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_내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46화>
내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 * * * *
재인은 벼리와 연이, 민수를 모두 초대했다.
기자회견장에서 재인과 주영은 너무도 다정해 보였다.
그렇게 다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일부러 그런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면 벼리를 초대하지 않았어야 했다.
도현이 벼리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도현은 돌아오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 보였다.
무언가 벼리에게 말을 하려는데 아끼는 것 같았다.
도현은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한강 둔치를 바라보며 차를 세웠다.
서울의 도심은 불빛이 살아 있었다.
밤의 강물은 까만 어둠뿐인데 서울의 강물은 아직 불빛들이 살아서 환하게 움직였다.
“벼리 씨...”
“...........”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안될 거예요. 그래도 상황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
벼리는 말없이 차 안에서 바깥의 보이지 않는 강물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쿠아리움에서 바다의 꿈을 기억하던 벨루가의 물방울 도넛이 떠올랐다.
물방울 도넛의 소용돌이에서 떠밀려 내려올 때는 세상 모든 것을 잊을 것 같더니 지금은 다시 현실에 대한 자각이 벼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주영이가 아버지한테 우주엔터테인먼트 사업을 맡게 해달라고 떼를 썼나 봐요. 사실 주영이는 경영에 대해 아는 게 없어요. 하지만 기업이라는 것이 거대한 조직이라서 시스템이 있게 마련이고 그 시스템은 뭔가 약간의 문제가 있어도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시스템이란 게 그런 거죠.”
“.........”
“아, 이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고. 주영이가 회사를 맡았어도 경영진들이 있어서 엄청난 충격이 있거나 하지 않을 정도의 시스템을 갖췄다 이런 말이에요. 그래서 주영이가 대표가 된 거예요.”
“...........”
“사실 나도 행사장 가서 알았어요. 오늘 영화 발표하기 전까지 기사가 난 게 하나도 없잖아요. 나도 오늘 거기서 안 거예요.”
“우주가 대유에 투자한 거....”
“아차, 이게 중요한 게 아니죠. 미안. .하여튼 뭐든 벼리 씨 마음에 용서를 구하려고 말을 꺼낸다는게.”
“..............”
“돌아가서 주영이에게 이번 영화 손 떼라고 할게요.”
“............”
“사실, 재인이는 아버지 회사에서 영향력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했어요.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 원래 꿈이었거든요.”
“재인 씨가요?”
“네, 원래 아들들은 모두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해요. 나도 그런 걸요. 나는 인정받기 어려워 바깥으로만 빙빙 돌지만요.”
“............”
“재인이가 예전부터 엔터테인먼트 일을 해보고 싶다고 했었어요. 특히 이번 영화제작하는 푸른수염은 재인이 직접 고른 시나리오예요.”
“그동안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어요.”
“음.. 재인은 영화를 하고 싶어 했어요. 하지만 그것이 원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이지요. 특히 형수가 그 일을 맡고 있었잖아요. 그 형수는 시집올 때 엔터테인먼트사의 지분을 꽤 가져왔어요. 그러니 더더욱 재인이 끼어들 틈이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우주가 투자를 한 거예요?”
“사실 난 주영이 대유에 투자한 줄 몰랐어요. 장난처럼 영화를 제작한다고 하길래, 으레 회사에서 진행하는 것인 줄 알았어요.”
“............”
“아, 우주가 투자한 것은.... 주영은 원래 옛날부터 모든 관심이 재인에게 있었어요. 재인이 뭘 하고 싶어 하는지만 관심이 있었어요. 처음 결혼을 하려고 할 때도 재인이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맡게 하려고 했었어요. 재인이 결혼을 벼리 씨와 하게 되어서 그 일이 무산되었어요.”
“뭐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줄만 알았지 어떤 일에 대해 타당성이나 배려를 평생 고민해 보지 않은 아이에요.”
“재인이 주영과 결혼을 준비할 즈음, 이미 푸른수염 영화에 대한 진행이 있었어요. 재인은 앞에 나서서 영화사업에 뛰어든 것은 아니지만 뒤에서 자신이 선택한 시나리오로 간단한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재인 씨는 늘 하고 싶은 일이 없다고 했어요.”
“아시죠? 재인이가 어떻게 살았는지? 재인은 언제나 무엇도 소망하지 않았어요. 소망하면 더 불행해지니까 소망하지 않는다고 나한테 말한 적이 있었어요. 아주 어릴 때의 이야기였어요.”
“소망하면 불행해진다는......”
“사실 그때의 나도 그랬거든요. 내가 가장 원하던 엄마가 사라졌을 때 깨달았거든요. 소망하면 안 된다는 것을. 그래서 난 내가 소망했었다는 기억까지 모두 지워버렸어요. 그런데 재인이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
“어린 나이였지만 나도 충격이었어요. 내가 무엇을 잊고 사는 것인지. 내가 무엇을 소망했었던 것인지. 그때 깨달았어요. 소망하지는 않더라도 소망했던 꿈은 잊지 말아야지, 이런 생각을 했어요.”
벼리는 도현의 말을 듣는 것이 마음 아팠다.
이 둘은 어떻게 이런 슬픔을 겪었을까 싶었다.
아프지 않기 위해 소망했던 기억도 지우고 소망하는 법도 지워버렸다고 했다.
돌고래 벨루가는 달랐다.
바다를 태어나게 한 태양을 잊지 않기 위해서 물방울 도넛을 계속 만들고 있다고 했었다.
“우리가 이렇게 물방울 도넛을 만드는 것은 태양을 잊지 않기 위해서야. 바다를 태어나게 한 태양을 잊지 않기 위해서.”
누구나 무언가를 잊지 않으려고 했다.
벼리는 재인과의 모든 일들을 기억하고 싶었다.
벼리는 재인과 함께 할 때의 모든 순간이 간절했다.
잊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재인의 사랑이 짧을 것을 알고 그렇게 간절했었나 생각이 들었다.
도현은 주영이 하는 일을 그만 하도록 말한다고 했다.
재인이 아버지에게 어떤 인정을 받고 싶었던 일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본능일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왔다.
재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밤이 다 지나도록 재인은 들어오지 않았다.
벼리는 밤새 머리가 하얗게 되는 것 같았다.
재인에게선 문자도 없었다.
처음엔 화가 났는데 새벽이 되어서는 걱정이 되었다.
벼리는 걱정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새벽이 되어 재인이 들어왔다.
초췌해진 모습으로 들어왔다.
“미안, 일이 좀 있었어. 잠 좀 잘게.”
벼리는 재인이 새벽에 들어와 잠을 잔다고 하자 가슴이 덜컹거렸다.
재인이 침실로 들어가 누웠다.
재인의 창은 커튼이 쳐 있었다.
정원에 새로운 나무가 심긴 것인지 갑자기 불안해졌다.
벼리는 재인을 두고 꽃달로 내려왔다.
꽃달에 랜디가 있었다.
“벼리........”
랜디는 다시 또 활짝 웃고 있었다.
“선물 어땠어? 맘에 들었어?”
“아, 선물, 정말 너무 멋졌어요. 바다에 다녀왔어요. 벨루가는 바다를 태어나게 한 태양을 잊지 않으려고 그렇게 물방울 도넛을 만든대요. 이렇게, 이렇게.”
벼리는 빙글빙글 돌았다.
돌고래가 돌듯이 빙글빙글 돌았다.
벼리가 몸을 빙글 돌리는데 갑자기 벼리 주변으로 물방울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랜디, 어떻게 한 거예요?”
랜디의 머리카락에서 다시 이파리가 돋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랜디는 두 팔을 들어 이파리가 다시 가라앉도록 했다.
“벼리, 물방울 좋지? 오늘은 벨루가 물방울 도넛을 기념해서 물방울로 만족하자.”
“충분해요. 어제도 충분히 특별했어요. 바다에 다녀왔어요.”
“벨루가에게 들었어. 벼리가 자기 스타일이라나 뭐라나. 한 번 더 만날 수 있게 해달래. 그래서 내가 생각해보겠다고 했어.”
“하하, 그러셨어요? 랜디와 있으니 웃음도 나와요.”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내려왔지?”
“네, 재인이 다시 또 새벽에 들어와서 쓰러져 자고 있어요.”
“알아. 그런데 오늘은 정원에 나무가 안 심겼어.”
“그래요? 그런데 재인은 왜....”
“지금 무서운 어떤 일이 벌어지려고 해. 불안한 기운이 정원에 가득해. 나무들이 질식해 쓰러질 것 같아.”
“재인인가요? 무서운 일을 준비하는 사람이?”
“벼리, 믿고 싶지 않겠지만 재인은 이 일에서 중심에 있어. 믿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 일들이 없어지는 게 아냐. 사실은 인정하는 것이 좋아.”
“재인은 왜 이런 수상한 일에 연루된 거예요?”
“그건 벼리가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닐까?”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그것도 물론 벼리가 풀어야 할 숙제겠지?”
“랜디, 저에게 너무 큰 숙제를 주신 거 아닌가요?”
“정원에 가봐. 나무들이 아파. 벼리의 위로가 필요할 거야.”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위로가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살만하기도 해. 사람들이 왜 목숨을 끊는 줄 알아? 위로가 없어서야. 마음 위에 얹어 있는 깃털만큼의 위로라도 만난 사람은 결코 죽지 않아. 그러니 위로가 얼마나 중요해?”
벼리는 꽃달을 나와 담쟁이와 쥐똥나무가 열어주는 문을 통해 정원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랜디가 지켜보는 가운데 들어갔다.
“랜디는 모든 곳에 다 가면서 왜 저기 정원은 못가요?”
“난 꽃과 나무의 기운으로 존재해. 저기 저 정원은 살아있는 기운이 없어. 그래서 난 들어가지 못해. 다만 나무들의 아픈 마음들은 똑같이 느낄 수 있어. 그래서 여기만 오면 가슴이 아파. 이렇게.”
랜디는 흉통이 있는 것처럼 가슴을 잡았다.
아파 보였다.
벼리도 정원에서 만나는 나무들을 보면 마음이 아팠다.
누군가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피어난다고 했다.
그런데 누군가 죽는다면 하늘의 별이 꽃에게로 떨어진다고 했다.
꽃은 별의 영혼을 안고 죽은 영혼을 기억하고 다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고 했다.
어떤 생명이든 시작이 있고 끝이 있었다.
언젠가는 죽게 되고 그 죽음 이후에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이어질 것이었다.
자연의 순리였다.
그런데 그린섬 정원은 자연의 순리에서 뭔가 어긋나 있었다.
누군가 죽으면 꽃이나 나무에게로 그 영혼의 별이 떨어진다고 했다.
누군가 실종됐다.
실종은 죽음을 의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린섬 정원의 나무들은 비밀만 갖고 있을 뿐 비밀을 말하지 않았다.
정원에 들어갔다.
나무들이 몸을 흔들었다.
다른 곳의 꽃과 나무들은 벼리에게 이야기를 했지만 이곳의 나무들은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하지 못했다.
구골나무의 이파리가 지금의 계절이면 윤기가 흐르고 반짝여야 했다.
“구골나무 님, 이파리가 힘이 없어요. 힘내요.”
구골나무를 쓰다듬어 줬다.
나무의 이파리가 생생해져 살아나는 것 같았다.
“랜디가 그랬어요. 위로가 큰 힘이 된다고. 제 작은 위로라도 힘이 되면 좋겠어요.”
구골나무가 조금 더 파릇파릇해졌다.
라일락도 몸을 흔들었다.
여린 몸으로 고운 꽃향기를 품는 대견한 나무였다.
“라일라를 알고 있니?”
라일락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라일라는 어디 있는 거니? 무사한 거니?”
벼리의 묻는 말에 모든 나무들이 몸을 떨었다.
그리고 온몸으로 향기를 뿜었다.
풀이나 나무, 꽃들은 잘리면서도 향기를 뿜었다.
지금 온몸으로 향기를 뿜는 것은 죽을 것 같은 괴로움의 표현일 것이었다.
수국이 곁에 있었다.
눈처럼 하얀 수국꽃이었다.
벼리는 눈송이와 같은 수국꽃을 쓰다듬었다.
“넌 준희 씨를 알고 있니?”
나무들은 괴로운 듯 다시 향기를 뿜었다.
벼리는 나무들이 어떻게 이 정원에 심어졌는지 꼭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원에서 나와 꽃달에 갔다.
재인에게 올라가 보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피곤해 있는 것은 또 마음 아팠다.
이런 복잡한 마음도 싫어서 올라가지 않았다.
꽃달로 주영이 들어왔다.
주영은 무엇을 해도 당당함이 있었다.
청춘이라면 저렇게 당당해야 하나, 잠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쭈뼛거리는 것도 청춘일 것이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청춘을 나아가게 하는 힘이기도 할 것이었다.
“벼리 씨, 박 여사가 벼리 씨 여기 있을 거라 해서 내려왔어요,”
주영은 도무지 걱정되는 일이 없는 이였다.
하고 싶은 일들에 주저가 없는 사람은 일반 사람들과 조금은 다른 부류였다.
주영은 하고 싶은 모든 말들을 쏟아낼 것이었다.
벼리는 말들의 홍수를 감당하기 위해 숨을 잠시 골라야 했다.
‘말들의 홍수쯤이야 괜찮아. 그 말들이 내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참 좋을 거야.’
벼리는 주영의 앞으로 걸어갔다.
벼리도 해야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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