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_꽃의 향기를 듣는 소녀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1화>
꽃의 향기를 듣는 소녀
* * * * *
벼리는 꽃과 이야기하는 능력이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는 비밀이었다.
할머니는 벼리가 꽃의 정령을 받고 태어난 아이라고 말씀하셨다.
벼리라는 이름은 할머니가 지어주셨다.
벼리는 그물의 위쪽 코를 꿰어 놓은 줄을 말했다.
벼리를 잡아당기면 그물을 오므렸다 폈다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물이 열 자라도 벼리가 으뜸이라 하였다.
"벼리야, 넌 언젠가 벼리라는 이름처럼 세상을 올바로 세울 거야."
할머니는 벼리의 이름 이야기를 하면서 벼리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말을 강조하곤 하셨다.
"벼리는 일이나 글의 뼈대란다. 어떤 일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겠지? 그런 의미에서 넌 벼리란 이름의 의미를 깊이 새겨야 한다. 넌 모든 일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될 테니까."
뭔가 중요한 사람이 될 거라는 이야기는 어린 나이에도 충분히 기분이 좋았다.
"넌 꽃의 정령을 받고 태어났어. 꽃들이 널 지켜줄거야. 늘 꽃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할머니는 꽃들의 이야기도 자주 해주셨다.
벼리는 할머니가 들려주는 꽃들의 이야기를 매주 좋아했다.
어린 벼리는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며 자신에게 뭔가 중요하게 운명적인 것이 지워져 있을 거란 생각을 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충분히 운명적인 일을 예감한 벼리였다.
하지만 어린 벼리는 충분히 어린 아이스러웠다.
벼리는 어려서 호기심이 많았다.
새롭게 일어나는 일들을 좋아했다.
새롭게 계절이 바뀌는 것을 좋아했다.
하루의 해가 바뀌는 풍경의 변화도 좋아했다.
해가 뜨고 지는 변화에 따라 꽃들의 표정이 달라지는 것도 좋아했다.
벼리의 호기심은 많은 것들을 좋아하게 했다.
벼리는 꽃들과 특별한 교감이 있었다.
가령 일반 사람들은 꽃들이 예쁘다, 곱다 이런 것을 느꼈다.
그러나 벼리는 꽃들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벼리가 보는 어떤 꽃은 웃고 있었고 어떤 꽃은 슬퍼하고 있었다.
이런 꽃들의 표정을 보면서 벼리는 꽃들과 자주 교감하며 지냈다.
벼리는 꽃들과 교감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꽃들은 벼리가 가까이 가면 앞 다투어 향기를 뿜어댔다.
꽃들은 향기로 벼리에게 마음을 표현하곤 했다.
엄마도 벼리가 있으면 꽃들의 향기가 더 짙어진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벼리는 꽃의 이야기와 표정을 느낄 수 있었다.
꽃의 향기를 이야기처럼 들을 수 있었다.
벼리가 꽃들의 향기와 흔들림에 꽃들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면 꽃들의 향기가 짙어졌다.
꽃들의 화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벼리가 길을 가는데 어디선가 벼리를 부르고 있었다.
아주 맑은 소리였다.
그것은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느껴지는 소리였다.
온몸의 감각에 소리의 세포가 돋아난 것 같았다.
벼리는 그 소리를 좇아갔다.
골목의 담벼락 아래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아주 작은 할미꽃이 하나 피어 있었다.
할미꽃이 피기엔 아직 이른 봄이었다.
꽃에서 작은 향기가 퍼졌다.
향기와 함께 작은 소리가 들렸다.
“벼리야....”
벼리는 작은 할미꽃 가까이로 얼굴을 바짝 들이 밀었다.
바람도 없는데 작은 할미꽃이 흔들렸다.
할미꽃이 웃는 것 같았다.
향기가 진하게 퍼져갔다.
그리고 소리가 들렸다.
“벼리야.....”
벼리는 깜짝 놀랐다.
꽃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순간 겁이 났다.
벼리는 벌떡 일어나 집으로 뛰어갔다.
뒤로 뭔가 쫓아올까봐 정신없이 뛰었다.
집으로 뛰어 들어가 방안의 옷장으로 숨었다.
“벼리야.”
옷장에 숨었는데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벼리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잠시 숨죽이고 있는데 오빠인 민수가 옷장 문을 활짝 열었다.
“뭐야, 또 귀신 본 거야?”
“문 닫아. 누가 쫓아올 거야.”
“이번에는 또 할미꽃 귀신이야?”
“어떻게 알았어?”
민수는 벼리를 옷장에서 끌어냈다.
그리고 꿀밤을 줬다.
“아야, 아파.”
“이 맹추야, 할미꽃 귀신이 어디 있어?”
“아니야. 진짜 아주 작은 할미꽃이 나를 불렀다니까.”
“너 자꾸 이러면 엄마한테 이른다.”
“치, 오빠는 내 말도 안 믿고.”
“바보. 귀신이 어디 있다고.”
“정말 꽃이 나를 불렀다니까. ‘벼리야’ 하고서.”
“쉬. 조용해. 엄마가 널 병원에 데려갈지도 몰라.”
“다들 내 말은 믿지도 않고. 흥, 연이 언니한테 갈 거야.”
“연이는 너랑 똑같은 바보니까 네 말을 믿는 거야.”
“연이 언니는 내 말은 다 믿는단 말야. 연이 언니가 내 친언니면 좋겠다. 바보 같은 오빠는 필요 없어.”
“엄마한테 이른다.”
“안돼.”
“엄마~~”
벼리는 서둘러 오빠의 입을 막았다.
할머니가 계실 때는 벼리가 꽃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하면 그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안 계셨다.
엄마는 벼리가 꽃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말하면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곤 했다.
당장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지 걱정하셨다.
벼리는 엄마에게 이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간혹 오빠에게 말하지만 오빠 역시 바보 취급이기 일쑤였다.
하지만 오빠 친구인 연이는 언제나 벼리의 말을 잘 믿어줬다.
연이는 벼리 네 바로 옆집에 살았다.
벼리는 민수보다 연이를 더 잘 따랐다.
아침에 눈 뜨면 연이부터 찾았다.
“또 연이야? 아예 연이 집에 가서 살아 버려.”
민수는 벼리를 한심해 했다.
다행인 것은 연이가 거의 벼리 집에서 지낸다는 것이었다.
연이 부모가 둘 다 직장에 다녀서 집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이 부모님이 늦는 날은 벼리와 함께 자기도 했다.
벼리는 연이와 함께 자는 날은 너무 행복했다.
“연이 언니한테 갈 거야.”
“가든지. 아마도 벌써 나갔을 걸.”
벼리가 방문을 여는데 연이가 들어왔다.
벼리는 뛰어가 연이의 품에 안겼다.
“언니.”
“무슨 일이야? 민수, 너 벼리 괴롭혔니?”
“넌 친구인 내 편은 안 들고 왜 맨날 벼리 편을 들어?”
“내가 벼리 편인 걸 몰랐어?”
“너희 집이나 가. 맨날 둘이 편먹고.”
“하하, 속 좁긴.”
민수는 씩씩거리며 방을 나가고 연이는 벼리를 껴안아 줬다.
“언니, 할미꽃이 나를 불렀어. 벼리야, 하고.”
“우와, 그런 일이 있었어? 무슨 말을 했는데?”
“몰라. 내 이름을 불러서 놀라 그냥 도망 왔어.”
“무슨 일인지 들어봤어야지.”
“그런데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궁금하다. 나도 꽃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면 좋은데. 꽃들은 나에게 이야기하지 않아.”
“언니, 다음엔 내가 물어보고 이야기해줄게.”
“다음에 가면 무서워하지 말고 물어 봐. 왜 불렀는지.”
“그래도 좀 무서운데.”
“바보. 착하고 예쁘고 연약한 꽃들이 어떻게 나쁜 일을 하겠니?”
벼리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후로 벼리의 이름을 부르는 꽃은 만나지 못했다.
벼리는 어린 소녀에서 어른이 되었다.
벼리는 여전히 꽃들과 이야기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가면서 꽃들과 이야기하는 일은 점점 더 비밀이 되었다.
꽃들의 이야기를 어쩌다 꺼내기라도 하면 당장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연이에게 꽃의 이야기를 간혹 전하긴 했지만 모든 이야기를 다 전하는 것은 아니었다.
벼리와 꽃들과의 교감은 오래도록 다정한 인사 정도였다.
세세한 사연을 주고받는 대화는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어린 시절 담벼락 아래에서 만났던 소리였다.
그 뒤로 만나지 못했던 소리였다.
벼리가 아무리 찾아보려고 해도 벼리를 불렀던 꽃은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다른 꽃에게 물어봐도 꽃들은 모른다고 꽃잎을 흔들곤 했었다.
“벼리야.”
분명 어릴 때 들었던 소리였다.
하지만 이곳은 어린 시절 놀던 골목이 아닌 도심의 거리였다.
도시는 늘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높은 빌딩과 포장된 도로는 작은 풀꽃이 자랄 틈을 내주지 않았다.
어쩌다 민들레라도 하나 발견하게 되는 날은 행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도시에서는 결코 야생의 꽃들이 피어날 수 없었다.
“벼리야.”
다시 소리가 들렸다.
벼리는 소리를 좇아서 움직였다.
어떤 빌딩의 꽃집 앞이었다.
꽃집에서 내놓은 화분에 할미꽃이 있었다.
어릴 때 보았던 할미꽃이었다.
도시에서는 길가에 할미꽃이 필 리가 없었다.
아마도 산에서 가져온 흙에서 싹을 틔웠을 것이었다.
벼리는 도시에서 할미꽃을 만난 반가움에 얼른 몸을 숙였다.
다시 꽃이 벼리를 불렀다.
“벼리야.”
“날 부른 것이 너니?”
“벼리야.”
“네가 날 부른 거야? 어떻게?”
벼리는 몸을 최대한 숙였다.
화분에 있는 할미꽃이 더 가까워졌다.
“벼리야.”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아? 네가 날 부른 게 맞니?”
“맞아. 내가 널 불렀어.”
“네가, 어릴 때 날 불렀던 꽃이 맞니?”
“하하, 꽃이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살겠니?”
“어릴 때 만났던 꽃이 아니야?”
“그때의 꽃은 아니지만, 난 그 할미꽃의 다음 다음 다음 그 다음으로 피어난 꽃이야.”
“아하, 그런 거구나.”
“어때? 나 곱지 않니?”
할미꽃은 한껏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할미꽃은 고개를 아무리 들어도 고개가 들려지지 않았다.
할미꽃의 운명이었다.
“너무 곱다. 예뻐.”
“그렇지? 이런 우아함이라니. 나의 우아함은 따라갈 꽃이 없어.”
“무척 우아해.”
“고마워.”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꽃들은 모두 벼리, 네 이름을 알고 있어. 넌 꽃들의 친구야.”
“맞아. 난 너희들의 친구야.”
“우린 네가 어린 꼬마 시절부터 알고 있었어.”
“아무도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어.”
“하지만 넌 알고 있었지? 우리들이 너의 친구라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지.”
“꽃들의 친구인 너와 이야기를 하게 되어서 너무 기뻐.”
“이렇게 꽃들과 이야기를 해보는 거 처음이야. 신기하다.”
“처음? 아니야. 넌 여러 번 꽃들과 이야기를 했어.”
“처음이 아니라고?”
“꽃들은 너를 통해서만 이야기를 전할 수 있거든. 아주 많은 꽃들이 너에게 이야기했을 거야.”
“난 왜 기억에 없지?”
“곧 기억 날 거야.”
할미꽃은 그린섬 빌딩에 있는 꽃집에서 내다 놓은 화분에 핀 꽃이었다.
그린섬 빌딩은 벼리의 집이 있는 골목을 나와 큰길 건너편에 새로 생긴 빌딩이었다.
소문으로 대유그룹의 아들이 빌딩의 소유주라고 했다.
젊은 빌딩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벼리와 민수, 연이는 금수저는 일반 평민과 급이 다르다고 그린섬 빌딩을 한참 올려다본 적이 있었다.
벼리는 할미꽃을 보기 위해 매일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그린섬 빌딩 앞을 지났다.
할미꽃은 매일매일 화사해졌다.
할미꽃도 매일 화사해지는 것을 보고 피어나는 모든 것들은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좀 흐르자 할미꽃도 나이를 먹게 되었다.
다른 꽃과 다르게 빠르게 나이를 먹어갔다.
꽃잎이 지더니 하얀 머리칼이 덥수룩해졌다.
벼리는 너무 놀라서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무엇보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이 나서 더 눈물이 났다.
“엉엉. 안 돼.”
“벼리야. 왜 우니?”
“네가 지려고 하잖아. 넌 떠날 거잖아.”
할미꽃은 바람이 없는데도 한참을 흔들렸다.
“슬퍼하지 마. 이렇게 내가 져야만 새로운 꽃들이 생기는 거야.”
“네가 아닌 다른 꽃이잖아.”
“내 옆을 봐. 새로운 꽃이 피어나지? 하나의 꽃이 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
할미꽃은 생각보다 수다스러웠다.
이별을 앞둔 슬픈 태도가 아니었다.
“이별은 슬픈 게 아냐. 내가 떠나면 훨씬 더 많은 새로운 꽃들이 너에게 말을 걸 거야.”
하지만 새로운 꽃들이 온다고 해도 그 꽃은 예전의 할미꽃이 아니었다.
벼리는 할미꽃이 떠나 버릴까봐 학교가 끝나기만 하면 그린섬으로 달려갔다.
학교에 있으면서도 할미꽃 생각으로 마음이 바빴다.
그러던 어느 날 쭈그리고 앉아 할미꽃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벼리의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다가왔다.
“넌, 누구?”
낯선 남자가 벼리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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