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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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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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능이 되어볼까 합니다. (3)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로버트가 여자 친구 제인과 그녀의 집 앞에서 심하게 다투고 있다.

둘의 감정이 점점 격해진다.

급기야 제인은 이별을 통보한다.

로버트는 매정한 그녀에게 실망하는 한편 자신의 옹졸한 행태를 반성한다.

하지만 학교 식당에서, 주차장에서, 동네에서 자신을 모른 채 하는 제인의 모습에 로버트는 큰 충격을 받는다.

실의에 빠져있는 로버트를 보다 못한 아버지가 그를 불러 대화를 나눈다.

아버지의 취미는 홈비디오 제작이다.

아들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삶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중이다.

아버지의 충고로 인해 로버트가 마음 바꾼다.

여자 친구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다.

제인의 집으로 찾아가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며 둘이 행복했던 시간을 상기시킨다.

그녀의 마음을 돌기에는 역부족이다.

도리어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화가 난 동네 할머니에게 혼이 난다.

이대로 포기할 가보냐.

다음날은 근사하게 차려입고, 꽃다발을 들고 찾아가 데이트를 신청한다.

매몰차게 거절당한다.

로버트가 제인의 집 앞을 서성거린다.

제인은 스케치북에 ‘포기해’를 써서 창문에 걸어놓는다.

로버트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밤중에 그녀의 집 창가에서 기타를 치며 세레나데를 부르기도 하고, 그녀의 책상에 매일 꽃을 한 송이를 가져다 놓는다.

로버트는 제인이 창가에 모습을 드러내면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별 짓을 다 벌이지만, 제인은 로버트가 선물한 물건들을 집어 던지며 매몰차게 ‘꺼져’라고 말한다.

그녀가 자신에게 스케치북에 ‘포기해’를 쓴 것처럼, 로버트는 미리 준비해간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며(러브 액츄얼리처럼) 자신의 마음을 전해본다.

‘너는 내게 완벽한 여자야’, ‘가슴 아파도 너를 사랑할거야’. ‘내게서 떠나지 말아줘’ 등을 보여준다.

제인은 여전히 싸늘하게 집 현관문을 닫아버린다.

마치 완전히 로버트에게서 마음의 문을 닫았다는 듯.

제인의 집 현관 앞에 떨어져 있는 스케치북.

로버트가 미처 보여주지 못한 스케치북의 글귀.


‘제발’


아버지는 실의에 빠져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모종의 결심을 하게 된다.

며칠 후 제인의 집으로 소포가 배달된다.

소포 속에는 비디오테이프가 들어가 있다.

동봉 된 메모에는 로버트 아버지의 메시지가 들어있다.

제인이 보게 된 비디오에는 로버트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아버지가 촬영한 영상의 일부가 들어있고, 마지막에는 여자 친구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로버트가 노력했던 모습들이 담겨있다.

기타연습을 한다던가, 스케치북에 문구를 작성하기 위해 수많은 글귀를 쓰고 버리고 하는 과정이라던가, 비에 홀딱 젖어서 집에 들어오는 모습이라던가....

아버지를 향해 마음을 털어놓는 로버트의 진심어린 말도 담겨있다.

제인은 곧장 집을 뛰쳐나간다.

로버트의 집으로 달려간다.

로버트가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제인은 다짜고짜 로버트에게 키스를 퍼붓는다.

‘미안해’‘사랑해’‘내가 더 사랑해’ 따위의 오글거리는 대화가 오가는 그들 너머로 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둘의 시선을 받은 아버지는 능청스럽게 ‘WHAT?" 이라며 어깨를 으쓱한다.

로버트가 제인에게 키스를 퍼부으며 아버지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운다.

뜨겁게 포옹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동그란 원 안으로 아이리스 아웃되면서 영화가 끝이 난다.

쉐인 에이커가 찍을 예정인 단편영화의 줄거리다.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시나리오에 담았다고 했다.

친구들은 영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스테디캠 촬영을 어떤 씬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할 뿐.

스케치북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한 장씩 넘기는 장면은 류지호가 제안한 것이다.

미래에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하게 되는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그 스케치북 씬이다.


“이 스크립트는 스테디캠을 위해 탄생한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안 돼! 싫어!”


쉐인이 완강히 거부했다.


“딴 사람 알아봐.”

“맞아. 우린 안 해.”

“미안해, 쉐인. 흥미가 떨어졌어.”


결국 쉐인은 4학년들의 협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류지호는 그들이 벌이는 신경전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가 보기에도 쉐인의 영화는 심심했다.

재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하다는 뜻이다.

TV시트콤과 영화는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그것이 로맨틱 장르라고 할지라도.

기본적인 촬영기법과 편집으로 편안하고 안정적인 영화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런데 명색이 영화과 학생이 필름작업이라는 소중한 기회를 홈비디오 찍 듯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로맨스 영화이기 때문에 미술이나 조명으로 뭔가를 만들어 낼 수도 없다.

헌데 스릴러나 공포영화에나 쓸 법한 스테디캠이 로맨스 장르에 적용되면서.


“영화같이 나왔네.”


편집된 영화를 감상한 로이의 평가다.

쉐인의 단편영화에 참가했던 학생들이 예술대학 극장에 모여 완성된 영화를 감상한 후 감상을 내놓았다.


“12분이 3분 같이 느껴졌어.”

“확실히 좁은 실내에서 스테디캠이 유용한 것 같아.”

“주차장 씬은 굉장해.”

“쉐인, 우리에게 고마워해라. 네 콘티대로 찍었으면 고등학생 영화처럼 보였을 거야.”


스테디캠을 이용한 동적인 앵글이 만들어지자, 다소 심심한 영화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주차장이나 학교 식당 등 시퀀스에서 스테디캠이 공간을 휘젓고 다녔다.

그로 인해 소소한 이야기로 자칫 작아 보일 수 있는 영화에 스케일감이 생겼다.


‘애매하네.’


반면에 류지호는 약간 모호한 느낌이 들었다.

본래 영화가 가지고 있는 정서와 스테디캠으로 찍은 장면들이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편집실에서 볼 때는 크게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헌데 편집한 영상을 극장 스크린 사이즈로 보자, 12분 분량의 소박한 이야기와 동적인 스테디캠 영상 사이에서 덜컥거리는 느낌이 든 것이다.

몇 개 장면은 보는 재미가 있었다.

로버트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차에서 내려 걸어가는 걸 스테디캠으로 따르다가, 제인과 마주치게 되고, 그녀의 외면을 받는 로버트의 실망한 얼굴에서 카메라는 제인의 뒷모습을 따라가고, 이어 그녀의 얼굴에서 마무리하는 롱테이크는 꽤 잘 나왔다.

둘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를 보여주는 대신 스테디캠을 이용한 시점 이동으로 둘의 관계가 틀어졌음을 보여주는 연출이다.

엔딩에서 현관을 향해 걸어가는 로버트의 정면을 스테디캠이 따라가다가 집 밖으로 카메라가 완전히 빠져나오면 제인이 다짜고짜 키스를 퍼붓는 것도 좋았다.

로버트와 제인의 커트를 따로 찍어 편집한 것이 아니라 원 씬 원 커트 느낌으로 처리하자, 그녀가 다시 돌아온 것이 깜짝 쇼처럼 느껴졌다.

그것들만 따로 떼어 놓고 보면 그랬다.

그런 커트들이 정서적인 몽타주와 연결되는 편집이 자연스럽지가 않아 보였다.


위이잉.

딸깍.


류지호는 쉐인의 영화를 다시 편집했다.

원래 감독이 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중요한 장면에서 사용된 스테디캠 커트를 제외하고 멋 부리기 위해 사용된 커트들을 덜어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러닝타임이 1분가량 줄어들었다.

로버트와 제인의 미묘한 감정을 보여주는 커트의 길이를 조금씩 조정했다.


똑똑.


누군가 편집실 문을 노크했다.

류지호가 편집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몸 이곳저곳이 찌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교수님?”


레이먼드 교수가 문가에 서있었다.


“아직도 편집을 하고 있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서요.”

“내가 좀 봐도 되겠나?”

“들어오세요.”


류지호는 레이먼드 교수와 나란히 스틴백(steenbeck)에 앉았다.


“교수님, 지금 커트 길이 어떻습니까?”

“좋네.”

“아버지 다이얼로그를 로버트 얼굴에 보이스 오버로 처리하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훌륭하군.”


류지호는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대고 앉은 레이먼드 교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칭찬을 듣고 싶어서 질문하는 게 아닙니다만?”


레이먼드 교수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능숙하군. 편집을 많이 해봤나?”

“스무 편 가량 작업을 하다 보니 손이 빨라지더군요. 한국에서도 몇 번 만져봤고요.”

“TFT 출신중에 길종 하라고 있었지.”

“한국에서 오신 분이죠. 제 조국의 많은 영화학도들이 존경하는 분입니다.”

“그는 정말 굉장한 사람이었어. 그가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할리우드에 남았으면 함께 졸업한 코폴라가 찍은 영화 못지않게 해냈을 거야.”

“그랬을까요?”

“미스터 하는 추구하는 바도 남달랐지만, 성적도 아주 우수했다고 하지.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수석을 놓친 적이 없었으니까.”

“그 정도셨을 줄은 몰랐네요.”

“난 자네도 미스터 하 못지않은 전설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하나야.”

“그럴 리가요.”


류지호는 UCLA에서 큰 욕심이 없었다.

그저 다양한 영화작업을 해보고, 안전하게 졸업하고 싶을 뿐.


“시험은 잘 봤나?”

“그럭저럭 패스는 할 거 같습니다.”


류지호는 2학년 가을 학기 중간고사에서 겨우겨우 B학점을 받는데 성공했다.


“대학생활의 리듬이 깨지는 것에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군.”

“매일 밤 술 마시고, 방탕한 대학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좋은 것 아닙니까?”

“놀 때는 화끈하게 놀 줄 알아야 하지. 대학에서는 학생에게 길을 제시할 뿐이지 가르치지 않으니까.”

“잘 노는 학생이 성적도 우수하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저는 이게 노는 겁니다.”


레이먼드 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워커홀릭은 확정이군.”

“이런 행위를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취미이기도 합니다. 재미있습니다.”

“연출 전공을 생각하는 걸로 알고 있네. 물론 우리 학교의 방침은 만능을 양성하는데 있지. 최대한 다양한 영화분야를 경험해보고, 글도 쓸 줄 알고, 촬영도 할 줄 알고, 연출도 알고, 프로덕션 디자인도 할 줄 아는. 이곳을 졸업한 학생은 할리우드에서 무슨 직업을 가지게 될지 몰라. 따라서 우리는 가능한 많은 걸 해보길 권하지. 하지만 자네는 달라.”

“다른 학생들과 입장은 같습니다.”

“자네는 지금 당장 현장으로 나가 어시스턴트로 일을 해도 될 정도야. 그 만큼 기술을 익힐 필요가 없다는 거지.”

“기술을 숙련시키려고 다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미친 듯이 영화에 참여하는 이유가 뭔가?”

“스태프들과 소통하는 방법, 영화작업을 하며 대면하게 될 각 분야의 딜레마, 연출만 하면 알 수 없는 협업자들의 고충. 그런 것들을 알고 싶습니다. 프로의 세계로 나가면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요.”

“자네는 가족 같은 스태프를 원하나?”

“딱히....”

“할리우드 시스템을 거부하는 독립영화 감독이 되고 싶은가?”


류지호가 웃으며 농담으로 대꾸했다.


“하하. UCLA의 가르침대로 만능이 되어볼까 합니다.”

“행운을 비네.”

“교수님, 저는 이때가 아니면 도저히 찍지 못할 것들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에서의 4년은 제 인생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생각보다 짧죠. 그렇다면 새로운 뭔가를 찾는 것에서 더 나아가 영화 만드는 방법 그 자체에 대한 회의와 질문. 이 시기에 그걸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네는 못 말리겠군.”


레이먼드 교수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꽤 놀랐다.

대가들은 보통 자기 세계를 실컷 영화에서 풀어놓고, 어느 시점에 가서야 영화의 본질에 의문을 갖는다.

많은 영화이론가들도 고민하는 부분이다.

영화란 무엇인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있을까.

하나 남은 것이 조지프 루카스가 기회만 되면 주창하는 디지털 시네마 정도.

그런 걸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해보는 거라면 그 또한 재능이다.

레이먼드 교수의 오해다.

류지호는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뭔가 대단한 걸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전 삶부터 쌓인 관념.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성공한 남들의 영화들.

그 모든 것들이 류지호의 창의력을 제한하는 틀이다.

그것으로부터 독립해 자신만의 것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교수님. 무슨 생각하십니까?”


류지호의 목소리로 인해 레이먼드 교수가 생각을 멈췄다.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자네들 촬영장에 가 봐도 되겠나?”

“언제든지 오십시오.”


레이먼드 교수는 그런 류지호의 어깨를 투덕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너무 무리하지 말게. 자네에게 남은 시간은 많아.”

“......”


류지호는 대답을 아꼈다.

단 한번 뿐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류지호는 아니다.

한번 살아보니 알 것 같다.

인생은 결코 길지 않다는 걸.

그 짧은 인생에서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전에는 가져보지 못한 부와 명예, 지위도 누려보면서.


❉ ❉ ❉


류지호가 스테디캠 특화로 찍으려던 단편영화는 흑인 빈민가에 살고 있는 12살 소년의 하루 일상을 쫒아가는 이야기다.

워킹타이틀은 <그림자>.

소년 후레쉬(Fresh)는 LA한인타운에 인접한 사우스 센트럴 LA 플로렌스 빈민가에 살고 있다.

엄마는 오래 전에 죽었다.

마약중독자 아빠는 노숙자로 행콕 파크를 떠돌고 있다.

따라서 소년 후레쉬는 이모와 함께 살고 있다.

이모는 갱단원인 남편의 강요로 매춘을 하고 있었고, 무려 8명의 자녀를 양육하고 있다.

8명의 자녀안에는 언니의 아들인 후레쉬도 포함된다.

돼지우리 같은 좁은 아파트에 8명의 사촌과 엉켜서 잠을 잔다.

거실 이곳저곳에 총알이 굴러다니고, 마약 가루가 보이고, 술병이 굴러다닌다.

후레쉬의 아침은 이모부의 고함으로 시작한다.

후레쉬는 악마 같은 이모부가 이모를 구타하고 욕하는 소리에 이골이 나있다.

더럽고 악취 나는 욕실에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나면, 이모부가 후레쉬에게 심부름을 시킨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는다.

때문에 후레쉬는 임무를 반드시 완수해야만 한다.

아침부터 이모는 누군가의 배아래 깔려 교성인지 고통인지 모를 신음을 흘려댄다.

이모부가 던져주는 책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집을 나설 때 후레쉬는 문득 이모부 홀로 생활하는 방을 돌아본다.

아침댓바람부터 마약을 하고 있다.

집을 나선 후레쉬는 주로 흑인들이 모여사는 빈민가를 가로질러 간다.

곳곳에는 의욕 없고, 비루한 흑인만 보일 뿐.


꼬르륵.


후레쉬는 배가 고프다.

어제 점심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폭군 이모부는 후레쉬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먹을 걸 내주는 법이 없다.

저 앞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마트가 보인다.

할머니가 운영하는 저 마트는 이 동네 갱단원의 아지트다.

저 마트에서 갱단원들은 거리낌 없이 맥주를 꺼내 마시고, 먹을거리를 집어 먹는다.

자신도 자랑스러운 이 지역의 어린 갱단원이다.

못할 것도 없다.

한인 마트로 들어가니 여지없이 노란 피부의 할머니가 두꺼운 방탄유리 너머 카운터에 앉아있다.

건들거리는 지역 불량배 형들도 몇 명 보인다.

후레쉬는 슬그머니 초콜릿 바 몇 개를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불량배 형들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 지들끼리 낄낄댄다.


[할머니, 살 게 없어요. 다음에 올 게요.]


통할 리가 없다.

한국인 할머니는 카운터를 빠져나와 아무 말도 없이 후레쉬에게 손을 내민다.

후레쉬는 짐짓 뻔뻔스럽게 굴어본다.

할머니는 요지부동이다.

후레쉬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훔친 물건들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온다.

한국인 할머니가 후레쉬에 손에 동 전 몇 개를 쥐어준다.


[뭐예요?]


한국인 할머니는 말없이 후레쉬가 챙긴 걸 가져오라고 손짓한다.

멀뚱히 그런 한국인 할머니를 바라보던 후레쉬가 이내 말뜻을 알아듣는다.

내가 돈을 주었으니, 그 돈으로 먹고 싶은 걸 사먹어라.

훔치는 대신 돈으로 물건의 갚을 지불하는 법을 배우라는 의미리라.

후레쉬는 고민한다.

자신은 거지가 아니다.

구걸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후레쉬는 너무 배가 고팠다.

후레쉬는 한국인 할머니 사장이 준 돈을 지불하고 초콜릿 바를 산다.


[저는 거지가 아니에요. 나중에 꼭 갚을 게요.]


후레쉬가 마트를 빠져나가려는데 불량배 형이 불러 세운다.

그리고 나중에 갚고 싶다면 장부에 쓰고 가라고 한다.

한국인 할머니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이 하는 행동에 관심도 없다.

후레쉬가 펼쳐본 외상장부에는 자신도 이름이 익숙한 불량배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이름 밑으로 금액들이 각기 다른 필체로 기입되어 있다.

금액에 검은 줄이 그어진 것은 갚았다는 의미리라.

헌데 사람 이름에 붉은 펜으로 X 표시가 되어있는 것이 보인다.

외상 장부로 안내한 불량배 형이 친절하게 알려준다.


[외상값을 갚을 수 없는 놈들.]

[갚지도 않을 거면서 왜 여기에 썼어?]

[갚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갚을 수 없다고. 그 새끼들 다 뒈졌으니까.]


후레쉬는 한국인 할머니를 돌아본다.

그녀는 장부 따위는 여전히 관심도 없다.


[나 대신 이름 좀 써줘.]


후레쉬는 12살임에도 자기 이름조차 쓸 줄 모른다.

한인 마트를 나온 후레쉬는 계속해서 길을 걸어간다.

농구를 하는 흑인 청년들, 마약에 중독되어 좀비처럼 거리를 배회하는 어른, 더럽고 낡은 소파에 앉아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 허리춤에 권총을 차고 활보하는 지역 갱단원 등.

이 동네는 한 톨 희망조차 없어 보인다.

후레쉬는 흑인 동네를 지나 히스패닉 거주지로 향한다.

경찰 순찰차는 어린 후레쉬를 무신경하게 지나쳐 간다.

후레쉬는 익숙한 듯 낡은 주택의 문을 두드린다.


탕탕탕!


느닷없이 주택 안에서 총성이 들려온다.

총 몇 발 쏘는 수준이 아니라, 총격전 수준의 소음이다.

후레쉬는 얼어붙는다.


덜컹!


문이 열리며 피 흘리는 히스패닉 청년이 튀어나온다.

후레쉬의 바지가 젖는다.

오줌을 지린 것이다.

히스패닉 청년이 거칠게 후레쉬가 메고 있는 가방을 낚아챈다.

가방을 열어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다.

마약 몇 봉지가 들어있다.

히스패닉 청년이 절뚝거리며 주택에서 황급히 멀어진다.

홀로 남겨진 후레쉬의 눈에 주택 내부의 모습이 들어온다.

피.

떨어져 나간 살점.

눈을 부릅뜨고 죽어있는 남자....

후레쉬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억지로 그 곳을 떠난다.

히스패닉 마을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에 주머니에 넣어둔 초콜릿 바가 생각난다.

봉지를 벗겨 한 입 깨문다.

달콤하다.

마약을 빼앗긴 걸 이모부에게 어떻게 변명할 것인 걱정이 한 순간에 날아갈 버릴 만큼.

류지호는 여기서 영화를 끝내려고 했다.

그래선 안 될 것 같은 아쉬움이 남았다.


“미안해. 스크립트를 새로 쓸 생각이야.”


류지호는 스태프와 배우로 출연할 이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단 한국인 할머니로 출연한 노인은 제외되었다.

한국인으로 출연한 할머니는 일본계 배우였다.

연기경력이 좀 되는 노인 배우를 급하게 섭외하다보니 한국인 출신 배우를 찾지 못했다.

영화기획 방향이 대폭 변경됨으로 해서 캐스팅을 새롭게 하기로 했다.

류지호는 단편을 찍으면서 낭비 없는 촬영에 강박적으로 임했다.

정확하게 계산되었거나 계획된 촬영을 하길 원했다.

일종의 할리우드 시스템에 대한 적응훈련이다.

돌발변수까지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임하는 촬영.

그런데 이번에는 이대로 촬영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싶었다.

흑인 소년의 하루를 통해 빈민가의 비극적인 현실을 보여주는 것.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또 다른 무엇.

류지호는 10분 내외의 단편영화에서 30분짜리 중편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그를 위해 좀 더 취재를 하고 빈민가 친구들을 인터뷰할 필요성이 생겼다.

에밀 쿠스트라차가 집시 마을에서 10개월을 생활한 것처럼 류지호가 플로렌스 지역에서 흑인들과 거주할 순 없다.

위험한 짓을 일부러 자초할 필요는 없다.


“호안, 나와 이야기 좀 해.”


호안은 소위 류지호 팀의 유일한 흑인 친구다.

그는 득달같이 달여와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왜? 또 뭐 재미있는 일 있어?”

“혹시 네 친구들 중에 콤프턴이나 플로렌스에서 살거나 살았던 친구 있으면 소개시켜줘.”

“걔들은 왜?”

“스크립트 새로 써보려고.”

“갱스터 무비나 후드필름이라도 찍게?”


후드필름(Hood film)은 80년대 스팍스 J 리 등의 감독들이 도시 빈민가 게토에 살고 있는 흑인들을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생겨난 장르다.

힙합 음악이 깔리고, 갱단, 마약, 인종차별, 가족의 해체, 빈곤, 불법 이민 등 빈민가 흑인 젊은이들이 겪는 상대적 빈곤과 범죄의 악순환을 주제로 한 영화들을 일컫는다.


“너와 내가 알면서도 외면하는 지금 이 나라의 인종 간의 편견을 써보게.”

“뭐야? 그 거창한 이야기는.”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우리 동포들은 비슷한 한이 있으면서 서로를 너무 모르는 것 같아. 그래서 오해와 편견이 깊지.”

“야,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하지 마. 젠장! 난 아프리카에 가본 적도 없고, 우리 부모님은 카리브해 출신이란 말이야. 피부가 검다고 해서 다 아프리카계라고 부르면 불쾌해.”


자메이카 출신인 호안이 성을 냈다.


“너나 그렇지. 대부분 흑인(Black American)이라고 칭하면 싫어해.”

“빌어먹을 자식들. 부모한테 아프리카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듣지도 못하고 자란 주제에 아프리카계라니. 난 미국인야.”

“알았으니까. 친구 있어, 없어? 그것만 말해.”

“소개만 시켜주면 돼?”

“인터뷰 할 거야.”


그 날 이후.

류지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흑인친구들을 만나 인터뷰했다.

그들로부터 소개 받은 빈민가 출신 흑인들을 만나고 다녔다.

실제 갱단원으로 활동하는 이들도 만났다.

흑인 밀집구역을 차를 타고 돌아보기도 했다.

주말에는 플로렌스 청소년 센터에서 빈민가 아이들과 놀아주고 그 지역 청소년들을 취재했다.

얼마 전까지 사우스 센트럴 빈민가에서 살았던 UCLA에 재학 중인 학생과 시나리오를 각색했다.


작가의말

편안한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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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우리 실력을 제대로 보여드리죠! (2) +6 22.07.07 6,100 174 24쪽
214 우리 실력을 제대로 보여드리죠! (1) +3 22.07.06 6,302 171 22쪽
213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6 22.07.05 6,225 174 29쪽
212 제대를 명 받았습니다! +7 22.07.04 6,167 161 21쪽
211 위험한 아이들! (2) +6 22.07.02 6,033 172 23쪽
210 위험한 아이들! (1) +6 22.07.02 5,968 165 24쪽
209 게임의 법칙. (3) +5 22.07.01 6,055 175 28쪽
208 게임의 법칙. (2) +10 22.06.30 6,273 179 29쪽
207 게임의 법칙. (1) +12 22.06.29 6,216 172 26쪽
206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두자. (2) +8 22.06.28 6,089 167 25쪽
205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두자. (1) +9 22.06.27 6,133 167 23쪽
204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5) +5 22.06.25 6,066 180 29쪽
203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4) +5 22.06.25 5,788 152 24쪽
202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3) +17 22.06.24 6,003 179 27쪽
201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2) +8 22.06.24 5,873 156 21쪽
200 재난영화 탈을 쓴 고발영화? (1) +7 22.06.23 6,175 170 22쪽
199 리더가 꼭 완벽할 필요는 없지.... +7 22.06.22 6,099 182 28쪽
198 반 발자국만 앞서 가라. (3) +7 22.06.21 6,166 186 30쪽
197 반 발자국만 앞서 가라. (2) +7 22.06.20 6,149 177 29쪽
196 반 발자국만 앞서 가라. (1) +9 22.06.18 6,187 202 27쪽
195 내 친구 많이 컸네! +4 22.06.17 6,269 187 27쪽
194 사고를 치려면 언질이라도 주고 쳤어야지.....! (2) +12 22.06.16 6,017 195 29쪽
193 사고를 치려면 언질이라도 주고 쳤어야지.....! (1) +6 22.06.15 6,012 192 25쪽
192 앞장서서 뭘 하려들지 말고 중간만 해. (3) +9 22.06.14 5,971 179 21쪽
191 앞장서서 뭘 하려들지 말고 중간만 해. (2) +4 22.06.13 6,124 188 25쪽
190 앞장서서 뭘 하려들지 말고 중간만 해. (1) +8 22.06.11 6,120 191 22쪽
189 Life Goes On. (6) +7 22.06.10 6,060 180 25쪽
188 Life Goes On. (5) +22 22.06.09 5,902 219 21쪽
187 Life Goes On. (4) +5 22.06.09 5,672 174 26쪽
186 Life Goes On. (3) +7 22.06.08 5,909 186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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