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_이번 학기 폭망인가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3화>
이번 학기, 폭망인가
* * * * *
이럴 수는 없었다.
엄마는 올해 토정비결을 보면서 내가 귀인을 만날 거라 했었다.
엄마의 말에 연이 언니도 벼리 인생에 드디어 연애 인생이 펼쳐지는 거냐며 기뻐했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어제부터 뭔가 꼬이고 있었다.
‘귀인이라니.’
‘연애 인생이라니.’
엄마는 아무래도 토정비결을 잘못 본 것이었다.
벼리는 원래 아무한테나 막무가내 우겨대는 성격은 아니었다.
‘아침에 왜 그랬어? 죽어 마땅해. 대책 불가야.’
‘전공필수 과목 교수님에게 억지로 우겨댄 거야? 어떻게?’
‘그런데 교수님이 나를 기억할까?’
벼리는 외투를 벗었다.
벼리는 아주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깐 스쳤으니 못 알아보겠지?’
아직 새 학기라 좀 춥긴 했지만 학점을 위한 것인데 이 정도 추위쯤은 견뎌야 했다.
‘여인이 아무리 추워도 멋은 포기하지 못하는 것처럼 학생이 어찌 학점을 포기할 것인가.’
교수는 교실을 한 번 훑어보더니 출석을 불렀다.
“은벼리”
“은벼리.”
벼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옆에서 친구 미소가 벼리를 흔들었다.
“야, 벼리야. 출석.”
벼리는 대답을 안할 수 없었다.
몸을 살짝 비틀어 시야에 안 들어가도록 요령껏 대답했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네..에..”
다시 불렀다.
“은벼리!”
“네”
벼리가 대답하자 교수의 입가에 웃음이 살짝 흘렀다.
벼리는 그 웃음을 보고 말았다.
‘아, 이번 학기 폭망이구나.’
벼리는 2시간 내내 암울했다.
수강신청 포기를 하자니 전공필수라 이미 어찌 할 수 없었다.
운명이었다.
강의가 끝나고 강의실의 뒷문으로 살짝 빠져나가려는데 교수가 벼리의 이름을 불렀다.
“은벼리. 은벼리 학생?”
“네? 저요?”
“그래요, 은벼리 학생. 잠시 내 연구실로 들르세요.”
교수의 이름은 김재인이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논문을 어마무시하게 많이 써서 이미 유명해졌다는 교수였다.
그림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이뤘다는데 발표한 논문이 엄청나서 학교에서 모셨다는 후문이 있는 교수였다.
그런 어마무시한 교수가 지금 벼리 앞에 있었다.
‘연구실로 왜 나를! 왜 나를 부르냐고.’
벼리는 고개를 푹 숙이고 ‘김재인’ 이름이 쓰여 있는 연구실 앞에 섰다.
뭐라고 사죄를 드려야 하나 별의별 대사를 다 떠올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침에 눈이 좀 안 보여서요.”
“죄송해요. 제가 교수님인 줄 모르고..”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제가 죽을 죄를...”
문 앞에서 혼자 한참을 중얼거리는데 안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와. 문 앞에서 뭐하고 있어?”
“네, 교수님.”
벼리의 목소리는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개미소리였다.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아니, 그게. 오늘 아침에...”
“하하, 미안하긴 한 거야?”
“죄송해요.”
“그럼, 미안함을 상쇄할 수 있는 기회를 좀 줄게.”
“무엇이든.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뭘 그렇게 겁을 먹어? 안 잡아먹어. 학점을 망치게 하지도 않을 테고.”
“감사해요.”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이 그림 좀 들고 나를 따라 와.”
“그림요?”
“응, 이 그림.”
재인은 그림 액자를 벼리에게 안겨 주었다.
벼리는 얼결에 그림을 안아 들었다.
“자, 그 그림을 들고 날 따라와.”
“어디로?”
“내가 왜 벼리 씨를 불렀겠어. 다 이유가 있지.”
벼리는 얼결에 재인의 뒤를 따랐다.
재인은 차 있는 곳으로 가서 뒷문을 열었다.
“이리 주세요.”
재인은 그림을 받아서 뒷자리에 실었다.
“교수님, 그럼 안녕히 가세요.”
“어? 가려고? 아직 일이 안 끝났는데?”
“아직요?”
“하하, 농담이야. 집이 그린섬 빌딩 근처가 아니야?”
“어? 어떻게 아세요? 제가 거기에 사는 걸?”
“이런, 딱 잡아떼긴?”
“네? 뭘?”
“어젯밤에 한 일을 벌써 잊었다고?”
“어젯밤? 네? 어젯밤? 맙소사,”
김재인 교수는 어젯밤 빗속의 그 남자였다.
후광이 비쳐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남자.
벼리가 오랫동안 두 팔에 안겨 그 남자를 바라보느라 넋을 잃었던 남자였다.
후광의 남자가 바로 눈앞의 교수님이었다니 벼리는 이렇게 난감한 일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퇴로는 없었다.
이럴 때는 뻔뻔한 것이 오히려 퇴로가 될 것이었다.
“어젯밤 우산 속 그분이 교수님이셨어요? 어머, 죄송해요.”
“하하, 뻔뻔한 태도 맘에 들어.”
“여러 가지로 죄송하게 되었어요.”
“죄송함을 만회하긴 쉽지 않을 텐데.”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어떻게 하겠어요. 설마 교수님이 절 잡아먹진 않으시겠죠?”
“하하, 잡아먹진 않겠지만 형편없는 학점은 가능하겠지?”
“에이, 교수님, 설마 교수님처럼 멋진 분이 쪼잔하게 점수로 복수를...”
“복수라니? 내가 뭐 억울한 것이 있나? 절대, 네버. 복수는 아니지.”
“뭐가 됐든.. 교수님.. 노여움을 푸시옵고. 점수는 좀 봐주세요.”
“좋아. 하는 걸로 봐서.”
“교수님, 제가 힘은 좀 센데. 뭘 더 들어 드릴까요?”
“힘은 이제 다 썼고. 차에 타.”
재인은 차 문을 열었다.
벼리가 머뭇거리자 벼리를 차로 밀어 넣었다.
벼리는 얼결에 재인의 차에 탔다.
재인은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벼리는 지은 죄가 있다 보니까 뭐라고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자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재인이 편하게 해준 덕분이기도 했다.
벼리의 차는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벼리는 재인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벼리, 뒷자리의 그림을 들고 따라 와.”
“제가 들고 가나요?”
“왜? 그냥 가려고?‘
“아니, 그게 아니라.”
“올라와서 미술관 전시도 보고 가.”
“제가 올라가도 되나요?”
“당연하지. 안 가봤지?”
“아직 미술관은 보지 못했어요. 가보고 싶긴 했는데.”
“이왕 왔으니 올라가서 한 번 보고 가. 지금 전시는 실연에 대한 것인데. 벼리 씨는 아직 사랑을 몰라서 실연도 모르겠지?”
“제 사랑을 어찌 보고 그런 말씀을. 제가 이래 뵈도 대학 4학년인데.”
“하하, 미안. 그렇지. 대학 4학년이면 사랑이 한 번쯤은 지나갔겠지?”
“당연하죠. 제가 대학 4학년이라니까요.”
“어째 강하게 부정하는 거 보니까 혹시 모태솔로?”
“............”
벼리는 모태솔로라는 말에 갑자기 말문이 막혀 버렸다.
물론 농담이었겠지만 연이 언니와 민수 오빠가 늘 모태솔로라고 놀렸기 때문이었다.
“모태솔로? 아직도?”
민수 오빠는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었다.
“모태솔로. 아무나 하는 게 아니죠. 어딘가 있을 벼리 님의 왕자님은 아, 어디에 있는 것인가?”
연이 언니는 진심은 아닐 테지만 놀리는 투로 말했었다.
모태솔로라는 말은 벼리의 마음을 찔렀다.
‘망할!’
그런데 이 교수님조차 벼리에게 모태솔로가 아니냐고 물었다.
‘모태솔로는 티가 나는가?’
벼리는 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 미안. 진짜 모태솔로?”
“무슨 말씀이에요. 모태솔로라니요. 그럴 리가요.”
“농담이었어.”
재인은 벼리의 반응에 미안한 기색이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미술관에 가야지?”
벼리는 재인을 따라서 미술관으로 갔다.
미술관 이름은 빌딩의 이름과 같은 <그린섬 미술관>이었다.
미술관은 ‘실연 후의 빛’이란 주제로 전시 중이었다.
“여기 전시되어 있는 작품은 숙명적인 사랑과 열정적인 사랑, 야망의 사랑이 끝나고 난 후의 빛이란 스토리를 담고 있어.”
재인은 작품에 대해 하나하나 애정을 담고 설명해 나갔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재인의 눈빛은 반짝였고 전문가적인 세련됨이 있었다.
“그런데 말야. 사랑은 환상적이고 행복한 아름다움이 있지?”
“그렇죠.”
“하지만 사랑이 끝난 실연이라면?”
“실연...”
“실연 후의 빛은 욕망처럼 어둡고 악마처럼 검은 것이 귀결이지 아닐까?”
“어둡고 검은....”
“맞아. 어둡고 검은 것.”
재인은 채색이 매우 밝은 그림 앞으로 벼리를 이끌었다.
“그런데 이걸 봐. 이 작품은 실연을 화려한 빛으로 표현했어. 실연인데. 사랑을 잃었는데 어떻게 화려한 빛으로 표현할 수 있지? 난 그 이유를 모르겠어.”
재인은 진정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사랑이 끝난다면 낭떠러지처럼 아무 것도 없는 걸까요? 단순히 아무 것도 없는?”
“사랑이 끝이니까. 끝! 끝 그 다음에는 무엇도 없는 게 맞다고 봐.”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왜?”
“그 많은 시간 존재했던 사랑이, 어떻게 없었던 것이 되죠? 사랑이 과거형이라고 해서 아예 사라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과거에 존재했다, 라고 말하잖아요. 사랑했던 사람의 과거에 존재하는 거죠. 그 과거란 그 사람의 기억이고 추억이 아닐까요?”
재인은 한참동안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했던 순간은 기억으로 남아 있을 거예요. 그래서 어느 순간엔가 힘든 순간이 오면, 아니면 외로운 순간이 오면 아름다운 노을처럼 빛날 수 있지 않을까요?”
재인은 벼리의 말이 의외인 것처럼 여전히 말을 아끼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한참 후에 말을 이어갔다.
“실연 후의 빛이란 아예 ‘없음’ 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것이 어느 순간엔가 다시 어떤 빛으로 살아날 수 있다는 건가?”
“무엇이든 살아있던 것들은 떠나면서 무언가를 남겨요. 기억이든. 빛깔이든. 그것이 추억이란 이름이든.”
“실연 후의 빛이 암흑이 아닌 이유일까?”
“그래서 많은 작가들이 실연의 후의 빛깔에 아름다운 빛깔을 넣는 것이 아닐까요?”
“............”
재인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재인이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자 벼리도 조용히 그 곁에 서 있었다.
재인이 걸음을 옮기자 또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재인이 말을 하지 않는 순간이 오자 벼리는 잠시 조용한 순간을 지켜줘야 할 것 같았다.
벼리는 한참 동안 재인을 따라 말없이 걸었다.
“재인...”
미술관 안으로 어떤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어디선가 본 듯한 남자였다.
할미꽃과 이야기를 할 때 말을 걸었던 남자였다.
세련되고 잘 생긴 남자.
‘여긴 멋진 남자들만 드나드는 곳인가?’
벼리는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오늘은 일진이 이상한 날이었다.
“아, 그 아가씨네.”
“알아?”
“그럼, 내가 아주 잘 아는 아가씨지.”
“언제 본 거지?”
“하하, 내가 진작부터 아주 잘 알던 아가씨야. 현재 대학교 4학년. 그리고 여기 꽃집에서 알바를 하고 싶어 하는.”
벼리는 잠깐 스쳤지만 그 남자가 멋있다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벼리가 그 남자를 다시 만나는 순간이 있다면 지금은 아니어야 했다.
아주 부적절한 순간이었다.
그 남자는 벼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귀여운 아가씨. 나의 이상형.”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Comment '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