975 37 10쪽
168 제 13막. 사냥. +9 13.10.02 954 26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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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제 13막. 사냥. +4 13.09.12 2,917 45 10쪽
162 제 13막. 사냥. +4 13.09.10 2,859 3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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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제 13막. 사냥. +5 13.09.01 1,116 26 10쪽
159 제 13막. 사냥. +8 13.08.29 4,180 36 9쪽
158 제 13막. 사냥. +7 13.08.26 1,525 28 12쪽
157 제 13막. 사냥. +3 13.08.17 2,162 37 11쪽
156 제 13막. 사냥. +2 13.08.10 2,700 21 9쪽
155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3 13.08.03 1,149 18 9쪽
154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3 13.07.27 1,015 25 11쪽
153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4 13.07.20 953 18 23쪽
152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2 13.07.13 1,023 21 13쪽
151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4 13.07.06 926 15 15쪽
150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3 13.06.29 2,752 28 15쪽
149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2 13.06.22 983 19 16쪽
148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3 13.06.15 1,010 15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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