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_우연과 운명은 한 끗 차이(1)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7화>
우연과 운명은 한 끗 차이(1)
* * * * *
재인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재인이 잠을 잘 못 자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실연의 빛’이란 주제는 자신이 기획한 전시였다.
재인은 오랫동안 사랑과 이별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누군가를 사랑한 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재인은 떠나보내는 일을 잘 하지 못했다.
모든 떠나는 것이 싫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를 보낸 후, 저녁에 잠드는 것도 싫었다.
불면증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오랜만에 정신과 의사인 영진에게 갔다.
영진은 그린섬 빌딩 가까운 곳에 정신과 전문병원을 열었다.
하지만 진료하는 날보다 쉬는 날이 더 많았다.
“넌 진료를 하는 거 맞아? 대체 병원 쉬는 날이 더 많아.”
“하지만 덕분에 너처럼 제멋대로 환자가 진료 받을 수 있는 거 아니니?”
“고마운 건가?”
“그럼, 엄청 고맙다고 해야지.”
영진의 병원은 강남의 아주 잘 나가는 빌딩에 있었다.
영진의 아버지는 한국 굴지 기업의 아들이 조그마한 병원의 병원장이 되는 걸 원치 않았다.
아들이 의사 되는 것을 그렇게 말렸던 영진 집안이었다.
하지만 이젠 맘대로 안 되자 아예 영진의 이름을 따서 ‘영진 메디컬센터’를 만들고 싶어했다.
영진은 그 모든 걸 싫어했지만 아버지가 지은 병원에 있지 않을 거면 회사에 들어오라고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건물에서 병원을 하게 된 것이었다.
병원은 영진 말고도 의사가 다섯이나 있었다.
영진이 병원 원장이었지만 영진은 원장 노릇을 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병원을 비우기 일쑤였다.
“재인, 난 머리가 너무 좋아 고생이야. 의사가 안 되었어야 해.”
“이런 잘난 놈. 나쁜 놈.”
“맞아. 난 잘난 놈이야. 나쁜 놈이기도 하고. 이렇게 의사가 내 발목을 잡을 줄 몰랐어. 아버지가 메디컬센터를 만들다니. 아버지의 사업 욕심에는 두 손 들었어.”
“그래도 난 네 병원이 있어서 좋아.”
“하하하.”
영진은 한참 웃더니 의사의 얼굴이 되었다.
“재인, 잠을 못 잔 얼굴인데?”
“응. 좀 못 잤어.”
“왜? 무슨 문제가 있어?”
재인은 영진이 준 차를 마셨다.
라벤더 차였다.
긴장을 풀어주고 불면증, 불안감에 좋은 차라고 했다.
나름 영진의 배려일 것이었다.
“난 아무래도 연애세포가 살해당했나봐.”
“갑자기 웬 연애세포? 연애해?”
“아니야, 그런 거.”
“그런데 연애세포?”
재인은 따뜻하게 몸에 녹아드는 라벤더를 천천히 마셨다.
추웠던 몸이 아닌데도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드는 차였다.
“도무지 내 안에서 연애세포를 끄집어낼 수가 없어서.”
“아이, 이 친구야. 나도 아직 연애세포를 제대로 못 살려 봤다고.”
“넌 언제나 여자가 새롭게 바뀌잖아. 제대로 못 살려보긴 뭘 못 살려. 이런 순 바람둥이.”
“바로 그거야. 내가 한 여자에게 몰입하지 못 하고 이 여자, 저 여자 기웃거리기는 것. 그것만 봐도 내 연애세포가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는 거지.”
“그렇게 흔들리는 것이 연애 아닐까?”
“그게 아니라고. 이 연애 바보야.”
“연애 바보는 또 뭐야?”
“너처럼 연애를 모르는 바보는 처음 봤어.”
“그 정도야? 내가?”
“연애세포란 어느 순간, 갑자기!”
영진은 한순간 허공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이렇게 어디선가, 없던 것이 생겨나는 것처럼. 아침 햇덩이가 바다에서 뿅, 하고 솟아나는 것처럼.”
영진의 두 팔은 바빴다.
“번개가 번쩍! 파바박! 치는 것처럼, 어느 순간 예측할 수 없게 빠져드는 것이 진정한 연애세포야.”
영진은 자신의 연애론을 온몸으로 설명했다.
“그럼 너처럼 많은 애인을 둔 사람의 연애세포는?”
“재인, 생각해 봐. 사랑이라는 게 통제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어?”
“아니.”
“봐, 아니라니까. 핵심은 그거야. 사랑이란 통제가 되지 않는 것. 그렇게 배웠잖아. 그게 일반적 진리야.”
“내가 연애 바보라는 거야?”
“아무도 못 건드린 네 연애세포. 그 세계는 아마도 두꺼운 문일 거야.”
“음.. 문...”
“궁금해. 그 문을 두드릴 여인은 누굴까? 우리 순정남 재인의 연애세포를 건드려 활짝 꽃피울 여인, 아 그녀는 누굴까?”
“이렇게 순, 농담만 해대는. 진심이라곤 눈 씻고 찾아 볼래야 찾을 수 없는...”
“진심인데? 네가 아직 사랑을 몰라서 그래.”
재인은 영진의 농담에 기분이 살짝 나빠지려고 했다.
영진은 다시 의사의 태도로 돌아와 물었다.
“재인, 말해봐. 뭔가 말하고 싶은 여자가 있는 거지?”
“사실 대학에서 내 강의를 듣는 학생이 하나 있거든?”
“학생? 여학생?”
“응, 여학생. 그 학생을 글쎄, 세 번이나 연달아 본 거야.”
“세 번이면 운명인데.”
“농담으로 듣지 말고!”
“진심으로 듣고 있어.”
“세 번이나 봤거든. 세 번. 어떻게 세 번을 우연히 보지?”
“세 번이나?”
“응, 그린섬 빌딩 앞에서, 학교 강의실에서 그린섬 정원에서. 세 번이나.”
“세 번이나? 재인, 그 여자를 잡아. 그 여자는 네 운명이야.”
“이 녀석 대체 정신과 의사 맞아? 학문적으로 설명해 봐. 넌 나보다 더 빨리 흥분하고 제대로 된 충언을 하지 않잖아. 뜬금없이 운명의 여자는 또 뭐야?”
“음... ”
“생각해봐. 네 인생에서 우연히 세 번이나 연속 만난 여자가 있었어? 그것도 운명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피할 수 없다는 거야.”
“내가 언제 강렬하게 만났다고 했어? 그런 말은 꺼내지도 않았어.”
“네 표정에 그렇게 쓰여 있어. 운명처럼 강렬하게 세 번이나 만났다. 이렇게.”
“순 사기꾼!”
“하하, 그러니까 내가 정신과 의사를 하는 거잖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우리들의 능력이니까.”
“아직 아무도 내 정원을 들어가 본 사람이 없어. 너도 알지? 그런데 그 여학생이 어떻게 내 정원에 들어간 거지?”
“그러니까 그 여학생이 네 정원을 들어갔고! 급기야 네 마음에까지 첫 발을 내디뎠다. 이거잖아?”
“그만하자. 이 몰이꾼 같으니.”
“놀려서 미안해. 그런데 그 여학생, 정말로 너하고 어떤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잖아도 다음에 만나면 이야기를 더 해볼까 해. 이상하게 신경이 쓰여.”
“다행이야. 연애세포 실종 미남에게 드디어 운명이 나타나다!”
“세 번 연속 만났다는 이야기일 뿐이야.”
“그냥 결혼해 버려.”
“결혼? 이제 세 번 봤다고!”
“뭐 어때? 넌 결혼적령기의 혈기 왕성한 수컷이고. 너희 집에선 널 결혼시키고 싶어 안달이고.”
“...........”
영진의 말에 화를 내려다 재인은 살짝 뜸을 들였다.
“그렇잖아도 고 여사와 그 일당들이 날 결혼 못 시켜서 안달이야. 어떻게든 날 도매금으로 넘겨서 치워버리려는 거지. 아마도 J그룹 막내딸과 혼인을 추진하는 것 같아.”
“그 결혼 할 거야?”
“절대. 네버. 사실 결혼이라는 것이 아무렇게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그 여학생하고 결혼해. 딱 좋아. 널 흔드는 여자. 세상의 하나 뿐인 여자. 운명의 여자.”
“몰아가기는 널 따라갈 사람이 없어. 암. 인정이야, 인정.”
“몰아가기는 내가 아니지. 도현일 못 따라가는데?”
“맞아, 진정한 몰이꾼은 도현이야. 몰이꾼으로 도현은 강적이야. 못 말려.”
“하하하, 우린 모두 도현의 밥인 거 맞지? 도현이 웃으며 말하면 그냥 넘어가게 되어 있어.”
*****
재인은 그린섬 미술관에 벼리를 데려갔을 때 조금 더 오래 있을 생각이었다.
도현이 갑자기 찾아왔다.
김 회장이 갑자기 자신을 불러들였다.
두 가지의 복병이 갑자기 찾아와서 재인을 방해했다.
재인은 학교에서 학생을 개인적으로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벼리를 개인적 용무로 불렀다.
재인도 자신이 학생을 그런 식으로 불러서 깜짝 놀랐다.
하지만 꼭 불러야만 했다.
자신이 벼리를 보면서 뭔지 모르게 자꾸 신경 쓰이는 이유를 알아야 했다.
처음 벼리가 신경이 쓰이는 것은 비 오는 날 저녁, 갑자기 벼리를 안아든 일이 있어서라고 생각했다.
재인은 스킨십을 싫어했다.
외국에서는 허그가 자연스러웠지만 재인에게 스킨십은 여전이 편하지 않았다.
그런 재인에게 비 오는 밤, 벼리가 품으로 날아든 것이었다.
재인은 벼리를 얼결에 잡았는데 한 마리 작은 새를 안은 느낌이었다.
아주 작고 여린 작은 새였다.
재인은 한참동안 벼리를 두 손으로 붙잡고 있었는데 그 순간이 정지되었으면 바랐다.
아주 오래 끝나지 않고 이어지길 바랐다.
순간이 정지되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재인도 모르게 한 자세로 한참동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모르는 척 오랫동안 품에 뛰어 들어온 작은 새를 보호하고 싶었다.
거의 본능이었다.
온몸으로 보호하고 싶은 여린 새.
그런데 현실은 순간 멈춤을 허용하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빗물은 그녀의 얼굴로 떨어졌다.
재인은 빗방울이 그녀의 얼굴로 떨어지자 그 빗방울을 막아야 했다.
그래서 고개를 더 내려 벼리의 얼굴 가까이 들이댔다.
약간 이상한 광경이 되어 버렸다.
벼리는 빤히 재인을 보고 있었다.
벼리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재인의 온몸이 순간 뜨거워졌다.
빗속인데도 몸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온몸의 피가 순간 100미터 전력질주를 하고 있는 것처럼 숨마저 가빠졌다.
재인의 뜨거운 얼굴은 자신도 모르게 벼리에게 더 가까이 닿아가고 있었다.
순간은 정지됐다.
한참동안 정지됐다.
시간의 왜곡이 있다면 이 순간일 것이었다.
정지된 이 순간, 재인의 몸에 붙은 불이 보인다면 작고 여린 새는 놀랐을 것이었다.
작은 새는 위험을 알았을까?
별안간 달아나 버렸다.
갑자기 빗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재인은 갑자기 빗속에 홀로 남겨졌다.
아직 불이 붙은 채였다.
품안의 작은 새가 날아가 버린 그 허전함은 재인을 오래도록 빗속에 남겨 두었다.
***********
두 번째 만남은 더 당황스러웠다.
한국대 강의를 시작하고 아직 익숙하지 않은 때였다.
지난 밤, 품에 날아든 작은 새가 날아가 버리고 밤새 작은 새는 다시 날아들고 다시 날아가 버리는 꿈이 지속되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이어지는 순간으로 잠들지 못한 밤이었다.
“재인아, 정신 차려. 해프닝일 뿐이야.”
혼자 중얼거리며 자동차로 한국대에 들어서는데 어떤 여인이 눈에 확, 들어왔다.
지난밤의 그 작은 새였다.
처음엔 아직 정신 차리지 못한 환영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였다.
상큼하게 나풀거리는 그녀.
재인은 자신이 어떤 여인의 실루엣을 그렇게 빨리, 잘 알아차리는 일이 신기했다.
재인은 사람에 대한 관심이 적어서 사람을 잘 구분하지 못하곤 했었다.
그런데 한 번 본 여인이 그렇게 선명하게 멀리서도 빛이 되어 걸어오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그의 차는 조금 서둘렀다.
그 여인이 횡단보도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와 마주쳐야 했다.
그러다 보니 차가 급정거를 하게 됐다.
“조심하셔야죠.”
이렇게 상큼한 목소리라니.
귀여웠다.
그리고 또 그 여인은 학교 안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두 번이나 서둘러 달아나버렸다.
그런데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 그녀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추운 날씨인데도 외투를 벗고 있었다.
숨고 싶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빛처럼 빛나는 그녀가 숨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그녀는 그냥 독보적으로 빛나는 존재였다.
재인에게 빛나는 그녀였다.
그녀는 강의가 끝나자 또 달아날 차비를 하고 있었다.
재인은 그녀를 그냥 보낼 수 없었다.
강의실로 불렀다.
그렇게 그린섬 미술관으로 데려간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재인은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몰랐지만 비 오는 밤 이전의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재인은 비 오는 밤, 벼리를 모르고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었다.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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