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_수상한 비밀정원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10화>
수상한 비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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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초록 머리에 껑충한 키의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의 모습이 나무와 비슷한 모습이 아니었다면 벼리는 오히려 깜짝 놀랐을 것이다.
벼리는 방금 전 들어가선 안 될, 금지된 장소에 들어갔었다.
누군가에게 들키면 안 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낯선 사람이 서 있었다.
낯선 사람이 벼리를 잘 아는 것처럼, 오랜만에 만난 사람인 것처럼, 약속했던 사람인 것처럼 인사를 건넸다.
“안녕!”
인사를 건네는 어감이 너무 가볍고 경쾌해서 벼리에게 있던 마음의 경계는 그냥 사라져 버렸다.
그냥 사라져 버렸다는 표현이 맞았다.
방어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그냥 방어기제를 녹여버리는 인사였다.
“나무 아저씨세요?”
벼리는 자신도 모르게 나무가 아닌지 묻고 있었다.
“하하하, 넌 정말 꽃과 나무와 이야기하는 게 틀림없어.”
“제가 꽃과 이야기하는 걸 아세요?”
“같은 세상의 사람은 서로 알아보는 법이잖아.”
벼리는 초록머리 남자의 머리카락이 순간 바람이 흩날리는 나뭇잎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나무숲의 향기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순간, 주변이 숲인 듯 착각이 들었다.
나무 향기가 세상을 한 바퀴 돌아서 맑게 벼리의 앞에 섰다
“난 랜디라고 해.
랜디는 손을 내밀었다.
벼리는 랜디의 손을 잡았다.
랜디의 손은 나뭇잎과 같은 느낌의 부드러운 시원함이 있었다.
“벼리라고 해요.”
“꽃과 이야기하는 벼리 씨, 반가워. 만나고 싶었어. 꽃들이 네 이야기를 많이 했어.”
“꽃들을 알아요?”
“그럼, 당연하지. 저기 담쟁이 있지? 저 담쟁이도 내 친구야.”
담쟁이와 쥐똥나무들이 랜디의 말에 우루루 몸을 흔들었다.
동시에 흔들리자 주변은 온통 맑은 향기였다.
도시가 숲처럼 향기로울 수 있다면 사람들은 훨씬 행복할 것 같았다.
“랜디 아저씨....”
“랜디라고 불러. 아저씨라는 말, 별로야, 난 영한 것이 좋아. 내 패션도 영하잖아,”
랜디는 푸른 잎을 흔들 듯이 두 팔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한 바퀴 돌았다.
“영하다는 것이 랜디의 패션과 같다면 요즘 핫한 트랜드는 아마도 복고인가요?”
“내가 올드하다는 말로 들리는데?”
“앗, 눈치는 영하신데요?”
“하하, 꽃들의 말처럼 역시 벼리는 상큼발랄 귀여워.”
랜디는 꽃집을 가리켰다.
“네?”
랜디는 살짝 웃었다.
“꽃 좋아하지? 우리 저기 꽃집에 가보자.”
“꽃달, 가보고 싶었어요. 잘 아세요?”
“그럼, 내가 단골이지.”
“와우, 정말요?”
“한 번 들어가 볼까? 꽃달의 민 실장도 분명 널 좋아할 거야.”
랜디는 한껏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벼리는 랜디를 처음 만났는데 익숙한 사람처럼 인사를 나누고 농담하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랜디를 따라서 꽃집에 들어갔다.
꽃집에 들어서자 음악이 들렸다.
Azure ray의 ‘A thousand years’란 곡이었다.
몽환적으로 아름다운 목소리와 어쿠스틱 기타소리가 꽃향기와 함께 어우러졌다.
딱 꽃집의 주인과 어울리는 음악이었다.
벼리가 꽃집에 들어서자 꽃들이 일제히 향기를 뿜었다.
벼리는 느낄 수 있었다.
꽃들이 자신을 향해 인사한다는 것을.
“안녕, 안녕, 안녕....”
수많은 안녕들이 떠다녔다.
소리를 시각으로 보이게 한다면 안녕, 이란 자음과 모음들이 공기를 떠다니며 음표처럼 춤 출 것 같았다.
인사하는 꽃들은 명랑하고 경쾌했다.
꽃달 안의 꽃들은 유난히 맑았다.
벼리는 꽃집에 갈 때면 마음이 아플 때가 있었다.
사람들에게 팔려가기 위해 냉장고에 들어가 있는 꽃을 볼 때였다.
꽃들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란 곳에서 잘려와 팔려가길 기다리는 일은 뒤에 따르는 행복을 위한 일이라고 해도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꽃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화내지 않았다.
결코 자신의 향기를 잃지 않았다.
사람들은 안 좋은 상황을 맞닥뜨릴 경우, 몸은 화학반응을 일으키고 고약한 냄새를 뿜는다.
위급한 상황, 긴장 및 스트레스 상황이 오면 잔뜩 긴장하고 힘들어 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땀 냄새를 맡으면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된다는데, 사랑하는 애인이 곁에 없다면 꽃향기로 대신 위로를 삼을 수 있다고 한다.
꽃은 꺾이면서도 향기로 위로를 준다.
꽃의 힘이고 매력이다.
꽃달을 운영하는 민 실장은 벼리를 반갑게 맞았다.
“우리 꽃집 앞에 자주 서 있었죠? 꽃을 좋아하는구나. 생각했어요.”
“절 보셨어요?”
“그럼요, 벼리 씨는 눈에 띄는 어여쁜 학생이죠. 반가워요. 내가 인사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네요.”
“실장님, 이 학생이 여기서 알바 좀 하면 어때요? 꽃을 아주 잘 다룰 것 같은데.”
“랜디, 벼리에게 물어봤어? 갑자기.”
“어머, 아니에요. 이 꽃집에서 알바하는 것이 꿈이었어요. 너무 좋아요. 꽃이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어요.”
랜디는 벼리의 생각을 미리 알았던 것처럼 으쓱했다.
“그럼, 랜디의 추천으로 벼리 씨는 이 꽃집의 정식 알바생이 되었네요.”
“저, 아주 잘 할 수 있어요.”
“그럼요, 벼리는 아주 잘 할 거예요.”
벼리는 고맙다는 인사했다.
“사실 저희 아버지가 이 건물에 근무하세요. 경비실에.”
“아, 그러시구나. 잘 됐다. 아버지가 계신 곳이니 더 좋아.”
벼리는 갑자기 꽃달에서 알바를 하기로 했다.
학교가 끝나고 시간이 되는대로 꽃집을 돕기로 했다.
랜디는 꽃집의 정식 직원은 아니었다.
하지만 꽃이나 나무가 병이 들었을 때는 랜디가 출동했다.
“랜디가 있으면 꽃들이 생생해요. 꽃들이 랜디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제가 꽃들에게 무슨 고민이 있는지를 잘 알거든요. 제가 바로 꽃들의 오라버니라는 건 아시죠?”
랜디는 평소 이상한 말을 농담처럼 자주 하니까 모두들 그러는가 보다 인정을 하는 분위기였다.
처음 대하는 벼리도 랜디의 말은 자연스럽게 들렸다.
꽃달 여자 직원이 와서 인사했다.
“안녕, 난 자연 팀장이야. 반가워.”
“반가워요.”
“응, 그렇잖아도 기다리고 있었어. 랜디가 어찌나 기다리던지.”
“랜디가 벼리 씨 데리고 올 거라고 했었어.”
“그런데 랜디는 이상해. 언제나 바람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니까.”
“이상하고도 신기하죠.”
“랜디가 무얼 하는지, 어디서 살고 있는 아는 사람이 없어. 벼리에게는 알려 줄까? 궁금해.”
“그런데 랜디가 다녀간 날은 꽃과 나무들이 얼마나 생생한지... 매번 놀라워요.”
“랜디가 꽃들의 오빠가 맞긴 한가봐.”
벼리가 꽃과 이야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랜디였다.
랜디는 벼리를 꽃 가까이 데려 갔다.
민 실장과 자연은 다른 손님을 맞으러 프런트로 갔다.
랜디는 벼리에게 꽃들의 이야기를 물었다.
벼리는 랜디가 알면서 일부러 묻는 것처럼 느껴졌다.
“벼리, 오늘 수선화 님 기분이 어떻다고 해?”
“살짝 슬프대요.”
“왜? 수선화는 언제나 자존감이 높은데? 무엇에도 굴하지 않잖아.”
벼리는 랜디의 귀에 살짝 말했다.
“수선화 님은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절대 물에 비치지 말라는 경고를 먹었잖아요. 그런데 저기 보세요. 유리 냉장고에 수선화 님이 비치잖아요.”
“아, 저런 실수가 있었네.”
꽃달에서 잠깐 있었지만 벼리는 랜디와 이야기를 하며 어린 소녀가 된 것처럼 이야기를 많이 했다.
“종달새 같아.”
랜디가 말했다.
벼리도 종달새가 된 것처럼 랜디에게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다.
“랜디와 함께 있으니 종달새가 되었어요.”
벼리도 농담이 자연스러워졌다.
집에 돌아온 벼리는 침대에 누웠는데도 랜디와 함께 한 여러 가지 일들이 떠올랐다.
무엇보다 정원에서 만났던 구골나무는 꼭 다시 보고 싶었다.
구골나무는 분명 어떤 슬픔이 있었다.
무엇일까 궁금했다.
그린섬 빌딩의 정원은 ‘Blue moon Garden’이라고 불렀다.
민 실장은 푸른 달이 뜨는 정원이어서 이름이 그렇다고 했다.
벼리는 푸른 달이 뜨는 정원이라는 말이 멋있어 보였다.
푸른 달이 뜨는 정원이라면 어떤 신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벼리는 다시 정원에 가고 싶었다.
지난 번 만났던 구골나무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는데 말이 없었다.
벼리는 꽃집에 있으면서 블루문 가든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 했다.
그러나 민 실장은 블루문 가든에 대해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민 실장은 꽃집 관리를 하고 있으나 블루문 가든은 재인이 직접 관리한다고 했다,
벼리는 갑자기 꽃집 알바를 하기로 했는데 다음 날 재인을 만난 것이었다.
* * * * *
벼리는 꽃달 알바를 시작했다.
그린섬 빌딩의 대표이면서 학교 교수인 재인, 그의 친구 도현은 벼리가 일하고 있는 꽃달에 자주 들렀다.
“꽃달이 언제부터 이렇게 관심을 받는 곳이었을까요?”
“우리야 언제나 민 실장님에게 관심이 많았죠.”
벼리는 꽃집 일이 재미있었다.
재인과 도현을 자주 보는 것은 조금 껄끄러운 일이었다.
또한 조금 설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둘 다 정원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벼리는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었는데 암묵적으로 이야기를 아끼는 거 같아 물어볼 수 없었다.
블루문 가든은 꽃달에서 보려고 하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통유리에 색이 입혀져 있었다.
창 바로 옆으로 높은 키의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그러나 벼리는 꽃과 나무와 이야기할 수 있었다.
벼리가 블루문 가든 가까이 가면 나무들이 일제히 이름을 불렀다.
“벼리야, 벼리야, 벼리야.”
“반가워.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다. 그런데 너희들이 잘 보이지 않아. 혹시 블루문 가든에 있는 구골나무는 잘 있어?”
“구골나무를 알아?”
“응, 잠깐 만난 적 있어. 그 구골나무를 한 번 더 보고 싶어. 이야기를 듣고 싶어.”
“구골나무가 요즘 슬퍼. 자꾸 눈물을 흘려.”
“슬픈 일이 있어?”
“우리는 알 수 없어. 네가 간다면 혹시 말해줄지 몰라.”
“걱정된다. 밤에 달이 뜰 때 한 번 가볼게.”
“조심히. 아무도 모르게. 비밀이야.”
나무들은 유난히 조심스럽게 벼리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그린섬 빌딩 꽃집 알바를 하면서 벼리는 자연스럽게 아버지에게 들렀다.
“아빠, 저기 정원에 가봤어?”
“정원? 저기 정원은 아무도 못 들어가.”
“관리하려면 사람들이 들어가야 하는 거 아냐?
“그렇지. 그런데 이 건물 세워진 뒤로 아무도 정원에 들어가 본 적이 없어.”
“누가 관리하는데?”
“아무도 안해. 정원은 여기 대표가 직접 혼자 한다고 들었어.”
“에이, 어떻게 저렇게 큰 정원을 혼자 관리해?”
“큰 지 작은 지 네가 어떻게 알아?”
“아, 그게 아니라. 넓어 보이잖아.”
“벼리야, 네가 꽃집에서 알바하는 것은 좋은데 저기 정원은 얼씬거리지 마. 보기는 예뻐 보이지만 뭔가 이상해. 원래 꽃과 나무라는 것이 사람들을 느슨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잖아? 그런데 저기 정원은 좋아 보이지만 뭔가 답답해. 좋지 않아. 넌 얼씬도 마. 알았지?”
“그럼요, 제가 거길 왜 가겠어요.”
벼리는 달빛이 희미하던 밤에 다시 블루문 가든을 찾았다.
담장에 이르러 담쟁이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문을 열어줘. 들어가고 싶어.”
나무들이 일제히 꼭 잡았던 팔을 펼쳤다.
벼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둥글게 길이 만들어졌다.
벼리는 달 모양의 연못 위쪽에 있는 구골나무에게로 갔다.
나무에게 물방울들이 가득 달려 있었다.
울고 있었다.
“구골나무야.”
우울이 깊어지면 자살한다는 말이 있었다.
나무도 자살한다는 말이 있었다.
구골나무에게서 느껴지는 아픔이라면 그런 슬픈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
꽃달에서 꽃들은 벼리에게 이상한 말을 했었다.
“이 건물에 행복하지 않은 꽃들이 있어.”
원래 꽃들은 항상 행복했다.
자신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일은 행복의 근원이기 때문이었다.
꽃은 지고 떨어지는 일조차 행복하다고 했다.
꽃이 떨어지면 더 많은 기약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벼리는 어떻게 이렇게 깊은 슬픔을 마음에 품은 나무가 있을까 걱정이 되고 궁금했다.
구골나무의 사연을 알아봐야 했다.
그 눈물의 슬픔을 들어봐야 했다.
수상한 비밀정원에 무슨 일이 있는지 꼭 알아야 했다.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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