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
독일군의 궁둥이(전선에서 연료 보급소, 식량 배급소, 지휘소, 무기고, 병원 등등이 모여있는 곳)에서 나타샤와 나타샤네 부대원들 마가리타, 뽈리나, 키라, 옥사나는 포로로 잡혀서 잡일을 하게 되었다. 나타샤와 동료들은 잡일을 하게 된 대가로 추가로 초코바와 통조림을 조금씩 더 얻어먹을 수 있었다.
"우물우물"
"잡일까지 하기로 했는데 겨우 이거만 주다니..."
나타샤가 속으로 생각했다.
'잡일이래봤자 우린 여군 포로인데 바느질 정도겠지?'
그 때, 뽈리나가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탈출합니까?"
나타샤는 순간 멈칫했다.
'그걸 나라고 알겠냐?'
"일단 이 곳의 구조를 파악해야 해."
나타샤는 현재 갖혀있는 오두막의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독일군의 궁둥이는 상당히 체계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저 쪽이 무기고 같은데..."
"밥 갔다 주는 파시스트 녀석 옷을 빼앗으면 무기고에서 무기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마가리타의 키가 무척 컸기 때문에 독일군의 옷을 뺏고 슈탈헬름을 쓰면 독일군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근데 우린 독일어 할줄 모르잖아!"
"대충 흉내내면 되지!"
나타샤 일행은 무기고를 예의 주시했다. 독일군 장교 한 명이 무기고로 가더니, 신원 확인 절차를 마치고 무언가에 서명을 한 다음 총 한 자루를 받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옥사나가 말했다.
"저길 터는건 무리겠죠?"
무기고를 지키는 병사들은 기관단총을 들고 있었고, 인근에는 경계 초소 또한 있었다. 혹시나 허튼 짓을 했다가는 기관총, 기관단총 등에 벌집이 될 것이 분명했다. 나타샤는 반대쪽 창문으로 가서 연료 보급소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키라가 말했다.
"독일 놈들은 연료랑 탄약 거의 떨어졌다는데 그런 것 같지도 않네요."
"여기는 비교적 후방 쪽이니 그렇지."
"아무래도 탈출 한다고 쳐도 차와 연료가 없으면 돌아가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때, 독일군은 나타샤 일행이 있는 오두막을 쳐다보았고, 나타샤와 동료들은 모두 창가에서 고개를 숙였다.
"이크!"
나타샤가 머리를 굴렸다.
'아무래도 그냥 탈출하지 않고 전향하는게 좋을 것 같은데...'
그 때, 마가리타가 비장한 눈빛으로 뽈리나, 키라, 옥사나에게 말했다.
"우리 절대로 전향하지 말기로 약속하자."
"당연하지!"
옥사나가 나타샤에게 말했다.
"설령 탈출 못 하더라도 상병님만 믿고 저희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전향하지 않겠습니다!"
"맞아! 전향자가 나오면 죽도록 패줄거야!"
나타샤는 떨떠름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절대 전향은 없다! 우리는 탈출을 위해서 잡일만 하는거..."
그 때, 문이 열리고 슐츠가 들어왔다.
'히익!'
슐츠는 혹여나 소련 여군 포로 관련하여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진급에 엄청난 불이익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직접 이들을 담당하기로 했다.
"따라오시오!"
그렇게 나타샤 일행은 2줄로 서서 슐츠를 따라 갔다. 어렸을 때부터 사격을 했던 뽈리나가 슐츠의 뒷모습을 보며 직감했다.
'이 파시스트 장교는 포로가 뒤에 있는데도 전혀 방심을 안하고 있군!! 이 놈을 인질로 잡으면!'
한편 궁둥이에 있는 독일군들은 이 광경을 보고 수근거렸다.
"저 대위가 세계대전때 한스 파이퍼의 상관이었대!"
"한스 파이퍼가 자기 자신한테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하더군!"
"근데 왜 여기서 포로 감독이나 하는거지?"
슐츠는 나타샤 일행에게 진입로에 철조망 설치하는 일을 시켰다.
"여기에만 철조망을 깔면 된다!"
옥사나가 속으로 생각했다.
'진입로에만 깔라고 하는걸 보니 파시스트 놈들 철조망이 부족한가봐...'
그렇게 나타샤 일행은 덜덜 떨면서 철조망 설치를 해야 했다. 마가리타가 나타샤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탈출은 언제 합니까?"
나타샤가 덜덜 떨며 말했다.
"일단 상황보고..."
철조망을 다 깔자, 슐츠는 나타샤 일행을 데리고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나타샤 일행이 걷고 있는 길 옆에 롤반에서 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궁둥이는 보급 때문에 항상 차량이 많이 오고 갔던 것 이다. 슐츠는 나타샤 일행을 딱히 감시도 하지 않고 총을 들고 걷고 있었다. 마가리타가 나타샤를 툭툭 치고 차도를 가리켰다.
'여기서 빠져나가는 차에 몰래 타서 탈출합시다!'
뽈리나, 키라, 옥사나 모두 나타샤의 눈치를 보았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차량에 올라타서 트럭을 탈취하면 됩니다!'
롤반에서는 계속해서 궁둥이로부터 식량, 연료 등을 운반하는 트럭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타샤는 쫄아서 지금 탈출하고 싶지 않았다.
'이 미친년들이!!'
하지만 다들 탈출하다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 때, 나타샤가 돌부리에 넘어졌다.
퍽!
"악!!"
슐츠가 뒤를 돌아보았다.
"조심하게!"
그 때, 궁둥이에서 빠져나가던 트럭에 타고 있던 한 장교가 슐츠에게 외쳤다. (참고로 슐츠와 동기이다.)
"이보시오!! 포로를 앞세우고 걸어야 하는거 아니오!"
슐츠가 외쳤다.
"아...알고 있소!! 먼저 앞으로 가시오!"
그렇게 나타샤 일행은 두 줄로 서고, 슐츠가 그 뒤에서 총을 들었다. 그러자 트럭에 타고 있던 장교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포로를 데리고 갈 때는 롤반에서 적당히 떨어져서 걸어야 하는거 모르오? 그렇게 롤반 가까이서 걸었다가는 지나가는 차에 타서 도망갈 것 이오!"
슐츠가 콧수염을 꿈틀거렸다.
"나도 알고 있소!"
그렇게 나타샤 일행은 롤반에서 떨어져서 슐츠를 뒤에서 두 줄로 따라갔다. 슐츠는 나타샤 일행에게 두 번째 진입로에도 철조망을 설치하라고 하고, 총을 들고 경계를 보았다. 설치가 다 끝났고 그렇게 나타샤 일행은 오두막으로 돌아와서 몸을 녹이며 음식을 먹었다. 그 때, 창가를 보던 옥사나가 말했다.
"남자 포로다!"
"남자 포로라고?"
1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 포로가 여자 포로 수용소에 같이 넣어졌다. 녀석은 완전히 겁에 질려서 벌벌 떨고 있었다. 옥사나가 궁시렁거렸다.
"질질 짜기는..."
"넌 이름이 뭐야?"
"유리. 통신병이야."
그 유리라는 녀석은 유선을 고치러 나갔다가 매복하고 있던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힌 것 이었다. 녀석은 벙거지 장갑을 벗고는 시꺼멓게 된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이런 시발..."
잠시 뒤, 독일군이 유리를 심문하러 데리러 왔다. 유리는 완전히 겁에 질린 상태로 붙들려나갔다. 뽈리나가 말했다.
"쟤 왠지 다 불 것 같은데..."
키라가 외쳤다.
"설마."
한 시간 쯤 뒤, 유리가 고개를 숙인 채로 다시 여군들이 있는 포로 수용소에 넣어졌다. 유리의 손가락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리고 유리에게는 뜨끈하게 뎁혀진 고기 통조림이 주워졌다. 유리는 허겁지겁 그 고기 통조림을 먹어치웠다. 나타샤는 이 광경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꿀꺽!'
마가리타가 유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왜 파시스트가 네 놈에게 고기 통조림을 준거지?"
유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고기 통조림을 모두 먹어치웠다.
"우물우물"
마가리타가 외쳤다.
"말해! 왜 독일군에 네 놈한테만 고기 통조림을 주었냐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 망할 계집애...악!"
투포환 선수 출신의 거구의 마가리타는 유리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렸다.
"으윽!!"
마가리타가 유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파시스트에게 정보라도 넘긴건가?"
유리가 외쳤다.
"놓으라고!!"
유리가 소리를 지르자 바깥에서 보초를 서던 독일군이 외쳤다.
"거기 아가리 닥쳐!!"
마가리타가 유리의 멱살을 놓았다. 뽈리나, 키라, 옥사나 또한 유리를 노려보았다. 유리가 항변했다.
"뭐 시발! 나는 3일 동안 아무 것도 못 먹었다고! 이대로 있다간 난 손가락도 절단해야할거야!! 스탈린 그 시발놈이 나한테 뭘 해줬다고!!"
옥사나가 유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 너만 배고픈줄 알아? 다들 배고파! 하지만 지금까지도 동료들은 목숨걸고 싸우고 있는데 그딴 통조림 쪼가리 때문에 동료들을 배신해?"
"닥쳐!! 시발!!"
유리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나는 조만간 후방 쪽으로 보내져서 치료도 받고 농지 복원에 투입될거야. 너네들도 솔직히 고기 통조림 먹고 싶은거 아냐?"
유리는 고기 통조림 뚜껑까지 혀로 싹싹 핥으면서 말했다.
"괜히 체면 생각하느라 멍청한 짓 하지 말고 현명하게 판단하는게 좋을거야. 어차피 전쟁의 승패는 나 같은 알보병이 정보 하나 덜 누설한다고 바뀌는게 아냐."
유리는 그렇게 통조림을 남김없이 먹고 난로 앞에서 몸을 녹였다. 참다 못한 옥사나와 마가리타가 유리에게 달려들었다.
"이 새끼가!!!"
그 때 오두막의 문이 덜컹 열리고 독일군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외쳤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그 독일군은 가만히 앉아 있는 나타샤에게 러시아어로 말했다.
"너가 여기서 계급이 제일 높다고 들었는데 아무 것도 안하냐?"
나타샤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독일군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본 다음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 때 나타샤가 물었다.
"잠깐만요!"
나타샤가 주저하다가 물었다.
"혹시 총상을 입은 상태로 포로로 잡히면 치료를 받을 수 있나요? 전향을 하지 않더라도..."
그 독일군이 러시아어로 말했다.
"독일군은 제네바법에 의하여 포로들을 치료해준다! 살아있다면 적절한 의료 조치를 받을 수 있을 것 이다!"
독일군이 나가고 나타샤는 안심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다행이다...크세니야는 아마 지금 치료를 받았겠지?'
몇 시간 뒤, 유리는 더 후방으로 가게 되었다. 유리는 그거 보라는 표정으로 나타샤 일행을 쳐다보고는 오두막 밖으로 나갔다. 나타샤는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전향한 새끼는 이제 편하게 지낼텐데 난 여기서 뭐야!!!'
독일 병사가 와서 빵 한조각을 나눠준 다음이 외쳤다.
"1시부터 또 철조망 설치 작업 들어가니 쉬고 있게!"
키라가 허겁지겁 빵 조각을 먹은 다음에 울분을 터트렸다.
"세상에 정의가 있는 겁니까!"
쥐꼬리만한 빵 조각을 들고 슐츠가 들어와서 외쳤다.
"어떤가! 일은 할만하지?"
나타샤 일행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슐츠는 뿌듯했다.
"독일 제국은 제네바 협정을 준수하며, 포로들에게도 후한 대우를 해주고 있소! 언제던지 전향할 수 있으니 원하면 말만 하시오!"
포로들이 많이 전향할수록 진급에도 유리할 것 이었다. 슐츠는 이번에는 좀 멀리 있는 진입로로 가서 철조망을 설치해야 한다고 했다.
"이번에는 트럭을 타고 갈 것이오!"
트럭이라는 말에 나타샤가 속으로 생각했다.
'트럭?'
어쩌면 트럭을 갈취하는데 성공하면 무사히 탈출할 수도 있을 것 이다. 나타샤가 고민했다.
'어...어차피 트럭 탈취하고 도망가는데 성공해도 다시 싸워야 할텐데...그냥 여기서 잡일이나 하는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마가리타, 옥사나, 뽈리나, 키라는 모두 트럭을 탈취하기로 결심을 한 것이 분명했다. 나타샤가 속으로 생각했다.
'제발 저 년들이 허튼 짓 안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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