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_연애계약서 양식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16화>
연애계약서 양식
* * * * *
재인은 상견례장에서 나오고 말았다.
뒤에서 무수한 목소리가 재인을 불렀다.
“재인아!”
“오빠!”
재인은 그동안 독립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도 홀로 판단하거나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재인은 자신을 잘 알았다.
자신은 절대 상견례장에서 움직일 수 없는 존재였다.
엄마의 말씀을 떠올렸지만 이미 포기하고 있었다.
재인을 옴짝달싹할 수 없게 하는 중압감은 너무 컸다.
재인은 거부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니까 당연히 그 자리에 있어야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재인의 앞으로 푸른 바람 한 자락이 지나는 것 같았다.
상견례장은 바람이 지날 만한 곳이 아니었다.
실외가 아니었다.
고급 호텔은 에어컨 바람조차 정제되어 바람이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무언가를 흔들지 않고도 바람이 스쳤다.
재인으로선 알 수 없는 감각의 느낌이었다.
향기였다.
재인에게서 실종된, 삭제된 향기가 재인을 스쳤다.
갑자기 블루문 가든이 떠올랐다.
재인은 갑자기 블루문 가든에 가봐야 했다.
가야 한다는 절박한 생각이 재인을 사로잡았다.
향기를 찾아야 했다.
상견례장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은 그 자리를 거부하는 힘으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거부가 아닌 무언가 하고 싶다는 강렬함이었다.
‘향기를 만나고 싶어.’
재인에게 뭔가를 하고 싶다는 것은 허락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재인의 가슴에서 향기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꿈틀거리자 걷잡을 수 없는 일이 생겨났다.
사람을 움직이게 할 때는 두 가지 요소의 작용이 크다.
부정적인 힘과 긍정적인 힘이 그것이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일에 대해 행동하게 하는 것은 부정적인 힘이 더 크게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에 대해 ‘좋아, 그래.’ 라고 하는 것보다 ‘싫어, 아냐.’ 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인은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을 따라서 그린섬으로 향했다.
재인은 자신에게 잠깐 스친 향기의 기억은 엄마의 부름인 것만 같았다.
그린섬의 펜트하우스로 올라갔다.
펜트하우스에서 블루문 가든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 졌다.
펜트하우스의 재인의 방은 블루문 가든이 잘 보이도록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
재인은 마음이 복잡해서 블루믄 가든을 내려다 봤다.
그런데 누군가 있었다.
자신의 나무 곁에 누군가 있었다.
벼리였다.
블루문 가든은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벼리가 다시 또 정원에 들어가 있었다.
자신의 정원에 벼리가 어떻게 들어간 것인지 이제는 따져봐야 했다.
정신없이 내려갔다.
재인이 1층으로 내려와 블루문 가든으로 갔다.
벼리는 보이지 않았다.
재인은 그린섬 밖으로 나갔다.
지난번처럼 블루문 가든 담 쪽에 벼리가 있었다.
처음 재인은 벼리의 정원 출입에 대해 경고할 셈이었다.
나무를 둘러싼 담장이 정원의 출입을 막아주는 역할을 못한다면 모두 콘크리트의 육중한 담으로 바꿀 셈이었다.
그러다 벼리를 맞닥뜨린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재인은 벼리를 블루문 가든의 비밀통로로 데리고 갔다.
“결혼할 사람 따로 있어!”
상견례장에서 나올 때는 무슨 정신이었는지 몰랐지만 이 말을 어떻게 책임질까 눈앞이 캄캄했다.
“우리 계약연애하자. 그리고 괜찮으면 계약결혼까지!”
재인을 보고서 한달음에 쏟아버렸다.
계약연애와 계약결혼을.
랜디는 재인의 제안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벼리는 그 제안으로 계약연애니, 결혼이니, 라는 말이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벼리의 머릿속으로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자신이 정원에 드나드는 것을 아는 재인은 앞으로 그린섬 빌딩 출입을 못하게 할 것이었다.
출입을 금하기 위해 높은 콘크리트 담을 칠 것이었다.
정원의 출입금지는 물론이고 꽃달의 출입 또한 금할 것이었다.
“좋아요. 대표님. 우리 계약연애해요.”
“정말?”
“제가 계약연애 한다는데 놀라시네요. 혹시 그냥 던져본 말씀은 아니시죠?”
“그럴 리가.”
재인은 대답과 다르게 많이 놀랐다.
설마 쉽게 답을 하리라 기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약연애를 하면 저에게 뭐가 좋은 거죠?”
“내 말에 바로 답을 한 것은 벼리도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 아냐?”
재인은 벼리가 원하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가 이곳 정원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리고...”
“그리고? 말해 봐.”
“........ 아니에요. 대표님도 말씀해 보세요. 저에게 뭘 바라는 거죠?
재인은 원래 계획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나름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음에 안도했다.
상견례장을 나오긴 했으나 후폭풍이 두려웠었다.
대유그룹에서의 입지가 적은 재인이었다.
재인이 벼리에게 요구한 것은 무모하게 던진 제안이었다.
재인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갑자기 결혼해야 돼. 결혼할 사람이 필요해. 일단 계약연애를 하고 계약결혼을 하면 좋겠어.”
“그런데 왜 저예요?”
“지금 넌 나의 정원에 오고 싶잖아?”
“겨우, 정원에 오는 걸로 계약연애라고요? 말도 안 돼요.”
“여긴 나 말고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만들어진 공간이야.”
“들었어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라고..... 그런데 정원을 만들었으면 누군가 관심을 갖고 들르면 좋지 않나요? 왜 이렇게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해요?”
“나와 결혼하게 되면 알게 되겠지?”
“............”
재인은 진지하게 말했다.
벼리는 재인의 진지한 대답에 더 이상을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일단, 우린 계약연애에 동의한 거지? 좋아. 계약연애를 하게 된다면, 먼저 우리집에 가자. 가서 연애하는 사이라고 말씀드려야지. 결혼할 거라고도.”
“..........”
“그리고 벼리의 집에도 가야겠지.”
벼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렀다.
이런 전개는 도저히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우리가 정말 계약연애를 하는 건가요? 진짜로?"
"당연하지. 그럼 연애모드로 가볼까?”
“어떤 게 연애모드예요?”
“하하, 나도 연애를 해보지 않아서 잘 몰라. 벼리는 연애를 좀 알아?”
“저야 연애를 잘 모르.. 아니... 연애는 고수죠.”
“다행이다. 그럼 우리 내일아침에 연애에 대해 구체적 방안을 세워 보자.”
“그런 게 필요해요?”
“뭐든, 확실한 게 좋지. 우리가 하는 일 앞에 계약이란 말이 붙잖아. 계약이 있으면 구체적인 계약 내용이 있어야지.”
벼리는 집에 돌아와 눈을 붙일 수 없었다.
계약연애와 계약결혼에 대한 구체적 계약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가야 할 것인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벼리는 꿈속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푸른 숲을 거니는 꿈을 꾸었다.
벼리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벼리 곁으로 멋진 남자가 벼리의 손을 잡고 함께 걷고 있었다.
그런데 벼리가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그 남자의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벼리가 다시 남자의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들면 남자는 꼭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벼리는 밤새 남자의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결국 얼굴을 보지 못하고 아침을 맞고 말았다.
벼리는 이상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은 재인과 계약결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럼 당연히 남자의 얼굴은 재인이어야 했다.
그런데 꿈속의 남자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얼굴을 보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벼리는 침대에 누운 채로 오래도록 생각했다.
아침이 되자 재인에게서 톡이 왔다.
“벼리, 잘 잤어요? 어제는 잘 들어갔어요? 데려다 줬어야 하는데 미안해요.”
계약연애를 하자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너무 다정한 톡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톡에 벼리는 설레기까지 했다.
진짜연애가 아니었다.
그러나 가짜연애라도 다정한 톡은 설레는 법이었다.
당연히 다정한 말투의 답이 날아갔다.
"좋은 아침이에요. 대표님도 잘 잤어요?”
벼리는 톡을 보내고 아차 싶었다.
'뭐야, 잘 잤냐니? 진짜 애인이냐? 바보... 정신 차려.'
자신도 모르게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를 하고 말았다.
“벼리, 괜찮으면 내가 데리러 가도 될까요? 우리 계약연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죠?”
“네. 준비할게요. 그리고 말씀 놓으세요. 연애하는 사이인데.”
다음 답은 조금 더 빨리 왔다.
“ㅋ 벼리도 말 편하게 해. 그럼 30분 후 데리러 갈게.”
벼리는 재인의 빠른 반응에 적잖이 놀랐다.
매우 빠르게 연인 모드 말투로 바뀌었다.
‘이러다 진짜 연애하면 어떡하지?’
벼리는 정신없이 나갈 준비를 했다.
재인이 집 앞에 있었다.
재인이 차 문을 열어줬다.
“그린섬 펜트하우스에 갈 거야. 괜찮지?”
“대표님, 아니, 재인 씨의 집? 자는? 그런 곳 아니에요.”
“맞아. 내가 잠을 자고 사는 집이야.”
“그런 곳에 제가 어떻게 가요?”
“왜? 내가 잡아 먹을까봐? 겁나?”
“설마요, 제가 그런 것에 겁먹을 나이는 아니죠.”
“겁먹을 나이? 뭘 상상하는 거야?”
“상상이라니요?”
“하하, 혹시 펜트하우스에 가면 키스? 뭐 이런 걸 상상하는 거야?”
“어, 무슨 말씀을. 우린 계약연애예요. 진짜 저랑 애인하려는 건 아니죠?”
“걱정하지 마. 우린 분명 선을 분명히 하려고 이렇게 계약서를 쓰려는 거잖아.”
“맞아요. 계약서.”
재인을 따라서 그린섬 펜트하우스로 올라갔다.
“커피?”
“네.”
“연하게? 아이스?”
“어? 다 아시네요. 연하게 해주시고 아이스로 주세요.”
“응, 그 정도는 관심이지.”
재인은 연한 아이스커피를 벼리의 앞에 놓았다.
“마셔, 몸을 깨어나게 할 거야. 아침은 모닝커피가 하루를 상쾌하게 해주지. 나도 모닝커피를 좋아해.”
재인은 벼리가 커피를 마실 때 뭔가를 들고 왔다.
서류가 들어있는 까만 파일 케이스였다.
까만 케이스 안에는 어떤 서류가 들어 있었다.
“벼리, 연애계약서야.”
재인은 미리 준비한 연애계약서를 벼리에게 내밀었다.
벼리는 깜짝 놀랐다.
연애계약서는 어떻게 쓰는 것인가, 라는 생각만으로 아침을 맞았는데 재인은 이미 완벽하게 서류로 만들어 벼리에게 건넸기 때문이었다.
연애계약서는 다음과 같았다.
*** 재인과 벼리의 연애계약서 ***
재인과 벼리는 다음과 같이 계약연애를 약속한다.
1. 기간: 1개월
2. 계약내용
제1조(기간)
연애 기간은 1개월로 하고 1개월이 지난 후 이의가 없으면 계약결혼을 진행한다.
제2조(마음가짐)
- 계약이란 단서를 붙이지만 연애하는 것이므로 상대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에 진심과 최선을 다한다.
- 상대에 대한 마음을 먼저 살피는 배려의 마음을 갖는다.
- 상대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알 수 있도록 표현에 최선을 다한다.
- 사랑함으로써 일상이 더욱 활력이 되고 희망이 배가될 수 있도록 한다.
- 각자 스스로의 삶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더 나은 삶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한다.
- 서로 각자의 삶을 살겠지만 각자가 아닌 함께가 될 수 있도록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서로의 삶을 응원하고 서로에게 위로가 되도록 한다.
제3조(데이트)
- 주말은 항상 함께 보낸다.
- 1주일에 3회 데이트한다.
- 상대가 원할 경우 합의하에 데이트를 추가할 수 있다.
제4조(연락)
- 하루 3회 이상 톡이나 문자를 주고받는다.
- (권장) 사소함으로 관계가 소원한 채 하루를 보낸 날은 다음 날, 서로에게 위로의 인사를 전한다.
제5조(가족인사)
- 매주 일요일 오전은 재인의 집에서 식사한다.
- 매주 일요일 오후는 벼리의 집에서 식사한다.
- 그 외, 행사가 있거나 집안에서 원할 경우, 합의하에 인사를 간다.
제6조(정표)
- 재인과 벼리는 계약연애의 정표로 커플링을 한다.
- 연애 기간 중에는 커플링을 빼지 않는다.
제7조(계약파기)
- 상대에 대한 신뢰가 깨져서 연애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을 경우, 쌍방의 합의가 없어도 계약은 일방적으로 파기될 수 있다.
- 상호 합의 없이 연락하지 않은 기간이 3일 이상 경과할 경우 신뢰 없음으로 간주하고 연애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
제8조(효력발생)
- 위 조항들에 대해 재인과 벼리의 쌍방 동의가 구두가 이루어진 날로부터 그 효력이 발생한다.
당사자: 재인(남) / 벼리(여)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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