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_우리 계약연애하자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14화>
우리 계약연애하자
* * * * *
벼리는 블루문 가든에 좀처럼 가지 못하다 어렵게 들어갔었다.
구골나무는 벼리를 기다렸던 것 같았다.
벼리가 정원에 들어서자 구골나무가 벼리를 불렀다.
“벼리야...”
소리는 향기를 품고 퍼졌다.
벼리는 소리의 향기로움에 눈을 감고 싶었다.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은 향기였다.
구골나무에서 향기가 퍼질 때 구골나무의 온몸에 방울방울 물방울이 맺혔다.
은방울꽃이 달린 것처럼 은종이 달린 것처럼 무수한 물방울들이 매달려 있었다.
눈물이었다.
방울방울 맺혔던 눈물이 순간 비처럼 후두둑 떨어졌다.
<두두둑>
울고 있는 슬픈 나무는 구골나무였다.
랜디는 울고 있는 나무의 사연을 잘 들어야 한다고 했다.
울고 있는 나무는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고 했다.
벼리는 자신도 모르게 구골나무를 꼬옥 안았다.
“울지 마.”
“울지 마.”
구골나무는 벼리의 포옹을 받고 울음을 잠시 멈췄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향기 잃은 아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향기를 잃은 아이가 향기를 찾도록 도와 줘. 그 아이가 향기를 찾으면 나도 꽃을 피울 수 있을 거야. 나도 더 이상 슬프지 않을 거야.”
“제가 어떻게 도울 수 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게요.”
“그 아이가 향기를 찾는다면 나는 눈물 대신 꽃을 피울 거야. 온밤을 하얗게 눈처럼 꽃피울 거야.”
향기를 잃은 아이가 향기를 찾을 때 자신은 꽃을 피울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꽃을 피우지 않고 어떻게 향기를 만들 수 있어요? 지금 아무리 둘러봐도 여기엔 꽃이 없는데 향기는 어디에서 오는 거예요?”
“향기란 꽃에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하지? 아니야. 꽃은 맑은 영혼 속에 있어. 우리가 꽃이 아닌 사람에게서도 향기를 느끼는 것은 그 이유일 거야.”
“그런가요? 어떤 사람에게서 좋은 향기가 느껴질 때가 있어요. 향수를 뿌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향수를 뿌린 것처럼, 몸에서 꽃이 핀 것처럼 향기로울 때가 있어요.”
벼리는 비 오는 밤, 재인에게 안겼을 때 빗줄기에서 꽃향기가 쏟아졌던 걸 기억했다.
재인에게서 온통 빛이 가득했던 것을 기억했다.
무엇보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모두 향기로 쏟아졌던 걸 기억했다.
‘그 사람에게선 향기가 쏟아졌어. 빗물이 향기일 리가 없을 거야. 그럼 그 향기는 그 사람의 영혼인가? 맑은?’
구골나무에게서 다시 향기가 퍼졌다.
구골나무에 눈물방울이 가득 맺혔다.
다시 눈물비가 쏟아졌다.
“그 아이에게 향기를 찾아 줘.”
“그 아이를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어요?”
“벼리, 넌 알 수 있을 거야.”
“제가요?”
“넌 향기를 듣는 아이야. 향기를 듣는 아이는 향기를 잃어버린 아이를 볼 수 있어.”
“그 아이는 어떤 표식이 있나요?”
“그건... ”
구골나무가 대답을 하려는 순간 쥐똥나무의 경고소리가 들렸다.
경고소리는 향기로 전달되었다.
행복한 향기와는 결이 다른 향기였다.
경고를 듣자 구골나무는 금세 입을 다물어 버렸다.
“벼리야”
“벼리야, 어서 나와.”
“누군가 오고 있어.”
벼리는 구골나무에게 인사도 하지 못하고 서둘러 정원을 나왔다.
정원에서 나오자 바로 앞에 랜디가 서 있었다.
“안녕, 벼리야.”
인사를 건네는 랜디의 초록 머리가 흔들렸다.
나뭇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처럼 순간 세상이 모두 푸른 숲이었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선물이야. 너에게 주는 나의 선물.”
랜디는 벼리가 긴장했을 때 푸른 숲을 선물했다.
숲은 피톤치드, 음이온을 뿜어내며 벼리를 맑게 헹구어 주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숲에 끌린다고 한다.
숲의 치유효과를 뒷받침하는 미국 하버드대 윌슨 교수의 ‘바이오필리아’ 가설이다.
피톤치드는 식물이라는 피톤(Phyton)’과 죽인다는 ‘사이드(Cide)’의 합성어다.
피톤치드는 항균, 항산화, 항염증 작용을 하고 말초혈관과 심폐기능을 강화해 천식과 폐 건강에 좋다.
피톤치드가 많은 나무는 편백나무, 구상나무, 삼나무, 화백나무, 전나무 등이다.
숲의 음이온은 신체적, 정서적 이완 효과가 크다.
정서적 안정을 주는 알파파가 증가한다.
숲의 소리는 신경 안정 효과가 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줄인다.
이러한 여러 가지 효능들이 벼리를 감싸고 벼리를 맑게 힘을 주었다.
사람들이 미용을 위해 원적외선 캡슐 속에 들어가면 피로가 회복되고 피부 미용에 좋은 것처럼 랜디가 주는 숲효과는 벼리를 짧은 시간 몸을 편안하게 도와줬다.
벼리는 사실 정원에 있는 동안 많이 긴장했다.
랜디는 아마도 그런 벼리의 긴장을 풀어준 것이었다.
그런데 랜디는 벼리가 블르문 가든에 들어간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담벼락 앞에 서 있었다.
벼리가 나오는 것을 들키지 않게 도와주려는 것 같았다.
“랜디, 제가 이곳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꽃들의 오라버니라는 말을 믿지 않는구나. 그래서...”
“또 꽃들의 오라버니라고...”
“하하, 믿거나 말거나지. 그런데 벼리야, 난 네가 꽃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대할 거지? 도와줄 거지?”
“제가 뭔가를 할 수 있을까요?”
“넌 할 수 있어. 해야만 해. 너의 운명이야. 네가 도와줘야만 꽃들의 눈물이 끝날 거야.”
“랜디, 왜 꽃들에게 눈물이 있어요? 예쁜 꽃들이 왜 슬퍼요?”
“꽃이 슬프다는 것은 슬픈 인간의 영혼 때문일 거야. 슬픈 영혼의 인간을 찾아서 도와줘야만 해. 나는 그저 지켜보는 존재일 뿐이야. 뭔가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벼리, 너 뿐이야.”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랜디는 한참동안 말을 아꼈다.
그러다 어렵게 말을 이었다.
“벼리, 이건 아주 어려운 일인데.”
“괜찮아요. 말씀해 보세요.”
“넌 이제 블루문 가든을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어.”
“지금처럼 몰래 들어가면 되지 않을까요?”
“안 돼. 네가 정원에 들어간 것을 그린섬 대표가 봤어. 이미 알고 있어.”
“정말요? 전 보지 못했는데... 그럼 어떻게 해요? 구골나무의 눈물을 보셨어요? 그 눈물의 사연을 들어보셨어요?”
“...........”
“구골나무가 제게 부탁했어요. 향기를 잃은 아이를 찾아달라고. 그 아이를 찾아서 향기를 찾아 주라고. 그러지 않으면 절대 꽃을 피울 수 없대요.”
“.......”
“향기를 잃은 아이에 대해 이야기 해주기로 했어요. 전 정원에 들어가야 해요.”
“벼리야. 하지만 이젠 들어갈 수 없을 거야.”
“지금처럼 몰래..... 안 될까요?”
“네가 들어갈 수 있는 모든 통로를 차단할 거야. 물론 쥐똥나무나 담쟁이도 널 위해 문을 열어주지 못할 거야. 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고 콘크리트 담을 세운다고 했거든.”
“쥐똥나무와 담쟁이를 모두 베어버린다고요?”
“네가 다시 정원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해야 정원에 들어갈 수 있어요? 어떻게 해야 담장의 나무들을 지킬 수 있어요?”
“재인이 너에게 어떤 제안을 할 거야.”
“어떤 제안요? 왜 제게 제안을 하죠?”
“넌 제안을 들어야만 할 거야. 네가 안한다면 안 해도 돼. 다만 담장의 나무들은 사라질 것이고 구골나무의 눈물도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거야.”
“안 돼요. 무조건 들을 거예요. 그럼요, 들어야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요. 전 나무의 슬픔을 외면할 수 없어요.”
랜디는 벼리에게 재인의 제의를 들어야 한다는 말을 했었다.
벼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재인이 자기에게 제안할 무언가가 무엇일지 알 수 없었다.
건물에서 재인이 나오고 있었다.
랜디는 갑자기 가야 한다고 말하더니 사라지고 말았다.
재인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장한 얼굴이었다.
단단히 화가 났거나 단단히 상심한 얼굴이었다.
“교수님, 아니, 대표님, 안녕하세요?”
“벼리, 꽃달 근무 시간 아냐?”
“아, 그게, 좀.. 죄송해요. 잠깐 바깥에 나왔어요. 바로 들어갈게요.”
“아냐. 잠깐 날 따라와.”
재인은 벼리에게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벼리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재인은 화를 내지 않았지만 화가 느껴졌다.
향기를 듣는 벼리로서는 재인의 마음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재인은 꽃달을 지나 어떤 작은 통로를 지나더니 하나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다시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문의 잠금장치는 홍채인식으로 열 수 있었다.
고급보안이 필요한 공간에 사용하는 장치였다.
사람의 홍채는 생후 18개월 이후 완성된 뒤 평생 변하지 않는 특성이 있었다.
홍채 인식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홍채의 패턴을 코드화해 이를 영상 신호로 바꾸어 보안용 인증기술로 이용한 것이다.
재인이 홍채를 가까이 대자 문이 스르르 열렸다.
문은 유리문이었는데 움직임은 견고하고 묵직했다.
문 2개를 지나자 초록빛이 눈에 들어왔다.
블루문 가든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이라던 블루문 가든이었다.
“놀랐지? 이곳에 왜 너를 데리고 왔을까?”
“..........”
재인은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벼리는 답하지 못했다.
벼리의 답을 바라는 질문이 아니었다.
“이곳은 나만의 정원이야. 알고 있지?”
“네? 네....”
“그런데 왜 나의 정원에 들어왔지?”
“어.. 어.. 그게...”
“모를 줄 알았어? 내 정원이야.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재인의 목소리는 무척 냉정했다.
벼리는 꼼짝할 수 없었다.
평소 보지 못한 재인의 모습이었다.
“죄송해요. 그게 사정이 좀 있어서.”
“남의 땅 무단 칩입은 죄인 거 알지?”
“죄송해요. 나쁜 짓을 하려던 것은.....”
“그런 말이 필요해서 이야기 꺼낸 것은 아냐. 내가 벼리에게 제안할 것이 있어.”“제안요?”
랜디가 말했었다.
“재인이 제안을 할 거야.”
“그 제안을 들어야 할 거야.”
벼리는 긴장되었다.
어떤 제안일지 걱정되었다.
“우리 계약연애하자. 그리고 괜찮으면 계약결혼까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계약연애? 계약결혼?’
“왜?”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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